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은 기원은 자연환경에 대한 적응의 결과이다. 그러나 자연환경에 대한 적응의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고 나면 집은 사회환경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집은 발전하면서 기능에 의한 분화가 생기게 된다. 일반 주거에서도 잉여곡식을 저장하기 위한 창고가 생기게 되고 생리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측간이 생기게 된다. 이러한 창고도 많은 수확을 한 집은 적은 수확을 한 집과는 다른 규모의 창고가 필요하게 되고, 사람이 많이 살고 있는 집에서는 방들이 많아지면서 사회적으로 부와 권력이 있는 사람의 집이 그렇지 못한 사람의 집보다 커지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것때문에 사회적인 측면에서 집을 찾아보는 이유이다. 사회 환경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집은 우리가 먹고 자는 주거 이외의 모든 집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시설, 궁궐, 관공서, 시장, 공연장, 전시장, 운동경기장 등 주거를 위한 집을 제외한 모든 건물은 사회환경의 변화에 의하여 만들어진 집들이다. 앞으로도 새로운 영역이 개발되면 새로운 집이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사회환경의 변화를 관찰하여 보면 새로운 건물의 발생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다.
개발업(developer)은 이러한 변화에 주목하면서 새로운 건축의 가능성을 찾는 직업이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집도 사회환경의 변화에 따라 변화를 한다. 부자가 사는 집과 가난한사람이 사는 집이 다르고 부자가 사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권력을 가진 사람의 집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집이 다를 뿐만 아니라 어떠한 경제기반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서도 많은 차이를 보인다. 상업이 산업기반인 사회와 농업이 산업기반인 사회는 집 구조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이것은 그들이 기반으로 살아가는 산업에 따라 생활에서도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는 소나 말 기타 쟁기 등과 같이 농업에 필요한 도구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상업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에서는 농업에서와 같은 도구가 필요없다. 상업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에서는 책상과 서류를 보관할 서류함이 필요할 뿐이다. 이처럼 살아가는 산업의 차이는 집의 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산업뿐만 아니라 주변 환경의 안정성도 집의 구조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치안이 안정되어 있는 곳의 집과 그렇지 않은 곳의 집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60년대 도시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집의 담에 유리병조각을 꽂아 놓거나 철조망을 휘감아 놓은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반면에 시골에는 담이 없다. 이것은 바로 불안감의 차이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 장에서는 이렇한 사회적 현상에 따라 변화하는 집의 모습을 다루어 보는 것으로 한다.
가. 담과 사회
우리는 기와집은 부자집 초가집은 가난한 사람의 집으로 생각한다. 원칙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도 사회상황에 따라 변화한다. 부안의 김상만가옥을 보면 기와집이 곧 부자집이라는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김상만가옥은 초가집이다. 김상만 가옥은 19세기말에 지어진 집으로서 당대에 손꼽히는 거상의 집이다. 이 집이 이렇게 지어진 것은 시대상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김상만의 선친은 고창에서 살다가 이쪽으로 이사를 왔다. 당시는 매우 혼란한 시기라서 도적이 날뛰던 시기이다. 김상만씨의 선친도 이곳으로 이사와서 새로 집을 지을 때 부자라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하여 초가로 집을 지었을 것이다. 이처럼 사회가 불안하게 되면 어떠한 형태로든 집에 자기 방어적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집의 구조 중에서 사회현상을 잘 반영하는 것은 담장과 폐쇄적 집구조이다. 담장은 집의 안정성을 보장하여 주는 가장 중요한 구조이다. 사회적 불안이 가중될 때 가장 먼저 높아지는 것이 담이고 폐쇄적인 집의 구조이다. 그러므로 담장과 집의 형태를 보면 그 지역의 치안상태를 알 수 있다. 외벽이 높고 개구부가 없다면 이곳은 매우 불안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태백산 줄기와 경상도 산간지역의 집이 폐쇄적 구조인 ㅁ자 구조의 형태를 한 것은 이 지역이 자연적던 사회적이던 간에 불안한 사회구조였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혹자는 경상도 지역 폐쇄적인 집구조와 충청도나 전라도 지역의 개방적인 집구조를 성리학의 학문적 계열에 관련지어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해석은 너무도 자의적이라고 생각한다. 이황의 제자 계열의 집 구조가 폐쇄적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지역적으로 그곳에 제자들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그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고 근본적으로는 자연적인 요소에 의하여 형성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의 불안 때문에 집의 구조가 폐쇄적으로 된 예를 외국에서 찾아보자. 우선 중국의 예를 보면 중국의 집은 매우 폐쇄적 구조로 되어 있다. 북경을 여행하는 동안 도시 농촌 할 것 없이 모든 집이 외부로는 창문이 거의 없고 담이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러한 중국의 집 구조는 상류층일수록 더욱 심하다. 사합원(四合院)이라는 중국의 상류주택을 보면 높은 외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구조가 된 것은 오래 전부터라고 한다. 한(漢)나라 때 만들어진 토기를 보면 이 때 이미 사합원의 원형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사합원 조성의 배경으로 중국고전건축의 원리(리원허: 116-118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중국의 역사는 오랫동안 불안하고 동요된 상황에 처해 있었으므로 건물을 설계할 때 방위성(防衛性) 한층 강조되었다. 문창(門窓) 역시 주변의 담에 달아서 임의로 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중국이라는 사회가 역사적으로 얼마나 전쟁으로 불안한 사회였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사합원이 가구 별로 위험에 대처하기 위한 예라고 하면 집단적으로 위험에 대처한 예를 중국에서 찾아보자. 중국 남부 복건성(福建省)의 객가(客家)의 집단주거지를 보면 커다란 원형 성채 안에 400여 가구가 모여 살고 있다. 이러한 마을이 형성되는 것은 그 집단이 매우 특이한 조직이어서 자폐적 구조를 가졌거나 또는 외부의 위험에 대하여 집단적으로 방어하기 위함이다.
* 객가(客家 발음 하카 : 인터넷 두산백과사전) 이 지역에서는 일반의 한민족(漢民族)은 본지인(本地人)이라 자칭하지만, 하카는 외래이주자(外來移住者)로서 토착민과 구별되고 있다. 하카(Hakka)란 객가(客家:k'ochia)의 광둥음이다. 그들은 종족적인 결합력이 강하여, 한때는 본지인과의 항쟁을 되풀이하였다. 성격과 풍습도 특수하여, 걸핏하면 싸우려 들고, 여자가 야외노동을 잘한다. 언어는 하카어[客家語]로 광둥어 계통에 속하지만, 발음은 관어(官語)에 가깝다. 하카의 유래는 분명하지 않으나, 화북(華北)에서 이주해온 한민족이 이 지방의 토착 소수민족인 좡족[壯族]·야오족[瑤族] 등과 접촉하여 생겼다는 설도 있다. 대부분이 산중의 오지(奧地)에 살고, 주로 농업에 종사하지만 해외로 진출한 사람도 적지 않다. 총인구는 20세기 초의 추계(推計)로 약 1500만 명이다.
비슷한 예를 유럽에서 찾아보자 11-12세기 이탈리아의 도시를 보면 탑상주택이 매우 많이 지어졌다. 이러한 건물은 도시 내의 가문간의 알력 때문이다. 탑상주택은 도시에 상류층을 형성하고 있는 봉건귀족과 신흥상공귀족간의 극심한 투쟁의 결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으로서 공격과 방어를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다.(도시주거 형성의 역사 : 손세관 저 127- 131쪽)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야기가 바로 이러한 가문간의 알력 사이에서 일어난 사랑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을 만큼 당시는 가문간의 알력이 매우 극심한 상황이었다. 다른 가문의 집을 감시하기 위하여 남보다 조금 더 높은 탑을 쌓다보니 점점 규모가 커져 수십 미터의 높이에 이르는 건물이 생겨난 것이다. 같은 책에 의하면 이러한 탑상주택은 이곳 외에도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코카서스 지방에서도 발견된다고 하는데 이것은 이민족의 이동통로에 마을이 위치하고 있어 생존의 목적으로 만든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일제에 의하여 만들어진 식민사관에 의하면 우리는 수많은 침략으로 점철(點綴)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앞서 예를 든 중국이나 이탈리아의 집구조와 우리 나라의 집구조를 비교하여 보면 우리 나라의 집은 전쟁이나 외부의 침입에 대하여 완전히 무방비의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집의 구조는 우리의 사회가 얼마나 안정적인 사회였는가는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따라서 집의 구조만을 보아도 우리 나라가 천 여 차례의 침략에 허덕였다는 이야기들이 얼마나 허구였나를 쉽게 알 수 있다.
이제 우리 나라로 돌아와서 살펴보자. 어쨌든 담은 영역의 구분과 안전을 보장하는 장치이다. 단순히 담으로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그것을 통하여 사회현상을 상상하여 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담의 높이를 살펴보면 도시와 지방을 비교하여 볼 때 높이에서 많은 차이를 보여준다. 또한 같은 지역에서도 담의 높이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초기의 담의 역할이 사회환경에 따라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서울에서 나서 자랐던 나로서는 시골의 집의 담이 왜 낮은가 하고 의아해하던 적이 있다. 아직 집에서 담의 의미를 알지 못하였던 시절이라 당연히 그러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의문은 양동마을의 관가정(觀稼亭 : 보물 제442호)을 답사하고 완전히 해소되었다. 관가정의 담은 매우 낮다. 관가정의 담이 낮은 이유는 그야 말로 당호(堂號)처럼 농사를 짓는 것을 내다보기 위함이다. 언덕 위에 위치한 관가정에서 보는 주변의 경관은 이곳 경상도 지방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시원함이 있다. 그러한 경관을 위하여 담을 낮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즐거움도 사회가 안정되지 않으면 즐길 수 없다. 자기 목에 칼이 들어오는데 편하게 앉아서 경관을 즐길 수는 없는 것이다. 아마도 불안한 사회였다면 관가정은 높은 담 위에 올려져있는 전망대 같은 모습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또한 망대의 높이는 화살이나 총의 사거리를 반영하여 꽤 높게 설치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 때문에 번(蕃)간의 알력이 심하였던 일본의 성은 높고 외부에서 잘 알아보지 못하도록 되어있는 것이다. 그러나 관가정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 전체에서 그러한 모습을 전혀 찾을 수 없다. 이처럼 우리 나라의 집에서 방어적 자세를 찾을 수 없는 것은 사회가 그만큼 치안의 문제에 있어서는 우리 나라전체가 매우 안정적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구한말 우리 나라에서 생활하였던 외국인의 여행기에도 나타나 있다. 여행기에는 우리 나라를 돌아다닐 때 위해나 물건의 도난에 대한 걱정을 한 적이 없다고 하였고, 극형에 처해지는 경우도 살인 등과 같은 현재의 개념에서 중죄인이 아니라 도적질과 같은 것이 대부분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안정된 사회구조를 유지하였기 때문에 집의 담은 높을 필요가 없었다. 이러한 담이 같은 지역이라도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차이를 보이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안전의 이유이고 두 번째는 권위의 표현이다. 안동의 하회마을에서 충효당, 양진당, 북촌댁이 있는데 그 중 북촌댁의 담과 소슬대문이 가장 높다. 이것은 상대적으로 북촌댁이 자신의 권위를 내보이기 위하여 높게 담을 쌓은 것이다. 이는 어쩌면 문파 중에서 상대적으로 위세가 덜한 것에 대한 콤플렉스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경우 담의 높이는 지방보다는 도시의 것이 높다. 이것은 도시의 치안상태가 지방보다 불안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도 도시 지역의 담은 지방보다 높고 견고한 것을 보면 지금이나 예전이나 도시가 시끄럽고 불안한 것은 같았나 보다. 이처럼 지방이 상대적으로 안전한 것은 지금으로 말하면 집단감시체제가 갖추어져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지방에 가면 이웃집의 숫가락의 개수까지 알고 지낸다. 서로가 잘 알고 지낸다는 뜻이다. 예전에는 더욱 그러하였을 것이다. 지금은 다르지만 예전에는 애들이 놀 때 식사할 시간이 되면 자기 아이 남의 아이라고 할 것 없이 집에 있는 아이들은 같이 먹였다. 동네의 강아지조차 같은 마을 사람들에게는 짖지 않고 외지인이 들어올 때만 짖을 정도로 마을은 가족 공동체만큼이나 유대관계가 돈독하였다. 따라서 다른 사람이 마을에 나타나는 경우 서로가 감시할 수 있어 마음놓고 편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을의 정신적 향도 역할을 한 명문가가 마을 사람의 민심을 얻을 경우에는 마을 사람들이 명문가를 지켜주기까지 한다. 예를 들면 함양의 정여창 고택의 종부의 증언에 의하면 조상이 마을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전쟁통에도 마을 사람의 도움을 받아 집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인터넷시사저널 : 674.5호 2002.09.26. 명가의 내력, 정 깊은 만석꾼) 마을에서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한 양반의 노력의 예는 구례의 운조루에서도 볼 수 있다. 운조루의 중문간에는 큰 뒤주를 두어 가난한 사람이 언제든지 필요한 만큼의 식량의 가지고 갈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배려로 명문가들은 마을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상황에 이르게되면 집의 담이 높을 필요가 없다. 담을 낮게 하는 것이 여러 가지로 편하게 된다. 집의 담이 높다는 것이 오히려 마을 주변에 있는 자신의 전답을 관리하는 데 불편할 수 있다. 조선 효종 때의 학자 이유태(李惟泰 :1607-1684)가 지은 초려집(草廬集)에 담장의 높이에 대하여 기술하여 놓은 것이 있다. '담장의 높이는 방이나 툇마루에 앉아 말의 등이 보이고 목노의 행동거지를 살필 수 있을 만하면 된다.'라고 기술하여 놓고 있다.( 한국의 살림집 : 신영훈저 51쪽 ) 이는 담의 높이는 주변의 살필만한 높이가 적당함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아무리 담이 낮더라도 사랑채에 앉아서 밖을 내다 볼 수는 없기 때문에 앉아서 담 너머를 내다 볼 수 있도록 대부분의 사랑채는 높게 누마루를 한 경우도 있다. 영천의 만취당의 새 사랑채 경우처럼 담을 아주 낮게 하지 않고 사랑채를 높여 사랑채에서 밖을 볼 수 있도록 하는 경우도 있다.
나. 사회적 지위 및 권위의식과 집
자신이 남과 다르다는 것을 인식시키기 위하여 사람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신을 부각시키려 한다. 옷을 화려하게 입는다든지 화려한 마차를 탄다든지 외출할 때 많은 하인을 거느린다든지 하는 것들이 이러한 것이다. 집, 가구, 의복 같은 선택의 영역처럼 가장 사치가 쉽게 퍼질 곳은 없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1 : 페르낭 브로델 저, 주경철 역 377쪽) 요사이도 돈이 있으면 좋은 차를 타고 고급 외제 옷을 입는 것도 이러한 차별화를 위한 노력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집에도 그러한 의지를 찾아볼 수 있다. 옛날이나 요즘이나 부자들은 넓고 큰집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자기를 과시하기 위하여 눈치껏 위법을 하여 크고 화려하게 장식하려고 한다. 이러한 의지가 너무 강하였기 때문에 아주 오랜 옛날부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너무 과하게 치장하는 것을 제한하려는 시도가 계속되어 왔다. 우리 나라의 경우 삼국사기 옥사조(屋舍條)에서 보면 이미 신라시대부터 품계에 따라 집의 규모 및 치장을 제한하였다. 조선조에도 이러한 제도는 존속하여 왔다. 대표적인 예가 위계에 따라 집의 규모를 제한하였고 사당을 제외한 곳에서는 색을 칠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러한 제한을 하는 것은 사람의 욕망은 끝이 없어 제한을 하지 않을 경우 서로 경쟁적으로 집을 크고 화려하게 지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는 요사이도 찾아볼 수 있다. 영덕 창수면 인량리에 가보면 재령 이씨, 평산 신씨, 안동 권씨의 세 집안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 가서 보면 은근히 세 집안이 경쟁을 하고 있는 것을 느낀다. 이 곳의 집은 기둥을 나라에서 금하는 원기둥을 사용하고 있고 평산 신씨 본가인 만괴당의 기단과 안채는 특히 높아 권위를 한껏 드러내고 있었다. 또한 안동 권씨 집안은 요사이에도 집의 규모를 계속하여 늘려가고 있어 은근히 세를 과시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려는 권위의식은 집을 짓는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한옥에서 나타나는 예를 몇 가지 들어보면 첫 번째로 기단을 높게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원기둥을 사용하는 것이고 세 번째는 안채나 사랑채를 높게 짓는 것이고 네 번째는 초공를 사용하는 것이고, 다섯 번째는 집의 규모를 늘리는 것 등이다. 이러한 것들은 대부분 조선조에 법을 금하였던 것들이다. 지금도 조금 돈이 있거나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법을 무시하려고 한다. 그런 사람들은 법을 무시하고도 건재한 것을 일종의 특권층의 상징으로 생각하고 있다. 눈치껏 위법을 하여 자신을 과시하는 사고는 예전에도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위의 여러 예 중 우선 기단에 대하여 이야기하여 보자. 집의 수평적 확장 못지 않게 수직적 확장은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좋은 방법이다. 수직으로 올리는 것은 사람에게 대단한 위압감을 준다. 사람의 인식체계에서 수평적 거리보다는 수직적인 거리가 거 멀게 느껴지는 것은 사람들에게 수직적인 인식체계가 잘 발달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느끼는 것은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느끼는 위기의식에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조그만 높은 곳도 떨어져 다칠 수가 있기 때문에 높은 곳은 사람들에게는 위험한 곳이다. 또한 위에서 있는 사람이나 동물은 쉽게 살필 수가 없기 때문에 자신에게 매우 위험한 존재가 된다. 따라서 수직적인 위계에서 어느 곳에 위치하는가에 따라 공격적인 위치가 되기도 하고 수세적인 위치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올려다 보이는 위치에 있다는 것은 사람에게 매우 불안감을 조성하게 된다. 이러한 점을 인식하였는지 대갓집의 기단의 높이는 대청에 앉았을 때 최소한 아랫사람의 눈 높이보다 높게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것은 아랫사람을 올려다보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기단의 높이를 높이고 또한 안채의 대청을 한껏 높여 놓은 것은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함이 많다. 기능만을 놓고 볼 때 기단의 높이는 그리 높지 않아도 된다. 기단이 높을 경우 드나드는 것이 불편하기 때문에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기단을 높게 하는 것은 높은 만큼 사람들에게 위압감을 주기 때문이다.
집의 권위를 보여주기 위하여 가장 많이 쓰는 방법은 것은 부연의 설치와 원형기둥을 사용하는 것 그리고 집을 높이는 것이다. 겹처마집과 원형기둥을 설치한 집이 너무 많아 이것이 조선조의 당연한 양식으로 생각하기 십상이나 이것도 금하였던 것이라고 한다. 처마의 깊이와 집의 높이는 깊은 관계가 있다. 처마가 깊지 않으면 집을 높게 지을 수 없다. 처마의 깊이는 햇빛의 조절을 하며 비가 들이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처마가 얕음에도 불구하고 집을 높게 지으면 여름에 햇빛이 들고 비가 들이쳐 불편하게 된다. 따라서 집을 높게 지으려면 당연히 처마의 깊이가 깊어질 수밖에 없다. 부연을 설치하지 않고 서까래로만 처마를 길게 빼려면 부재의 크기가 커져서 자재를 구하는데도 쉽지 않아 비경제적이고, 미적으로도 멋이 없어 부연을 설치하는 것이 오히려 낫다. 반대로 부연을 설치하면서까지 처마를 길게 빼었을 때 집이 낮으면 지붕이 너무 크게 되어 집의 균형이 잡히지 않는다. 따라서 높고 큰집은 당연히 부연을 설치하여야 한다. 예전 안동 화회마을의 북촌댁을 찾아갔을 때 북촌댁 종손되시는 분이 '북촌댁이 하회에서 가장 크고 높은 대청이다'라고 자랑하셨다. 이만큼 집을 높게 짓는 것은 위세를 자랑하기에 더 없는 좋은 방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만 위세를 보이려고 할 때는 겹처마를 돌리고 집을 높게 짓게 되는 것이다.
집에 초공을 돌리는 예는 조선조 초기에는 대군의 집 등과 같이 왕의 친인척의 집에서만 사용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조선조 말기 19세기말이나 금 세기초에 들어서면서 일반 사가에도 이러한 경향이 보인다. 1904년에 지어진 윤보선 생가를 보면 초공으로 장식한 것을 볼 수 있다. 신영훈 선생은 '조선조에는 능력이 있는 중앙의 목수는 공조에서 관리하였기 때문에 지방의 사가에서 마음대로 데려다 쓸 수가 없었다'고 하였다. 조선조 말에 정부의 행정력이 완화되면서 돈 있는 사람들이 집을 지을 때 서울의 목수를 데려다 쓸 수 있게 되면서 서울의 유행을 따라 집을 화려하게 짓게 되는 것이다. 권위를 표현하는 마지막 방법은 집을 크게 짓는 것이다. 신라시대나 조선시대의 가옥규제를 보면 모두 집의 크기를 제한하는 규정이 있다. 신라시대에는 실의 크기를 품계에 따라 제한하였고 조선시대에는 간수를 제한하였다. 사회적 지위가 엄격하였던 시대에는 어쩌면 당연한 규제였는지 모른다. 사회적 지위에 어울리지 않는 집을 소유한다는 것은 위계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집의 규모를 제한하는 것은 당연하였을 것이다. 집을 크게 지어 자신의 지위를 나타내는 것은 현재에도 있다. 우리는 넓은 집에 사는 사람은 최소한 돈이 많거나 또는 권력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궁궐을 호사스럽게 짓는 것은 왕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함이다. 당대의 권력자들이 자신의 집을 필요이상으로 크게 짓는 것은 바로 이러한 권위의식의 발로이다.
사회적 지위와 집과의 관계를 살펴보자. 집을 살펴보면 그 집의 사회적 지위를 읽을 수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당대 최고 권력자였던 대원군의 집이었던 운현궁과 지방의 명문거족의 집인 하회 마을의 양진당을 비교하여 보자. 운현궁과 양진당을 비교하여 보면 운현궁이 전체의 집 규모도 크지만 특히 사랑채가 양진당 보다 상대적으로 훨씬 크다. 두 집의 사랑채를 비교하여 보면 단순히 집안의 위세만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권력자의 집에는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 이러한 현상은 과거에도 마찬가지여서 많은 사람이 찾아오기 때문에 넓은 사랑채가 필요한 것이다. 양진당에 가보면 대청에는 많은 소반이 걸려있다. 예전의 상차림은 소반에 개인별로 차려내었기 때문에 소반을 보면 이 집에 찾아오는 손님의 규모를 알 수 있다. 양진당에 걸려있는 소반을 보면 꽤나 많은 손님이 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양진당의 사랑채를 보면 대청의 규모가 여섯간으로서 큰 사랑채에 속하지만 일반의 집에 비하여 매우 크다고 할 수 없다. 또한 운현궁의 사랑채와 비교하여 보면 전혀 비교의 대상이 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또한 강릉의 만석지기 집안인 선교장도 사랑채의 크기가 그리 크지 않다. 부속채의 크기가 크지만 정작 주인이 사는 공간은 다른 집과 별 차이가 없다. 이는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대부분 문중의 사람 정도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비교하여 운현궁을 보면 집 자체의 규모도 대단하지만 사랑채만을 보아도 앞의 두 집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규모를 자랑한다. 이렇게 규모가 커진 것은 단순히 집주인의 위상 때문은 아니다. 찾아오는 손님이 많다보니 그들을 맞이하기 위하여 집의 규모가 커진 것이다. 옛말에 정승집의 개가 죽으면 손님이 오지만 정승이 죽으면 손님이 없다고 한다. 그만큼 권력에는 사람이 모이기 마련이다. 예나 지금이나 중앙 권부에서 물러나 낙향한 촌로에게 사람들이 찾아가지는 않는다. 이것이 집의 규모를 결정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권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사람이 모이니 사람을 맞이하기 위하여 집이 규모가 커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 경제구조와 집
과거의 경제구조와 현대의 경제구조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과거 한국의 경제구조는 농업을 기반으로 한 자급자족의 경제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지금은 공업화사회에서 정보화사회로 전이가 이루어지고 있는 사회이고 유통의 발전으로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고 있는 시대이다. 이러한 경제환경의 변화는 집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온다. 경제 활동의 발달은 화폐경제의 발달을 전제로 한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재화를 집안에서 저장하기보다는 시장에서 필요한 만큼 구매하여 소비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경제구조 때문에 집의 형태에도 많은 변화가 발생하게 된다. 과거의 생활을 보면 생활에 필요한 곡식 및 기타의 소요물품을 대부분 곳간에 보관하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서 쓰는 방식이었다. 특히 주식인 쌀은 수확기에 일년동안 먹을 양식을 확보하여 보관하고는 때에 따라 뒤주에 옮겨 필요한 만큼 가져다 쓴다. 이러할 경우 집에는 창고가 많이 필요하게 된다. 또한 조선조에는 아직 화폐경제가 많이 발전하지 않아 많은 경우 물물교환의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베나 쌀 등은 화폐를 대신하여 화폐와 같은 기능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곡식은 잘 보관되어야 할 중요한 품목이었기 때문에 보관할 창고가 많이 필요하였다. 예전 어머님들이 겨우살이 준비를 하실 때 겨우내 먹을 쌀을 마련하고 김장을 담고 나면 흐뭇해하신 것은 시장에서 물품을 구입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여간 과거의 집은 소요되는 물건을 일단 집에 쌓아두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기 때문에 집의 구조에서 곳간이 차지하는 비중의 만만치 않았다. 충북 보은의 선병국가옥(중요민속자료 제 134호)을 보면 집의 규모가 117칸쯤 된다. 그 중에서 안채가 34칸, 사랑채가 36칸 안채에 부속된 행랑채가 34칸, 사당이 10칸 문간채가 3칸으로 되어있다. 이 중에서 사당을 제외하면 순수살림에 쓰이는 규모는 107칸이다. 이중에서 광이나 곳간으로 쓰이는 규모가 24칸으로서 집 규모의 1/4정도가 물건을 저장하기 위한 시설이다. 이러한 규모는 현재의 집과 비교하여 보면 매우 과하게 잡혀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지어지고 있는 집을 보면 창고가 차지하는 면적은 극히 미미하다. 현재의 주택에서는 가사에 필요한 도구를 넣어두기 위한 창고 외에 음식물이나 일상에 필요한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가 필요치 않다. 이러한 변화가 생긴 것은 생활에 필요한 식료품을 포함한 대부분의 물품을 필요한 만큼 시장에서 사다가 사용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집에 당연히 있어야 할 창고의 기능을 시장이 대신하여 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