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 달에 발표된 설문 결과 두 개. 하나는 민노총의 조사인데, 성인 노동자에게 ‘하고 싶은 일’을 물었다. 응답자의 42.3%는 '가정 충실'을 꼽았고 35%는 '개인 자유'를 들었다. '직장 성공'은 11.2%다. 이 중 '가정 충실'엔 남성이 많이 몰렸고 '개인 자유'는 여성이 더 선호했다. 또 하나는 성균관대 한덕웅 교수의 조사다. 03학번 신입생의 가치 순위 1위는 '나의 행복'인데, 20년 전 신입생 1위인 '가정 안녕'과 퍽이나 다르다. '강한 독립심' 항목의 경우 20년 전 3위에서 15위로 낮아져 자녀의 부모 의존도가 매우 높아졌음을 보여준다.
이상을 가족 시나리오로 읽어보면 이렇다. 죽도록 '가정 충실'에 매달리다가 '개인 자유'의 신장과 함께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 나선 엄마. '가정 안녕'과는 다른 '개인 행복'을 추구하면서도 그 비용은 부모에게 기대어 손쉽게 해결하려는 자녀. 반면 '가정 안녕'의 꿈이 '직장 성공'에 달렸다고 믿고 한길을 달려간 20년 전의 젊은 사내는 허망한 터닝 포인트에 서서 '가정 충실'을 곁눈질하는 중년이 되어 있다. 문제는 이때쯤 아내는 더 이상 마누라가 아니고, 아이는 아빠의 지갑만 쳐다보고 있다는 점이다.
5월을 맞아 진지하게 '가족 복귀'를 고민하던 중년 남성들이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을 대강의 사정이다. 물론 당사자의 잘못도 크다. 오랜 ‘남근(男根)신화’에서 깨어나기 싫어했으며 직장에선 어진 신하로 굴다가도 집에선 오만한 왕처럼 군림해온 그들. 남성이자 어른의 이름으로 누려온 피고(被告)의 기득권도 원고석의 여성과 청소년이 보기엔 여전히 너무 많다. 그래서 더 답답하다. 어쩌란 말인가. 가부장적 권위의 추억이든 따듯한 가정의 설계든 어디로도 숨통을 틔울 수 없는 이 시대 중년 남성의 사면초가를.
사회 구조의 변동과 가족의 재구조화가 한 짝임을 상기하면 '직장 성공'에서 '가정 충실'로 전략을 바꾼 중년 남성의 뒤늦은 선택은 또다시 실패할 것이 분명하다. 해법은 새로운 의미의 가족을 꿈꾸고 삶의 방식을 다르게 디자인하는 것 외엔 없다. 하지만 살아버린 시간이 더 많은 중년의 나이에 그게 어디 쉬울까. 주변의 측은지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다. 가족을 '안정된 쉼터'이자 '애정의 발원지'라고 믿고 반편생 그 경비를 충당해온 그들이 뒤늦게 그곳에서 '안정'과 '애정'을 얻으려고 할 때 소박맞는 기분을 공감한다면 말이다.
이런 말이 있다. ‘군대 졸병과 말단 직원과 아빠 노릇을 모두 겪어봐야 한국의 중년 남성이 된다.’ 갖은 수모와 외압을 견뎌낸 '사회의 비겁한 중년'은 바로 '가족의 든든한 기둥'과 같은 말이었다. 사태가 심각한 것은 국가와 사회 시스템이 지원하고 격려해야 할 이들 중년의 삶이 가가호호 안방의 몫으로 내동댕이쳐져 있다는 사실이다.
해서 나는 이 5월에 쏟아져 나온 남성 관련 신간들에도 성찰과 애정의 균형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탈영자들의 기념비'(생각의 나무)가 꼬집는 국가 가족주의의 허상도, '남자의 탄생'(푸른숲)이 고발하는 남성 프로젝트의 실패도, '남성 성기의 역사'(까치글방)가 이끄는 역사 문화적 인식도 시커멓게 멍든 중년 남성의 가슴을 어루만져 주지는 않는다. 가족에 대한 지식인 사회의 서늘한 거대 담론 못지않게 중년 남성의 오늘 하루에 작은 변화를 꾀하는 가족의 따듯한 지혜가 더욱 충분히 강조되어야 한다. 중년 남성, 그들이 웃으면서 자신의 문제를 바로잡는 날이 곧 가족이 다같이 웃는 날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