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일 교수의 책을 몇 권 읽었는데, 그같은 외전(外典)의 독서가 불교 내적인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었는지 모른다. 내 연구 테마 중에서 조동일 교수의 학설에서 도움을 받은 것들을 정리해 본다.
1) 《천수경》을 비롯한 불교의식문을 우리말로 옮길 때 제일 큰 난관은 운율의 문제이다. 불교게에서는 조선시대의 〈회심곡〉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4음보의 율격이 너무나 깊이 각인되어 있어서 기존의 거의 모든 번역들이 4음보를 자연스럽게 택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4음보 율격은 늘어지고, 글자도 많아지고, 시간도 올래 걸린다는 문제가 있었다. 그 대안으로 3음보 율격을 택하여 번역하게 되었는데[〈천수경 한글화를 위한 과제〉, 《다보》 제10호, pp.155-157.], 이같은 사실들을 나는 조동일, 《한국시가의 전통과 율격》을 통해서 분별하게 되었다.
2) 밀교의 다라니(주문)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주는가? 어떤 기능을 갖고 있는가? 이 문제를 해명한 것이 〈밀교 다라니의 기능에 대한 고찰〉[《인도철학》 6집, p.183.]인데, 나로서는 다라니에 전언(傳言)이 없다고 보았다. 다라니의 언어는 무의미의 언어인 셈이다. "의미를 묻지 말고 용도를 물어라"는 비트겐슈타인(L.Wittgenstein, 의 말처럼, 다라니는 의미의 전달 밖에서 그 용도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성격을 나타내기 위해서 조동일, 〈경기체가의 장르적 성격〉에서 처음 만난 '교술장르'라 할 때의 교술(敎述) 개념을 빌어서 쓴 바 있다. 다라니는 교술의 기능을 갖는 것이 아니다. 선의 화두 역시 교술의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님은 다라니의 경우와 마찬가지다.[그런데, 이 문제와 관련해서 〈밀교 다라니의 기능에 대한 고찰〉을 쓸 때에는 몰랐지만, 뒤에 기호학 관련 책을 읽게 되자 '교술' 이란 개념 대신에 기호학의 기표와 기의라는 술어를 빌어서 써도 좋았을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다라니는 교술의 기능을 갖는 것이 아니다" 라는 이야기는 "다라니는 기의없는 기표이다" 라고 말해도 되는 것이다.]
3) 조동일, 《우리 학문의 길》에서는 "일반이론을 만들자"고 하였는데, 일반이론이란 무엇인가? 예컨대, 불교사에는 수많은 결사운동이 일어난다. 백련결사, 정혜결사, 수정결사 등. 불교사전을 보면, 이들 하나하나의 개별적인 결사들에 대해서는 아이템으로 설정되어 있어서 다소간의 설명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결사' 라는 아이템은 불교사전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경허와 한암의 결사운동을 다룬 논문 〈결사의 근대적 전개양상〉[《보조사상》 제8집, p.135.]에서, 역사적인 여러 결사운동의 특징들을 귀납하여 결사의 일반적 정의를 시도하여 보았다. 이렇게 일반적 정의가 설정되어야, 이들 일반적 정의와 개별적인 하나의 결사운동이 어떤 점에서 같고 다른지를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일반이론을 추구하는 문제의식을 《우리 학문의 길》을 통해서 깨닫게 된 것이다.
4) 그런데, 의상스님의 《법계도》에 대한 조동일 교수의 해석[〈義相·明 ·元曉의 질서관과 문학이론〉, 《한국의 문학사와 철학사》(지식산업사, 1996)]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 논문은 1992년 처음 발표되었다 하는데, 이미 오래 유통되고 있다. 따라서 불교학계의 본격적인 비판이 있어야 할 것이며, 그런 점에서 그같은 비판 논문을 기다리기로 한다. 사실, 그같은 역할을 이 지면이 감당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분량이나 성격이 이 책의 여타 부분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