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크리미아 전역 [2] 막다른 곳에서 벌어진 역사적인 혈전](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static.naver.net%2Fncc%2F%2Fimage_text%2Fnaf%2Fa02%2F53%2F54%2F20160926105453946.png)
독일 제54군단이 심페로폴에서 세바스토폴로 향하는 가도를 따라 공격에 나섰으나 곧바로 진격이 둔화되었다. 소련군이 진지에 틀어박혀 진득하게 방어전을 펼치자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던 것이다. 우회로가 없어 앞으로만 밀고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이미 오데사 전투가 증명했다. 그렇게 막혀 있는 제54군단의 머리 위로 북동쪽에서 무지막지한 포탄들이 날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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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격 중인 막심 고르키 해안포대. 세바스토폴 전투 초기에 독일군의 진격을 물리친 일등공신이었다.
제30해안포대(막심 고르키 1포대)가 포탑을 육지로 돌려 독일군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선봉에 섰던 제132사단은 68발의 포탄을 얻어맞고 400여 명의 인명 손실을 입은 채 후퇴해야 했다. 동시에 남쪽 해안에 있던 제35해안포대(막심 고르키 2포대)도 동남쪽에서 다가오는 독일 제30군단을 저지하기 위해 포격을 개시했다. 이들의 상황도 제54군단과 비슷해 전진은커녕 뒤로 돌아 사정권 밖으로 물러나야 했다.
도시 해안가 남북에 각각 위치한 막심 고르키 1, 2포대는 지난 1912년부터 건설에 들어가 1936년 완공된 구경 305mm 거포 2연장으로 이루어졌다. 최대 사거리가 40km에 이르고 400mm 장갑으로 보호받는 포탑 하나의 무게만도 무려 1,300톤에 달했다. 막심 고르키 포대와 세바스토폴 요새가 워낙 단단하기도 했지만, 외곽에 축차적으로 구축된 수많은 벙커와 진지의 야포들, 소련 해군도 상당한 위력을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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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폐허만 남아 있는 제35해안포대(막심 고르키 2포대). 지하 암반을 깊게 파서 만든 구조물이라 자체 방어력도 상당히 뛰어났다.
만슈타인은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공격 중지를 명했다. 이런 경우 미국이나 영국이라면 바다에서 세바스토폴을 협공하는 작전도 고려했겠지만 해군력이 약한 독일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얼마 되지 않는 독일 해군의 거함들이 영국 해군의 감시망을 피해 대서양과 지중해를 돌아 흑해까지 올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반면 소련 흑해 함대는 자유롭게 독일군을 공격했고 바다를 통해 병력과 물자를 끊임없이 세바스토폴에 공급했다.
만슈타인은 바다를 이용할 수 없고 우회로도 없는 상태에서 세바스토폴을 향해 무조건 전진만 하다가는 손실이 너무 클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일단 세바스토폴을 제외한 크리미아의 여타 지역을 완전히 정리해 배후의 위협을 없애기로 결심했다. 당시 크리미아 내의 소련군은 서쪽의 세바스토폴 일대와 동쪽의 케르치 반도로 양단되어 있던 상황이었다. 만슈타인의 시선은 동쪽의 케르치 반도로 밀려나간 소련 제51군 쪽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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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르치 반도의 페오도시야를 공략 중인 독일군. 만슈타인은 잠시 세바스토폴 공략을 미루고 소련 제51군을 크리미아에서 몰아내는 작전에 돌입하였다.
이어진 격전으로 전력이 거의 손실된 상태였지만 케르치 해협을 장악하고 있던 제51군은 독일에게 눈엣가시였다. 비록 당시 소련은 이 중요한 전략 요지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지만, 모스크바 방위가 우선이어서 충분한 지원을 할 수 없었다. 11월 10일, 만슈타인은 새롭게 증강된 제42군단에 케르치 반도로의 진격을 명령했다. 그리고 11월 16일, 케르치 시(市)에 입성하면서 독일은 케르치 반도에서 소련군을 완전히 몰아냈다.
이제 다시 독일의 목표는 홀로 남은 세바스토폴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정면 돌파 외에 뾰족한 공략법이 보이지 않았다. 만슈타인은 공간을 이용한 기동전으로 상대방을 일거에 포위 섬멸하는 작전을 주로 구사해온 인물이었다. 하지만 들어갈수록 진격로의 폭이 좁아지면서 방어력은 더욱 강화되는 세바스토폴에서는 이러한 전술을 사용할 수 없었다. 11월 20일, 독일은 공격에 나서 4km를 전진했으나 소련군의 포격에 또다시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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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이 약한 독일이 도시 전체가 요새화된 세바스토폴을 점령하는 방법은 정면 돌파 외에는 없었다. 당연히 많은 희생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11월 30일이 되자 독일 제11군의 사상자가 20,000여 명에 이르면서 더 이상 작전을 지속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거기에다가 모스크바 전투가 격화되면서 탄약과 포탄의 공급이 제때 이루어지지 않아 독일군은 화력 부족에 시달렸다. 어쩔 수 없이 만슈타인은 케르치 시, 페오도시야(Feodosia), 얄타(Yalta) 같은 크리미아 내의 주요 점령 거점을 관리하는 병력까지 소환해 세바스토폴 공략에 투입했으나 효과는 미진했다.
소련군은 강력한 요새를 방패 삼아 효과적으로 방어전을 펼치고 있었다. 거대한 요새와 방어 시설을 무너뜨리지 않는 한 독일의 노력은 백약이 무효였다. 공격 방법이 극히 제한된 이상 만슈타인은 화력 보강이 시급하다고 보고 OKH(독일 육군 최고사령부)와 남부집단군에 요청해 대대적인 포병 전력 확충에 나섰다. 다른 부대들도 포가 아쉬운 형편이라 본토와 후방에 있는 2선급 대포라도 있으면 이유 불문하고 확보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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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전 지휘소에서 참모들과 작전을 검토 중인 만슈타인. 그는 화력 보강이 시급하다고 보고 전력 확충에 나섰다.
당시 OKH는 모스크바 전투에, 남부집단군은 로스토프(Rostov on Don) 공략에 정신이 없었지만 가용할 수 있는 포병 전력을 긁어모아 만슈타인에게 보내주었다. 마침내 12월 16일이 되었을 때 세바스토폴 일대에는 여타 전선에서 이동 전개한 208개 포대로 구성된 총 1,275문의 야포와 150대의 전차를 갖춘 2개의 루마니아 사단을 포함한 8개의 사단이 증강되어 병력도 20만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동안 소련군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12월 13일까지 해상을 통해 제388사단이 새롭게 배치되면서 방어력이 증강된 상태였다. 이렇게 양측이 전력 확충에 나서는 동안의 소강 상태는 12월 17일, 독일이 2차 공세를 시작하면서 깨졌다. 5일간의 포격 후, 제54군단이 체르나야(Chernaya) 강 일대의 소련 제3방어구역(Defence Sector III)을 강습했다. 더불어 남쪽에서 제30군단과 루마니아군이 협공을 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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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2월 얄타 인근 산악지대를 정찰하는 루마니아군. 전쟁 중반기 이전까지 상당한 역할을 담당한 독일의 동맹군이었다.
이번에도 막심 고르키 포대의 거포들이 독일군 진출 방향을 향해 사정없이 불을 뿜었다. 포연이 사라진 후 독일군이 간신히 숨을 돌리면, 포격 동안 매복하고 있던 소련군이 튀어나와 격렬하게 저항했다. 결국 독일의 공격은 또다시 차단되었고 그러한 틈을 타 해상으로 제345사단과 해군 제79육전여단이 증원된 소련군은 방어 전면을 더욱 강화했다. 이번에도 독일군은 세바스토폴의 철벽에 막혀 좌절하고 말았다.
바로 그 즈음 소련은 독소전쟁 개시 이후 처음으로 독일을 밀어내고 있던 중이었다. 전선 남부에서는 로스토프를 탈환하여 최초의 전략적 승리를 맛보았고 중부에서는 모스크바의 사수가 확실해졌다. 북쪽의 레닌그라드는 상당히 위태로운 상황이었지만 계속 분투 중이었다. 그래서 적진에 홀로 떨어져 압도적인 독일군을 상대로 분투하는 세바스토폴의 모습은 가히 굴복하지 않는 소련의 저항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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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선전 매체에서 보도한 세바스토폴 수비대의 모습. 비록 선전용으로 연출된 사진이지만 그들은 강력한 요새를 방패 삼아 효과적인 방어전을 펼치고 있었다.
자신감을 얻은 스탈린은 이번 기회에 세바스토폴을 구원함과 동시에 크리미아를 완전히 탈환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해당 지역을 관리하는 북코카서스 군관구(North Caucasus Military District)에 크리미아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12월 25일부터 코카서스 일대에서 한창 편성 중이던 일부 소련군 부대들이 서둘러 케르치 해협을 건너 크리미아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비록 독일이 케르치 반도를 점령하고 있었지만 제11군 대부분이 서쪽 끝의 세바스토폴 공략에 매달려 있다 보니 동쪽 끝인 이곳에는 2개 대대 규모의 전방 경계부대만 주둔한 상황이었고, 소련군을 막아내기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하지만 상륙 능력이 부족한 소련군은 상당히 신중했다. 소련군은 독일군이 주둔한 케르치 시를 건너 뛰어 페오도시야 등을 비롯한 깊숙한 후방으로 상륙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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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협을 건너 케르치 반도에 상륙한 소련군. 선박편이 나빠 소부대 단위로 축차적으로 투입되었다. 하지만 한 달 동안 무려 30만의 대군이 전개될 수 있었다.
하지만 선박이 부족한데다 한겨울에 급하게 실시되다 보니 상륙 도중 익사하거나 동사하는 병력이 속출했다. 한 번에 투입 가능한 병력도 중대급 정도에 불과했고 중화기도 제대로 보유하지 못해 최초 투입된 부대는 증원군이 올 때까지 해안가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만일 근처에 독일군이 있어 공격을 가했다면 몰살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어느덧 해안가 교두보 연결에 성공하면서 소련군의 진지는 단단하게 구축되었다.
글남도현 | 군사 저술가[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