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옥윤(吉屋潤)
[생졸년] 1927년 2월 22일 ~ 1995년 3월 17일 /향년 69세
본명은 최치정(崔致禎), 평안북도 영변에서 출생, 1941년 평양 종로국민학교를 졸업하고 1947년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48년 월남하여 1949년 2월 서울에서 치과전문학교(후에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에 입학하였고, 대학생 신분으로 기타를 연주하는 군예단원이 되기도 했다. 곧바로 치과대학 선배인 김영순(金榮淳)이 조직한 악단 멤버가 되어 재즈 음악에 접하게 된다.
1950년 초 동경으로 건너가 오자와[小澤秀夫]에게서 재즈 음악과 색소폰연주법을 배웠다. 1952년 일본에서 주일미군캠프촌을 순회하는 악단을 조직, 본격적인 재즈맨이 되었다. 이 때 일본 문인들의 이름을 본 따서 요시야 쥰[吉屋潤]으로 행세했다.
10년만인 1960년 동경 스윙 오케스트라 악단을 인솔하고 서울에 귀국했고, 1962년에 「내 사랑아」라는 곡을 발표하였다. 1966년 다시 서울에 왔을 때 「서울의 찬가」를 동아방송을 통해 발표하였다. 그 해 연말 미국에서 돌아온 인기가수 패티김(金惠子)과 결혼, 신혼여행을 겸해 베트남을 위시하여 동남아와 유럽 등지로 순회공연 길에 올랐다.
1967년 홍콩에서 「빛과 그림자」를 발표하였다. 1969년 첫딸 정아를 낳았고, 정아가 만 20세가 되어 성인이 된다는 뜻으로 「1990년」이라는 곡을 발표하여 사랑의 선물을 노래하였다. 1971년 뉴욕에서 「이별」이라는 곡을 만들었으며 1973년 이들 부부는 정식으로 이혼했다.
1974년 동경(TBC TV 주체) 국제가요제에 참가하여 「사랑은 영원히」라는 곡으로 패티김이 입상(金賞)하였다. 1976년 오랜만에 「당신은 모르실거야」라는 곡으로 혜은이라는 신인가수를 발굴하였고 1977년 MBC TV 주최 서울가요제에서 「당신만을 사랑해」로 그랑프리를 획득하였다.
1977년 11월에는 한국을 대표하여 동경 야마하재단에서 주최하는 세계가요제에 참가하였다. 1978년 이 콤비는 제1회 뉴질랜드, 태평양가요제에 출전하여 금상을 수상했고 이 때 일본 빅타레코드사에서 1990년을 타이틀로 12곡을 일본어로 직접 앨범을 취입 출반했다.
1981년 경희대학교 대학원에서 「관악기연주자의 교합상태에 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79년 12월 이화여대 출신인 전연란(全蓮蘭)과 혼인하였다. 1981년 가요작가 박춘석(朴椿石)과 함께 태양음악주식회사 창설 기념으로 「길옥윤 전집」(LP 2매)을 출반했고, 1983년 서울예술전문대학 실용음악과 주임교수로 취임하였다.
1984년 2월 한국음악저작권협회회장(10대 회장)에 피선되었고, L.A.올림픽 문화행사에 참가하여 예일대학에서 한국의 전통음악리듬(세마치장단)과 재즈 음악과의 접목을 특강했다. 1985년 88올림픽 공식 주제가로 「아침의 나라에서」(김연자 노래)가 당선되었다.
1989년 신사동에 ‘창고(倉庫)’라는 야간업소를 운영하였는데 부채가 늘어나자 1992년 업소를 동경 아카사카[赤阪]으로 옮겼다. 동경에서 「애수(哀愁)의 색스폰」이라는 그의 히트곡 연주곡집을 CD로 출반했다. 1994년 4월 척추 수술을 받았고, 같은 해 6월 SBS TV에서 그의 마지막 콘서트가 방송되었다.
1994년 10월 부산 동래시민병원에 입원했을 때 「부산찬가」·「2002년」 등을 작곡하였다. 1995년 2월 김수환(金壽煥) 추기경으로부터 영세를 받았다. 투병 중에도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까지 300여 곡을 악보에 기록하였다.
1995년 3월 21일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연예협회장으로 영결식을 거행하고, 운구 때 패티김이 「서울의 찬가」를 눈물로 불렀다. 문화훈장 보관장을 추훈받았다. 1995년 10월 23일 세종로 공원에 「서울의 찬가」 노래비를 서울시에서 건립하였다.
그의 노래들은 1990년 이후 댄스음악위주의 환경속에서 잊혀지다가 2015년과 2018년 KBS 2TV '불후의 명곡-전설을 노래하다'(이하 '불후의 명곡')를 통해 다시 신세대들에게 알려졌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