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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살해에 가담한 우범선.. 역사 / 즐기며 살자 2011/07/17 23:47
http://blog.naver.com/jeeh001/90118271793
우범선 : 1) 그의 집안은 조상 대대로 무인의 맥을 이었다
2) 1881년(고종 17) 별기군(別技軍)에 자원하여 참령(參領)이 되고 김옥균이
주도하는 개화파에 가담하였다
3) 1894년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 의원이 되고 갑오개혁에 가담했다
4) 1895년 일본이 주도하여 훈련대가 창설되자 제2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그해 10월 7일 명성황후는 친일성향의 훈련대에 위협을 느끼고 해산과
무장해재를 명하였다.
5) 1895년(고종 32) 10월 8일 훈련대 해산 다음날 우범선은 이두황(李斗璜)과 함께
휘하장병을 이끌고 일본군 수비대와 함께 궁궐에 침입,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弑害)하는 을미사변에 가담하였다.
6) 그는 명성황후의 시신에 석유를 부어 태우는 마지막 처리 과정에도 가담하였다.
우범선은 조선을 개화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도움이 필요하고,
명성황후를 제거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고 오판(誤判)하였다
7) 1896년 고종황제의 아관파천 뒤 일본으로 망명, 도쿄[東京]에 거주하였다.
일본정부의 보호와 후원을 받았고, 일본 여성 사카이[酒井 仲]와도 결혼하였다.
2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이 농학자(農學者) 우장춘(禹長春)이다
8) 히로시마 인근 구레시[吳市]에서 일본 정부의 후원을 받으며 거주하였다가,
일본에 정치적으로 망명해있던(그러나 명성황후의 총애를 받았던)
고영근(高永根)·노원명에게 암살당하였다 1903.11.24.
=> 아관파천 :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乙未事變) 이후 일본군의 무자비한 공격에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과 왕세자가 1896년(건양 1) 2월 11일부터 약 1년간 조선의 왕궁을
떠나 러시아 공관에 옮겨 거처한 사건.
=> 우리나라의 농학발전의 기초를 닦은 유명한 육종학자인 우장춘은 우범선이 도쿄에서
사카이 나카와 결혼하여 낳은 아들로서, 우범선과 사카이 나카가 결혼할 때 일본승려, 회운사 주지승 아라이가 우범선이 피살되면 아들 가운데 한 사람을 키워주기로 했던 약속대로 키워주게 된다.
http://www.journalog.net/shinbs33 에서 옮겨 왔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역사를 옳게 읽으면 옷깃을 여미게 되고, 역사를 바로 알게 되면 두려움이 생긴다.
또 역사를 바로 살피는 첩경은 '흐름'으로 읽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역사를 단편적으로 끊어서 이해하면 대단히 큰 오류를 범하게 되기가 십상이다.
1896년 10월 8일. 일제는 주한일본공사 미우라 고로 (三 浦 梧樓)의 지휘로 50여 명의 경찰, 신문사 사장, 낭인들을 동원하여 조선의
왕비인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사건에 연루된 우범선(禹範善)은 일본으로 망명한다. 사건 당시 우범선의 공식 직함은 조선군 훈련대의 제 2대대장이었고, 계급은 참령(參領)이었다.
우범선은 도오쿄,고베(神戸)를 거쳐 일본국 최대의 조선(造船)기지라고 불리는 구레(吳市)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조선 침략의 주역들로부터 극진한 보살핌을 받는다. 그 대표적인 인물 스나가(須永) 가문의 사람으로, 그의 주선으로 사카 이나카(坡井)란 일본 여인과 결혼하여 아들을 두게 된다. 그리고 그 아들이 바로 우장춘. (훗날 우장춘은 스나가 가문의 호적을 들여 일본에서의 이름을 須永長春스나가나가하루 라고 고쳐 사용하기도 한다.)
1903년 11월 24일, 우범선은 명성황후의 심복과도 같았던 고영근(高永根)에게 망명지인 일본 땅 구레 시에서 향년 47세로 암살 된다.
이 사건이 역사와 아무 상관이 없는 개인의 원한이라면 여기서 모든 것이 끝나야 옳지만, 역사의 흐름은 그것을 용인하지 않았다.
우범선이 암살 되었던 구레시의 와쇼 거리 2079번지는 땅 값이 하늘과도 같다는 지금까지도 흉가 터라 하여 집을 짓지 않아 빈터(밭)로
남아 있다. 어디 그 뿐이랴. 다섯 살에 암살로 아버지를 잃은 어린이가 자라서 육종학(育種學)의 세계적인 권위자 우장춘(禹長春) 으로 성장한다.
1950년 3월 8일, 우장춘 박사는 일본 땅에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2남 4녀의 사랑하는 자식들을 남겨 둔 채 혈혈단신 가난에 쪼들리는 조국으로 돌아온다. 이 같은 우장춘 박사의 석연치 않은 귀국에 대해 몇 가지 설왕설래가 있었던 것은 당연하다.
첫째, 반역자로 몰려서 암살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 우범선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함인가, 자신의 능력을 아버지의 나라에 바침으로써 속죄를 하려 했는가?
둘째, 농업환경이 열악한 곳에서 육종학을 꽃 피우고 싶은 식물학 야망 때문인가?
일본의 공영방송인 NHK TV 에서도 이 같은 우장춘 박사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논픽션 작가 쓰노타 후사코 (角田房子) 원작의 [두 개의 조국]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하게 되었고, 나는 그 다큐멘터리의 한국 측 리포터로 출연하게 되었다.
일본 측 연출자인 오카사키 사카에 (岡崎榮) 도 대단한 의욕을 보여서 제작진은 우장춘 박사와 관련이 있는 일본 땅을 두루 섭렵하면서
우장춘 박사의 일본 쪽 자녀들과도 모두 만나서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그때나마 나는 똑같이 <아버지 우장춘 박사의 느닷없는 귀국이
무엇을 의미 하느냐>고 물었지만, 자녀들의 대답은 모두 한결 같았다.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조금은 쑥스러운 웃음을 담으며 그렇게 말했지만,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분위기가 역역하였다. 게다가 맏아들은 인터뷰에는 물론
응하지 않았고, 촬영을 하지 않겠다는 조건을 제시하여도 만나주지를 않았다.
아내와 장성한 자녀들에게 일언반구의 말도 남기지 않은 채 농업 환경이 열악한 아버지의 나라로 돌아가고 싶어도
우장춘 박사에게는 돌아갈 방도가 없었다. 이승만 시대의 한일관게가 민간교류를 불가능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마침내 우장춘 박사는 일본 땅 규슈에 있는 오무라수용소(大村收容所)로 잠입하여 한국인 밀입국자로 위장했다. 어찌 비장한 각오라고 아니 할 수 있으랴.이 이야기는 난제에 난제가 거듭되면서도 일단 촬영을 끝내면서 2시간 짜리 다큐멘터리로 완성 되었다. 한국에서는 KBS의 전파를 탔고, 일본에서는 NHK의 전파를 타면서 좋은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우장춘 박사의 학문적인 업적은 잘 그리면서도 그의 돌연한 귀국을 정확하게 밝혀내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다.
방송이 나간 지 며칠 뒤에 MBC 문화방송의 고문이셨던 언론인 최석채(崔錫采)선생께서 몸소 전화를 주시면서 우리들이 고민했던 부분에 명쾌한 결론을 내려주셨다.
-우장춘 박사가 내게 직접 말했어. 아버님을 대신하여 조국에 속죄하기 위해 가족들을 버렸노라고.......
아, 등잔 밑이 어두워도 분수가 있지. 최석채 선생의 명쾌한 증언을 듣고서야 나는 우장춘박사의 일본 쪽 자녀들이 보여주었던 어색한 웃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들은 차마 "아버지는 우리를 배신 하였습니다." 라고 말할 수가 없었을 뿐이었다.
역사를 적은 전적들을 대하노라면 역사서에 등재된 당사자와 후손들의 관게는 단절 되어지지를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역사에 악명을 남긴 사람들의 후손들은 그 선조로 인해 수백 년 동안을 마음 편히 살지 못하는 경우를 허다하게 보게 된다.
또 그것은 옛 기록에서만 작용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일도 그 테두리에서 벗어나지를 않는다.
[출처] 아버지와 아들 (우범선, 그리고 우장춘) |작성자 Sirius
[차길진의 미스터리Q] 이두황
[일간스포츠] 입력 2011.03.02 09:27 기사보내기 |
최근 모방송국에서 대한제국 황실을 배경으로 한 가상 드라마가 인기다. 나로선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다. 작년 두 번째 100일 구명시식 테마가 '아듀, 대한제국', 즉 대한제국 회항이었기 때문. 대원군과 명성황후 간의 앙금도 그랬지만, 명성황후를 시해한 중심인물 이두황과 우리 가문과의 악연을 푸는데도 만만치 않았다.
1895년 10월8일 새벽, 광화문을 향해 한 무리의 군대가 행진했다. 흥선대원군의 가마를 둘러싼 부대는 일본인 아다치가 지휘하는 낭인 50여명과 일본경찰 10여명, 일본군 수비대가 앞서고 그 뒤에는 우범선이 이끄는 조선군 훈련대와 이두황이 인솔하는 훈련대 제1대대가 따랐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일명 '여우사냥'의 시작이었다.
최초로 이들을 막아선 사람은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이었다. 홍계훈은 사력을 다해 이두황을 훈계했으나 그만 일본군의 칼을 맞고 쓰러진다. 홍계훈을 쓰러뜨린 여우사냥 일당은 명성황후를 찾아 경복궁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마침내 명성황후를 찾아내 칼로 난자한 뒤 사체를 소각하는데 성공한다.
여우사냥 직후, 이 사건에 연루된 조선인 반역자 이주회와 박선은 처형되나 핵심인물인 우범선·이두황·구연수는 일본으로 도피하는데 성공한다. 미우라 등 47여명의 일본 낭인들이 증거불충분으로 일본으로 돌아오자 그들은 동경 바닥을 활개 치며 주색잡기에 빠져 살았다. 오죽하면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이자 화폐 만엔권의 주인공인 후키자와 유키치까지도 '국모를 살해하고도 은인자중하지 않는다'며 질책했다고.
8년 뒤 우범선은 자객 고영근에 의해 살해되지만 이두황과 구연수는 1907년 이토 히로부미 통감에 의해 '정미특사'로 사면돼 고국 땅을 다시 밟게 된다. 이두황은 귀국하자마자 중추원 부참의가 됐다가 이듬해 전라북도 관찰사에 오르고 1910년 한일합방 후에는 전라북도 도장관에 오른다.
그 후로도 이두황은 죽을 때까지 정부로부터 끊임없이 훈장을 받는다. 또 일본인들에게 어찌나 잘했던지 그가 죽은 뒤에는 많은 일본인들이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석해하며 눈물을 흘렸고 죽은 뒤 전라도장으로 엄수되었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매국노 이두황의 족자를 몇 점 소장하고 있다. 그는 한학과 서예에 약간의 조예가 있어 일본 체류 시절에도 글씨를 팔아 유흥비를 마련했는데 그 시절 족자가 우연찮게 나와 인연이 되고 말았다.
그의 글씨를 보고 있노라니 심경이 복잡해졌다. 나와 이두황의 인연은 참으로 묘했다. 국모를 살해한 이두황은 나의 선조인 차치구 영감도 죽게 한 장본인이다. 우금치(牛禁峙)는 전라도에서 충남 공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고개로 1894년 11월8일부터 14일까지 동학농민군과 친일관군이 최대 격전을 벌인 장소다. 애통하게도 동학농민군은 근대식 소총으로 무장한 친일관군에 의해 대패했고 동학농민군을 이끌던 차치구 영감은 관군대장 이두황에 의해 처형되셨다. 한 마디로 이두황은 가문의 원수였던 셈인데.
1951년경, 나의 선친인 차일혁 총경은 민족정기를 바로 잡기 위해 전주 기린봉 명당터에 자리 잡은 그의 묘를 부관참시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화장하여 뼛가루를 묻었기 때문에 부관참시는 불가능했다.
씁쓸한 마음으로 이두황의 족자를 정리하며 어디엔가 있을 흥선 대원군 최대 걸작품이 궁금해졌다. 그가 친 최고의 난초에 ‘만수무강’하시라는 의미로 불로초까지 그려 넣었다는 그림. 명성황후 시해를 주도한 미우라 공관의 절친이자 후원자에게 선사했다는 그 그림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hooam.com/ 인터넷신문 whoim.kr)
소속 국가 : |
한국 |
우장춘 1898 일본 도쿄[東京]~ 1959. 8. 10 |
죽은 곳 : |
한국 | |
죽은 때 : |
1959. 8. 10 | |
직업 : |
농학자 | |
태어난 곳 : |
일본도쿄[東京] | |
태어난 때 : |
1898 |
우장춘
별기군 훈련대 제2대 대장을 지내다 을미사변에 연루되어 일본에 망명한 우범선(禹範善)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916년 구fp중학교를 졸업하고 도쿄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농과대학 실과에 진학했고, 1919년 졸업과 함께 일본 농림성(農林省) 농사시험장에 취직하여 육종학(育種學)연구를 시작했다. 1922년부터 〈유전학 잡지〉에 〈종자에 의해 감별할 수 있는 나팔꽃 품종의 특성에 관하여〉 등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며 왕성한 연구활동을 보였다. 1930년 나팔꽃에 관한 그의 박사학위 제출용 논문이 시험장의 화재로 소실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4년여의 노력 끝에 〈종의 합성〉이라는 논문을 다시 작성·제출하여 1936년 도쿄제국대학 농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학위논문은 세포유전학연구에서 게놈을 분석하고 기존의 식물을 실제로 합성시킨 최초의 사례로서 〈일본 식물학 잡지〉에 발표되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박사학위 취득 후에도 기사(技師)가 되지는 못하고 계속 기수(技手)에 머물렀으나 1937년 다키이종묘회사[瀧井種苗會社]연구농장장으로 초빙되어 자리를 옮겨 1945년 사임할 때까지 의욕적인 연구는 물론 〈원예와 육종〉을 발행하는 등 육종의 과학화를 위해 노력했다. 8·15해방 후 식민통치로 피폐해진 농촌을 구하고자 1947년부터 벌어진 우장춘 박사 귀국추진운동에 답하여 귀국을 결심하게 되어 1950년 한국농업과학연구소(1953년에 중앙원예기술원으로 개칭)의 초대소장에 취임했다. 귀국 후 무·배추 등 채소와 볍씨 품종개량에 정열적인 노력을 기울였으며 육종학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자 일본의 기하라[木原] 박사가 개발한 씨없는 수박을 재배하고, 후진양성에도 힘써 김종·진정기·김영실, 그리고 원우회의 제자들을 길러내 한국 농업근대화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1953년 중앙원예기술원 원장, 1954년 학술원 추천회원, 1958년 농사원 원예시험장 책임자가 되었다. 1959년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받고 같은 해 8월 10일 위·십이지장 궤양으로 죽었다.
* 우 박사는 매일 아침 두레박으로 우물물을 길어 어머니를 생각하며 세수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고 한다. 1959년 우 박사 생일에 제자들이 축의금을 거두어 줬는데, 박사는 이 축의금으로 연구소의 두레박 우물 옆에 모유정(母乳井 )이란 비석을 세우고 자신을 길러주고, 자신이 일본에서 조선인으로 살아오면서 힘 들고 괴로운 때가 많아, 한때 일본으로 귀화하려고 심각하게 고민한 자신을 꼭 조선인으로 살아가야만 한다고 깨우쳐 준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을 기렸다고 전한다. 그 어머니는 비록 일본인이었으나 자신의 남편이 조선인이었음에도 조선을 배신한 인물임음을 잊지 않고, 남편의 죄를 씻는 길 중 하나가 아들을 끝까지 조선인으로 살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아들을 키운 인물인 셈이니, 국경을 초월하여 민족의식이라는 보편적인 가치를 알고 실천한 고결한 인품을 지닌 분이라 할 수 있다.
2011.11.26.
민족문제연구소 경북북부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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