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의 字는 의지(義之)이며, 號는 율정(栗亭)으로 본관은 廣州이십니다.
선생은 1483년 성종(成宗)이 경서에 밝고 품행이 방정한 인물을 널리 구할 때 손순효(孫舜孝)의 추천을 받아
경연(經筵)에서 《대학》와 《중용》을 강론하셨는데, 서거정(徐居正), 허종(許琮) 등 당대의 석학은 물론, 성종
(成宗)도 선생의 고매한 인격과 박식함에 탄복하였다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성종이 높이 등용하고자 하였으나 나이를 핑계로 거절하고 고향인 利川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 후 利川의 설봉서원(雪峯書院)에 제향 되셨습니다.
율정 선생은 젊어서부터 시서(詩書)에 통달하고 성리학(性理學)에 정밀하여 선비들의 추앙을 받았으며, 천문·
지리·기상·역학 등의 일반과학 분야까지 전심하여 각기 일가를 이루었다고 많은 문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용재(慵齋) 성현(成俔)이 지은 《용재총화》 제8권에 의하면, “상사(上舍) 이관의(李寬義)는 문명(文名)이 있어서 여러 사람들이 받들어 거벽(巨擘)으로 삼았다”라고 하였으니, 실로 선생의 학문적 경지가 어떠하셨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선생의 성리학은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로 이어지는 조선 전기 사림파의 주자학적 학문을 계승한 것으로, 그런 연유로 당대 수많은 석학들이 선생의 제자가 되고자 배움을 청하였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일두(一蠹) 정여창과 추강(秋江) 남효온, 물재 (勿齋) 손순효 등이 선생의 제자입니다.
일찍이 선생이 이천에 우거하고 계실 때 정여창이 선생에게 나아가 첫 스승으로 섬기며 다년간 수학하였습니다.
그 후 정여창은 성균관 대성전에 東邦 十八賢 중 한 분으로 배향되는 대학자가 됩니다.
정여창의 문집인 《일두속집》 제1권에 “삼가 율정(栗亭) 이 선생(李先生) 관의(寬義)의 시에 차운(次韻)하다”라는 시(詩)가 있습니다.
이 시의 시제(詩題)를 보면, 정여창 역시 깍듯하게 ‘선생(先生)’이라는 존칭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날과 달리, 유학을 국가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조에서는 ‘선생(先生)’이라는 칭호는 아무한테나 붙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조차도 과거의 수많은 유학자들 중에서도 특정한 분들, 예를 들면 율곡 이이 또는 퇴계 이황 같은 분들에게만 선별적으로 선생이라는 칭호를 붙이고 있습니다.
이렇듯 율정 선생은 후학들로부터 가없는 존경을 받으신 진정한 ‘선생(先生)’이셨던 것입니다.
추강(秋江) 남효온의 문집인 《추강집》 제5권에 출전하는 귀신론(鬼神論)를 보면, “광릉(廣陵) 이관의(李寬義)가 말하기를 ‘천지간에는 귀신이 없다. 이른바 천지인(天地人) 삼신(三神)이라는 것은 다만 이렇게 말한 것일 뿐이다.’”라는 문구(文句)가 나오고, 뒤이어 “저 ‘이자(李子)’의 귀신이 없다는 설과 같은 것은 이치에 닿는 점이 있다.”
라는 문구(文句)도 나옵니다.
이 글에서 특히 주목되는 바는, 추강(秋江) 남효온은 율정 선생을 유학자에 관한 한 극존칭인 이자(李子)로 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정 유학자의 성씨 다음에 자(子) 字를 붙인다는 것은 그 분을 공자(孔子)와 같은 성인(聖人)과 거의 동급 반열로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극히 드문 예로서 퇴계 이황 선생을 이자(李子)로 부르고, 송시열 선생을 송자(宋子)로 부르는 것에서 그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듯 율정 선생은 생육신의 한 분이며 당대 유림의 최고 석학이었던 추강(秋江) 남효온으로부터 ‘이자(李子)’ 라 불리시었던 것입니다.
추강(秋江) 남효온의 귀신론(鬼神論)이라는 글은 남효온과 당대 식자층들 간의 논쟁을 기록한 문답형식의 논설로서, 이 글에는 남효온 외에 논쟁의 상대자들의 주장도 수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곧 남효온뿐만 아니라 논쟁에 등장하는 상대방들도 “광릉(廣陵) 이관의(李寬義) 선생”이 곧 ‘이자(李子)’라는 것을 상호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로서 알 수 있는 것은 조선조 당대 모든 선비들에게는 율정 선생이 곧 ‘이자(李子)’라는 것은 상식이었고, 고로 선생에 대한 ‘이자(李子)’라는 호칭은 당연하고도 일반화된 존칭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율정 선생은 후학들로부터 가없는 존경을 받으신 ‘선생(先生)’ 이셨음은 물론이고 당대 모든 선비들로부터 학문적 성취와 사상적 중심으로서 추앙을 받으셨던 ‘이자(李子)’ 이셨던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심전(心田) 박사호(朴思浩)의 연행 기록인 《심전고(心田稿)》 제3권 / 응구만록(應求漫錄)을 보면, 율정 선생은 중국에서도 문장과 경세(經世)에 뛰어난 선비로 추앙 받고 계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응구만록(應求漫錄)은 심전(心田) 박사호(朴思浩)의 중국 연행 기록으로, 중국 조정에서 중서(中書) 벼슬을 하고 있는 오숭량(吳嵩梁)의 운객(雲客)이 신라로부터 조선조까지 우리나라의 대학자를 언급하는 글이 나옵니다.
“귀국에는 본래부터 - 중 략 - 최고운(崔孤雲 최치원(崔致遠)), 이목은(李牧隱 이색(李穡)), 이율정(李栗亭 이관의(李寬義)), 정율은(鄭栗隱), 이월사(李月沙 이정귀(李廷龜)), 최간이(崔簡易 최립(崔岦)), 차오산(車五山 차천로(車天輅)) 등 많은 이가 계십니다”
이 글에 의하면 栗亭 先生은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 목은(牧隱) 이색(李穡) 선생 등과 함께 동방의
대학자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렇듯 선생은 국내보다도 중국 조야(朝野)에 더 많이 알려져 계셨고, 후대 평가에서도 고운(孤雲) 최치원, 목은(牧隱) 이색 등과 함께 거론될 정도로 위상 역시 상당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栗亭先生 문집 발간이라는 慶事를 맞이하여, 廣州李氏 栗亭公派 종원 모든 분께 廣州李氏 十韻科公派 文化有司로서 경하(慶賀)의 말씀을 드립니다.
아울러 문집 발간에 각고의 노력을 아끼지 않으신 栗亭公派 都有司이신 취산(翠山) 근수(根守) 님께도 진심어린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이제 栗亭先生을 마음속에 다시금 기리며, 선생 관련한 일두(一蠹) 정여창의 詩로써 축하의 끝인사를 갈음코 져 합니다.
삼가 율정(栗亭) 李先生 관의(寬義)의 시에 차운(次韻)하다
학문은 천리와 인도를 궁구하여 당대에 으뜸이었으되 / 學究天人冠一時
누항에 살면서 남이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았네 / 而居陋巷不求知
성군께서 특별히 불러 치도를 물으시고는 / 聖君特召問治道
산림 속에 은거하고자 하는 뜻을 허락하셨네 / 因許山林意所之
西紀 二O一九年 七月 日
廣州李氏十韻科公派 文化有司 已而 柱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