우리 민족이 제때에 북한 핵무장을 저지하지 못하면 언제 삼천리 금수강산에 잿더미가 될지도 모르는데 북한핵을 지지하는 이들이 있으며, 9.11 테러를 지원한 사담 후세인이 바빌로니아 제국의 재현을 누리며 전세계 정복을 위하여 생화학 무기를 제조하는데도 그를 두둔하는 것을 평화라 부르는 이들이 있다. 따라서, 사상 한민족 생존의 최대의 위기의 때에, 그리고 세계 평화도 테러로 전세계를 정복하려는 이라크 사담 후세인의 악랄한 야욕에 위협받고 있으며, 법치 민주주의 국가의 실현을 위한 국민의 염원이 김대중 대통령의 비밀대북송금으로 배신당한 이 시점에 우리는 518 광주사태를 민주화운동이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한가를 이제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1980년 5월 중순은 유신 철폐를 요구하는 대학생들의 시위가 전국의 다른 대학교들에서는 가라앉은 시점이었다. 그럼에도 전남대학교에서는 5월 15일부터 17일까지 금남로에서 매일 시위를 계속하였었다. 당시 시위 이슈는 그들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 체재 잔당이라고 부르는 최규하 대통령 정권의 퇴진이었다. 물론 이 시점은 대학생들이 당시 최규하 대통령께서 정보부장 서리로 갓 임명한 전두환이라는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했던 때이다. 이렇듯 518 시위 이슈는 처음부터 신군부와는 전혀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따라서, 민주 광주화운동 관련 인사들이 518 광주 사태를 신군부와 관련시키는 것은 당시 상황을 전혀 모르거나 역사 조작이다. 만일 518광주 사태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역사 조작이라면 이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5월 18일은 일요일이었으며 5월 19일 시위의 주체는 분명히 대학생들이었는데 불과 이틀만에 그 시위의 주체가 학생들에게서 윤상원이라는 노동자가 이끄는 노동자들에게로 넘어간다. 그리고 이때부터 더 이상의 대학가의 시위가 아니라 시민군의 시위로 성격이 바뀐다. 노동자들을 선동하여 경찰서를 부수고 경찰서와 예비군 무기고의 무기들을 탈취한 것도 윤상원이라는 노동자가 주동하였다. 21일 그는 이 유혈 시위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광주 외곽 지역까지 시민군을 보내 습격하여 경찰서와 예비군 무기고의 무기들을 탈취해 오게 한다.
그가 무장 시위군을 조직하여 군인들에게 총을 쏘라고 하였다. 그때 온건파로 불리는 다수의 광주 시민들은 이 시가전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과격파로 불리며 노동자들이 주도하던 시위 지도부는 온건파 학생들을 총으로 위협하며 시위대에 편입시켰다. 당시 현장에 있던 광주 시민들에 의하면 이들은 가가호호 방문하여 청년들을 총으로 위협하며 강제로 시민군을 삼았다고 한다.
흔히 광주 시민들이 그때 무장한 것은 계엄군의 과잉 진압에 대한 시민들의 자발적인 과잉 시위였다고 해명한다. 그러나 과연 자발적인 과잉 시위였을까?
총을 든 폭도들이 전라도 도지사 위에 군림하였으며, 무장 시민군을 조직하자마자 방송국들부터 불질렀으며, 경찰에게서 치안권을 빼았고, 경찰에게 임무를 할당하였으며, 광주는 대한민국에서 독립하였다며 광주 해방구를 선포한 것이 과연 시민들의 자발적인 행동이었을까? 오히려 조직적인 배후 세력이 분명 있었다고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지 않는가? 더구나 청년들과 시민들을 강제로 총으로 위협하여 시민군에 편입시키는 당시의 광주는 공포 사회였다.
만일 계엄군이 5월 27일 광주 시민들을 이 폭도들로부터 구해 내지 않았다면, 그리고 이 폭도들이 광주의 행정과 경제와 치안권을 장악한 상태가 한달 더 지속되었어도 광주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었을까? 만일 당시 시위 지도부가 북한과 내통이 없었다면 어떻게 그런 무모한 일을 담대하게 저지를 수 있었을까? 그리고 왜 1980년 5월 27일 광주 시민들을 폭도들로부터 구해낸 계엄군이 김대중 대통령 정권 하에서는 범죄자로 지탄을 받아야 하는가? 이제는 총든 과격파 시위대의 위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국군에게 총을 쏘아야 했던 것이 과연 자발적인 행동이었는지를 광주 시민들이 말해야 할 때이다.
5월 27일 새벽에 계엄군이 광주 시민들을 구하기 위하여 진주할 때 총으로 위협하며 결사 항쟁을 강요하던 자들의 신원은 정직하게 확인하였는가? 그리고 항복 권유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화력을 총동원하여 계엄군에게 발포하였기에 총격적은 불가피하였으며, 따라서 군민 피차간에 희생자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분명히 희생자가 있었다. 광주를 구하기 위하여, 더 나아가 이들이 전국적으로 확대시키려던 유혈 시위로부터 대한민국을 구하기 위하여 시가전은 최후의 그리고 유일한 수단이었던 것이 당시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 폭도들이 유공자로 포상받고 시위대가 빗발처럼 쏘아대는 총격을 무릅쓰고 폭도들로부터 광주를 구해낸 계엄군은 죄인 취급을 받아야 하는지 물어보아야 하지 않는가?
폭도는 폭도이다. 누구든 경찰서를 파괴하고 예비군 무기고를 부수고 빙송국들을 붙태우고 군인의 장갑차를 약탈하고 무장 폭력배들을 조직하여 경찰에게서 치안권을 강탈하고 도지사에게서 행정권을 수탈하고 선량한 온건파 시민들에게 공포감을 주어 시가전을 선동한 자들은 폭도이다. 그리고 광주의 상처는 이 폭도들을 유공자로 대우하고 이 폭도들로부터 광주를 구한 계엄군을 죄인 취급함으로 치유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광주의 진정한 명예는 그 출신지와 정체가 수상한 폭도들의 갖은 횡포와 압력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시민군에 합세하지 않음으로서 그 유혈 시위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려 했던 자들의 궤교를 분쇄시킨 광주의 선량한 시민들에 의해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