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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촌 최덕지 혼이 담긴 영암 영보정, 월출산에 비추다 세상에 끼치다
조선 전기 학자 연촌 최덕지
호남지역 대표적 성리학자
세종시대 가장 훌륭한 신하
문종 임금의 스승
영보정 설립자
영보최씨 입향조
영보정 보물 제 2054호 지정
최덕지 영정 보물 제 594호 지정
“월출산이 참으로 아름답게 잘 보이니 이곳 영보(永保)가 이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명지(名地)가 따로 없네요?”
“세상을 다 얻은 듯합니다.”
“들판을 넓고 푸르러 백로(白鷺)가 한가로이 날아 노닐고 저 멀리 월출산(月出山)의 구름이 서기운집(瑞氣雲輯)하니 신선(神仙) 노름을 한 듯합니다.”
“땅은 광활한 옥토(沃土)요, 경치는 수려(秀麗)하니 이곳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디 있겠소!”
“세상이야! 어디나 다 아름답지 않을까 만은 월출산이 한 눈에 들어오는 이 영보가 아름답기 그지없어 보입니다.”
“그 산세를 품어 안으니 이 한세상 덧없습니다.”
“저는 오랜 관직 생활을 마치고 낙향(落鄕)을 처가(妻家)가 있는 곳으로 한 사람입니다.”
월출산을 앞산으로 오봉산(五峰山)을 뒷산으로 넓은 평야를 바라보고 죽림(竹林) 밭을 뒤로 하여 6백년 넘게 월출산의 기를 받아온 전남 영암 덕진면 영보마을, 최덕지(1384~1455)라는 문신(文臣)이 그의 나이 69세 때(1450년)에 예문관직제학을 끝으로 사퇴를 하고 모든 관직을 떠나 낙향했다.
최덕지(崔德之),
영보 최씨의 뿌리인 최덕지는 1384년(고려 제32대 우왕 10)에 태어나 1455년(조선 제7대 세조 1) 72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최덕지는 본관이 전주(全州)이며 자는 가구(可久), 호는 연촌(烟村).존양(存養)이다. 최용봉(崔龍鳳)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을인(崔乙仁)이고 아버지는 문과에 급제하여 참의를 지낸 최담(崔霮)이며 어머니는 박인부(朴仁夫)의 딸이다. 광지(匡之), 직지(直之), 득지(得之), 덕지(德之) 네 아들을 낳았다.
그는 일찍이 양촌 권근을 따라 배우고 태종을유(1405)년에 생원시(生員試)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직제학(直提學)이 되는 등의 1405년(태종 5) 식년문과(食年文科)에 동진사(同進事)로 급제한 뒤 추천을 받아 사관(史官)이 되었고 이후 김제군수, 남원부사 등을 지내는 등 관직에 몸을 담았다. 김제에서는 논공법(論貢法)을 상소하여 세제(稅制))의 개혁에 공헌하였다. 그는 1409년 교서관정자로서 원구단(圓丘壇)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 오제제문(五帝祭文)을 준비 못하여 한때 투옥(投獄)되기도 했다.
그는 뒤에 감찰 등 삼사(三司)의 청요직(淸要職)을 거쳐 외관직으로 김제군수, 님원부사 등 여러 주.군을 다스리는 등의 여러 곳의 수령(首領)을 지냈으며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 등을 지녔다. 최덕지는 도학(道學)에 출중하여 교우들의 추앙을 받았고 고려사(高麗史)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남원부사를 사퇴하고 관직에서 물러나 영암의 영보촌(永報村)에 내려가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는데 이때 존양(存養)이라는 호를 사용하였다.
남원부사를 사퇴한 최덕지는 문종이 즉위해 1451년 정3품 당하관(堂下官)인 예문관직제학에 다시 임명했으며 그의 학술과 문예를 높이 평가하였을 정도로 총애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려나는 등의 치사(致仕)할 나이가 안 되었는데 나이가 많다는 핑계로 이젠 관직 생활에서 물러나겠다는 마음을 갖고 연로(年老)함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다시 내려갔다. 그는 관직에서 스스로 물러나 영암의 영보촌으로 내려가 살면서 그의 누각(樓閣)의 편액을 존양루(存養樓)라고 하였다. 최덕지는 1405년(태종 5) 식년문과(食年文科)에 동진사(同進事)로 급제한 뒤 추천을 받아 사관을 시작으로 1451년 예문관직제학을 끝으로 46년간의 관직 생활을 했었다.
연로함을 이유로 관직을 그만 둔 최덕지는
“아니다. 내가 이 자리에 있을 일이 아니지!”
“난 오래도록 관직 생활을 해왔고 더할 나위 없는 명예스럽고 영화로운 관직이지만 내가 이 생활을 끝으로 생을 마감할 수는 없다.”
“삶이란 한 분야에서 보내는 것은 무의미하는 일이야!”
“다방면에서 보내는 것도 멋진 인생이지!”
“사람은 태어난 곳을 다시 찾는 것은 세상의 이치로다.”
“이것 또한 윤회(輪回)로다.”
“유년, 청년, 장년, 노년으로 이루어지는 인간 성장의 각 시기를 국가의 발전 단계와 결부시키지 않는가?”
“그러하듯 유년은 고향이요, 청년도 고향과 객지이며 장년은 작업에 따라 거기서 지냈고 하니 노년마저 그럴 수는 없는 법, 노년을 유년시절처럼 보내는 것 또한 온당하리라.”
“그게 바로 세상 이치임을!”
잘 나가던 관직에서 스스로 물러나며 낙향을 두 번이나 했던 최덕지는 이미 그의 마음에는 인생의 스토리의 밑그림을 그려낸 일대기에 대해 설계를 했었다. 낙향은 건강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인생 말년만큼은 한양이나 관직의 근무처가 아닌 그가 태어났던 곳 또는 자연을 사모(思慕)한 곳인 자연의 풍광이 있고 초당(草堂)이 있는 시골로 돌아가려고 했다.
연촌 최덕지는 남원군수를 그만두고 그의 처의 고향인 영암 영보촌으로 낙향하여 당호를 존양(存養)이라고 하고 학문을 연구했다. 이때 시조 한 수가 전한다.
청산(靑山)이 적요(寂寥한데 미록(麋鹿)이 벗이로다
약초(藥草)에 맛들이니 세미(世味)를 잊으로다
벽파(碧波)로 낛시대 둘러메고 어흥(漁興)겨워 하노라
최덕지는 유유자적한 전원에서 살면서 지은 시로써 자연 속에서 본성을 보전하고 기른다는 당호를 내걸었다. 바로 존양(存養)이다. 최덕지는 존양이란 당호를 내걸고 학문과 전원생활에서 즐거움을 찾았다.
이 시는 현실을 잊고 그저 자연 속에서 즐거움을 찾겠다는 그의 모습이 그려진 시임을 찾아볼 수 있다. 초장(청산이 적요한데 미록이 벗이로다)에는 청산에서 사슴과 벗하는 자연 생활을 말했고 중장(약초에 맛들이니 세미를 잊으로다)에는 자연에 묻혀서 사는 생활이 생명에 이로운 약초의 맛과 같아서 세속적 현실의 즐거움은 끊어버렸다. 종장(벽파로 낛시대 둘러메고 여흥겨워 하노라)에는 전원에서 고기잡이하는 흥취가 자신의 삶의 의미라고 봤다.
자연에 귀의하며 유유자적 살고자했던 생각에 잘 나가던 관직을 미련 없이 가감하게 버리고 영보촌에서 생활을 하고 있던 연촌 최덕지는 가르쳣던 문종이 조선 5대 임금으로 오르자 스승으로 모셨던 최덕지를 한양으로 불러들인다.
조선 4대 임금인 세종의 맏아들인 문종은 세종 때 선조 임금이 병환으로 정사를 잘 볼 수 없어 대신 봤던 그다. 문종은 성균관에서 학문을 배운 연촌 최덕지를 스승으로 모시며 학문을 배웠다. 그때 연촌 최덕지의 예문(禮文)과 학문(學文)에 뛰어남을 알았다. 성품이 좋은 등 성실한 신하로 눈여겨봐뒀다. 문종은 그런 그를 다른 신하들보다 더 많이 존경하고 총애(寵愛)했다. 그런 그였기에 남원부사에서 사퇴하고 영암으로 낙향해 있는 것을 문종은 최덕지가 시골에서 은거(隱居)하며 썩고 있는 것을 아까워했다. 그의 지식과 열정을 나라를 위해 헌신하도록 다시 기회를 주고자 그를 불러들었다. 그런 그가 또 갑작스럽게 관직을 그만 두겠다고 했을 때 문종은 그의 말에 의심을 했다. 진실로 그러는 건지 아니면 농담 삼아 한 건지 알쏭달쏭했었다. 귀를 의심한 문종은
“전하! 소인 최덕지는 관직에서 물러나고자 하옵니다.”
“통촉해주옵소서!”
“전하! 하해와 같은 전하의 은혜를 다 보답하지 못해 송구하옵나이다.”
“소인의 마음을 헤아려주시옵소서! 전하!”
하자 문종은
“직제학이 지금 뭐라고 했소이까?”
“관직을 그만 두겠다고 했습니까?”
“어허 이건 무슨 말이요, 이거 참!”
“이게 왼 일입니까?”
“안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직제학의 훌륭한 인품과 성품과 학문은 짐이 세종 임금 때부터 지켜봤고 인정했습니다.”
“견줄 자 없는 훌륭한 직제학께서 관직을 그만둔다니요!”
“이게 말이 되옵니까?”
"지금 한 말 진실인지요?"
"왜 이런 겁니까?"
“직제학을 어느 신하보다 인품이 뛰어난 사람으로 봤는데!”
“어허 참!”
"갑자기 그만 두겠다니!"
"아거 뭐란 말입니까?"
"직제학께서는 나의 스승이었소!"
"직제학의 가르침에 따라 짐은 이 나라의 훌륭한 왕이 되고 싶소!
"나라와 백성을 위해 태평성대를 누리고자 하오!"
"국태민안을 시킨 왕이 되려하오!"
"성품과 학식이 훌륭한 직제학을 불렀건만 짐의 뜻을 저버리다니요!"
"실망이라로다."
“무슨 사연이라도 있단 말입니까?”
“짐을 도와주면 안 되겠습니까?”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시구려!”
“짐이 이렇게 간청을 합니다.”
문종이 간청을 하자 최덕지는
“전하! 송구하옵나이다.”
“소인은 이미 마음을 굳혔습니다.”
“전하! 통촉해주옵소서!”
하자 문종 임금님은
“어허 참!”
“직제학의 마음을 알 길이 없어 가슴이 답답할 뿐이요!”
“어서 자세한 말을 해보세요!”
하자 최덕지는
“전하! 전하가 소인에게 큰 사랑으로 대하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부족한 소인이었어도 신뢰하며 소인의 인품을 높이 평가하여 관직을 맡겨주는 일에 은혜롭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황공하옵나이다.‘
“전하! 소인은 관직을 그만 두고자 한 것은 다른 뜻은 없사옵니다.”
“다만 소인의 나이를 생각했을 뿐이옵나이다.”
“송구하옵나이다만 소인은 나이를 많이 먹은 듯합니다.”
“너무 관직에 오래 머물렀던 것 같습니다.”
“이제는 후배들을 생각할 때이고 보다 젊은 사람들이 관직을 맡아하는 것이 도리요, 시대적인 흐름이며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소인은 언제 세상을 떠날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말년을 고향에서 보내고 싶어 하기에 송구하옵니다만 낙향해 고향에서 후학양성도 하면서 말년을 보내고자 관직에서 물러나고자 했을 뿐이옵니다.”
“전하! 송구하기 짝이 없습니다.”
“전하!”
“그러하오니 소인은 이만 관직에서 물러나고자 하옵나이다.”
“소인은 나이도 나이지만 관직에 오래 있었기에 이제 관직 생활에서 벗어나고자 하옵나이다.”
“소인은 이젠 기력이 다한 듯합니다.”
“심신이 허약해진 듯하옵니다.”
“송구하옵나이다. 전하!”
“미진하나마 자연 속에서 은거하면서 후학양성을 하면서 여생을 보내고자 하오니 소인의 뜻을 헤아려주시길 바라나이다. 전하!”
“소인은 너무 나이(67세)를 먹었나이다. 이제는 젊은 분들에게 충정을 대신하고자 하옵니다.”
“그러하오니 소인을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게 해주옵소서!”
“전하!”
“아무리 학식과 덕망을 쌓은 소인이라고 하지만 정차 나라의 미래를 봤을 때 젊은 세대들의 신선한 사고와 패기가 더 났고 소인은 거기에 미치지 못하옵나이다.”
“소인은 늙어 이젠 정신도 혼미해질 때입니다.”
“정신이 맑아야 전하를 극진히 모시면서 직책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다고 봅니다.”
“육신이 튼튼해야 나라에 열정적으로 충성을 다할 것이옵니다.”
“전하의 극진한 총애를 입고 기대하는 만큼 다하지 못할 소인이기에 소인은 늙어 더 이상 심려를 끼쳐드릴 수가 없다고 판단돼 이 자리에서 그만 물러나고자 하옵나이다.”
“송구하옵나이다. 전하!”
“통촉해주옵소서! 전하!”
하자 문종은
“직제학의 뜻이 참으로 깊소이다.”
“직제학의 인품다움이 다시 한 번 크게 느끼게 됩니다.”
“직제학은 정말 조선의 훌륭한 신하였습니다.”
“직제학이 정 그렇다니 아쉬움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큽니다.”
“직제학과의 이별은 슬픈 일입니다.”
“짐의 마음이 아프면 직제학의 마음도 아프리라 봅니다.”
“우리의 인연은 우연히 아니었습니다.”
“필연이었고 악연이 아니었습니다. 선연이었고 숙명이었지 않았는가 합니다.”
“이 이별이 영원한 헤어짐이 아닌 언제 필시 다시 만나는 일이 됐으면 합니다.”
문종 임금은 깊은 시름에 빠진 듯 하는 표정이 어두웠다. 왕의 눈물을 보일 정도로 총애를 했던 최덕지가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하겠다고 애원함에 곤룡포로 얼굴을 가렸다.
문종 임금은 마음을 추스르고 최덕지에게
“직제학 최덕지는 고개를 들으시오!”
“짐의 얼굴이 보이는지요!”
“어떻습니까? 밝은 표정으로 아니 보일 것입니다.”
“짐의 얼굴이 밝지 않은 건 그만큼 직제학 최덕지를 총애를 했다는 것입니다.”
“또 직제학의 인품과 성품과 학식을 높이 샀다는 것임을 짐의 얼굴에서 나타내 보인 것입니다.”
“직제학은 들으시오!”
“그토록 총애를 했던 직제학이 떠난다니 슬플 뿐이요!”
“시방 짐의 마음은 찹찹 하오이다.”
“서운함이 이루 말할 수 없소이다.”
“그렇소이다. 남은 인생을 고향에서 보내는 것도 중요하지요?
“직제학이 연로하기에 그런 생각이 많이 들것으로 판단됩니다. 이해가 갑니다.”
“직제학은 훌륭한 충신이었습니다.”
“본인에 충실했고 부모는 물론 나라와 백성을 위해 희생정신을 보여준 이 나라의 진정한 충신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직제학 최덕지는 역사에 길이 남을 인물로서의 평가받고도 남으리라 봅니다.”
“직제학 자신이 태어난 고향으로 다시 내려가 이곳에서 꽃과 열매를 맺었던 것처럼 고향에서도 그렇게 하겠다는 직제학의 깊은 뜻에 감동하오이다.”
하자 최덕지는
“전하! 황공하옵나이다.”
“전하의 하해와 같은 사랑과 높은 은덕을 소인 최덕지는 평생 잊지 않고 그 고마움을 깊이 새기면서 살아가겠습니다.”
문종은 최덕지에게
“직제학 최덕지는 들으시오!”
“직제학 최덕지는 자신의 본분을 충실히 한 사람이요.”
“훌륭한 학자였고 이 나라에 진정한 충신이었소!”
하며 최덕지에게 낙향하여 여생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도록 생활에 쓸 수 있는 돈과 비단.쌀.필기구와 말 두필을 챙겨주는 등의 하사품을 내렸다.
그는 관직에서 스스로 물러나는 모범을 보여주는 등의 명예롭게 사임을 하고 귀향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당시 풍습으로 볼 때 명예로운 직책을 사양하고 귀향하는 경유가 드물었다. 이에 대해 동료들은 그의 높은 덕과 행동을 칭송하였으며 다투어 시부(詩賦)를 지어주고 먼 길을 떠나 오가는데 드는 비용을 마련해주는 등의 노자(路資)를 마련하여 주었다.
최덕지는 그의 나이 67세 때인 문종 원년(1451년)에 불려와 학자양성과 학문연구의 경연(經筵, 왕과 유신이 경서와 사서를 강론하는 자리로 국왕이 유교적 교양을 쌓도록 하여 올바른 정치를 할 수 있도록 함)과 서연(書筵, 왕이 왕세자를 교육하는 것)을 담당하거나 외교문서도 적성도 하고 문필에 능해 사관(史官)의 일을 도맡아하는‘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에 일을 보다가 그 다음 겨울에 늙음으로 치사(致仕,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남)를 고하고 돌아갈 적에 여러 명망 있고 어진 경대부(卿大夫, 높은 관직에 있는 벼슬아치)들이 술을 싣고 강가에까지 와서 환송을 위한 흠모(欽慕)의 송시(誦詩)를 40여 편이나 지어 노래하였다. 최덕지가 관직에서 물러난 것은 두 번째로, 남원부사를 그만두고 영암 영보촌으로 낙향하여 존양루에서 후학을 양성하면서 은거하고 있는데 세종 때 스승으로서 세종의 맏아들인 문종을 가르쳤던 인연으로 문종이 즉위하자 그를 다시 찾았다. 하지만 그는 임명 받고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관직에서 물러나겠다고 스스로 자청하며 또 다시 영보촌으로 내려갔다.
성삼문은 5언 절구, 이개는 7언 절구, 하위지는 7언 절구 시부를 했고 또 류성원은 시(詩)를 지어 그를 칭송하였다.
성삼문은 전별의 시로『시종일관 의리를 온전히 하셨으니(終始能全義)/공과 같은 분은 나의 스승입니다(如公我所師).』라고 읊었다.
성삼문은 또『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은퇴가 아니라/물러갈 때는 이와 같이 함이다/옛날 한나라 임금은 소광을 생각하였고/당나라에서는 공규를 소중이 여겼네/강산에 응당 기쁨이 있어/고기니 새도 서로 알고 있으리/끝까지 의를 지켜왔으니/그대 같은 분이 나의 스승이 되리라』
하위지는『장부의 향방은 옛적부터 어려운데/선생의 괘관을 가까이 볼 뿐일세/옛날 소광은 물러 갈 줄을 알았고/그대는 낙천하고 천명을 알아/청한을 사랑하시였고/십년의 어조도 옛날같이 친한데/길거리의 이이들도 즐거운 그 모습 기다리네/이제부터 시골에서 만나도 부끄럽지 않는데/하물며 그 명예 만조에 가득 할 것을』
또한 이개는『진퇴는 종용하여 사정에 맞고/영리와 명예에 따름을 싫어 하셨도다/청안이 백발 되어 한가로운 신세 되니/집주위에 산이 푸르고 돌아가실 그 뜻 변의 치 못하는/선생의 높은 뜻 사람에게 흠모케 하네/한강위에 즐비한 백 잔의 술은/모두 선비들의 석별을 아끼는 마음일세』
또한 정인지는『혼탁한 세상에 퇴관함은 기이하지 않건만/맑은 이때 물러감을 뉘가 알리/푸른 산 푸른 물도 나를 속이는 듯한데/오늘날 그대를 보내는 시 쓰기 부끄러워라/호남은 바로 작은 강남 같은데/천리의 꾀꼬리의 꽃은 푸른 기운 속에 있네/ 다행이 내 고향과 멀지않은 곳에 있으니/기필코 다른 날 만나 술 마시며 같이 맑게 지내리』
또한 신숙주는 다서 수를 연거푸 지으면서 『세상에서 숨은 그윽한 정 만류하기 어려워/하루아침에 벼슬 버리고 귀거래를 부르셨네/사람들이 그 높은 뜻 작작한데/처음으로 남아의 장한 회포로 알리로다/숙덕과 높은 풍도 잠과 거가로 표시하고 맑은 규율은 다시금 고을의 모범이 되셨네/고급의 인물이 공의를 따를 곳에 계시면/난초 속에 싸이시어 한가로워 우리/금류와 같이 용퇴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나/홍진 속에 쌓여 골몰하는 사람이 부끄럽구려/일찍이 선인과 결별하여 놀았건만/지금은 졸몰 할지 유유한 생각뿐일세/날마다 같이 있었던 것을 다행으로 여겼는데/이제부터는 근심이 바다 끝에서 격했구나/서로 보내는 정자에 해가 기우는데/고향 같은 멀어 구름 속에 있구나/가실 길에 눈이 쌓여 서풍이 급한데/강가에서 또 한잔 다시 올리세』 또 급류에 용퇴한 사람이 얼마나 되던고/하다가부친을 회고하며 울컥하였다.
또한 유성원은『미인이 있는데 어찌 하오리까/해는 저물어 가고 서리와 눈이 내리네/산과 물이 중복되어 길은 멀고/ 흰 망아지는 가자고 하는데 맬 수 없구나』
또한 김종서는『돌아와 죽림에 누워 옛 칠현을 바라다가/다시 장차 술과 함께 온전한 천복을 얻으셨네/가을 물가에서 읊조리면 달은 길게 비치는데/봄 동산에 놀 때 꽃은 타오를 듯이 붉구나/한 쌍의 붉은 수레 빛이 끊이지 않고/몇 가지 단계의 그림자가 연했구나/어리석게 삼도몽을 좋아 아니하므로/남가일몽 그 녹이 이천임을 웃으리』
또한 양평대군도『내 아들이 집을 이어 높은 빛으로 바뀌니/노년에 삼락이 쌍전하구나/관에서 물러나와 도홍경에 내리지 않으시고/시를 질 때는 도리어 맹호연 같도다/하백당중의 잔치에 항상 편안하게 쉬고/연분홍 티클 속에 오래도록 머무르니/선생이 진즉 귀거래를 부르시니/보이지 않은 조주길이 팔 천리나 되구나』
또한 김담도『성군의 은혜 깊어 은퇴를 허락하는 날/친구들은 깊은 정으로 송별연을 열었도다/부름 받고 처음으로 오던 날/사퇴할 날 그때는 몰랐으리/은퇴해 나가는 일 이것이 세교가 되니/호남에서 다시금 신선이 되 오려라/강 머리에서 한잔 올리니 사양 마시오/내일이면 서로 생각에 잠겨 슬프리로다』
또한 윤자운은『부름 받고 새 임금 보일 때/지금도 생각하니 산속에 흰 구름 같도다/출처하는 것이 그때와 같은 사람 옛적부터 적으니/몇 사람이나 그대의 다 못 안다고하랴/그대에게 먼저 조전 보내 송별을 고하니/그 전별과 같이 외로운 마음 위로 하소서/오늘 아침에 또 퇴관하고 가시니/이별하는 마음유유하며 더욱 깊이 가노라』
박팽년은 『지금 선생의 귀향에 즈음하여 왜 이구동성으로 감탄하고 칭송하는가/인심을 감동시키는 중앙이 조정에 있지 않고 전리에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왜 인심이 조정을 떠나겠는가』 라고 송사를 읊어주며 그는 갈무리했다.
문종 원년(1451년) 겨울 환송식은 성대했다. 하연, 김종서, 정인지, 안지, 이선제 등이 직접 참석하였거나 전별시를 보냈다. 특히 하위지, 이개와 같은 젊은 학사들의 아쉬움이 매우 컸다.
동료들은 강가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송별의 시조를 읊으며 그동안 함께 일했던 시절을 돌아보면서 최덕지의 관직 떠남을 아쉬워했다. 기쁨의 눈물인지 슬픔의 눈물인지 하염없는 눈시울을 적시면서 시조를 너도나도 읊어 됐다.
경대부들은 송별의 시를 읊어주면서 술잔을 기우리며 나눈 연촌 최덕지 직제학에게
“직제학님께서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을 내려간다고 하니 이토록 허전할 수가 없소이다.”
“직제학님께서 늙어서 일을 그만 둔다고 하였지만 늙음은 곧 깊은 혼을 쏟았다는 뜻이요, 수없이 헌신을 해왔다는 표현으로 들립니다.”
“세상의 빛남은 늙음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늙음은 나이를 먹었다고 보다는 연륜과 경륜 그리고 덕망을 쌓았고 그만큼 쏟았다는 것이라고 봅니다.”
“직제학님은 도전하는 정신을 보여줬습니다.”
“실패가 두려워서 도전하지 않고 나이 묵음에 힘이 없음이 두려워 도전하지 않는다면 청춘을 잃어버린 것이 된다고 했는데 직제학님은 영원한 청춘(靑春)이었습니다.”
“나는 늙었거늘 하셨지만 관직의 그 자리는 오로지 한 결 같이 새롭습니다.”
“사람은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어쩜 늙은 것도 행복이라고 봅니다.”
“오늘이야말로 앞으로의 살날 중에 가장 젊은 날이고 가장 소중한 날이 아닌가합니다.”
“그야말로 농익어가는 삶이라 기쁘게 반기고 마음껏 사랑하며 해보고 싶은 것 하다가 떠나겠다는 생각으로 한바탕 신바람 나게 마지막을 장식하려는 직제학님의 생각이 아니신지요?”
“오늘은 비록 다리가 부실해 걷지를 못한다하더라도 우리는 즐겁게 살고 열심히 일하며 매사를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정열적으로 뛰다가 진리께서 내리신 저나 대제학님의 소명을 다하고 어느 날 홀연히 떠나간다면 그것이 해탈(解脫)이요 진정한 열반(涅槃)이 아니 시련지요?”
“젊어서 천신만고도 겪어 보았고 중년에 천만다행하게도 일원대도(一圓大道) 만나 우주의 진리가 무엇인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내가 갈 곳이 어디 인지를 어쩌면 잘 알 것 같은 삶을 이어왔습니다.”
“더욱이 정신수양, 사리연구, 작업취사의 심학을 닦아 어느 정도 삼대력(三大力)을 갖춘 것 같기도 합니다.”
“인생사 늙은 것도 자연스럽고 사라지는 것도 또한 지연의 이치요, 피고 지는 것도 자연의 순리입니다. 순리대로 살면 마음도 행복하고 세상만사가 순조롭다고 했습니다. 어린아이의 미소가 아름다운 건 그 마음에 동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해맑은 아침햇살이 반가운건 우리 안에 평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듣기 좋은 건 우리 안에 여유가 있기 때문이고 하루하루가 늘 감사한 건 겸손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연은 소중합니다.”
“악연도 인연이고 선연도 인연입니다.”
“선연(善緣)을 맺었으면 합니다. 오늘 마주친 인연들이 소중한 우리 안에 자리했으면 합니다.”
“존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의 삶에 늘 향기가 나는 것은 우리 안에 또한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청춘이란 것은 꼭 나이가 젊은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이가 들어도 청춘처럼 사는 것입니다.”
“사람은 늙어가는 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라 했잖아하지 않았습니까?
좋은 포도주처럼 세월이 가면서 익어가는 것이지요.“
“직제학님은 시간의 흐름을 통해 자신을 단련시키고 그 안에서 깊은 연륜과 성숙함을 꽃피웠다면 그것은 그것이 부러운 어떤 사람이 차지하고 싶어 부려보는 자존심과 오기 같은 것으로는 결코 넘볼 수 없는 묵직한 가치가 될 것입니다.”
“시간이 흐른 뒤에 숙성되고 익어져서 나와 사랑하는 이들에게 유익하게 됨을 믿고 담대해지시기를 바랍니다.”
“직제학님! 오늘은 송별을 위한 뜻 깊은 자리이며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모두가 직제학님을 위한 송시 한 편씩을 읊어주고 있습니다.”
“기쁜 일입니다.”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보다 더 의미 있는 시간이 어디 있겠습니까?”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값진 추억의 시간입니다.”
“우리 경대부들은 직제학님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아마 머물었던 그 빈자리가 크게 느껴질 것입니다.”
“직제학님의 모습이 그 자리를 있는 듯 늘 생각이 날 것입니다.”
“직제학님이 더욱 그리워질 것입니다.”
“궁궐 못지않은 고향산천도 소중합니다. 찾아 볼 곳입니다. 언젠가는 돌아갈 곳이옵니다.”
“모든 관직을 마치고 고향으로 가는 길, 전별을 하려하니 눈물이 앞섭니다. 서운 섭섭할 뿐이옵니다.”
“따스한 바람은 남쪽에서 불어줍니다.”
“고향에 내려가 머물면서 남풍을 이곳까지 미치게 하여주셨으면 합니다.”
“남풍을 느끼기를 직제학님의 온기라고 생각하렵니다.”
“직제학님이 오랜 관직에서 머문 일은 나라와 백성을 영화롭게 했습니다.”
“동료들에게 본보기로서의 큰 귀감이 되어줬습니다.”
“직제학님은 영원히 우리의 가슴에 남을 것입니다.”
“직제학님의 몸은 떠났어도 그 정신은 늘 우리와 같이 할 것이옵니다.”
“한 잔의 술과 한 줄의 시는 직제학을 존경한다는 의미요 그 모든 것들에 대한 따름이요 기쁨의 찬 축배의 읊음이었다.”
때는 바야흐로 문종은 병이 이미 깊고 세자(단종)는 어리며 수양대군이 은근히 위세를 드러내던 참이이었다. 최덕지가 임명 받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연로함을 핑계되며 스스로 관직을 그만 두고 낙향을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노령기(老齡期)를 누리고 값지게 보낼 것인지를 통찰했었다.
그는 사람은 물질인 육신과 정신의 마음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이 육신을 나로 알고 그 육신에 병이 나거나 늙어가는 것을 보면 만사가 저조해지고 우울해진다. 그러나 정작 이 육신을 움직이고 지배하는 것은‘마음’이라고 전제했다.
최덕지는 늙음은 익어가는 것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공(空)이 무(無)가 아니고 상호의존관계의 바탕이라는 점을 깨달으며 공과 생사의 문제를 그는 나름대로 고찰했다.
최덕지는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관직에서 머물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어느 날 갑자기 훌륭한 관직을 가감하게 버렸다. 그는 우아하게 나이 들기의 방법으로‘건강 유지하기, 욕심을 줄이고 만족함을 알기, 늙음은 인생의 보람, 마음 가꾸기, 숙면하기, 죽음을 이해하고 대비하기’등에 대해 고령자들에게 실질적 도움이 될 조언을 아끼지 않았으며 몸소 실천해 보여줬다.
최덕지의 낙향, 그는 선택 아닌‘필수’였다. 그는 나이 60대 들었을 때 고령의 나이임을 알고 있었기에 생(生)과 사(死)를 깨달았기에 고향으로 가서 남은 생을 보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관직도 중요하고 명예도 중요하지만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인생 말년에‘고향에서 기거(寄居)’하며 지내는 것도 인생을 멋지게 사는 방법 중에 하나다 라는 것을 그는 깨달고 있었기에 더 늦기 전에 관직을 버리고 은거(隱居)를 자청했다.
좌천(左遷)이 아닌‘자천(自薦)’이다. 선택이 아닌 '필수' 다.
그는 고향에 가서 관직에서 멋진 삶을 보냈듯이 고향에서도 멋진 삶을 보여주겠다는 생각을 하며 인생드라마를 쓰기를 어느 한쪽만을 고집하려고 하지 않았다. 태어나고 자랄 때는 고향에서 어쩔 수 없이 지냈지만 공부를 하기 위해 출세를 하기 위해 집을 떠났고 타향에서 관직 생활을 하고 보내야했던 것에서 여생(餘生)은 다시 고향을 찾아서 보내야겠다고 그는 시나리오를 여러 관점에서 썼다.
금의환향(錦衣還鄕)이 인생 마지막 장식으로 그는 하고 싶었다. 최덕지는 남은 생을 고향에서 펼쳐야겠다는 마음으로 낙향을 했다. 모든 경륜으로부터 얻어 피어난 꽃, 그 열매는 고향에서 열리게 하겠다는 생각을 깊이 했다.
최덕지는 어쩜 그가 얼마 후이면 자신도 열반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관직에서 머물다가 세상을 떠난 것보다 고향에서의 눈을 감은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해왔던 그였기에 문종 즉위 중요 관직을 맡았지만 본인의 최종 정착지를 우선 생각했었다. 최덕지의 고향은 전주이다. 그는 고향 전주로 가지 않고 처가의 고향인 영암 영보촌으로 갔다.
낙향을 고집하는 최덕지를 두고 역사가들은 아마 직제학 최덕지가 문종이 간청을 하면서까지 관직을 맡아 보필해주기를 바랐는데도 관직에 물러나겠다고 한 것은 왕좌자리다툼이 일어날 것을 미리 감지하고 정치에 전혀 관여하거나 편에서지 않았던 그이기에 문종 사후 한바탕 태풍이 불 것이라는 것을 예측을 한 그가 계속 있기가 불편하였기에 화를 면하고자 물러날 생각을 했으며 나중에 일어난 수양대군의 피비린내 나는 왕위 찬탈, 왕자의 난에서 목숨을 면할 수 있었다고 봤다. 만약 그가 문종 곁에서 계속 함께했더라면 그도 이런저런 사유를 돼 처형당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역사학자들은 판단하고 있다.
조선 5대 임금인 문종은 조선 4대 왕인 세종의 맏아들로 태어나 약 30년간 세자로 세종을 보필했다. 조선 5대 임금으로 오른 문종은 사망하고 문종의 맏아들인 단종이 즉위하지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의를 뺏기고 상왕이 되어 이후 단종 복위운동을 하던 성삼문 등이 처형되고 단종은 서인으로 강등되어 결국 유배생활에서 사망하고 만다.
수양대군은 문종이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재상들이 국정을 좌지우지하게 돼 그는 신하가 감히 왕권을 능멸하려든다며 한명회와 공모하여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살생부에 적힌 김종서, 황보인 등 궁중 원로대신들을 죽였다. 영의정이 된 수양대군은 안평대군마저 죽인다. 단종은 나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는다며 왕의 자리를 사양하는 등 양위(讓位)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성삼문과 박팽년 등이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밀고로 발각되어 고문 후 능지처참(陵遲處斬) 당했다. 단종도 1457년 6월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에 유배되고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매일같이 관풍매죽루에 올라 시를 지어 울적한 회포를 달랬다. 이해 9월 경상도 순흥에 유배되었던 노산군의 숙부인 금성대군이 다시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돼 이에 다시 노산군에서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었다가 10월 마침내 사약을 받아 죽음을 당했다.
만약 연촌 최덕지가 성삼문, 김종서, 황보인 등의 다른 대신처럼 궁궐에 머물렀다면 한통속이라고 보고 공모 죄로 몰아 그들처럼 처형을 당했을 것이다.
그는 처가의 고향인 영암 영보촌에서 여생을 보내고자 낙향했으나 5년간 살다가 그만 그의 나이 72세에 세상을 떠났다. 문종이 영정 1본과 유지 초본을 하사하였다. 이후 후손들이 최덕지를 기리고자 영당을 세워 영정을 모셨다. 후손들은 사당(祠堂)을 세워 제사(祭祀)하고 있을 존(存), 기를 양(養), 사당 사(祠)‘존양사(存養祠)’라 이름 하였다. 존양이란 호는 이때 얻은 것이다. 최덕지의 기름이 항상 존재한다는 뜻에서 그를 모신 것이다.
존양루는 조선 문종 때 예문관직제학을 지낸 연촌 최덕지가 남원부사를 그만두고 낙향하여 은거하면서 건립하여 단종 사화 시 절개를 지켜 사육신으로 유명한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어귀, 정인지, 신숙주, 서거정, 김감, 김종서 등 당대의 유명한 학자들이 최덕지 선생에게 후진양성에 전력하였던 역사가 있는 유서 깊은 곳으로 존양루의 현판은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친필이다.
존양루를 짓고 연촌으로 부르던 호를 존양이라 부르며 고향에서 후학을 양성하게 돼 16세기에 화려하게 꽃피우던 호남의 유학은 이미 15세기의 최덕지에서 그 뿌리가 심어졌음을 알게 됐다. 뒷날 전라 감사로 영보촌을 방문했던 저헌 이석형(李石亨)은 제최직제학존양정(題崔直提學養亭)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내 마음 보존하여 나의 성품 기르도다/세상의 명예 구하지 않고 천명을 즐기노라』 라고 최덕지의 존심양성(存心養性)이라는 성리학 공부와 학문의 깊이를 한없이 찬양했다.
연촌 최덕지는 남원군수를 그만두고 그의 처의 고향인 영암 영보촌으로 낙향하여 당호를 존양이라고 하고 학문을 연구했다. 이때 시조 한 수가 전한다.
최덕지 영정(影幀)은 처음에는 존양루에 있었다. 1578년(선조 11)에 후손들이 사당을 세워 영정을 모셨는데 안타깝게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불타서 선산이 있는 나주 가적동(나주시 세지면 성산리)에 묻었다. 1610년(광해군 2)에 후손이 영정을 봉안(奉安)하였고 1636년(인조 14)에 영보촌 종가로 옮겼으며 1713년에는 강수향의 영정과 함께 녹동서원 영당(靈堂)에 봉안하였다. 녹동서원은 전남 영암군 영암읍 교동리에 있으며 1630년(인조 8)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최덕지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존양사(存養祠)를 창건하고 위해를 모셨다.
존양당은 현손인 최연창씨 댁에 위치한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당시 누각은 훼손되고 사라졌고 이후 1633년 7대 후손 엽정 최정이 중수했다. 그후 최근 1971년에 중수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1칸 반으로 우측 두 칸은 대청마루에 좌측 2칸은 내실로 골기와 팔작지붕이다. 이곳에는 최덕지와 관직에 있을 때 지냈던 인물들이 그가 낙향함을 아쉬워 많은 아쉬움의 시를 건넨다. 조선의 충신으로 사육신이었던 취금헌, 박팽년, 유성원, 매죽헌, 성삼문, 백옥헌, 이개 등의 시문이 남아 있고 현판과 다수의 편액문이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의 친필이라고 전하고 있어 순덕고절(淳德高節)한 정학지사(正學之士)로서 조야(朝野)의 선비들로부터 추앙받았다.
1716년(숙종 42) 존양루의 옛터에 연촌영당(烟村靈堂)이 건립되었다. 현재 건물은 1932년에 보수된 것이다. 연촌 영당은 녹동서원 관련 문서를 보관한 함경제(含敬堂) 뒤인 옛 존양루 터에 건립되었다.
연촌 영당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연촌 최덕지의 영정 1본과 초본을 모셔놓은 곳으로 연촌 영당 내부에는 최덕지 영정의 모사품이 있고 진영과 유지 초본이 양쪽에 봉안되어 있다.
연촌유사(烟村有史)에 의하면 최덕지 초상은 본래 3본이 있었는데 그중 1본은 옛 종양루 영당에 봉안했으며 나머지는 녹동서원과 주암사에 각각 봉안했다고 한다.
최덕지 초상 원본은 비단 바탕에 채색되었으며 크기는 가로 53Cm, 세로 74Cm이다. 영정은 책이 놓인 탁자에 앉아 있는 모습인데 얼굴은 오른쪽을 향하고 몸체는 정면으로 돌려져있다. 앉은 자세는 편안하며 눈초리, 손, 옷 주름의 처리 등이 세밀하게 표현되었다. 또 모자는 고려 말 조선 초의 발립을 쓰고 있다. 안색은 전반적으로 갈색계의 색조를 띠고 있는데 눈썹은 담묵하게 칠하고 그 위에 털을 한 올 한 올 방향이 밑으로 숙여지게 하여 눈썹의 특징이 살아 있으며 눈매는 작지만 생기가 차있다.
또한 유지초본(105CmX150Cm)은 안면이하 흉부까지의 모습이 남아 있는 타 유지본과 달라 원본과 같은 크기이며 최덕지의 초상화는 조선 최고의‘사대부 초상화(肖像畵)’이고 함께 봉안된 유지(투명종이)에 그린 초본(90Cmx120Cm)은 초상화의 초안 과정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영정과 유지초본은 사액(賜額)과 함께 문종이 직접 하사하였다. 최덕지 영정은 1975년 5월 16일‘보물 제595호’로 지정되었다.
최덕지는 세종 때 배출된 많은 학자 중 한 사람으로 정치적 격동에 휘말려들지 않는 오로지 문신과 학자로서 명예로운 삶을 마쳤던 분으로 평가가 높고 기억되고 있다.
전주의 서산사(西山祠), 남원의 주암서원(舟巖書院), 영암의 녹동서원(鹿洞書院) 등에 제향(祭香)하였다. 시호는 글을 공경하는 뜻의‘문숙(文肅)’이다.
전남 영암 덕진면 영보마을로 낙향한 최덕지는 남원부사로 있다가 낙향하여 은거하며 존양루를 짓고 학문에 전념하다가 그가 가르쳤던 세종의 맏아들인 문종이 즉위하자 1450년에 다시 왕의 부름을 받아 에문관 직제학에 제수되었으나 이듬해에 연로함을 이유로 사직서를 제출, 물러나 향리로 돌아와 영보 뒷산 오봉산 형제봉 아래에 터를 잡고 후학을 양성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마을 앞 언덕배기에 누각인 영보정(永保亭)이라는 정자가 이 마을에는 훌륭한 인물이 머물렀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으며 이 지역이 영암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또한 영보정이 보물로 지정될 정도로 영암에 있는 정자 중에서도 가장 문화적 가치로써의 의미가 담겨있다. 영보정은 월출산 등 주변의 자연 경치를 감상하고 지낼 만큼 풍류를 즐길 장소로 으뜸이다.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영보리 296번지에 있는 영보정은 조선전기 문신 최덕지와 최덕지의 사위이자 신희남의 증조부로 의례를 관장하는 정3품 좌통례를 역임하고 낙향한 신후경이 유림(儒林)의 향약소(鄕約所)로 건립한 누정(樓亭)이다. 연촌 최덕지가 관직을 떠난 후 영암의 영보촌에 내려가 학문연구에 몰두하면서 사위 신후경(慎後慶)과 함께 지은 정자이다. 15세기 중반에 창건되었으나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당시의 규모도 명확하지 않다. 처음 있던 정자는 황폐되어서 1605년(선조 38) 생원괴 진사에 합격하여 참봉에 이르렀지만 벼슬에 나가지 않고 고향에 돌아와 시(詩)와 주(酒)로 자위(自慰)하며 지낸 7대 후손인 최정(崔정)과 홍문과부제학.대사간.이조참의를 지낸 신천익(慎天翊, 1592~1661)이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지었다.
영보정으로 가는 입구에 들어서면 넓은 뜰이 잘 정리되어 있으며 전면에 영보정이 있다. 정자는 대지 1.320m2(400평)에 1.32m2(40평)의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되어있다. 네 귀에는 활주(刹柱, 추녀 뿌리를 받치는 기둥)를 세웠다. 영보정에서 해마다 5월 5일에 풍향찰(豊鄕察) 또는 풍향제(豊鄕祭)를 지내는 등의 마을 축제가 이곳에서 열리고 있다. 시.도기념물의 지방문화재로 되어있던 영보정은 2019년 12월 30일 보물 제2054호로 지정됐다. 영보정은 전주최씨와 거창신씨 종중이 관리하고 있다.
조선 초기의 명신 최덕지(崔德之)와 신후경(慎後庚)이 관직을 떠난 뒤 유림(儒林)의 향약소(鄕約所)로 건립한‘영보정(永保亭)’이라는 편액은 석봉(石峰) 한호(韓濩)가 글씨를 썼다. 한석봉에 대한 떡 썰기 이야기가 나온데 그 무대는 영암 서호 아천(아천포)이다. 한석봉은 훌륭한 인물이 되기 위해 어머니와 함께 송악에서 영암으로 내려와 녹동서원에서 공부를 하였으며 그의 어머니는 떡을 팔아 생계를 이어갔고 한석봉이 글을 다 배웠다고 하여 얼마나 잘 배웠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불을 끄고 어머니는 떡을 썰고 한석봉은 글씨를 쓰는 등으로 누가 잘 하는지를 시험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영보정은 일제강점기 때 청소년들에게‘항일구국정신(抗日救國情神)을 교육한 장소로 삼는 등의 역사적 의미가 크다. 일제강점기인 1921년에는 이곳에 영보학원(1921년)을 설립하여 청소년들에게 항일구국정신을 배양시켰다. 영암지역 청년들의 항일투쟁활동으로 꼽히는 1931년의’형제봉만세운동‘도 영보학원을 중심으로 졸업생과 청년회원들의 주축이 되어 일어난 것이다. 지금도 해마다 음력 5월 5일 단옷날에 이곳에서 마을축제’풍향제(豊鄕祭)‘가 열린다. 풍향제는 한국방송공사(KBS)가 선정한 전국 100대 예술제행사이기도 하다.
최덕지는 학식이 높고 행동이 단정하여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는 많은 저서를 남겼다. 아쉽게도 남긴 저서들은 불타버려서 한 권만 남아 있다. 다만 그에 대한 현인들의 논설만 전하고 있을 뿐이다.
영보정의 영보(永保)는 '영원히 지키다 또는 영원히 보전하다' 라는 뜻이다. 영보의 영(永)과 보(保)의 갑골문을 살펴보면 영(永)은 영의 갑골문이 사람과 그 앞에 있는 길로 그러낸 것이다. 사람이 앞으로 가야할 길이 인생에서 가장 길이기 때문에 그것으로써 세상에서 가장 길다를 표현했다. 길다는 사람이 길을 향하고 그 팔이 길을 가리키고 있는 것은 길을 강조함으로써 이와 동음이어인 긻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길다를 들어서다(어떤 상태나 시기가 시작되다)를 표현한 사람의 모습과 더불어 긻이 들어서다, 즉 긴 상태나 시기가 시작되다로 풀이하여 길다를 표현 한 것이다. 길 영(永)의 갑골문이 자향 자체가 우리말의 길다를 표현한 것이므로 길 영(永)은 영원(永遠), 영생(永生), 영영(永永), 영겁(永劫)과 같은 아주 긴 시간을 요하는 말에 자주 쓰인다.
보(保)의 갑골문은 '팔이나 엉덩이, 고개를 들고 서 있는 사람 뒤에 아이가 서 있는 모습' 으로 그러낸 것이다. 동음이의어 애(맨 처음), 뒤(온통 전부 다) 다의어 서다(체면, 권위, 위신, 명분, 면목 따위가 바로 유지되다), 들어서다(어떤 상태나 시기가 시작되다)의 뜻으로써 맨 처음이 온통 바로 유지되는 상태가 시작되다가 지키다 또는 보전하다의 뜻이라고 말로 풀어서 표현한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이 자형을 지키다(보호하다)의 뜻을 표현한 문자로 활용한 것이다. 지킬 보(保)의 갑골문에서 서 있는 사람의 뒤는 비구름이 하늘을 뒤텊다(빈 데가 없이 온통 덮다) 등에서 쓰이는 뒤(온통 전부 다)의 뜻처럼 온통, 전부 다의 뜻으로 표현한 것이다.
우리말의 지키다(조선고어 딕희다)에는5가지의 뜻이있다. 예를 들어 나라를 지키다. 집을 지키다. 등에서의 지키다(재산, 이익, 안전 따위를 잃거나 침해당하지 아니하도록 보호하거나 감시하여 막다)는 보호하다의 의미이고 명예를 지키다. 문화유산을 지키다, 건강을 지키다 등에서의 지키다(어떠한 상태나 태도 따위를 그대로 계속 유지하다)는 보전하다의 의미이다. 이 중에서 첫 번째 듯 지키다(보호하다)를 문자로 시각화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상나라 학자들은 5번째 뜻의 지키다(보전하다), 즉 그대로 계속 유지하다로 자형을 표현하고 이 자형을 지키다 또는 보호하다의 뜻을 표현하는 문자로 활용하였다.
영보의 영(永)은 연촌 최덕지(崔德之)를 의미하고 있다. 보(保)는 신후경(慎後慶)을 말한다. 최덕지의 덕(後)의 갑골문을 보면 서거라를 뜻하는 거리 행(行)과 그 가운데에 눈과 수직막대를 상형한 곧을 직(直)이 들어가 있다. 눈을 상형한 글자가 눈 목(目)자가 되고 수직막대는 측량막대로서 도로가 직선으로 바르게 놓여졌는지를 살피는 도구다. 사거리에서 앞을 '똑바로 보는 모습' 을 상형한 글자가 바로 '덕(德)' 이다. 사거리를 세상을 살아가는 길이라고 본다면 '인생 길을 바르게 살아가라' 는 함이 덕(德)자를 만든 고대인들의 숨은 뜻이다.
덕자는 은덕이나 선행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로써 '사람의 행실이 바르다' 라는 뜻을 위해 만든 것이다. 길을 뜻하는 彳자가 있으니 덕자는 곧은 마음으로 길을 걷는 사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여기서의 길이란 우리의 삶이나 인생을 비유한 것이다. 덕자는 곧 곧은 마음가짐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덕은 크다, 배풀다. 고맙게 생각하다, 은덕, 복, 선행을 의미한다. 덕이란 정의를 구하고 악을 구하지 않으며 억지로 취하지 않으며 부끄러움이 있는 군자의 도를 지킨다. 그 지킴은 진실에 입각한 곧은 길, 곧은 마음, 곧은 눈의 얼굴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 않고 앞을 똑바로 보는 변하지 않는'영원함(永)' 이다.
신후경(慎後慶)의 후는 갑골문이 '뒤지다(걸음이 뒤떨어지다), 뒤떨어지다(뒤에 처지다)' 의 뜻을 갖고 있다. 이곳은 자형이 그려내고 있는 것을 뒷머리(으뜸이 되는 사람, 조선고어 웃머리), 들다(가거나 오다) 또는 들다(어떤 처지에 놓이다), 아래(조선고어 뒤, 나중)의 뜻으로 해석한 경우이다. 즉 으뜸이 되는 사람이 나중으로 가거나 오다의 뜻으로 활용하면 뒤지다(걸음이 뒤떨어지다)가 되고 으뜸인 사람이 나중인 처지에 놓이다의 뜻으로 활용하면 뒤떨어지자(뒤에 처지다)가 된다.
후는 '으뜸이 되는 사람이 반대로 있는 쪽' 을 설명한 것이거나 '머리 위쪽에 난 머리털이 있는 뒤쪽' 또는 '머리 위쪽에 난 머리털이 반대로 있는 쪽' 을 말로 풀어서 설명하고 이것을 뒤(향하고 있는 방향과 반대되는 쪽이나 곳)의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으뜸이 되는 사람이 있는 뒤쪽, 즉 '으뜸이 되는 사람이 뒤를 지켜주는 또는 보호해주는 의미' 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신후경의 후(後)는 '지키다. 보호하다' 라는 뜻으로써 영보의 보(保)는 '신후경(慎後慶)' 을 말한다.
영보정을 세운 최덕지와 사위인 신후경은 전주최씨, 거창최씨의 영보촌에 있어서 두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최덕지는'영원함(永)' 을 갈구하였고 신후경은 그 사상철학과 문화를 '지켜(保)' 가려고 했다.
최덕지는 고향 전주를 마다하고 처가의 고향인 영암 영보촌으로 내려가 거주한 것은 전주는 도시화 된 곳이기에 좀 더 한적하고 조용한 곳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어 했다.
그는 처가의 고향에는 산세가 빼어난 월출산이 있기에 영암이 마음에 들었다. 월출산이 잘 보이는 곳에 처(妻)가 태어났기에 최덕지는 영암이 아름다운 고장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관직 생활을 하면서부터 이미 낙향(落鄕)을 영암 영보촌으로 굳혀났다. 그는 나이를 많이 먹은 관계로 공기가 나쁘고 소음이 심한 복잡한 곳보다는 자연의 소리가 들리고 공기가 깨끗한데다가 경치가 좋은 곳에서 살아봐야겠다는 생각을 관직에 있으면서 해왔었다. 마치 안사람이 그런 곳에서 태어났기에 안사람한테 심정을 이야기하고 상의를 하며 낙향 지를 영암 영보촌으로 선택, 조용한 곳에서 은거하다시피 여생을 보내고자 했다.
최덕지는 안사람에게
“여보! 고향을 떠난 지가 몇 수년인지요?”
“너무 오래 된 것 같소이다.”
“많은 세월이 흘렀소!”
“당신과 함께 내 나이 20대에 김제부사 부임을 받아 지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젠 70세를 앞두고 있으니 어언 50년이 다된 세월이 되었구려!”
“저를 만나 김제로 갔다가 남원으로 갔다가 한양까지 가서 함께 동가식서가숙하듯이 말없이 묵묵히 함께 지내온 당신이 참으로 고맙기 짝이 없소! 감사하구려!”
“당신의 내조가 없었다면 과연 내가 오랜 관직에서 머물 수 있었을까 싶소!”
“당신이 없었다면 진즉 관직에서 물러나 진정 동가식서가숙했을지도 모르요?”
“다행히 당신의 변함없는 지극 정성스러운 내조가 있었기에 오늘의 제가 있고 명예롭게 관직에서 물러나게 됐고 영화를 누렸던 것 같소!”
“난 여복이 많은 것 같소!”
“이 모든 덕택은 당신한테 있소이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같을 건지 모르겠소!”
“당신도 고향을 떠난 지가 오래돼 태어난 고향이 무지 그립지 않을까하오!”
“그래서 당신에게 보답하고자 난 당신의 고향으로 내려가 여생을 보네고 싶소이다.”
“그렇게 해야 그동안 당신한테 신세진 것을 갚은 일이라고 생각을 해봅니다.”
“임자! 당신을 위한 생각이니 그렇게 해 주련지요?”
하자 안사람은
“여보! 당신의 생각인데 내 어찌 반대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당신의 뜻이라면 전 찬성이고 대 환영입니다.”
하자 최덕지는
“여보! 당신은 정말 마음이 깊고 기품 있는 사람이요?”
“남편의 말을 거절하지 않고 다 잘 들어준 당신이 참으로 고맙고 위인이 구려?”
“이젠 진정 당신의 고향으로 가서 여생을 보낼 수 있어 마냥 기쁠 수 없소!”
“어서 달려가고 싶은 심정이요?”
최덕지는 경치가 아름답고 아늑한 영암 영보촌에서 여생을 보낼 수 있다는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가슴이 설레었고 마음 같아서는 당장 뛰어 내려가고 싶었다. 그러자 안사람은
“여보! 잠을 청하세요!”
“무슨 생각에 잠을 설치시는지요?”
“이제는 당신이 원했던 영보촌으로 가서 살게 됐으니 마음 편하게 주무세요?”
하자 최덕지는
“알겠습니다.”
“당신의 고향 영보촌으로 간다고 생각하니 잠이 안 오는구려!”
“제가 너무 설렘을 하는 것 같소!”
하며 엎치락뒤치락하다가 잠을 이루었다.
다음 날 아침 최덕지는
“제가 당신을 위해 영암을 고집한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영암 월출산이 좋아서 또 당신이 태어난 곳이 맘에 들어서 가고자한 것이요?”
하자 안사람은
“여보! 당신이 말한 대로 영암은 아름다운 고장입니다. 공기 좋고 물 맑은 곳이며 살기 좋은 곳입니다. 특히 나이 들어 여생을 보내기에는 아주 알맞은 곳입니다.”
“특히 영보촌은 뒤에는 아담한 산이 있고 마을 앞에는 넓은 옥토들이 있어 좋고 마을 저 편에는 수려한 월출산이 보여 지상낙원(地上樂園)이 따로 없을 것입니다.”
“여보! 잘 생각했습니다.”
“당신한테는 여생을 보내면서 후학을 가르치기에는 안성맞춤일 것입니다.”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저를 생각해 내 고향 영암으로 가서 살겠다니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
최덕지는 안사람과 문종 임금님이 하사해준 말을 타고 영암으로 향했다.
처가의 고향으로 낙향한 최덕지는 영암 영보촌(영보리)에 내려와 정착하면서 후손을 번창시켰다. 자식들과 이곳에서 살면서 손을 이어갔다. 최덕지는 67세에 영보촌에 다시 내려왔다. 그는 나이가 많이 들어 큰 거동을 할 수는 없었다. 마을을 위주로만 활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처가가 있는 근처에 집을 짓고서 마을 앞에 작은 정자를 세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금의 영보정보다 허술한 아담한 정자를 세웠다. 그리고서 정자에 나가 풍류를 즐겼다. 인생 마지막 여생을 이곳에서 지내며 보냈다. 그러던 그가 5년 뒤 사망을 했다. 향년 72세이다.
처의 고향인 영암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었던 최덕지는 꿈은 이루었지만 안타깝게도 이곳에서 오래도록 지내지 못하고 그만 짧은 세월로 이곳마저 떠나고 말았다.
최덕지는 영암 영보촌에 내려오면서 안사람에게
“여보! 드디어 우리가 소원했던 영보촌에 왔구려!”
“와서 보니 이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소!”
“그동안 내 가슴이 무척 답답하고 마음이 복잡하고 정신이 맑지 못하고 몸은 무거웠는데 여기에 오니 그런 일들이 싹 가신듯합니다.”
“여보! 다시 한 번 당신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소!”
“한양에서 천리 길 영암까지 왔으니 이제는 못 누린 여유도 찾고 풍류도 즐기면서 보내고 싶구려!”
“여보! 그동안 갈고 닦은 학문 지식을 후학을 위해 쏟을 생각이요!”
“더 연구하여 훌륭한 인재를 키울 것입니다.”
“당신도 이제는 모든 시름 다 내려놓고 편안하게 지내시구려!”
“당신은 나의 영원한 벗이요, 인생 반려자입니다.”
“우리 인생 종착지는 바로 이곳이오니 멋진 인생의 꽃과 열매를 보여줍시다."
후선들에게 좋은 뿌리가 되도록 합시다.“
라고 최덕지는 안사람에게 말했다.
최덕지는 마을 사람과 친화력을 보여줬다. 최덕지가 영보촌으로 낙향한다는 소식을 들은 마을사람들은 무척 반가워했다. 최덕지가 영보촌으로 오자 마을사람은 환영하며 낙향을 위한 잔치를 벌어줬다.
대 환영을 받은 최덕지는
“그래 난 영보촌에서 뿌리를 내리겠다.”
“나의 뿌리가 싹을 틔우고 하여 꽃이 피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겠다.”
“대대손손 자자손손, 대를 이어 자손번창이 되도록 뿌리를 튼튼하게 할 것이다.”
라며 최덕지는 자손번창, 입신양명을 가슴 깊이 새기면서 입향조로 하여 영보촌에 제2의 인생, 고향으로 삼고 터를 잡았다.
최덕지는
마을사람(유림)들한테 후학을 양성 및 풍류를 즐길 영보정을 세우겠다고 건의했다. 이 말을 들은 마을사람들은 적극 찬성했다. 특히 유림에서 적극 나서겠다며 후원했다.
영보정을 짓기 위해 터를 모색했다. 이곳이 좋은지 저곳이 나은지를 검토하고 또 검토했다. 영보촌에 정자를 세울 생각을 많이 했던 최덕지는 어느 날 꿈에 한 스님이 나타냐 마을 앞 언덕배기에 서서 목탁을 두드리며 한 참 서 있으면서 지팡이를 찍고서 사라진 꿈을 꾸었다.
최덕지는 꿈을 꾸다 그만 잠에서 깨어나 꾸었던 꿈을 곰곰이 생각해봤다. 간밤에 꾼 꿈이 무슨 의미일까? 생각하고 생각해봤다.
최덕지는
“간밤에 꾼 꿈이 무슨 의미일까?”
“왜 스님이 마을 입구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지팡이를 찍고 사라졌을까?”
“알 수가 없도다. 알 수가 없어!”
“무슨 뜻일까?”
“왜! 스님이 거기에서 그랬을까?”
최덕지는 해몽에 하루 종일 시간을 보냈다.
무슨 꿈일까, 무슨 꿈일까 하다가
무릎을 쳤다.
“맞다. 정자를 짓고자해 터를 어디가 좋을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스님이 답을 내린 거다.”
“옳지, 맞다 맞아 스님이 내 고민을 들어 준거야!”
하며 최덕지는 마을사람들한테 꿈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정자 터를 스님이 말해줬던 곳으로 가서
“마을사람들!”
“들어보십시오! 우리가 세우고자한 정자는 이곳입니다.”
“스님이 이 장소에서 한참동안 목탁을 치고 했던 곳입니다. 지팡이를 찍었던 곳이옵니다.”
하자 마을사람들은
“아! 그래요!”
“신기하기도 합니다.”
“꿈에 스님이 나타나 정자 터를 정해주고 가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마을사람들은 정자 터를 보니 정말 주변의 경치가 한 폭의 그림처럼 한눈에 들어온 자리였다. 명지였다. 마을사람들은 이렇게 졸은 명지가 있었다니 참 스님도 고마워라 했다.
최덕지는
의례를 관장한 정3품 좌통례를 지내며 낙향해 살고 있는 사위인 신후경을 불렀다.
최덕지는 사위에게 꿈 이야기를 들려주고
“최 사위!”
“내가 영보촌에 정자를 세우려고 하네”
“최 사위가 정자를 짓는데 맡아 나서주길 바라네!”
“최 사위가 알다시피 난 나이가 들어서 힘이 없네!”
“그러니 최 사위가 내 대신 적극 나서서 이 일이 잘 되도록 해 주게나!”
“최 사위를 믿고 난 조언만 하겠네!”
“최 사위가 총감독하고 지휘해주길 바라네!”
“이젠 정자를 세울 장소도 잡았고 하니!”
“어서 서두리 게”
“건물을 지을 재료와 인력을 동원하길 바라네!”
“공사 날짜는 손 없는 날을 택해 바로 들어가도록 하게!”
하자 신후경은
“네! 장인어르신”
“분부대로 차질 없이 이행하겠습니다.”
하며 장인어른 최덕지를 안심시켰다.
정자 건립에 총감독을 맡은 신후경은 마을사람들을 모아 정자 건립에 대한 설계도를 보여주며 건물을 지을 인력에 참여를 해달라고 독려했다. 신후경은 또 건물을 지을 목수에게도 나무와 가와 돌 등을 어떻게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작업은 생각대로 순조롭게 진행됐다.
정자가 완성되자 최덕지는 기쁨의 눈물을 흘렀다. 또한 마을사람들도 보고 감탄했다.
정자에 마을사람들이 다 나와 잔치를 벌었다. 이미 한차례 상량식에서 잔치를 하기도 했지만 완성 후의 잔치는 신도 부러워할 만큼 건하게 차려 농악놀이를 하는 등 모두가 덩실덩실 춤을 추며 정자 건립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최덕지는 모든 마을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마을사람들이 정자를 지어놓은 것을 보고 다들 기뻐하시니 저 또한 기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이 모두가 마을사람들이 협조해준 덕분입니다.”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이 정자는 우리의 자산입니다. 자랑으로 여길 정자입니다.”
“정자를 짓는 것은 마을사람들이 휴식을 취하게 하고자했으며 이곳에서 모여 회의도 하고 풍류를 즐기고도 하라는 목적을 두고 건립했습니다.”
“영보정은 영보사람들의 얼굴입니다. 우리의 혼이 담긴 정신적 문화재입니다.”
“정자는 영보정이라고 지었습니다. 현판은 명필인 석봉 한호가 썼습니다.”
최덕지는 또한
“오늘 영보정 개장 축하연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한자리에 뵙게 돼 기쁩니다. 마을 분들께 좋은 공간을 만들어 제공하게 된 것 같아 뿌듯합니다.”
“저는 올레 고향이 전주입니다. 제가 이곳으로 와 정착을 하게 된 것은 처를 생각했고 이곳이 마음에 들어 전주보다 이곳 영암 영보촌이 더 아름답고 편안한 곳이라고 여겨 여생을 이곳에서 보내고자 이곳으로 낙향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기뻐하면서 반갑게 맞이해주고 환영해주니 행복합니다. 또한 아름다운 정자를 짓게 돼 흐뭇하고 기쁩니다. 처의 고향이 어느 고장보다 살기 좋은 곳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정자를 지어 놓고 정자에 앉아 사방을 굽어보니 신선놀음이 따로 없는 것 같습니다.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습니다. 특히 저 멀리 보이는 그림 같은 월출산이 한눈에 들어오고 하여 품어 않은 것 같습니다. 가슴까지 파고든 풍경이 한없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솟아납니다.”
“영암의 명산, 달이 난다하여 산 이름을 월출산이라고 지었다는데 아마 달뜨는 모습은 이 정자에 앉아 감상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밤이 기다려집니다. 낮은 들녘의 푸름과 새들이 보이고 밤엔 달과 별이 보이는 산도, 들도, 강도 그리고 달도 품고, 별도 품은다면 삼라만상을 품은 영보정이 아닐까합니다.”
“오늘 이 자리는 기쁜 날입니다. 이 기쁨 다 같이 나누시길 바라고 누리길 바랍니다. 영보정에는 어화둥둥 소리가 온 세상에 이르길 바래봅니다. 모두모두 흥겹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라고 마을사람들이 영보정 개장 축하연에 오신 것을 환영하며 감사의 말씀을 전했다.
영보정을 지었다는 소문에 영암 고을 전체로 전해졌다. 소문은 전주 등과 한양까지도 알려졌다.
직제학님께서 고향에 내려가 정자를 지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경대부들은 영보정 완공 축전을 보냈다.
『직제학님께
직제학님이 고향을 내려가 경치 좋은 곳에서 터를 잡고 정자를 지었다는 소식을 접하니 매우 반갑기 이를 데가 없는 것 같고 기쁠 뿐입니다. 인생 말년 자연에 귀의하는 것도 복이 아니겠습니까?
직제학님의 자연 생활이 부럽기만 합니다. 고향에 내려가 터를 잡으며 정자를 짓고 후학도 가르치고 정자에 앉아 풍류도 즐기겠다는 직제학님의 꿈이 이루어진 것을 우리 또한 기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 누림은 곧 우리의 누림입니다.
직제학님! 안락한 영암 땅 명지에서 부디 지체보전하시고 만수무강하시길 바랍니다. 직제학님처럼 우리도 언젠가는 고향을 찾아 자연에서 여생을 보내고자합니다. 남도의 소식, 좋은 소식이 있거들랑 기별해주시길 바랍니다.
직제학님은 매.난.국.죽(梅蘭菊竹)이었습니다.
매화처럼 불의에 굴하지 않는 선비의 정신을 보여줬습니다. 난초처럼 군자다운 인품으로 선비의 덕을 보여줬습니다. 국화처럼 어떠한 역경에 처해서도 지조와 절개를 굽히지 않는 선비의 정신을 보여줬습니다. 대나무처럼 항상 변함없고 곱고 바른 선비의 지조와 절개를 보여줬습니다.
또한 늘 푸른 소나무였습니다. 소나무는 장수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또 수호의 나무로 여긴답니다. 소나무는 꿋꿋한 절개와 의지를 상장한다고 합니다. 소나무가 꿈에 보이면 벼슬을 할 징조이고 솔이 무성함을 보면 집안이 번창하며 송죽 그림을 그리면 만사가 형통한다고 합니다. 직제학님은 소나무다운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직제학님 영보정에 직제학님을 상징하는 소나무 한 구루 심어도 좋을 듯싶습니다. 소나무가 있는 정자, 상상만 해도 그 운치는 묻어난 듯합니다. 유명한 화가보다 더 멋진 그림으로 남으리라 봅니다.
직제학님! 남쪽의 바람은 어떠하신지요, 따스하리라 봅니다. 남풍에 꽃이 만발하고 그 향기 이곳까지 풍기는 듯합니다. 저는 무엇을 해 보낼까요? 이 축전의 글밖에 없어 송구스럽습니다. 그리고 자연 속에서 좋은 기운 듬뿍 받으셔서 여생, 편안하게 보내시라는 말밖에 전할 수 없어 부족함을 많이 느낍니다.
직제학님! 영보정의 좋은 풍경 함께 즐기고 싶습니다. 영보정에 꽃피고 새가 지저귀거든 부디 초대하시옵소서! 또한 농익은 술 향 진동하거든 잔 기우리게 해 주십시오?
이곳에서도 봄이 찾아왔습니다. 새가 지저귀는 걸보니 직제학님의 소식을 전한 듯합니다. 잘 지내고 있는지 안부의 소리를 들을 듯합니다. 저 또한 새 편으로 안부를 전하고 듣도록 하렵니다. 부디 강건하시고 평안하시길 기원합니다.』
함께 일했던 그를 존경했던 경대부들이 직제학 최덕지에게 영보정 완공 축전을 보낸 편지이다.
영보정은 왜 지금의 자리에 세웠을까?
영보정은 조선 초기의 호남에서 대표적인 성리학자인 연촌 최덕지가 예문관직제학을 마지막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인 전주로 가지 않고 처가의 고을인 영보촌에 거주하면서 그의 사위이자 조선시대 통례원의 의례를 관장하는 정3품 당산관직인 통례원좌통례(通禮院左通禮)를 지낸 신희남의 중조부인 신후경과 함께 지었으며 후에 최덕지의 7세후손으로 전사시에 합격하고 벼슬에 나가지 않고 영암에 은둔한 최정이 신희남의 중손이자 인조반정에 반대하며 영암에 은둔했고 종2품 이조참판을 역임한 신천익과 함께 재건(1630년)한 것이다.
영보정은 오봉산(五峰山)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영보정을 중심으로 산이 병풍처럼 펼쳐져있다. 정면에서 영보정 뒤 좌측으로는 영보마을이 있다. 그리 마을 가구 수는 몇 가구에 불과하다. 영보정 입구 쪽에도 집들이 있다. 최덕지는 영보정 좌측 뒤편에 살았다. 영보마을 좌측으로 산줄기가 감싼 듯이 에워쌌다.
영보정 앞으로는 들판이 넓게 펼쳐져있다. 정면에서 좌측으로 멀리 월출산이 보인다.
최초 있었던 소나무
400평부지에 40평의 건물로 되어있는 영보정 앞에는 고목의 운치 난 느티나무가 서있다. 나무 바로 밑에는 우물이 되어져있으며 우물 앞 우측으로 소나무 한구루가 서있다. 소나무는 약 400여 년 전에 영보정을 중건하기 이전부터 최초 건립하고 얼마 뒤에 심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수령은 400살, 높이는 7m, 들레 2.8m이다. 그런데 이 소나무는 고사하고 없애 새로운 소나무가 대신하고 있다.
영보정은 언덕배기에 세워진 건물이다. 모든 정자가 그러하듯이 마을 어귀나 약간 높은 곳에 설치한다. 전망이 좋은 곳을 선택해 세웠다. 영보정도 마찬가지다.
영보정은 엄밀히 살펴보면‘풍수(風水)’에 입각한 정자이다.
중앙에서 관직에 머물다 시골에 낙향에 자기 짓을 짓거나 서원이나 정자 등을 건립할 때에는 터의 지기(地氣)를 살피는 풍수를 반드시 활용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더라도 한양도성 계획에 대한 정도전의 이야기는 무수히 등장하지만 도성 계획에 풍수가 개입되었다는 이야기는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전문가들이 현장을 확인해 보면 풍수가 개입된 흔적이 곳곳에 나타나있음을 엿볼 수 있다. 궁궐, 사원, 정원, 사대부 종택 등에서 하나도 예외 없이 모두 적용됐다.
풍수사례를 보면 창덕궁은 인정전 정문의 앞마당은 형태가 사다리꼴이다. 대체로 대궐의 앞마당은 넓고 반듯한 사각형이 되어야한다, 그런데 찌그러진 사다리꼴일까? 의문점이 드는데 이것은 북한산에서 종묘로 들어가는 지맥(地脈)을 훼손시키지 않고 마당을 만들려다 보니 사다리꼴이 된 것이다.
또한 안동 하회마을의 부용대(芙蓉臺)라는 절벽이 있다. 이 암벽의 나쁜 기운이 마을에 미치지 않도록 중간에 소나무 1만 구를 심어 만송정(萬松亭)이라는 인공 숲을 만들었다. 이는 겨울철 북서 계절풍을 막는 방풍림(防風林) 역할을 한다. 방풍림 역할도 띠기도 하지만‘암벽의 거센 돌 기운’을 막아내기 위한 인공 숲이기도 하다.
우리 조상들은‘기(氣)’의 흐름을 중시했다. 풍수에 이론에 따르면 기는 바람을 만나면 흩어지고(氣乘風則散) 물을 만나면 멈춘다(界水則止) 라 한다. 명당(明堂)이라면 바람을 뒷산, 좌청룡(왼쪽 산이나 언덕), 우백호(오른쪽 산이나 언덕)로 막고, 앞에는 물이 있어야한다. 사찰이나 궁궐에 들어갈 때 항상 물길 위 다리를 건너야하는 것은 이 건물들이 풍수사상의 이러한 명당 터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물길 안이 명당이다. 이 물길을 안에서는 명당수(明堂水)라고 하고 밖에서는 나쁜 기운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금지한다는 의미에서 금천(禁川)이라고 불렀다.
남쪽 멀리 조산(朝山)이 있어야하고 가까이에는 자그마한 안산(案山)이 있어야한다. 이것은 안산은 가문의 인재 배출과 집적적인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안산의 기운을 받아 인재들이 생긴다고 본다. 안산은 뒷산보다 높아서는 안 된다. 좋은 산은 정문을 그쪽으로 내서 기운을 받아야하고 암벽이나 돌이 많은 나쁜 산은‘정문으로 방향을 약간 틀어서’기운을 막아야한다.
산 사람의 공간인 양택(陽宅)은‘평지’이고 죽은 사람의 공간인 음택(陰宅)은‘산’이다.
풍수에 있어서‘잉(孕)’은 풍수에서 정말 중요시 하는 개념이다. 잉은 뱃속의 아이가 잉태(孕胎)한다는 의미이다. 출산을 앞둔 여인의 배가 불룩 튀어나와 있는 것처럼 잉이란 혈(穴) 자리(묘 자리) 바로 뒤에 불룩 솟아있는 자연 형태의 튀어나온 부분을 말한다. 이러한 잉이 없으면 진정한 명당 터가 아니라고 우리 조상들은 생각했다.
우리 조상들은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인간에게 미치는 자연환경 가운데‘바람(風)’은 정말 두려운 존재이다. 바람은 인간에게 많은 악영향을 끼치므로 바람에 특히 신경써야한다. 그래서 바람에 잘못 노출되면 얼굴에 변형이 올 수도 있고 심한 풍병(風病)에 걸릴 수 있다. 심지어 하루아침에 사망하기도 한다. 사방이 바람이 너무 잘 통하는 곳은 인간이 자연 재해에 고스란히 노출되는 곳으로 넓은 초원지대는 그리 좋지 않다. 산도 있고 들고 있어야 된다.
영보정의 풍수를 보면 정자 뒤로는 나지막한 산이 병풍처럼 들러 싸여있다. 뒷산은 묘 자리에서 보듯이 잉(孕)에 해당된다. 정자 앞으로는 넓게 들판이 펼쳐져있다. 들판보다 약간 높은 위치에 놓여있다. 정자가 있는 곳이 평평한 곳처럼 보이지만 뒤로는 지맥(地脈)이 흐르는 산이 있고 정자 바로 앞에는 여러 구루(느티나무 5구루)의 나무가 서있다. 또한 정자 연못 앞 우측으로 소나무 한 구루와 또 다른 한 구루가 서있다.
이 나무들은 그늘을 만들어주는 역할과 정자를 운치 나게 하기 위한 역할도 한다. 중요한 것은 풍수에 입각한 나무를 심었다. 확 트인 들판에서의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주기 위한 역할과 저 멀리 월출산의 너무 센 기운을 적절하게 차단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특히 소나무는 마을을 수호(守護)하는 통신목(洞神木) 중에는 소나무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래서 산신당(山神堂)의 산신목(山神木)은 거의 소나무이다. 소나무가 지는 부정을 물리치고 제의공간을 정화하는 뜻을 가진다. 제의신당의 주위에 금줄을 칠 때 왼새끼에 소나무가지를 꿰어두는데 이는 밖에서 들어오는 잡귀와 부정을 막아 제의공간을 정화하고 신성화하기 위한 것이다.
출산 때나 장을 담을 때에는 치는 금줄에 숯.고추.백지.솔가지 등을 꿰는 것도 잡귀와 부정을 막기 위한 것이다. 소나무는 오래 사는 나무이므로 예로부터 십장생의 하나로‘장수(長壽)’를 나타냈다. 비바람, 눈보라의 역경 속에서 푸른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꿋꿋한‘절개(節槪)’와‘의지(意志)’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쓰여 됐다. 꿈에 소나무를 보면 벼슬을 할 징조이고 솔이 무성함을 보면 집안이 번창하며 송죽 그림을 그리면 만사가 형통한다고 해몽한다. 소나무는 수호(守護)의 귀신을 쫒고, 장수와 절개 그리고‘정화’와 반듯한 선비를 상징하여 그런 의미로 심었다.
규목(槻木)인 느티나무의 꽃말은‘영원(永遠)’이다.
산림청에서는 2000년 새천년을 맞아 밀레니엄 나무로 느티나무를 선정했다. 느티나무는 천년을 살 수 있는 나무이면서 동시에 우리나라의 곳곳에서 당산목(堂山木), 정자나무, 수호목(守護木) 등으로 이 땅 우리민족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을 함께 해왔다. 향후 천년 우리의 역사를 함께할 나무로서 느티나무의 역사성과 문화성은 참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마을 입구에 심어져있는 느티나무는 수호신, 장수, 자손번창, 부귀영화 등을 상징한다. 마을을 지켜주는‘수호신(守護神)’으로 서낭당과 같은 역할을 띠는 등 주술적인 의미를 나타냈다. 느티나무는 뿌리가 깊고 가지가 많음으로‘자손(子孫)을 번성(繁盛)’시키는 의미로 여겼다. 또한 느티나무는 모양이 단정하고 수명이 길어 정자 목으로도 일품이다.
유구한 역사와 함께 인간수명 몇 배나 살다보니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오래전부터 은행나무와 더불어 보호목(保護木)으로 지정되어 함부로 훼손하거나 상하지 않게 하고 나무를 귀하게 예우했다.
회화나무를 궁궐 초입에 심는 때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돈화문 주변은 조정 관료들이 집무하는 관청이 배치되는 외조(外朝)의 공간이어서 예로부터 중국에서 궁궐 건축의 기준이 되는 주례(周禮)에 따랐다.
주례에 궁궐 정문 안쪽에 괴목(회화나무, 느티나무)를 심고 그 아래서 삼공(三公)이 나랏일을 논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궁궐 외에 학식 높은 선비들이 사는 마을에 흔히 심었다. 이 나무를 두고‘학자나무(學者修), 선비나무’라고 불렀다.
느티나무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옛날부터 오래된 느티나무를 마을을 지켜주는 상징으로 여겨 왔다. 가지가 넓게 퍼지기에 그늘이 많아 정자 근처에 많이 심어 느티나무, 팽나무와 함께 정자나무라 부르고 있다.
느티나무를 문간 안에 세 구구를 심어 놓으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고 믿었다. 특히 서남쪽에 심으면 도둑을 막을 수 있다고 봤다. 동구 밖에 있는 느티나무에 정성껏 치성(致誠)을 드리면 아들을 낳게 된다고 믿었다.
느티나무는 옛 신라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금벌(禁伐)과 보호의 덕(德)을 입어 노거수(老巨樹)가 많아 살아남아 수호목으로 주민들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었고 그래서 정월 초하루, 칠월 칠석이나 단옷날을 기해 매년 마을에서는 목신제를 올리기도 한다.
마을의 수호신처럼 마을을 보호하고 상징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느티나무는 오랜 세월동안 한자리에서 우리의 일상을 지키고 있는 고목으로서 그것은 마을 역사와 목격자이고 삶의 목격자이며 미래의 목격자를 상징한다. 마을리 경험한 희비애락(喜悲哀樂), 삶과 죽음의 시간을 함께 해온 느티나무는 마을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본 목격자이다. 자연은 인간을 품고 산다. 느티나무는 우리를 지켜주는 마음의 지킴이로 늘 그 자리에 무심한 듯 서있다.
느티나무는 행복과 화합, 평화, 번영, 성장을 상징하며 학교의 교목(敎木), 고을의 군목(郡木), 도시의 시목(市木), 도의 도목(道木), 마을의 향목(鄕木), 회사의 사목(社木) 등으로 삼고 대표하고 있다.
느티나무는 우리나라 모든 지역에서 자라는 나무로서 높이 약 36m 정도 성장한다. 수명이 길고 모양이 아름답고 나뭇잎이 단정하여 오래전부터 충(忠), 효(孝), 예(禮)를 상징하는 나무로 여겼다.
영보촌 영보정의 느티나무는 가식 없는 성격과 온화하고 순박한 영보촌의 기질을 나타낸다. 심근성이 강한 장수목으로 어떠한 토양조건에도 불구하고 번식력이 강하다. 늠름하고 꿋꿋한 기상과 정엄한 수형, 굳센 저항력으로 많은 열매를 알차게 맺음으로써 어떠한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개척인의 진취적 기상과 영보촌의 본연의 이념을 추구하는 기본정신을 담고 있다.
느티나무는 목재로서 사랑을 받았다. 느티나무는 우리의 목조건축 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아름다운 건축물들을 만드는데 쓰여 왔다. 2010년 국립산림과학원이 전국 114개소 목재문화재 기둥 1009점을 조산한 결과, 시대별로 고려시대 55%, 조선시대 21%가 느티나무라는 것을 밝혀낸 바가 있다.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기둥도 느티나무를 사용했다. 또한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법보전, 조선시대 사찰건물인 강진 무위사, 부여 무량사, 구례 화엄사의 기둥은 전부 혹은 일부가 느티나무다. 또 흔히 스님들이 싸리나무로 만들었다고 하는 구시(절의 행사 때 쓰는 큰 나무 밥통), 절의 기둥, 나무 불상도 대부분 느티나무다. 기타 사방탁자, 뒤주, 장롱, 궤짝 등의 가구까지 느티나무의 사용범위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쓰임새가 너 많은 느티나무는 당산나무로서의 지킴이로서 만족할 수 없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느티나무는 목재로서도 아주 귀한 대접을 받았다.‘상놈은 살아 생전 소나무 집에서 소나무 가구를 쓰다가 죽으면 소나무 관에 들어가고 양반은 느티나무 짐에서 살다가 느티나무 관에 담겨 저승으로 간다’라는 말이 있다.
실제로 천마총 등 신라고분이나 가야 목곽분에서 출토된 대부분 관들의 재료로 쓰였으며 전국 유명한 사찰과 궁궐의 기둥, 목조불상받침, 전통악기, 전통가구, 선박 등의 주재료로 사용됐다. 느티나무는 벌레가 먹지 않고 오래가며 먼지도 타지 않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사용했다.
한방에서는 가을에 잎자루 끝 조그맣게 달리는 열매를 젊을 유지시켜주는 약재로 사용하는데 꾸준히 먹으면 눈이 밝아지고 흰 머리카락이 검게 변하는 등 효능이 있다. 느티나무는 성질은 서늘하며 맛은 쓰고 독성은 없다. 동의보감에서 잎, 줄기, 열매를 괴목이라 하며 혈압을 낮추고 피를 멈추게 하며 염증을 가라앉히는 효능이 있다하였다.
느티나무의 플라보노이드 성분은 가래를 멎게 하고 염증을 없애주며 기침과 천식 등의 기관지 관련 질환에 도움을 준다고 한다.
느티나무 잔가지는 고혈압, 동맥경화 등 심혈관질환 예방, 혈전제거, 염증완화, 강장작용, 이뇨작용, 부종, 변비 등의 효능이 있다.
잎은 임신 독을 없애고 폐열을 제거하여 몸 안에 있는 악성 종기와 고름을 제거하는 치료 효과가 있다.
열매는 가을에 따서 햇볕에 말려 물에 달여 먹으면 무병장수하고 흰 머리카락을 검게 만드는 효능이 있다. 또한 간장보호, 시력보호, 눈의 피로회복, 안구건조증, 백내장, 녹내장 개선 등이 효능이 있다.
껍질은 줄기 껍질의 카달렌 성분이 있어 폐암치료 효능에 탁월하다.
느티나무에서 풍겨 나오는 피톤치드는 우리 인체를 편안하게 해준다. 그래서 정자나무로 식수를 한다.
느티나무는 가구용 또는 주방용으로 쓰였다. 예로부터 장롱(欌籠)을 만드는 데는 느티나무를 주로 선호했다. 느티나무는 결이 곱고 단단하며 무늬와 색상이 예뻐 고급 목재로 썼다. 양반 댁 등 가구로 주로 사용한 느티나무 장은 장수, 번창, 영화, 수호신 등을 의미하기에 머리맡에 두었다. 또한 느티나무 도마가 금색을 띈다고 하여 부(富)의 상징으로 여겼다. 느티나무로 만든 도마는 가족의 건강과 성공, 가정의 복을 상징했다.
무릇, 나무가 오래되고 커져서 자신의 존재에 위용을 드러내게 되면 천연기념물이 되고 그 나무는 과거에 그 누군가가 심어서 그렇게 된 것이니 반드시 사람과 관련되어 있다.
만물의 영장인 사람은 나무를 키우고 나무가 커지면 스스로 존재감을 갖게 돼 주변 땅에서 신목(神木) 된다. 그렇게 되면 나무를 중심으로 당산제(堂山祭)를 지낸다.
대한민국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천재문화가 있고 마을에서는 나무를 통해 하는 것이 당산제이다. 주변인들과 얽혀있는 감정은 불편함을 야기하고 일이 잘 풀리지 않게 만든다. 공동체의식이 적고 분열된 분위기에는 화합과 일체감이 필요하며 꽉 막힌 듯 하는 답답함을 해소하려면 제사를 통해 청량감을 느끼게 만드는 혜원(蕙園)의 중심 고목인 느티나무를 심고 크고 오래된 나무와 만남을 한 결 같이 가지게 되면 삶이 편안하리라 본다.
가로수와 조경수, 정자나무로 흔히 만나게 되는 느티나무는 오래전부터 우리 문화와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영복(永福), 귀목(鬼木), 신목(神木)으로 받들 정도로 느티나무가 신령스런 힘이 있다고 믿었던 우리 조상들은 봄에 일찍 전체적으로 싹을 틔우면 풍년이 들고 위쪽보다 아래쪽이 먼저 싹을 틔우면 흉년이 들며 밤에 광채를 띠면 동네에 경사가 생기고 임신부가 지극정성으로 치성을 올리며 아들을 낳게 해준다고 믿었다. 소원을 들어주는 수호신으로 많이 심었던 느티나무다. 시골 어귀, 한 마을의 역사를 간직한 정자나무의 역할을 하는 수종은 주로 은행나무, 팽나무, 회화나무 그리고 가장 많은 느티나무 등이다. 느티나무는 수명이 길어 오래 살 뿐만 아니라 줄기가 곱게 자라면서 가지가 사방으로 뻗어 생김새도 좋고 목재로도 우수하여 모든 면에서 으뜸으로 치고 있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활엽수종 중 하나로 그늘을 만들어주고 사람이 편안하게 쉴 수 있게 해주는 나무로서 느티나무를 규목(槻木)이라 하여 나무의 결이 좋아 고급가구를 만드는데도 쓰였고 예부터 불상이나 부잣집 기둥 등을 느티나무로 만들었다. 한마디로 나무가 갖추어야할 모든 장점을 다 가지고 있다. 그래서 느티나무를‘나무의 황제’라는 별명이 붙여져 있다.
영보촌 영보정 앞에는 느티나무 여섯 구루가 심어져있다. 정자 정면 중앙에 다섯 개, 좀 앞으로 나와서 좌측에 가장 오래된 느티나무 한 구루, 우측에는 소나무 두 구루가 있다. 한 구루는 오래된 느티나무와 대칭하며 나란히 하고 있다. 대칭을 한 소나무는 한참 나중에 식재한 것이다. 한 구루는 400년이 된 노송(老松)의 자리에 어린 소나무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꿈틀거리며 승천하는 용을 닮았다하여 용송(龍松)으로 불렀던 원래의 소나무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 선비와 마을사람이 서로의 우의를 가리는 뜻에서 지어놓은 정자 앞에 각각 한 구루씩‘느티나무’를 심었다. 느티나무가 총 여섯 구루인데 한 구르는 최덕지가 정자를 짓고 나서 얼마 후 심은 것이며 이때 소나무도 한 구루를 같이 심었다. 정자 중앙에 있는 느티나무는 다섯 구루는 정자를 중건(重建)할 때 심을 걸로 판단된다. 먼저 정자 좌측에 한 구루를 심고 난 후 200년 뒤에 정자 앞 중앙에 다섯 구루를 심은 것이다. 정면을 바라봤을 때 좌측에 느티나무 우측에 소나무를 식재했다. 용트림 한 듯 하는 형세를 한 우측에 있었던 소나무는 바람에 가지 부러지고 점점 이가지 저가지가 없어지다가 꽁지 부분만 잎이 나와 있어 결국은 시름시름 앓고 말라진가 싶더니 1985년에 완전 고사되고 말았다. 1987년에 그 장소에 기리는 치원에서 새로운 소나무를 심어뒀다. 오래된 느티나무와 대칭을 이루고 있는 소나무도 근래에 들어와 심은 것이다.
총 여섯 구루의 느티나무와 한 구루의 소나무는 입향조인 연촌 최덕지, 함께 영보정을 건립한 자장 신후경 이후 중건을 한 최정과 소은 신천익 그리고 영보정 건립 및 중축에 협조한 분을 의미한 기념식수(紀念植樹)이다. 가장 오래된 느티나무는 입향조 최덕지, 한 구루의 소나무는 사위 신후경의 식수(植樹)이며 정자 가운데 느티나무 다섯 구루는 최정, 신천익과 정자건립에 협조를 한 분들의 식수이다.
느티나무와 소나무는‘장수, 번창, 번영, 성장, 평화, 행복, 화합, 영화’와 그리고‘충, 효, 예’그리고‘권력, 권위’와‘수호신, 입신양명출세, 등용문’등의 뜻을 담았다, 나아가‘태평성대’를 바라는 의미에서 심었다. 아마 다섯 구루의 느티나무는 정자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운 사람뿐만 아니라 최씨(崔氏) 가문과 신씨(慎氏) 두 가문의‘화합과 평화’그리고‘번창.번영’을 위해 심었다고 판단된다.
늘 푸른 소나무는‘장수, 절개, 의지’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한 구루의 소나무는 일심동체(一心同體)를 화합정신, 즉 성씨는 달라도 몸은 달라도 한 구루의 푸른 소나무처럼 늘 변함없이 되라는 의미에서 식수했을 것으로 보인다.
영보정에 느티나무를 가운데에는 다섯 구루를 왜 심었을까하는 궁금 점이 또한 들게 한다. 다섯이란 수는 영보정 건립에 큰 기여를 한 분들과 최씨, 신씨 가문을 나타냄은 틀림없다. 여기에 또 하나의 사실은 영보정 뒤의 산 이름에서 연루됐다고 추정된다. 산 이름이‘오봉산(五峰山)’인데 봉우리가 다섯 개여서 오봉산이라고 불렀다. 오봉산 봉우리마다 각자 의미가 있고 사연이 있다. 정자에는 주로 정자나무 한 구루가 대체적이다. 영보정은 특이하게도 여섯 구루의 느티나무와 한 구루의 소나무가 심어져있다. 정자는 소나무 숲 또는 느티나무 등이 있는 곳에 들어섰다. 아니면 정자를 먼저 세우고 나서 나중에 조경수를 한 것들이다. 영보정은 후자에 해당된다. 정자를 세우고 나서 나무를 심었다. 그런데 왜 한 구루도 아니고 여러 구루나 심었을까하는 궁금 점을 낳게 한다. 이것은 다시 말하지만 누정 건립에 큰 공을 세운 사람과 두 집안 가문을 뜻하면서 오봉산의 이름 때문에서 비롯됐다.
영보정 앞에는 유일하게 느티나무 말고도 소나무 한 구루가 용트림 하듯이 서있다. 이것은 승천(昇天)하라는 뜻에서 용송(龍松)을 한 소나무를 선택하여 심었다. 용은‘지고의 영적 존재, 초자연적인 것, 무한, 변화하는 정신, 변화하고 변신하는 신의 힘, 자연계의 율동, 생성의 법칙, 초자연적인 예지, 강력한 힘의 부귀와 풍요, 권력과 권능의 힘’과‘수호신(守護神)’그리고‘입신양명출세(立身揚名出世)’와‘등용문(登龍門)과 득세(得勢)’를 상징한다.
영보정은 조형미가 뛰어나다. 여백미가 있다. 간결하고 담백하다. 너무 화려하지고 요란하지도 않다. 너무 돋보이려하질 않았다. 너무 모습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다. 아담한 정자이다. 자연스럽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려는 겸손함이 묻어난다. 품으려는 어머니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누구든지 찾아오면 다과상과 술상을 마련해 맞아하겠다는 기다림의 마루를 하고 있다. 집안에서 생활하다 답답함을 느낄 때, 노동일을 하여 피로가 누적될 때, 나그네와 자연을 벗 삼아 술 한 잔을 하고 싶을 때,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며 장기를 두고 싶을 때, 모든 시름을 잊고 싶을 때, 마을소사를 논의하고 싶을 때, 고을과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고자 할 때는 정자에 나와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하면서 머리도 식을 겸 지내도록 항상 자리를 비워두고 있다.
정자가 자연 속에 깊숙이 파고들지 않았다. 산에 가까우면서도 들에 있는 듯 하는 적당한 위치에 서있다. 정자에서 바라보이는 시선이 자연스럽게 가도록 보이도록 느끼도록 품도록 위치와 방향을 적절하게 잘 잡아낸 정자다운 정자의 품격을 보여주고 있다.
영보정은 설립자 최덕지의 사상이 잘 묻어난 명 작품이다. 오랜 공직생활로 인하여 자연의 풍경을 자주 접하지 못했던 그는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연을 가까이 하며 지내지를 못했다. 유유자적의 풍류를 즐길만한 여유로운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는 공직생활을 하면서 짬짬이 자연을 찾아 보아왔던 것들을 메모해났다. 언젠간 낙향하여 초당을 짓고 유유자적(悠悠自適) 자연을 음미하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래서 그는 이곳 영암 영보촌으로 와서 자연을 만끽하고자 더할 나위 없는 삶을 누리고자 가장 먼저 신경을 썼던 것이 바로‘영보정’이다.
영보라는 말은‘영원히 지킨다’는 뜻이다. 길 영(永), 지킬 보(保)자를 써서‘영보(永保)’라고 했다. 길 영은‘오래도록, 길게 하다. 오래되게 하다’또는‘영원히’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지킬 보는‘편안하게 하다. 돕다’라는 의미가 있는 단어다. 마을 뒤로는 오봉산이 있고, 마을 들녘 저 편에는 월출산이 있고, 산내들이 있는 영보마을과 마을이 품고 있는 모든 자연과 마을의 역사와 마을이 지향하고 자랑하는 전통문화를 변질되지 않도록, 훼손되지 않도록, 사라지지 않도록 낡은 것은 고치고 새로운 것은 더 새롭게 가꾸고 지켜가겠다는 영보의 정신이다. 또한 영보가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을 이곳의 정기를 받아 힘차고 편안한 생활을 영위하도록 영원히 지켜주는‘수호신(守護神)’역할을 띠며 기운을 불어주겠다는 영보촌의 발복(發福)이다. 그래서 수호신의 역할을 띤 영보정의 정자나무는‘영원히 지킨다’라는 뜻을 지닌‘영보(永保)’란 이름을 부끄럽지 않게 한다.
영보정이 있는 영보촌은 풍수적으로 보면 혈(穴)의 4대 요소인 입수(入首), 선익(蟬翼), 혈토(穴土), 전순(氈脣) 도는 승금(乘金), 상수(相水), 혈토(穴土), 인목(印木)의 혈장이 모두 담겨있다. 곡장(曲墻) 뒤 가운데 융기한 곳이 취기(聚氣) 입수로 여전히 힘을 발휘할 기세이다. 좌청룡, 우백호와 물의 흐름도 안정적이다. 좌향은 곤좌간향(坤坐艮向, 곤방을 등지고 간방을 바라보는 자리. 서남쪽을 등지고 동북쪽을 바라보는 자리)이다. 혈상(穴狀)은 유혈상(流穴狀)이다. 마을은 유혈의 정 위치이다. 명당도 넓다. 강과 평야가 있는 득수국(得水局)의 형세이다.
생거(生居)진천, 사거(死居)용인이라고 한다. 살아서는 진천 땅이 좋고 죽어서는 용인 땅이 좋다는 뜻이다. 영보촌은‘생거영보, 사거영보’의 두 장점을 지낸 명지이다.
대문장가가 나올 명지 영보촌, 지형의 형국은 황앵탁목혈(黃鶯啄木穴)이다. 황앵탁목혈이란‘노란 꾀꼬리가 나무를 쪼는 혈(명당)’을 말한다. 꾀꼬리가 나무에 붙어 있듯 혈도 산 중턱에 매달려 있다. 주산 오봉산은 꾀꼬리 같은 새의 모양을 한 바위로 되어있다. 앞산은 나무가 옆으로 누운 듯 하는 모습으로 와목체(臥木體)고 가운데는 꾀꼬리가 나무를 쪼아 생긴 구멍이 나있다. 마을 정면에는 월출산이 뚜렷하게 나타내고 있는데 나이가 많고 지혜와 덕을 갖춘 훌륭한 스승의 노사(老師) 선생 같은 큰 학자를 낳게 한 산이다. 좌향도 묘좌유향(卯坐酉向, 집터나 묏자리 따위가 묘방을 등지고 유방을 향하여 앉은 자리, 동쪽에서 서쪽을 향하여 앉은 자리)으로 묘좌는 오행으로 목(木)에 해당된다.
최덕지 같은 훌륭한 학자들이 많이 배출되고 출세하는 이유가 영보촌이 좋은 기운을 장생발복(長生發福)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덕지 후손인 손자인 산당 최충성(崔忠成), 연촌의 7세손인 동원 최정(崔珽), 최정의 후손인 초당 최선석(崔宣錫), 최탁(崔琢) 등의 학자를 배출했다.
전주최씨 영암지역 현대 인물로는 학계에 최간열, 최규창, 최영, 최운열, 최원열, 최한수, 최홍열이 있으며 법조계에 최권열, 최득열, 최형보가 있으며 관계에 최건열, 최공열, 최규배, 최규학, 최규환, 최병호, 최영, 최영훈, 최종열, 최평열, 최필열이 있으며 군 출신으로 최귀조, 최규대, 최영호가 있으며 의료계에 최웅, 최인식, 최인호가 있으며 언론계에 최봉열, 최병우, 최정, 최경천이 있으며 경제계에 최동열, 최윤호, 최준호가 있으며 금융계에 최기술이 있으며 종교계에 최건차가 있다. 그 외 최건일, 최광호, 최규용, 최규상, 최병환, 최희동 등이 전주최씨 가문의 영암에 인물이다.
정자가 자연을 품으면서도 채움의 공간보다‘비움의 공간’을 두었다. 자연이 너무 차있으면 답답함은 물론 자연의 기가 넘쳐 다른 특징이다. 정자 앞에는 좀 왜소한 여러 구루의 느티나무를 심어났다. 좀 앞으로 나와서 양쪽으로 하나는 느티나무, 하나는 소나무 이렇게 조성해났다. 지금은 연못을 메워 찾아볼 수는 없지만 전형적인 사원의 배치도를 적용했다. 건물과 연못과 정원이 조화롭게 조성되어 있다.
단순히 그저 감상하려고만 한 것이 아닌 영보정이 풍수사상을 입각하였지만 그러면서 자연을 품어 안겠다는 의미로 연못을 꾸몄다. 정자의 마루가‘놓는다, 꺼낸다. 펼친다’라는 뜻이라면 연못은‘담는다. 모아둔다. 간직한다’라는 뜻이 내포하고 있다. 정자의 마루는‘소반(小盤)’이며 성찬의 장소이다. 연못은‘그릇’이며 생명수의‘생지(生池)’이다. 나무는 마루와 연못과의 관계를 이어주는‘매개체’로서 자리하고 있다.
봉황은 갈증이 나면 물을 찾아 떠나버린다고 한다. 그래서 봉황을 상징하는 난봉산(卵鳳山)에 아래에 연못을 조성해 둔다. 난봉산이‘봉황새가 알을 품고 있는 형상으로 봉황이 날개 짓을 하는 모양’을 한 곳이라면 분명 거기에는 연못이 있게 마련이다. 봉황이 갈증이 생기면 목을 추겨주려고 한 것이다.
연못은 하천 치수와 더불어 중요하게 여겼다. 영보정 앞에 작은 연못을 만들어 갈증을 달래주고자 만들었다. 영보정에는 여러 구루의 나무를 식재했다. 이것은 새들이 날아들어 노니라는 배려다. 노니면서 목도 추기라는 자연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다. 정자에 앉아 새소리도 듣게 하고, 정자를 운치도 나게 하고, 마을에 기운도 북돋게 하고 또 주변의 자연경관 조화롭게 어울리게 하는 등의 여러 목적을 두고 고려했다.
정원에 연못을 만들 때 곧‘풍수(風水)’를 고려해야한다. 풍수에서 물은 곧‘돈’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물이 좋으면‘재운(財運)’또한 상승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없고 뒤집을 수도 없다. 가령 주택의 정원에 풀장이나 연못을 조성하려면 매우 신중해야한다. 모양새와 방위를 고려해야하므로 자신이나 믿음이 확고하지 않으면 안하는 건만 못하다. 잘 못 조성했다가는 재산상의 손실이나 재앙의 정도가 상대하기 때문이다.
영보정의 연못은 장방형이다. 정자의 크기만큼 조성했다. 왜 원이 아닌 사각형으로 연못을 조성했는지는 좀 더 파악해봐야겠지만 사각형의 연못인 게 아쉬움으로 남는다. 정원의 대형 연못은 가급적 사각형 모양을 피해야한다. 어느 방위든 연못가의 모서리가 마치 예리한 칼날의 형태가 되어 주택을 향하게 되기 쉽다. 삼각형 연못을 조성하지 이유가 그래서이다. 정원에 있는 연못은 될 수 있으면 사각형보다는‘둥근 원형’을 한 것이 좋다. 그리고 정원에 있는 연못에는‘비단 잉어’를 키운 것이 좋다. 홍색의 비단 잉어는 좋은 기운이 가득한 것을 나타내고 황색의 비단 잉어는‘부귀(富貴)’를 상징한다, 이왕이면 상서로운 수인 9를 감안해‘9마리’를 넣어 키우는 게 좋다.
숫자 9는 '균형, 질서, 최상의 완전' 등을 표현하는 수로 '완전무결함과 영원' 을 나타내는 '불후' 의 숫자이며 '온전함' 을 의미한다. 상서로운 수인 9는 '불변수' 라고도 하며 '종말, 완결' 을 뜻하기도 한다. 고대인들은 9를 '완성' 에 이르는 곳이라고 여겼다. 모든 숫자 중에서 3X3은 가장 '길' 한 숫자이며 9는 '하늘의 힘' 을 나타낸다. 9는 명당에서처럼 9가지 방위와 아홉 번째 점으로서의 '중심' 을 나타낸다. 천하를 다스리기 위한 '구법, 구관' 을 뜻한다. 토지를 우물 정자 모양으로 아홉 구획으로 분할했다. 인도에서의 숫자 9는 '신성' 을 의미한다. 9는 철학에서 아홉 개의 보편적인 물질이나 요소를 의미한다. '지구, 물, 공기, 불, 에테르, 시간, 공간, 영혼, 마음' 이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숫자 9는 '신화' 를 의미햇으며 유럽에서는 숫자 9는 '영웅' 을 의미한다. 캄보다아의 숫자 9는 '행운' 을 의미한다.
연촌 최덕지는 세상을 떠난 나이가 72세 때이다. 7과 2를 더하면 9이다. 9란 숫자의 의미를 아는 듯 그는 9란 완전한 수, 불후의 수, 온전한 수, 불변의 수를 낳은 그다.
연촌 최덕지 72세의 사망 나이 7과 2를 더하면 9이고 7X2는 14이다. 14의 1과 4를 더하면 5가 된다. 그가 직제학을 그만 두고 영보촌에 낙향해 살았던 해의 수는 5년이다. 그가 식년문과에 동진사로 급제한 해가 1405년이다. 그가 직제학을 그만 두는 해가 1450년이다. 관직생활한지가가 45(남원부사 사직 후 낙향 포함)년이다. 45년은 사망 나이 72의 7+2=9. 사망 나이 72의 7X2=는 14인데 1+4=5 이것을 9(7X2)와 5(1+4)를 곱하면 45년이 된다. 9의 숫자 의미는 '균형, 질서, 완전, 영원, 불후, 온전함, 신성' 을 의미한다. 14의 수는 '구원, 해방, 석방, 육체의 구원' 을 의미한다. 5의 수는 '하나님의 은혜, 결합, 영적, 초월, 오감, 절반의 완성, 오각형' 을 의미한다. 45의 수는 '땅의 완전수, 창조, 물질, 질서, 안정, 방향, 세상,실용, 방어, 시각형' 과 '결합, 은혜, 영적, 초월, 오감, 오각형' 의 성장변영한 영화로움을 누린 통치의 기간을 의미한다. 최덕지의 관직생활 45년의 4와 5를 더하면 9이다. 9는 그가 사망한 나이 72세를 말한다. 최덕지에 관련한 수(사망 나이 72, 관직생활 45년, 낙향생활 5년)의 의미를 파악해보면 이런 논리가 성립됨을 알 수 있다.
영보정의 연못은 물은 적당히 차서 넘치는‘일출(日出)’혹은‘용출(湧出)’의 모양새로 설계되었다. 재원(財源)이 샘솟거나 가득 차서 넘치는 모양은 맑고 조용한 물의 흐름과 소리를 내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 물이 너무 세차게 치솟거나 소리가 크면 사나운 기상이 되어 급속하게 재산을 잃게 될 우려가 큼을 알고 설계했다.
풍수에서 산은‘자손(子孫)’, 연못은‘재물(財物)’을 주관한다.(山主子孫水主財物)
집 앞에 수당(水塘)은 물을 한데 모으는 것으로 곧‘재물을 모은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연못을 조성했다. 영보정은‘위룡옥(圍龍玉)’이다. 위룡옥은‘용을 집 안에 모셔서 자손을 번성하게 한다’는 뜻이다. 위룡옥은 아트막한 산에 기대어 집을 짓지만 산사태나 수해를 방지하기 위해 산골짜기가 아닌 산의 능선이 내려오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산등성이가 길게 이어진 형상이 곧 용과 같은 모양인데 그 용을 위룡옥으로 둘러싸 화태(化胎)에 앉힘으로서 용을 집안에 모시는 형태를 갖춘 것이다. 이런 용을‘준용(俊龍)’이라고 한다.
풍수지리에서 물은 기를 모으는 역할을 하며 돈 등 재물을 의미하기에 소중하게 다뤘다. 물이 좋으면 재운도 상승하고 한다는데 안타깝게도 영보정의 연못이 사라지고 없다. 주택의 중앙에 연못이 있으면 집안의 기를 끌어 모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집안에 있는 생기를 모두 연못으로 흡수하여 집안은 항상 건조하고 가족들은 생가가 없어 건강이 좋지 않다고 한다. 다행히 마을 입구에 있는 정자에 연못을 두어 그 화를 피했다.
영보촌의 뒷산 오봉산은 용(龍)이다. 용은 물이 있어야한다. 용이 머문 곳, 영보정의 연못이었다. 연못이 사라져 오봉산 용이 기력을 잃은 듯하다. 또한 봉황새와 꾀꼬리가 아름다운 소리를 내며 나무에 앉아 한가롭게 노니기를 바란다. 아름다운 소리를 내면서 노닐다가 목이 마르면 목을 추겨야할 텐데 물이 없다. 새들이 앉았던 나무는 있는데 물은 없어졌다. 영보정을 꾸몄던 최덕지를 비롯해 신후경과 최정, 신천익 등은 정자를 세우며 정자 주변에 나무도 심고 연못도 만들고 하고자 한 것은 심오한 뜻이 있었기에 그랬다. 덜렁 정자만 짓지 않고 여러 구루의 나무를 심어 운치를 더했다. 정자와 나무가 있으면 조화가 안 맞아 연못도 함께 하게 했다. 나무가 있으면 새가 날아들고 그 주변에 물이 있다면 더할 나위없는 놀이터가 될 것이다. 그들의 생각은 과학적이었고 자연친화적이었으며 풍수사상에 상당한 조예를 갖고 있었고 믿었고 따랐다.
영보정 앞에 조성된 연못은 이곳에 담긴 물은 아마‘화기(火氣)’를 막고자 했다. 월출산의 강한 기운이 되려 영보촌에 불의 기운으로 변해 마을이 피해를 입을 것으로 보여 정자 앞에 연못을 두었다. 영보정의 최초 심어났던 수령 400년 된 소나무는 고사했다. 이것은 연못을 메워버렸기 때문이라고 본다. 소나무는 용송(龍松)이다. 용은 물이 았어야한다. 물에서 사는 용이 승천하는 것은 물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물에서 살면서 세상을 지켜주었다. 물이 없으면 용도 살 수가 없고 신통한 생명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영보정에 물이 말랐다. 아예 흙으로 매꾸어버렸다. 그랬으니 용송이 살아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연못의 물관리를 잘 안 해주는 탓에 소나무는 가지도 부러지고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만 것이다. 용을 닮지 않은 소나무를 심어났으니 소나무가 과연 영보마을을 지켜주련지 의심스럽다.
영보정 정자는 느티나무가 살짝 가려진 느낌이다. 마치 정자 앞에 발을 걸어둔 모습이다. 느티나무가 발인 셈이다. 정자가 나무 사이로 살짝 얼굴을 내보이고 있는 듯하다. 완전한 노출을 피하고 있다. 느티나무는 적당한 그늘을 형성해 주는 목적과 운치를 내고자하는 목적과 자연을 가까이한다는 목적도 있지만 이것은 자신의 모습을 너무 들어 내보이지 않으려는‘겸손함’에서 그랬다. 누정 앞에 좌우로 느티나무와 소나무는‘수호신’역할이 강하다. 가운데 느티나무들은‘화합’의 의미가 많이 풍긴다. 영보정 정자나무는‘봉위수(封衛樹)’다. 경관을 좋게 하는 동시에 방풍(防風)의 역할을 하게 한다. 집 뒤의 키가 큰 나무나 대나무를 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자 앞에 다섯 구루의 느티나무가 최덕지 후손 및 최씨, 신씨 가문의 사람들이라면 좀 더 좌우로 나와 서있는 느티나무와 소나무는 영보정 최초 건립자인 최덕지(느티나무), 신후경(소나무)이 아닌가한다. 최근에 심은 또 한 구루의 소나무는 정자를 지을 당시 쯤 기념식수로 식재했던 소나무가 고사한 바람에 그 자리에 1987년 5월 5일에 다시 소나무를 싶은 것이다. 소나무를 심으면서 소나무 시슬기에 【영보사당의 기상을 담아 늘프르고 우람한 이 소나무는 약 400년년 전 영보정의 조경수로 신.최 양문의 회의를 굳게 하기 위하여 심었었다. 오랜 풍마우습으로 노쇠되여 고사지경에 이르름에 이를 안타까히 하던차 동향인 최윤호의 주선과 김옥현 영암 군수의 배려로 회생하게 되어 옛 프르름을 되찾았으니 참으로 희행한 일이다. 이에 지역주민과 영보청년회는 그 기쁨을 이 돌에 새기니 영보정과 느티나무와 벗을 삼아 늠름한 수형을 영원히 이어가리라】 라고 표지석을 세워뒀다. 아쉬운 건 고사된 소나무 같은 용송(龍松)을 심어났더라면 최초의 의미를 살렸고 가치가 있었을 텐데 생각이 미치지 못한 면이 있어 보인다.
영보정의 그림, 전체적으로 보면 병풍을 펼쳐 놓은 듯 하는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하다. 채움과 비움이 적절하게 구성이 되어있고 음과 양의 조화도 알맞게 되어 있고 주변의 경치와도 아름답게 이루고 있는 수준 높은 걸작의 명화(名畵)이다. 영보정만 봐도 영보촌의 풍경과 마을의 풍습과 마을사람들의 성격과 사상 그리고 생활 등의 여러 문화를 엿볼 수 있다.
아쉬움이 있다면 정자 앞에 있었던 연못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연못은 분명 풍수에 입각해 만들어났을 것인데 어떤 용문인지 연못을 메워버렸다. 이 장면을 최덕지 선생이 봤다면 분노할 일이다. 연못은 물이 있어야했고 물에는 연꽃과 물고기도 살게 하며 감상을 하면서 그런 운치에 풍류를 즐기려고 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풍수에서 연못이 필요했다. 연못을 없애는 것은 나쁜 기운을 불러들이겠다는 것이다. 연못을 조성해 수기(水氣)의 기가 적절하게 분출하게 하려 했다. 또한 연못 안에 연꽃 식물과 물고기를 두어 생명력이 꿈틀거리게 하려는 등의 마을에 생기를 불어주려는 목적으로 조성했다.
영보정은 사람으로 치면‘얼굴과 가슴’이다. 연못은‘심장’이다. 나무는‘허파’이다.
영보촌에 들어선 영보정은 명당자리로서의 명지이다. 오봉산을 주산으로 하여 오봉산의 맥이 머문자리에 영보정을 세웠다. 뒤로는 산이 에워싸고 건물 앞에는 연못을 조성한 배산임수의 성격을 띠고 있다.
영보정의 연못은 여러 의미로써의 인공적으로 조성된 연못이다. 기운을 북돋아 주고 양기를 모으는 등 발복을 하기 위한 조성 목적이었다. 영보정의 연못은 서원의 건물 배치 개념에서 찾아볼 수 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서원이 설립된 곳을 살펴보면 배향(配享)하고자 하는 선현의 연고지가 가장 많다. 이러한 연고지는 선현의 출생지이거나 고향, 성장지 또는 유배지, 출절과 연관된 곳, 은거하여 후학을 지도했던 곳, 묘소가 있는 곳 등으로 구분된다.
풍기 소수소원, 영천 임고서원(정몽주), 함양 남계서원(정여창), 밀양 예림서원(김종직), 김포 우지서원(조헌), 안동 임천서원(김성일), 나주 미천서원(허목), 순천 옥천서원(김굉필), 예안 도산서원(이황), 산청 덕천서원(조식), 논산 돈암서원(김장생), 논산 노강서원(윤황), 장성 필암서원(김인후), 정읍 무성서원(최치원), 용인 심곡서원(조광조), 파주 자운서원(이이) 등 여러 서원의 건축 배치들이 존경받을 만한 선현의 연고지인 동시에 사람들이 은거하여 수양하며 독서하기에 좋은 곳, 즉 산수가 빼어난 곳이기도 하였다.
주변 풍광이 빼어난 곳에 서원이 자리를 잡게 되는 요인으로는 성리학자들이 자연 속에 은둔하여 심신을 수양하며 천인합일(天人合一)을 할 수 있는 곳을 찾았던 것이 중요한 이유였다. 성리학자들에게 천인합일 사상은 가장 중요한 유가적 정신 관념으로 자연과 인간은 하나가 되어 우주의 생명 전체는 융화하고 교섭할 수 있다는 인생의 최고 이상이었다. 따라서 자각적으로 천인합일의 경지에 이르는 것은 중요하였다.
이런 이유로 사대부들은 골짜기가 있어 물이 흐르고 산이 있어 풍월을 가까이 할 수 있는 자연에 서원을 건립하여 학문을 연마하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따라서 자연과 함께하기에 가장 적합한 누정(樓亭) 형식의 건축을 서원건축에 원용하여 격렬한 논쟁도 하고 시회(詩會)도 열며 자연을 접하는 장소로 삼았다. 이러한 누(樓)는 서원 진입부에 배치되었다.
영보정은 뒤로의 산과 앞에는 넓은 들녘을 하고 있다. 연못보다 누정이 더 높은 위치에 세워져있다. 이것은 전망이나 배수를 고려하기도 했지만 바람의 기운을 염두한 것이다. 바람이 집 안에 불어오는 쪽으로 건물을 배치하면 집안 기압이 바람으로 인해 조금씩 높아진다. 기압이 높아지면 그안에 사는 사람도 기운을 받아 건강해지기 때문에 바람의 방향에 따라 건물 배치를 했다.
영보정의 연못은 임산부의 태아를 지켜주는 '양수(羊水)' 이다. 양수는 태아를 보호하며, 성장을 돕고, 항균작용과 체온유지 그리고 분만 시 윤활유 역할을 한다. 태아를 둘러싸고 있는 양막 안에 차 있는 액체인 양수, 태아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양수가 없다면 태아는 온전하지 못한다.
생명의 탄생을 돕는 양수, 생몀의 원천인 양수가 있기에 인간 등 동물은 태어난다. 고로 영보정의 연못은 양수이며 그 양수가 영보촌의 생명을 잉태시켜주고 있다. 영보정의 연못은 단순히 보기 좋으라고 조성된 게 아니다. 심오한 철학과 사상이 담겨진 연못이다. 근데 양수인 연못은 사라졌다. 영원히 지키겠다는 영보(永保)라는 말이 무색하게 태아를 지켜준 양수가 없어졌다.
영보촌의 영보정은 정자에 방을 두었다. 책을 보관하는 서재고로 또는 필요한 생활품을 보관하고자 두었다. 정자에 방을 둔 것은 독특한 양식이다. 영보정은 서원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을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서원이 후학을 양성하거나 강론(講論)장으로 사용하거나 시화를 하는 장소로 쓰였듯이 영보정도 그런 의미로 사용하였다.
영보정은 보불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정자가 마루로만 되어있지 않고 건물 중앙 뒤쪽에 방을 두어 보기두문 독특한 양식을 한 정자라고 판단, 보물로 지정했다. 또한 영보정 주변의 나무와 연못 등이 조화롭게 하고 있어 감안해 전형적인 정자로서의 대표할만한 문화재로 여겨 그 가치성을 인정해 국가에서는 국가적인 문화재로 삼았다. 그런데 연못을 어떤 연유로 없앴는지 이유를 모르겠으나 무지함을 보여준 일로써 통탄할 일이요, 당장 원상 복구하라고 항의하고 싶은 마음이다. 안타까운 현실을 낳아 아름다운 영보정이 빛바랜 듯하다.
영보정 느티나무는 그늘진 멋진 사랑방이 되어주고 있다. 농번기에는 느티나무 아래에 모여 앉아 새참을 먹었다. 여름 더위를 피하기에 느티나무 그늘만 한 곳이 없을 정도로 마을사람들한테 아주 요긴한 정자였다. 선비들만 즐겼던 장소가 아니었으며 누구든지 이곳에 쉬어가거나 이용할 수 있게 했다. 학생들이 이 정자에서 좋은 경치를 바라보고 바람을 세면서 독서를 하면 멋스러움이 묻어나는 이보다 더 좋은 공간을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은 쉼과 여유로움이 풍겨나는 낭만 공간, 최고의 영보정이다.
영보정 앞에 있는 소나무는 소나무 수형(獸形)이 용(龍)이 하늘로 올라가는 형상이어서 용나무 또는 용송(龍松)이라 하며 옛날 어느 사람이 가지를 자르니 나무에서“아이고 내 팔이야”하는 소리가 저녁마다 났으며 나뭇가지를 자른 사람도 얼마 후 죽었다는 전설이 있는 소나무로 군 보호수로 관리했다.
영보정의 느티나무와 소나무는 그저 그늘용이나 보기 좋으라고 심어진 것이 아니다. 깊은 의미를 두고 나무를 심었다. 나무의 위치, 나무의 방위, 나무의 수, 나무의 생김새 등으로 고려했다. 특히 나무의 위치나 수는 아무데나 마구 개수에 상관없이 심은 것이 아니다. 정확한 장소에다 하나를 심을지 두 구루를 심을지를 철학과 풍수 등의 사상이론에 입각하여 선택해 심어야 제대로의 역할을 하고 우환(憂患)이 생기지 않는다. 용트림한 소나무를 심어났으니 영보촌에는 출세를 한 분들이 나오게 된 것은 다 이 나무의 덕분이다. 나무의 기를 받아 많이 훌륭한 인물로 배출되고 출세를 하게 된 이유다. 이 모두가 입향조 최덕지 산생의 깊은 뜻이 담긴 철학과 사상이며,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위하려는 것이었으며, 마을, 나라, 백성과 장수, 부귀영화, 출세 등등의 밝은 미래를 위한 어떻게 하면 나을 것이라는 내다보고 조성한 혜안(慧眼)이요, 감동감탄 그 자체다.
영보정 앞에 느티나무를 종성(種姓)하게 한 최덕지는 전북 전주에는 은행나무가 많은데 그중 풍남동 은행나무는 연촌 최덕지가 심었다고 한다. 연촌이 죽은 후 과거를 보러가는 사람들이 은행나무 앞에서 최덕지 학문을 궁상(窮相)하고 급제를 기원하는 묵념을 올리기도 하고 정월 초하루에는 후학들이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또 인품이 뛰어나고 오복(五福)을 두루 갖춘 인물로 알려진 연촌을 존경하는 여인네들이 그 은행나무에 빌면 아들을 낳는다는 떠도는 소문에 정월 초하루 남정네들이 제사를 지내고 나면 여인네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최덕지 같은 훌륭한 아들을 점지해 달라며 눈물로 빌었다고 한다.
“신목(은행나무)님!”
“제발 아들을 하나 낳게 해주십시오!”
“최덕지 어르신 같은 훌륭한 아들이 태어나게 해주시길 간절히 바라나이다.”
하며 손이 닿도록 눈물을 흘리며 치성을 들었다.
영보정 앞에는 연못을 만들었다. 연못은 운치 난 목적이라기보다는 풍수에 의해 조성했다. 명당은 반드시 물이 존재한다. 뒤에는 산이 있고 앞에는 냇물이 흐르고 저만치에 나지막한 산이 있는 곳을 우리는‘배산임수(背山臨水)’라고 본다. 영보정의 연못은 명당수(明堂水)이며 밖에서 불어오는 나쁜 기운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금지하고자 인공 연못을 조성했다. 연못이 곧 금천(禁川)인 셈이다. 영보촌은 형제봉을‘주산(主山)’으로 하여 좌측으로 산줄기가 에워쌓은 듯 굽어져있는데‘좌청룡(左靑龍)’에 해당되며 우측으로도 역시 휘어져있는데‘우백호(右白虎)’에 해당되며 마을 앞으로 낮은 산이‘안산(案山)’이다. 영보정은 배산임수에 자리하고 있다.
영보정에서 월출산이 그림처럼 펼쳐져 보인다. 정자에 앉아 월출산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모든 시름을 다 잊을 것 같은 풍류(風流)를 즐길만한 최적의 공간이다. 그런데 영보정이 월출산을 정면에서 바라보이지가 않는다. 이것은 월출산에서 봤을 때 영보정과 정면으로 마주지지 않게 약간 방향을 틀어서 세운 것은 이것 또한 풍수에 의해 그랬다. 월출산은 기(氣)가 세다. 그 센 기운이 너무 강하게 미치면 좋은 기가 의외로 사람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며 마을과 사람의 기를 월출산 기가 압도해 눌러버릴 것으로 판단, 건물을 약간 틀었다. 나무와 연못 등도 다 기(氣)와 연관되어 조성한 것이다.
풍수사상에 의해 건물을 월출산 정면으로 마주치지 않게 해 그로 인하여 월출산이 옆으로 보이지만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것보다 약간의 측면에서 보이는 것도 멋스러움이 나고 월출산만 정면에 두면 다른 풍경들이 가려지거나 손해를 보기 때문에 배려하는 차원에서 고려해 위치와 방향을 잡았다. 영보정은 월출산이 잘 보이는 곳에 세운 것은 맞지만 월출산만 담으려하지 않았으며 주변의 경치도 함께 담아내려고 정자 배치에 신경을 썼다. 풍수사상에 기초를 한‘과학(科學)과 미학(美學)’이 숨어 있는‘시선집중, 감성충족’영보정이다.
영보정은 오봉산 산세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따랐으며 역행하려하지 않았다. 만약 횡으로 흐르는 산세에 T자형의 종으로 세웠다면 지세나 경관을 역행하는 일로 조화롭지 못한 것은 물론 산의 기세를 외면하여 불행을 낳은 액운(厄運)이 솟는 영보정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자연의 흐름을 잘 따른 영보정이기에 그 가치가 돋보이고 멋스럽고 그래서 국가문화재로서의 지정을 받게 됐다고 본다.
영보정은 길 영(永), 지킬 보(保), 정자 정(亭)를 써‘영보정(永保亭)’이라고 했다. 이것은‘오래도록 편안하게 하라’는 뜻에서 그렇게 지었다. 산이 에워싸는 곳에 정자를 지어 나무도 심고 연못도 조성해났으니 영보정은 그 이름값을 톡톡히 하리라 본다.
영보정은 보물(寶物)로 지정됐다. 또한 최덕지 영정(影幀)도 보물이다. 이 마을로 인하여 영보에는 최씨(崔氏)와 신씨(慎氏)가 주로 성씨를 하며 자자손손(子子孫孫) 번영을 이루고 있다.
입향조인 최덕지는 이순(耳順)의 나이인 67세에 낙향해 영보촌에 정착했다. 그는 70세인 고희(古稀) 또는 종심(從心)에 되자 노쇠함을 보여줬다. 그가 지은 정자에 나가기가 힘들 정도로 거동이 불편함을 느꼈다. 행동이 줄어들고 하는 등 그는 방안에 머무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는 결국 72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일생일대를 화려하게 보내며 세상을 뒤로 한 최덕지는 남긴 유언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그의 인품을 봐서는 아마 이러하지 않았을까한다.
자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최덕지는
“나는 후회 없이 살다 가는구나!”
“마을 앞 영보정에 느티나무와 소나무를 심어주거라!”
“느티나무는 열매를 많이 맺어 풍요와 다산과 번창을 의미하니!”
“또 소나무는 늘 푸른 모습을 보여주니!”
“두 나무는 이 마을을 지켜주면서 마을사람들을 장수하게 하고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고 입신양명하게 할 것이다.”
“여보! 여보! 고마웠소!”
하며 최덕지는 눈을 감았지 않았을까한다. 자식들은 아버지의 임종(臨終)을 지켜보고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영보촌을 위해 아버지를 시조(始祖)로 삼아 대(代)를 끊지 않고 자손대대로 이어가겠다고 굳게 마음먹었다. 그리고 아버지를 기념하는 나무를 심어줬다. 나무의 상징처럼 영보촌에는 전주최씨와 거창신씨가 집성촌을 이루며 자자손손 대를 이어가며 영화로움을 누려오고 있다.
최덕지는 이 세상을 떠나고 없지만 그의 혼(魂)은 영보정에 머물고 있다. 그가 지었던 정자와 심었던 느티나무가 그를 분신(分身)임을 말해주고 있으며 변함없이 자리하면서 영보의 이름답게 영보촌을 영원히 지켜주고 있다.
영보촌에는 최덕지의 후손인 최성호 가옥이 국가민속문화재로 중용민속문화재 제164호(1984.01.14)로 지정되어있다. 초가집 삼성당 고택인 최성호 가옥은 국가민속문화재 제164호로 지정됐다.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남도 부농의 집으로 19세기 말에 지었다. 20세기 중반에 고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문간채의 상량분에‘승정기원사회갑이십팔년무산구월초칠일창축 상량’이라 기록되어 있어 1848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안채와 사랑채는 문간채보다 이전에 건축된 듯하다.
최성호 가옥의 구조 및 배치는 약 200여 평의 대지 위에 안채와 사랑채, 문간채 그리고 헛간채가 사방에 배치되어 작은 규모이지만 짜임새 있는 공간을 연출하고 있다.
안통의 ㅁ자 형식과는 다른 각각의 독립된 집 네 채가 정사각형을 이루고 있다. 문간채 서쪽 끝에 대문이 있고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사랑채가 보이고 우측으로 헛간채가 이어지며 마당을 지나 안채가 자라잡고 있다. 안채는 아담한 규모의 ㅡ자형 집으로
서쪽부터 부엌.큰방.대청.작은방이 있으며 부엌을 제외하고 앞쪽에 툇마루가 있다. 작은 방 뒤쪽에는 아궁이가 있으며 안방과 부엌 전면에 각각 계단을 설치하였다.
사랑채는 남도 식으로 서쪽부터 아랫방과 옆으로 앞은 부엌방, 뒤는 사랑부엌이 있으며 사랑아랫방, 사랑뒷방, 대청 순서로 배치하였다. 대문채는 왼쪽부터 대문간, 문간방, 대청으로 구성되어있다. 헛간채는 한쪽에 광이 있고 다른 한쪽에 화장실이 있으며 중심부에 헛간채가 있다. 후원과 주변에 자란 나무들이 시원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부엌 뒤의 장독대가 대나무 숲 바로 앞에 자리를 잡아 청결한 감을 주고 있다.
최성호 삼성당 고택은 4세손까지 이어오며 살고 있다. 최성호 고택에서 1956년 개봉한 영화 백치 아다다(감독 이강천, 출연 나애심.한림.장민호.김정옥) 등 영화 외 6.25특집 드라마도 고택을 무대로 삼아 찍었다.
영보리는 본래 영암군 북일시면(北一始面) 지역으로 칭암도 찰방이 따린 영보역이 있어서 역보역, 역촌, 역몰, 영보촌을 통 털어서 영보라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냉천(冷泉), 관곡(寬谷), 내동(內洞), 서당(書堂), 은행정(銀杏亭)을 병합하여 영보리(永保里)라 하였다. 그중 내동, 서당동, 은행정은 1구, 관곡, 냉천동은 2구로 운영하고 있다. 마을별 성씨 분포는 내동, 서당동, 관곡동은 주로 전주이씨(全州李氏), 은행정은 거창신씨(巨昌慎氏), 냉촌동은 함평이씨(咸平李氏)가 많이 살고 있다.
관곡마을은 마을 형태가 양지쪽과 음지쪽으로 나누어지고 중앙으로 큰골이 있어서 지형과 같이 넓을 관(寬), 골 곡(谷)자를 써 관곡(寬谷)이라고 부르고 있다.
내동마을은 안동네, 안골 등으로 불리고 영보에서 가장 큰 으뜸 마을이여서 중앙마을이라는 뜻으로 안 내(內), 골 동(洞)자를 써‘내동(內洞)’이라고 부르고 있다. 마을 안에 국가지정 문화재(보물 제 594호)인 최덕지 영정 등 문화유산이 집중되어있다.
내동에는 합경당(合敬堂)이 있는데 전주최씨 문중에서 연촌 최덕지, 최산당, 김문곡의 문집이 판각이 있다.
서당동마을은 내동 동남쪽에 인접한 마을로 옛날에 한문을 가르치는 서당이 있어서 마을 이름을 글 서(書), 집 당(堂), 골자를 써‘서당동(書堂洞)’이라고 부르고 있다.
은행정마을은 마을 앞에 연못이 있었고 연못에 백련 꽃을 심고 연못 옆에 은행나무를 심어 이 은행나무가 마을을 대표 할 수 있도록 수림을 이루어 마을 이름을 은 은(銀), 살구나무 행(杏), 정자 정(亭)자를 써‘은행동(銀杏洞)’이라고 부르고 있다. 원래 강선달 연못이 백련연못이었는데 백련의 효성이 지극하여 백련이 홍련이 됐다고 한다.
냉천동마을은 마을에 참새가 많았다고 하여 참새골이라 부르기도 하고 마을 북동쪽에 조산(鳥山)머리란 곳에 고인돌이 다수가 마을 앞 공동식수가 유별나게 차가워 찰 냉(冷), 샘 천(泉), 골 동(洞)자를 써‘냉천동(冷泉洞)’이라 부르게 됐다.
영보에는 내동에 고인돌 10기, 냉천동에 11기 총 21기가 조사됐으며 9기 밖에 확인할 수 없다.
영보리에는‘여운사(如雲寺)와 여운치고개’가 있는데 여운치고개는 영암에서 금정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구름이 쉬어가는 고개라는 뜻이나 원래는 소원을 비는 여원령(如願嶺)이라 하였다. 그 유래는 고개에 여원당(如願堂)이라는 미륵당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소원을 빌면 성취된다는 소문이나 강진, 해남 등에서 과거를 보려가는 사람들이 여원당의 영험(靈驗)을 받고자 치성(致誠)을 드리면 과거의 행적이 좋지 않았던 사람에게는 과거에 여사여사한 비행(卑行)이 있으니 과거에 급제할 수가 없으니 돌아가라는 음성이 들려서 돌아가는 길이라고 해서‘도라베기 길’이라고 하였다고 하고 지명이 한문화 되면서 여원(如願)제가‘여운(如雲)제’로 바뀌고 그곳에 있는 사찰이라 여운사(如雲寺)라 한다.
연촌 최덕지(최덕지, 1384~1455)는 동국여지지 인물 조에서 전주최씨의 영암 입향조(入鄕調)로 확인된다. 최덕지는 고려 때 시중(侍中)을 지낸 문성공파 시조 최아(崔阿)의 후손이며 호조 참의와 집현전제학(集賢殿提學)을 역임한 아버지 최담(崔霮)과 어머니 전주박씨(全州朴氏)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최덕지가 김제와 남원, 한양 등지에서 세거(世居)하다 벼슬을 버리고 영암 영보촌(영보리)에 낙향하여 후학을 가르친 이래 그 후손들이 지금까지 집성촌을 이루어 세거하고 있다.
영암 영보촌으로 이주하여 정착한 전주최씨는 이후 혼인으로 인한 인척 관계를 통해서 서서히 친족 공동체를 형성해 나갔으며 이때 전주최씨(全州崔氏) 가문과 혼인관계를 맺으면서 새롭게 영암에 터전을 마련하게 되는 가문이 거창신씨(巨昌慎氏)와 남평문씨(南平文氏)였다.
영보촌의 영보정은 보물로 지정될 만큼 아름다운 정자이다. 주변의 경치를 한 몸에 담아내고 있어 어느 지역의 정자 못지않게 으뜸으로 치고 있다.
월출산이 북향한 너른 들에 있는 영암 덕진면 영보정은 정자 앞에 연못이 있고 다섯 구루의 느티나무와 한 구루의 늙은 소나무가 수문장처럼 주위에 서 있어 의미는 넘치고 상당한 가치성을 띨 만큼 풍수사상이 담긴 정자이다.
영보정은 태어난 고향은 전주이면서 말년은 영암 영보촌에서 보낸 조선 초기 문신연촌 최덕지가 세운 정자로 관직을 그만두고 영보촌으로 내려와 영보 들판과 월출산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이곳에 사위 신후경과 함께 지었던 영보정으로서 마을은 물론 영암의 역사 문화를 융성하게 했다.
영보정은 세월이 흐름을 타 건물이 훼손되고 낡아지는 등 쇠락하였다. 이것을 보고 후손들은 선조가 건립한 것을 방치할 수 없다고 느껴 그 정신과 혼과 사상과 상징성을 다시 살려내기 위해 1630년경 최덕지의 7대손인 최정과 외손인 신천익 등 후손들이 뜻을 모아 재건하였다. 양 문족(文族)이 부분 중개수하면서 한말까지 이어온 것이 지금의 영보정이다.
영보정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조선의 동계(同系) 관련 정자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 내부는 3면이 마루이고 후면 가운데 방을 둔 독특한 평면형식을 갖추고 있다.
기둥과 도리, 처마의 자제가 단단하고 들보는 나무의 수형을 그대로 살려 천연미를 더했다. 단층 팔작지붕으로 내 귀의 추녀를 찰주로 받치고 있는 다른 정자와는 비교가 된다.
현판은 추사 김정희와 쌍벽을 이룬 한호 한석봉의 친필이라고 전한다. 영보정은 전체적인 비례와 조형미, 완성도를 인정받아 지방문화재였던 것을 보물 제2054호로 지정했다.
영보정은 군서 구림 회사정, 영암읍 장암 장암정, 신북 모산 영팔정과 함께 영암군의 대표적인 정자이다.
최덕지는 이곳에서 학문에 힘쓰면서 연촌(烟村)인 호를 존양(存養)으로 바꾼다. 존양은 존심양성(存心養性)으로 맹자에 나온다. 맹자는 마음을 간직하고 성품을 기르는 것, 그것이 곧 하늘을 섬기는 것이라고 했다. 존심양성이 어려운 말이라 풀어놓아도 어렵다. 주희는 존심양성 앞에 격물치지(格物致知)를 놓았다. 사물의 이치를 규명하여 자기의 지식을 확고하게 하는 격물치지가 존심양성의 수도법이라고 했다. 존심양성은 옳은 이치를 깨닫는 것, 그리고 그것이 흔들리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존양 최덕지는 이곳에 누정을 지었는데 정(亭)이 영보정이고 누(樓)가 서재로 지은 존양루(存養樓)다. 정에서는 후학을 가르쳤고 누에서는 스스로의 학문을 닦았다.
최덕지는 김제군수, 남원부사를 거치면서 총애를 받아왔다. 그는 직무에 누구보다 충실하고 정직 공정하게 봤던 인물로 평가를 받아왔다. 그런 그를 세종의 맏아들인 조선 제5대 문종(1414~1452)이 즉위(1450)하자 동국병감, 고려사를 등을 편찬하고 병제를 정비하여 3군 12사를 5사로 줄었고 병력을 증대시킨 학문을 좋아하고 인품이 관후한 문무 관리를 고르게 등용하도록 하고 언로(言路)를 자유롭게 열어 민정 파악에 힘쓰는 등 세종을 보필한 공이 큰 세종이 병들자 그를 대신하여 국사를 처리한 문종은 1450년 왕으로 오르고 예문에 뛰어난 최덕지를 불러 예문관직제학(禮文官直提學)을 제수(除授)했다.
직제학은 정3품으로 예문관의 예악령정(禮樂刑政)에 관련된 일을 기록하는 사관(史官)이다. 그런 그가 어느 날 갑자기 그 직을 그만두겠다고 임금께 아뢰었다. 그는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겠다는 치사(致謝)를 알리는 사직서를 올렸다.
연촌 행장에 보면 문종이『그 사람이 순실하고 아직 늙지 아니하였으므로 내 머무르라고 하고자 한다』하고 육신(六臣)과 모든 경대부(卿大夫)가 만류하였으나 선생이 가로되『내 어찌 세상을 잊으리오, 머무르면 빈 벼슬이요, 가는 것이 분수라 내 집에 작은 초당이 있으니 돌아가 내 여년을 마치기를 결단하였노라고 제공들을 이별하니 술을 실어 강가에 보내고 또 글로 송덕(頌德)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존양의 나이 68세이다.
임금이 낙향한 전대의 신하를 다시 불러들인 것도 드문 일이었다. 그런 그를 애써 떠나려는 이의 옷자락을 잡고 있을 정도로 그를 신뢰를 하고 총애를 했던 것을 보면 최덕지가 벼슬살이가 순탄했고 승승장구할 수 있는 자신이어서 훌륭한 직책을 버리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말년에 벼슬이 올라 아랫사람을 많이 부리고 녹봉(祿俸)을 더 받으려는 것이 사람의 마음인데 최덕지는 가문의 부와 명예가 걸린 벼슬을 두 번이나 버렸다는 것은 그만큼 수양이 깊었고 진퇴의 때를 알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시를 지어 떠나는 그에게 예를 표했다『시종일관 의리를 다하신 선생이 바로 우리 스승이로세』성상문은 말했다. 또한『급류에 용퇴한 사람이 얼마나 되던가 선친과는 일찍이 상투 틀면서부터 노니셨는데』라고 신숙주는 말했다. 또한『선생이 귀향에 즈음하여 왜 이구동성으로 감탄하고 칭송하는가 인심을 감동시키는 중망이 조정에 있지 않고 전리에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박팽년은 말했다. 또한 기대승의 고조부 기건은『월출산 구름 짙어졌다가 엷어지면 덕진강 물길은 하늘 끝까지 멀리 흐르겠네』라고 했다. 연촌 최덕지 직제학이 낙향하겠다고 하여 28명이 송별시를 남겨 연촌유사에 전한다.
문종 2년 수양대군이 왕위 찬탈을 위해 발호하던 바야흐로 피바람이 시작될 폭풍전야의 고요였다. 문종은 곧 죽고 단종도 서러운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4년이 채 안 남은 시점이다. 때를 알아도 떠나는 사람이 있고 못 떠나는 사람이 있다.
연촌 최덕지는『창랑(滄浪)의 물이 맑거든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려지거든 내 발을 씻으리라 굴원(屈原)이 말했지만 창랑의 물은 스스로 청탁을 알려주지 않는다.』세상이 맑으면 맑게 살고 흐리면 흐리게 살라는 청탁자적(淸濁自適)의 그런 생활태도를 뜻하는 한강변에서의 송별시를 받아들고 영암으로 내려온 연촌은 향년 72세란 천수를 누린다. 그 이별의 자리가 사실은 생사의 갈림길이었다. 그는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억조창생(億兆蒼生)의 안녕을 위해 목숨을 초개(草芥)처럼 버린 데서‘의(義)’가 있었지만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아는 데서는‘지(智)’가 있었다.
최덕지는 세조가 즉위하던 1455년 영보촌에서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세종 때 배출된 많은 학자 가운데 정치적 격동에 휘말리지 않고 문안하게 보낸 그다. 그는 문종 즉위 다시 예문관 직제학이라는 관직을 맡았지만 사실 정국이 소용돌이 칠 것을 예견하고 연로를 핑계되고 바로 사직하고서 다시 영보촌으로 낙향했다. 그리하여 피비린내 나는 왕의 찬탈(簒奪)에 연루되지 않고 뭄과 이름을 보전할 수 있었다. 명철보신의 지혜로운 최덕지였다.
최덕지는 그의 고향 전주로 안가고 영암 영보촌의 처가로 내려와 영보정을 세웠다. 영보(永保), 무엇을‘영원히 지키라’는 것일까 현판 이름에 대해 살펴보면 대단히 보수적인 냄새마저 풍기는 저 말은 최덕지와 신후경의 영예(榮譽)를 아니면 전주최씨와 거창신씨의 화합(和合)을 영원히 지켜가라는 의미가 아닌가한다. 또한 영보정의 정자나무가 마을을 고을을 나라를 영원히 지키라는 의미를 담았을 것이다.
영보정과 관련된 유물로‘영보정동계문서’가 있다. 전주최씨, 거창신씨 두 가문이 중심이 되어 만든 동계(洞契) 규약을 담은 7책이다. 친족 결속을 다짐하는 내용과 함께 역사 시간에 배우던 향약의 4대 강목(덕업상근, 과실상교, 예속상교, 충란상교)으로 요약할 수 있는 이 책은 모두가 가로 12Cm, 세로 35Cm 크기로 덕진면 영보리 함경당(含慶堂)에 보관되어 있다. 예컨대 동네 물을 흐리는 자를 어떻게 처벌할지, 동네에서 과거시험 보는 이를 어찌 지원할지와 같은 세목들이 있어 조선 후기 향토 사회의 생활 모습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해준다.
전주최씨 분파를 살펴보면 문열공계는 예의판서공파, 판윤공파, 양도공파, 지평공파 등 6개 파로 나뉘고 문성공계는 크게 안령사공파, 대호군공파, 판서공파, 중량장공파로 나뉜다. 문충공계는 군수공파, 현령공파, 총량공파로 나뉜다. 영암 영보지역의 전주최씨는 문성공계 중량장공파(龍鳳, 연촌 최덕지의 증조) 후손들이며 중량공파는 다시 연촌공파, 소윤공파(得之, 연촌의 형), 송애공파(匡之, 득지 위의 형) 등으로 나누어진다.
전남 영암 덕진면에는 운암리(雲岩里)가 있다. 운암리는 덕진면 내에서 가장 높은 지역에 자리하여 오봉산(五峰山) 기슭이라 항시 구름이 끼고 암석이 많아서 구름 운(雲)자와 바위 암(岩)자를 써‘운암리(雲岩里)’라 했다. 운암리는 대천동(大川洞) 1구, 송석정(松石亭) 2구, 선암(船岩)과 운곡(雲谷) 3구로 구분되어 있다.
2구 송석정마을은 백운산 아래 북남으로 길게 뻗어있다. 마을 뒤에 용샘골(龍泉)에서 용이 내려오고 용암(龍岩)과 용샘(龍川) 동쪽에는 법절(法寺)이 있어 법절골이라고 부르기도 하였으며 마을지반이 암반으로 되어있고 송죽(松竹)이 잘 우거져 소나무 송(松)자와 돌 석(石)자와 정자 정(亭)자를 써‘송석정(松石亭)’이라고 했다. 또한 마을 입구에 밥상바위가 있어 정월보름과 음력 2월 1일에 어머니들이 행운을 비는 곳이다. 용바우(龍岩)는 용시암(龍泉)에서 살던 이무기(구렁이)가 용이 되어 바위를 딛고 하늘로 올랐다고 하며 지금도 바위에 용 형상으로 폐인 곳이 있는데 그때의 용이 빠져나간 자국이라고 하며 날이 가물면 기우제를 지낸다.
송석정마을은 보리나 콩 밭 대신 녹차 밭을 조성, 보성 녹차 밭 못지않게 녹차 밭으로 유명하다. 녹차 밭이 있는 곳에서 월출산이 한눈에 클로즈업 된다. 월출산을 감상하면서 녹차 한잔을 음미하는 쉼과 여유와 녹차 밭을 걸어보는 낭만과 추억은‘녹차의 향기 내 안에 두다’테마주제로‘녹차 밭을 걷다 추억을 그리다’슬로건아래 운암리 녹차 밭으로 떠나는 여행, 풍류(風流)는 신선놀음이다.
전남 영암군 덕진면 영보리(영보촌)는 연천 최덕지 선생으로 인한 국가로부터 지정받은 보물의 고장이다. 영보정‘보물 제2054호’, 최덕지 영정‘보물 제595호’등 보물을 두 개나 간직하고 있는 영암 영보촌은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고장으로서 또는 자연 풍광이 아름다운 고장으로서 우리의 가슴에 깊이 남을 만하다. 영암을 대표하는 고장으로서의 자랑이 되고 있다.
영보촌은 매년 단옷날을 기해 영보최씨 계보를 낳은 입향조 연촌 최덕지 선생을 기리는‘풍향제(豊鄕祭)’를 지내고 있다. 영암 풍향제에서 가장 대표적인 행사로서 풍년과 지역인의 안녕을 기원하는 행사로 지역 고유의 전통과 역사를 보존하고 전승하면서 지역인의 화합을 도모하고 생업 등의 이유로 고향을 떠난 인사들에게 고향방문의 계기를 마련해주기 위한 목적에서 매년 5월 5일에 열리는 영암을 대표하는 마을축제로 1979년부터 시작돼 영암군과 함께 전통적으로 매년 실시하고 있다.
영암의 전통문화를 지키고 출향인사들의 고향방문을 이끄는 역할을 하고 있는 영보풍향제가 단순한 지역행사를 넘어‘전통문화창달과 경로효친사상의 계승발전’에 기여하는 지역 화합 문화축제로 발전하고 있다.
풍향제는 민속놀이를 시작으로 풍향제 봉행, 기념식, 표창장 수여, 장학금 전달, 오찬 및 노래자랑 등의 프로그램으로 매년 개최하고 있다.
영보는 영보마을을 비롯하여 운암리, 영등리, 백게리, 노송리 등 대동계를 함께하는 12개 마을을 말한다. 영보는 1979년부터 전통문화 계승과 주민 화합을 위해 출향인사의 고향방문 행사를 겸하여 매년 5월 5일 단옷날을 기해 영보풍향제를 열고 있다. 영보풍향제 날짜를 5월 5일로 잡은 것은 영보의 지대가 높아 보릿고개가 가장 먼저 온 곳이라 가난 극복을 위해 자식들을 타지로 내보내 공부를 시켰는데 마늘을 뽑아 자식들 학비를 대줬을 정도로 자식들을 향한 사랑과 자식을 위한 부모의 마음이 컸고, 그래서 영보풍향제를 양력 5월 5일로 정한 것도 출향인사들이 자녀들도 영보풍향제에 함께하기를 바라는 차원에서 고향에 모이기 좋은 날로 정했다.
연촌 최덕지 선생의 혼이 서러져 있는 영보촌은‘영보세상 우리세상 영보문화 우리문화’캐치프레이 아래‘영보에 가면 세상이 보인다 영보에 오면 미래가 열린다’슬로건으로 영보의 문화가 삶이 되는‘영보에서 미래의 꿈을 영보에서 행복한 삶을’누리라고 영보촌 사람들은 영보를 가다 영보에 오다 하며‘내 삶의 마지막 여행지, 영보로 오세요!’라고 홍보하고 있다.
천연(天然)의 자연 풍광이 아름다운, 숭고(崇高)의 문화가 숨 쉬는 고장 영보,‘꽃향기는 십리를 가고 사람의 향기는 천리를 간다’라는 말이 있듯이 영보의 꽃향기는 십리를 가지만 영보사람들의 향기는 천리를 가지 않을까한다.
영보정이 있는 영보촌을 인생 태어나서 꼭 한 번 가봐야 될 여행지이다. 이곳에서 영암의 명산 월출산을 품어보며 마을은 그리 크지는 않지만 아늑한 자연의 풍광을 간직한 곳이기에 힐링과 치유의 쉼과 여유를 찾아 누려볼만하다.
영보정(永保亭)
永有永保亭肉身任
保有永保亭世上置
亭有永保亭榮華咲
영원함 있는 영보정에 육신을 맡겼으니
보호함 있는 영보정에 세상을 두었도다
정자함 있는 영보정에 영화가 피었다네
연촌(煙村),존양(存養)의 호와 영보(永保)를 빗대어 시 한수를 지어보고자 한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시골에서 안빈낙도할 적에 구름이 촌에 들어와 연기인양 하도다
존재함 기르겠노라 전원에서 유유자적할 적에 어린 후학들은 읽었다네 스승의 글을
영원히 지키겠노라 고향에서 무사태평할 적에 말벗 동료들은 읊었다네 이별의 시를
김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