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대종중 시조정비사업에 관한 제언
나는 어제 작금에 들어 우리 대종중차원에서 추진하고 있는 시조바로세우기 및 묘역정비 사업에 대한 구체적 계획을 듣고 우리 청주송씨 후계 백대를 위해 양심과 충심을 실어 이를 바로 하고자 제언을 한다. 이의 추진위원들 뿐 아니라 우리의 혈맥을 이은 종족이라면 눈을 씻고 정신을 가다듬어 읽어 주시기를 갈망한다.
나는 2005년 을유보 발간 이전부터 우리 선조들에 대한 역사적 모호함에 대하여 정확한 사실을 규명하고자 20여년 이상을 매진해 왔다. 처음에는 우리 부조로부터 전해내려 온 가첩, 세보, 세헌록, 읍지 등을 중심으로 알아가면서 우리 선조들에 대한 찬사와 함께 경외의 존경심이 일었었다. 그런 중에도 여러 시조의 선계문제, 시조 유충의 함자 및 군호의 봉작시기문제, 묘소의 위치문제, 선묘4세 제단비 문제 등의 의문들로 고심하던 중 을유보 수단을 하게 되면서 편찬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교정참여도 하게 되었다. 촉박한 일정의 편찬 작업에 참여하면서 여러 의문들은 더욱 크게 느껴졌고 가문의 금석인 세보를 이런 의문투성이로 종족과 후손들에게 남겨도 되는지 번민과 갈등 속에 을유보는 발간이 되었다. 이후 이런 고충을 유심히 듣고 계시던 편수위원장 정암 수복씨께서 제대로 된 선계를 밝혀 보자며 대종중 차원의 소위원회를 만들어 약간의 경비지원과 함께 여산, 하계, 송씨대동보, 청송심씨 등 여러 관계 족보들을 제공하였고 나는 여산 밀직공 직계후손들의 소장한 관계파보를 모조리 빌려다 낱낱이 파헤치며 본격적인 시조의 진실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 우리 가문의 역사에서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대체적인 진실은 가려졌다.
그 동안 막연히 청주송씨의 自出은 여산이라던 우리의 선계문제는 여산 밀직공 송방영의 손자로 청주군 휘 유충임이 확연했고 우리들 후손에게 전해진 옛 가첩들에 명시된 휘 유충의 휘함 有敬도 하계족보를 통해 의문이 풀렸다. 휘함이 유충으로 바뀐 내용에서 이미 군호의 봉작시기도 조선 초 임이 드러났고 하계족보에서도 봉작시기를 조선 초로 명시하고 있다. 다음문제는 자여 도종산의 선묘4세제단비문제이다. 아시다시피 도선산의 묘소는 단 3기이다. 위에 1기, 아래에 2기가 있다. 우리는 도선산이라 부르면서 묘제를 올리지 않고 제단비에서 제향을 거행한다. 입향조인 대사성공, 손자인 생원공, 6세, 7세 절제사 양위분의 묘소 4기가 있어야하는데 문묘는 3기뿐이니 선대들이 병인보 발간 이후인 1934년 4위분을 묶어 제단비를 세웠다. 이는 입향조 대사성공의 묘를 부정하는 것이다.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실묘한 1기의 묘를 추적하기에 나섰다. 1926년에 발간된 우리 병인보에 생원공의 묘소가 덕현운이실전(德峴云而失傳)이라 해 놓았는데 덕현산에 있다했지만 잃어버렸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나는 실전한 것은 어쩔 수 없으니 덕현산만 찾으면 도선산 나머지 3기의 묘는 확정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십수년을 묻고 다녔다. 그러다 돋보기로 옛 가첩을 들여다보니 모두 德古介로 적혀 있었다. 그런 차에 『신김해지리』에 오척 뒷산이 떡고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하계족보에서도 오척이라는 명시가 있었다. 묘소는 실전했지만 소재파악은 끝이 났으니 도선산에 있는 3기의 묘소는 그 주인공들이 가려진 것이다. 당연히 맨 위는 대사성공이요, 아래 2기는 양위 절제사공의 묘소이다. 이런 사실 위에서 묘역 정비 사업을 추진한다면 부끄러운 선묘4세제단비는 자연적으로 철거 대상이 되고 실전한 생원공의 제단비만 따로 세우면 된다. 그것은 뒷날, 떡고개의 묘가 발견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사성공의 묘갈, 절제사 양위분의 묘갈을 세워 앞으로는 묘에서 시제를 올려야 한다.
다음으로 시조 청주군에 대한 여러 문제이다. 우리 청주송씨 가문에 청주군이 시조로 등재된 사실은 1926년 병인보 부터이다. 불과 100년 미만이다. 우리가 올해로 김해에 정착한 568년을 생각하면 아주 일천하다. 1453년 계유정란이후 재지사족으로 조선 300년을 좌우해온 영향력을 감안하면 대외적으로도 창피한 면이 없지 않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절대 이런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병인보이전의 우리시조는 원조 고려 평장공 宋大原, 시조 상서공 宋 椿으로 기재해 오다, 在注씨가 발간한 파보까지도 휘 椿을 먼저 올린 것도 있지만 상고하건데 ‘이들이 모두 典據가 상세하지 않아 후일 밝히기로 한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청주군 휘 유충이 시조로 받들어 졌다. 우리가 병인보를 발간하던 해에 공교롭게 여산에서도 병인보를 발간했다. 여산은 원래 4개파만 존재해 오다, 병인보부터 밀직공파를 더해 5개파가 되는데 여산의 의안변백에 의하면 이는 1700년대부터 밀직공의 후손들이 세계도를 제시하며 여산의 후손임을 증명한데 따른 것임을 적시하고 있다. 1307년 심양에서 충렬왕과 충선왕 간을 이간질한 죄목으로 충선왕에 의해 참살당한 송방영의 세 아들들이 선후계의 계보도를 상세히 기록해 증거로 내세웠던 것이다.
방영의 참살사건이후 첫째 완은 철원지방으로 피신했고 둘째 標는 경기 화성으로 또 청주로 남하하였으며 셋째 군보는 안동으로 또 영해로 옮겨가면서 뿔뿔이 흩어져 갔다. 그래도 계보도는 철저히 남겼던 모양이다. 그 속에 標의 아들로 송 유충의 기록이 있다. 우리가 전혀 몰랐던 선계가 이미 명확히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충선왕을 비롯한 충숙왕의 후계는 모두 몽고반종이다. 그 시대 그런 구명피난의 가족사에서 청주군의 봉작은 있을 수가 없다. 군호의 봉작에는 반드시 采地(領地)가 따른다. 그래서 병인보에서는 청주에 채지를 받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당연히 조선개국의 공이다. 이어 태종5년에 서원군이 습봉을 한다. 襲은 이어받을 습이다. 아버지의 봉작과 채지를 그대로 물려받았다는 것이다. 고려조정의 봉작일 수가 없는 말이 습봉이다. 그러나 두 분은 배위가 누군지도 모른다. 또 김해가 어떤 곳인지도 모를 뿐 아니라 청주군의 딸 정경부인 송씨의 사례처럼 훗날 묘도 발견 될 수가 있다.
그리고 어느 가문에서나 입향조는 아주 중요한 비중을 둔다. 우리 청주송씨도 입향조 대사성공이 아니면 여산에서 분관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역사적인 大姓들도 시조의 묘역보다는 중시조를 더욱 중요시한다. 그래서 대부분, 시조묘는 없고 제단비로 갈음함이 많다. 다만 후대에 난립한 씨족들에서 시조묘를 화려하게 치장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 시조 2위 분의 문제는 첫째, 배위를 아예 모른다. 둘째, 나의 오랜 연구결론은 2위분 모두 분묘가 청주지방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결론은 당시 청주군의 사위인 심덕부의 세거지였으며 대사성공의 장인 대제학 최연공의 세거지 임과 동시에 정경부인 송씨의 묘도 발견되었고 시조 두 분의 君號, 역시 청원군, 청주군, 서원군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병인보이전의 세보나 가첩들에 시조 宋大原의 大原도 청주의 古號였다. 후에라도 발견되면 더욱 좋겠지만 아니라도 시조의 분묘를 조성하는 것은 반대다. 김해역사의 기록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입향조 대사성공의 격이 달라질 수가 있다. 그래서 시조는 여러 벌문의 사례에서 보듯 현재의 시조제단비로도 충분하다할 것이며 하등의 예에 어긋남도 없다. 종사를 정비함에 있어서는 엄청 신중과 숙고를 거듭해야 한다. 종중의 중지를 모아 묻고 또 진단해서 장차의 실수를 줄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들리는 말에 조성비 등 돈도 안내고 참여도 안하는 사람들이 뒷말을 한다는 소문이 있다. 한 씨족의 정통성을 바로 하는데 있어서 돈 낸 이들만 자격을 부여한다면 돈이 한 씨족의 역사를 전횡하게 된다. 이것이 될 법이나 한 말인가? 더구나 사업추진을 하면서 우리역사에 관심이 많은 나에게도 연락 한 번없었다. 대 내외에 대대적으로 여러 식견과 종중의 총의를 모아 최종 결론을 내고 착수에 접근해도 부족할 판에 이런 추진은 종중의 후일을 담보하기 힘들 것이다.
우리 청주가의 시조문제는 그 동안 여러 차례 수정되어 왔다. 이번에야 말로 모호했던 과거를 여러 전거를 통해 확실한 의안변백을 해야 할 시점이다. 송대원이 송유충으로 송유경이 송유충으로 변해왔던 과정을 상기하면서...
이것으로 금번, 사업추진에 대한 근간의 대강을 밝혔다. 내용에 의문이나 질타는 겸허히 수용하겠다.
2015. 9. 30 평지에서 춘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