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가시야마 아키라의 『류』는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 어려운 참으로 독특한 소설이다. 처음 이 소설을 접했을 때는 별 관심을 나타내지는 않았다. 그저 추리소설이겠거니 하는 생각이 강했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점점 책속으로 빨려들었다. 흡인력이 대단한 책이다.
류(流)라는 제목처럼 20세기 들어 중국은 거대한 격랑 속에 휘둘렸다. 그것은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 한 가운데에 일본제국주의가 자리하고 있다. 일제가 패망의 길을 걸을 즈음 중국에는 국민당과 공산당이 대치하고 있었고, 우리는 남북이 대치하고 있었다.
중국에도 우리에게도 내전이 있었고 여전히 양쪽 진영은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고 있다. 우리와 중국이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는 으르렁거림이 도를 넘어 서로에게 문을 굳게 닫고 있지만 중국은 서로가 왕래를 통해 서로의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다.
장제스와 마오쩌뚱
서로의 마음을 어루만지다보니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새롭게 드러나고 지금까지 익히 알고 있던 사실들이 전도되는 일들이 벌어졌다. 히가시야마 아키라의 『류』는 바로 그 점에서 꼬인 이야기를 풀어내며 미래로 나아가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살풀이 같은 것이었다.
대부분의 소설은 일관된 하나의 흐름을 견지한다. 그것이 추리이든, 사랑 이야기든 개인의 성장사들 모두가 그렇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 모든 것을 한 곳에 담아 버무렸다. 그런데도 어색하지 않고 난삽하지도 않다. 그러나 사실은 그게 우리들의 진솔한 삶의 모습이다.
이야기는 1970년대 중반 예치우성의 삶을 따라 전개된다. 국민당이 대만으로 건너가고 30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것이다. 따라서 우연치 않게 국민당이든 공산당이든 가담하여 내전에 참가했던 사람들 중 전쟁 통에 죽지 않은 이들은 여전히 대륙이나 대만에 살아 있었다.
그러나 대만과 대륙 양안이 단절됨으로써 당시 참혹한 전쟁을 치룬 소설에 등장하는 할아버지들은 각자의 시각에서 자기들 유리하게 전쟁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같은 일에 대한 서로의 이야기가 어긋나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걸 입에 담는 사람은 없었다.
어차피 모두가 지난 일이고 달리 확인할 방법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할아버지의 파란만장한 대륙에서의 지난 날 이야기가 예치우성에게는 그대로 역사가 되었다. 그러나 차츰 양안의 해빙 무드에 힘입어 대륙과 어느 정도 교류가 이루어지자 대륙의 시각이 곁들여진다.
저자의 이야기 솜씨는 대단해서 타이베이의 골목을 누비면서도 어느 순간 대륙에서의 할아버지들의 이야기가 곁들여진다. 타이베이의 이야기는 늘 소란스럽고 살벌했다. 할아버지들의 이야기는 늘 화려했으며, 그들 이야기 속에는 언제나 대륙으로 돌아갈 꿈이 들어있었다.
<자료 : 인터넷>
그들에게 대만은 그저 잠시 머무는 곳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대만에 특별한 애착도 없다. 말하자면 대륙에서 이주한 자들이 일등국민이라면 대만의 원주민들은 이등국민이었다. 그런 어수선함이 사회를 더욱 소란스럽게 했다.
예치우성은 그런 소란의 한가운데를 젊은 시절을 관통하면서도 할아버지에 대한 생각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의 할아버지가 어느 날 가게에서 살해되었다. 예치우성은 문득문득 할아버지가 생각나 할아버지 살해범을 찾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무슨 특별한 수가 있는 것은 아이었다.
따라서 특별히 할아버지의 죽음을 파헤치기 위한 어떤 노력을 기울인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일상 속에서 우연히 할아버지가 생각났고, 할아버지와 관련되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숨겨놓은 사진을 우연히 찾아보게 됨으로써 상황은 급반전을 이룬다.
그것은 할아버지가 죽였다는 일본의 개라 불리는 자의 일가족 사진이었다. 할아버지가 죽인 사람의 가족사진을 보관하고 있었다니. 그리고 그 사진을 삼촌에게 보여주자 그가 보인 행동이 생경함에 할아버지의 죽음이 새롭게 인식되기 시작했다.
소설은 예치우성의 일상을 따라 이야기가 이어지므로 할아버지의 살해에 관한 이야기는 아주 느리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양안의 화해무드를 타고 대륙에 있는 할아버지의 옛 친구 마 할아버지와 연락이 되었다.
그리고 결국 예치우성은 산둥성 옛 고향으로 찾아간다. 그곳에서 마 할아버지를 만나 할아버지가 죽였다는 왕커창 가족을 찾는다. 마을 입구에는 예치우성의 할아버지가 마을 사람들을 몰살했다는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왕커창 가족의 이야기는 할아버지의 무용담과는 사뭇 달랐다. 왕커창은 일본인을 부인으로 맞았다는 것 때문에 일제의 앞잡이로 낙인이 찍혔다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예치우성의 할아버지 예준린이 마을 사람들과 함께 생매장한 것이다.
그것을 왕커창의 아들 위우원이 숨어서 지켜보았고 그는 그 분풀이로 예준린과 함께 끔찍한 일을 저지른 슈일후의 가족을 죽였다. 그리고 막 나타난 예준린에 의해 그는 슈일후의 아들로 오인되어 구출되었다.
예준린은 위우원을 대만으로 데려와 길렀지만 위우원은 예준린에 대해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다. 애증이 교차했다. 결국 그는 예준린을 죽였지만 처음의 생각대로 온 가족을 다 죽일 수는 없었다. 그 동안 가족들과 어느 정도 정이 들었다고 해야 할까? 어떻든 화해의 전조다.
그는 외항 선원이었으므로 입국 신고 없이 몰래 들어와 예준린을 죽이고 다시 바다로 돌아갔으므로 범죄는 완벽했다. 그리고 마침내 대륙 산둥성 고향으로 돌아가 폐병으로 지친 몸을 달래고 있었다.
70년대 타이페이
예치우성은 대륙과 일본을 경유한 서진 교환으로 그곳의 할아버지의 옛 친구인 마 할아버지와 당시의 상황을 접하게 되었고 그곳의 사진을 볼 수 있었다. 그곳에 위우원이 있었다. 예치우성은 위우원이 할아버지를 죽인 범인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여권을 위조하여 대륙으로 들어가 할아버지의 과거의 실체를 듣게 된다. 복수가 대를 이어내렸지만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대륙의 사람들도 이제는 모두 다 지난 일이라며 복수를 확대해석하지 않는다. 후에 예준린의 죄상을 적어놓은 비석도 폭파해버렸다.
역사는 모든 걸 묻혀버렸고 더 이상 사람들은 그때의 악몽을 입에 담지 않았다. 역사는 의도적으로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치유되는 법이다. 그걸 일부러 건드리면 역사의 상체기는 덧날 수밖에 없다. 덧난 상처는 부풀리게 마련이다. 우리가 꼭 그렇다.
우리는 일제가 물러가자 한순간에 좁은 반도는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로 급격하게 갈라졌다. 상황에 따라 국민당이든 공산당이든 가입을 한 중국과 달리 반도의 허리가 잘라지면서 선택의 여지는 없어졌다. 그리고 내전을 치루면서 갈등은 고착화되었고 왕래는 끊어졌다.
같은 언어를 쓰는 같은 민족이지만 두 진영은 지구상에서도 가장 이질적인 진영이 되었다. 같은 식구가 생면부지의 남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산가족 행사는 늘 어색했고, 간교한 정치인들의 놀이터로 전락하고 남북은 늘 긴장 속에 대치하며 날을 세우고 있다.
급기야 이 작은 땅덩이가 핵무기 시위장으로 변하고 있는 중이다. 갈라설 줄은 알지만 화해할 줄은 모르는 민족이다. 지금은 우리끼리도 북한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달라 서로 다툰다. 우리는 다투지 않으면 입이 근질거리고 온 사지에 근육이 욱신거리는 민족이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던 말은 자취를 감추고 지금은 왜 통일을 해야 하느냐고 묻는다. 왕래가 없으니 화해도 없다. 함께 사는 법을 모른다. 우리에게 한국전쟁을 깊이 있게 다룬 소설이 없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이 소설이 주는 여운이 길다. 무척 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