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엔 佛 心 이 가득합니다 ⊙
▽ 주차장에 도착하자마자. 주차장에서 바로 보이는 부석사 일주문을 먼저 지나게 된다.
▽ 일주문을 자세히 보니 전후좌우로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뱀을 물고 있는 형상이 눈에 띄어 유심히 보게된다. 용은 예로부터 신령스런 상상의 동물로 여겨왔으며 뱀은 사악한 동물로 여겨 용이 뱀을 응징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 부석사(浮石寺) 경내를 둘러보기로 한다. 우선 부석사 하면 학창시절 책에서 배운 무량수전이 떠오르는 영주의 부석사를 생각하게 되는데 이곳 서산에도 한자로도 같은 부석사가 있다는 것을 이번에 알게 됐다.
무량수전은 불교에서 서방 극락정토의 주재자인 아미타불을 모시는 건물로 극락보전ㆍ극락전ㆍ무량전ㆍ보광명전(普光明殿)ㆍ아미타전 등이라고도 한다는데 오른쪽 아래 사진이 극락전이다.
이곳 서산의 부석사는 도지정문화재인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인 수덕사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17년(677)에 의상대사가 창건하고, 그 뒤 무학대사가 중건하였다. 이 사찰에는 극락전, 요사채, 신검당, 안양루 등이 있으며 불상은 아미타불을 주불로 하여 관세음보살, 대세지 보살, 지장보살 등 8좌의 불상이 안치되어 있다.
1330년(충숙왕 17)에 부석사에서 봉안된 금동관음보살상이 1370년 왜구로부터 약탈당해 일본 쓰시마 섬[對馬島, 대마도] 소강이라는 포구의 작은 마을에 있는 관음사에 봉안되어 있었는데 1973년 일본에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2013년 10월, 절도범들에 의해 다시 국내로 밀반입되었고 소유권에 대한 한일간 법적 논쟁이 진행중에 있다. 현재 대전 국립문화재연구소에 보관돼 있는 상황이라 하니 아직 제자리를 못찾고 있는 금동관음보살상이다.
▽ 부석사는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고려의 충신이었던 유방택이 망국의 한을 품고 낙향하여 이곳에 별당을 짓고 살다가 세상을 떠나자 그를 아끼고 따르던 사람들이 그가 쓰던 별당을 개조해 부석사라고 불렀다고 전한다는 설도 있다.
아래는 부석사의 범종과 부석사종무소, 오른쪽에 산신각 및 아래 템플스테이(Temple Stay : 산사체험은 한국의 전통사찰에 머물면서 사찰의 일상 생활을 체험하고 한국불교의 전통 문화와 수행 정신을 체험해보는 것을 의미) 방사(房舍)건물이다.
▽ 부석사 위쪽으로 떨어진 곳에 마애불이 있다고 하여 그곳으로 향한다.
▽ 오전에 태안에서 마애삼존불을 보고 다시 이곳에서 마애불! 두손합장 절을 한다
▽ 부석사 마애불에서 바라 본 풍경
▽ 만공선사가 수련을 했다는 만공토굴이 부석사 맨 윗 부분에 자리잡고 있다. 한사람이 들어가 수련할 수 있는 공간이며 작은 불상이 놓여져 있다.
▽ 부석사 경내 주변에는 이와 같은 고목(古木)을 많이 볼 수가 있다. 수령이 수백년은 되어 보이는 느티나무가 인간의 보호를 받고 명맥을 이어가는 모습이다.
▽ 태안의 백화산과는 달리 이곳 서산의 도비산은 암질이 다른 형태임을 알 수가 있다. 백화산은 화강암이고 도비산의 암석은 이암(진흙이 모여 굳어진 암석)이 아닌가 생각이 드는데 층리가 얇게 형성되어 결대로 갈라지기 쉬운 것은 셰일이라고도 하니 그것도 같다.
간월암
충남 서산시 부석면에 위치한 간월도.
간월도가 예전에는 피안도(彼岸島), 간월암은 피안사(彼岸寺)라고 불린 적이 있다.
원효대사가 세웠다고 하는데 그 출처가 분명하지는 않다. 밀물이 들어오면 물위에 떠 있는 연꽃과 같다 하여 연화대(蓮花臺)라고도 불렀다. 고려 말에 무학 대사가 이곳에서 수행 중에 달을 보고 홀연히 도를 깨우쳤다 하여 암자 이름을 간월암(看月庵) 이라 하고 섬 이름도 간월도라고 하게 되었다, 무학 대사의 득도처였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것은 대사가 태어난 곳이 간월암에서 멀지 않은 충남 서산시 인지면 모월리 이기 때문이다.
무학이 누구인가.
1392년 왕사로서 조선 개국에 참여 했고, 한양 천도를 주도한 인물이었다. 그 공으로 인해 간월도와 인근의 황도를 하사 받아 절을 지었으니 그가 지은 절을 무학사(無學寺)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 후 조선의 억불정책으로 폐사되었던 것을 1941년 만공선사가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무학 대사는 간월암을 떠나면서 짚고 다니던 주장자를 뜰에 꽂으며, 지팡이에 잎이 피어나 나무가 되어 자랄 것인데 그 나무가 말라죽으면 나라가 쇠망할 것이요, 죽었던 나무에서 다시 잎이 피면 국운이 돌아 올 것이라 예언했다고 한다.
만공스님은 죽었던 나무가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을 듣고 간월암을 찾으니 암자는 간 곳이 없고, 그 자리에 묘가 들어서 있었는데, 실제 귀목나무에서 새파란 잎이 돋아나 있는 것을 보고 이곳에 머물며 중창을 위한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기도 회향 전에 김씨 가문에서 묘를 이장해 가는 가피가 답지하였고, 절터를 되찾은 다음 제법 모습을 갖춘 암자를 짓고 손수 간월암이라는 현판을 써서 내건 후 종종 찾아와서 한소식을 했었던 추억의 장소가 간월암인 것이다.
언젠가 만공스님이 끝없이 보채는 파도를 보다가 송(頌)을 한수 읊었다.
불조불우객(佛祖不友客)부처와 조사를 더불어 벗하지 않는 객이
하사벽파친(何事壁波親)무슨 일로 푸른 물결과는 친했는고
아본반도인(我本半島人)내 본래 반도 사람이라
자연여시지(自然如是止)자연에 이와 같이 멈추노라
만공스님이 중창 불사를 한 후 간월암은 벽초, 서해, 진암스님의 발길이 닿았었고 경봉, 춘성, 효봉, 금오, 성철스님등 기라성 같은 도인들이 간월암에 수행의 족적(足跡)을 남겼다
무엇 보다 간월암이 유명해진 것은 1942년 8월부터 1945년 8월까지 만공스님이 조선의 독립을 위해 천일기도를 했고 천일기도 회향 사흘 후 조국이 독립을 맞이했다는 사실이다.
지척에 살던 만해 한용운 스님이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써 세속에서 독립운동에 앞장섰다면 만공스님은 마곡사와 수덕사를 중심으로 선원에서 정진하며 웬만해서는 산문을 나서지 않았다. 또한 선학원을 만들어 일제의 한국불교말살 정책과 총독부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신 수행가풍을 지키기 위해 헌신 하였으니, 한국불교에 있어서 만공스님의 위치는 확고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조국의 독립 소식을 전해들은 만공스님은 무궁화 꽃에 먹물을 듬뿍 찍어 ‘세계일화(世界一花)’라고 쓰시고 대중 앞에서 말씀하시길
“너와 내가 둘이 아니요, 이 나라 저 나라가 둘이 아니요, 이 세상 모든 것이 한 송이 꽃이다. 머지않아 이 조선(朝鮮)이 세계일화(世界一花)의 중심이 될 것이다. 지렁이 한 마리도 부처로 보고, 저 미웠던 왜놈들까지도 부처로 보아야 이 세상 모두가 편안할 것이다."라고 하셨으니 그 법기(法器)의 크기를 가늠이나 할 수 있으랴.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84호서산 간월암 목조보살좌상
간월암 목조보살좌상은 제작 시기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양식적인 특징상 1600년 전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이후에 형식화된 보살상과는 다르게 갸름한 타원형의 얼굴, 비교적 긴상체, 높고 안정감 있는 무릎, 부드러운 옷 주름의 표현 등이 특징인 조선시대의 보살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