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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 실명 소설(자전)/ 그래도 노무현과는…(전장 400장)
들어가며
노무현의 10주기가 바로 어제였다. 5월 23일…. 6년 만에 나는 진영 대창초등학교 맞은편 진영 노인대학에 강의를 하러 갈 준비를 헤 왔었다. 대창초등학교는 노무현의 모교다. 둘은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위치해 있다.
하지만, 김해 행 버스 타는 걸 포기하고 말았다. 왼쪽 어깨의 인대를 접합시키는 대수술을 받았기 때문이다. 일주일 되었다. 앞으로 두 달 이상 재활 치료를 받아야 한단다.
참으로 안타깝다. 분통도 터지고말고. 그동안 색소폰과 노래로 노무현의 애창곡 중 하나인 ‘허공’을 얼마나 열심히 연습해 왔던가? 하늘이 무심하다는 표현인들 못 쓸 까닮이 어디 있는가?
그러나 어쩌랴! 불가항력인걸. 대신 보조기 위에다 튼 타월을 두르고, 노무현과의 기가 막힌 인연을 중편소설로 엮는다. 등장하는 인물은 거의 실명이다.
<1>기구한 괴짜 초등학교장의 첫 걸음
‘기구하다’는 형용사 외에 다른 어휘가 없다. 내가 처음 노무현을 만난 사건 말이다. ‘운명적’ 만남? 너무 거창하다. 나는 한갓 장삼이사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리고 ‘적’이란 일본 식 표현 잔재라니, 구태여 내 자존심을 꺾을 필요가 없지 않은가?
하여튼 이야기를 이어 나가려니 적잖이 흥분된다. 미리 내비치는 게 석지만, 4백 장짜리 이 이야기는 진짜 소설보다 소설 같다고 장담한다.
노무현? 살아 있는 그를 처음 만난 것은 허태열과의 인연 때문이었다. 허태열이 누구냐고? 허태열을 모른다면 장담하건대 그는 우리나라 국민이 아니리라. 그만큼 그도 유명한 사람이고말고. 그의 마지막 벼슬은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다.
그의 근황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의 마지막 벼슬은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와 지금도 연락이 가능하다. 휴대전화 번호는 011 -311-292*이지만, 010으로 바뀌었어도 나머지 조합은 이은집 작가가 맞춰낼 수 있다. 아니면 이메일 주소(mailto:ws811*@na.go.kr)가 있으니 안부 정도는 전할 수 있다. 허태열과 노무현, 이해찬, 이회창 등과의 얽히고설킨 사연을 풀려니 조금은 난감하다. 여든을 두 살 앞둔 나이라 기억력도 그만큼 줄어들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팔을 걷어 부치자.
나는 솔직히 고백하면 가방끈이 짧다. 아무리 영남의 수재들이 모여드는 특차(特次)라 치자, 그래도 고등학교 과정인 부산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만 스무 살에 교사로 임용됐으니, 뒤늦게 기가 죽을밖에.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교장으로 승진하였으니, ‘학력(學歷)’ 이란 말 앞에 주눅이 들밖에. 하기야 교사 때 방송대 초등교육과 과정을 이윤택과 같이 마쳤으니 그 ‘학력’ 에 2년을 보태어도 무방하지만, 아서라 그게 무슨 의미가 있으랴. ‘부산 교육대학교 3년 중퇴’도 억지 춘향일 따름.
어쨌든 교육의 꽃이라 불리는 교장의 자리에 앉은 것은 1999년 9월1일이었다. 정년까지 5년 반 남은 날짜였다. 부산의 변두리, 강서구에 자리 잡은 가락초등학교. 나는 교장 자격증을 얻어 교장이 되었지만, 정작 ‘교장 자격’은 없다는 자격지심에 휘둘려 지내야만 했다.
술도 담배도 입에 대지 않는다, 춤(사교춤)도 출 줄 모른다, 고스톱은 민폐만 끼친다, 바둑도 못 둔다. 장기는 맥만 아는 정도. 대신 노래방에서 마이크를 잡으면 절대 놓지 않는다. 어쩌다가 녹차를 마시기 시작했었는데, 거기 심취하는 바람에 커피는 절대 마시지 않았다. 손님이 오면 내가 녹차를 달여 내놓았다. 이 정도면 리더십의 요건 하나도 갖추지 못했다는 비난을 어찌 듣지 않고 베길 있었으랴! 해거 나는 혼지 중얼거렸다. 입상 중의 밉상….그건 서러운 독백이었다.
게다가 나는 운전면허조차 없었다. 따라서 주위에서 ‘천연기념물’ 혹은 ‘인간문화재’라는 달갑지 않은 놀림을 받기 예사였다. 그럴 때마다 진땀을 흘릴 수밖에. 다행히 아내가 운전을 할 줄 알아 출퇴근 문제는 해결될 수 있었다. 물론 다른 직원에게 폐를 끼칠 때도 많았지만,
여기서 잠깐.
당시 가락초등학교는 좀 특별했다고 해야 하겠다.
6학급 짜리 해포 분교장(分敎場)이 따로 있었으니까. 본교는 6학급이었다. 거기다가 본교에도 유치원이 있었고, 분교장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입학식과 졸업식을 네 번이나 치러야 했다. 일주일에 한 번은 분교장에 내려가 근무했다. 버스가 있었지만 걸어서 왔다 갔다 하기 예사였다. 도로가를 말이다. 차들은 과속으로 달려 나 자신 다칠까 봐 아찔하기만 했다. 내가 그러니 어린이들은 오죽하겠는가?
분교장 어린이들은 48명으로 기억된다. 차라리 본교와 통합하여 스쿨버스로 통학하게 되면, 일거양득이란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교육청의 계획도 그거였다. 나는 수시로 가정통신문을 발송하고, 분교장 학부모들에게는 사신도 보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해포초등학교에서 분교장으로 격하된 것도 억울한데, 그것마저 아예 없어진다는 데 거부감을 가졌던 것이다. 그곳 졸업생들이 말이다.
어쨌든 본교와 분교장의 학구를 샅샅이 돌아다녔다. 어딜 가나 들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될 수밖에. 그런데 가끔 할머니와 할아버지들 더러 알은체를 했다. 그들은 내가 오랜 인연을 맺어왔었던 강서 노인대학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입을 모았다.
“학교에 어려운 점이 많지예?”
“이번 목요일에도 노인대학에 노래하러 오실랍니꺼?”
“우리 집에 가서 저녁 잡수고 가시이소.”
정말 시골 냄새가 물씬 풍기는 그 들판에서 잠시라도 머뭇거릴라 치면 고향에 온 느낌이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지금은 밀양시 산내면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는 사범학교 한 해 후배 고종렬 교장의 춘부장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그분은 저 멀리서 자전거를 타고 오고 있었다. 나는 왼쪽 도로 가를 걸어가는 중이었고. 한데 그분에 네 시야에 들어오는가 싶었는데 약간은 위태하게 자전거에서 내리는 게 아닌가!
고 교장과 나는 한 살 차이라 친구다 다름없는 사이다. 당연히 자전거에 앉아 내 인사를 받아도 된다. 하지만 그분은 달랐다. 자전거 핸들을 잡은 채 내가 민망해할 정도로 깊이 허리를 숙이더니,
“선생님, 나오셨는교?”
고 한 것이다. 난 눈시울이 젖는 걸 느꼈다. 내가 노인 학교 선생이고 당신은 제자라 스승의 예우를 해 준 것이다. 나는 이튿날 가정통신문에 이 눈물겨운 미담을 실어 본교와 분교의 학부모들에게 발송했다.
내가 만나는 귀한 분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 중 한 분. 롯데 강병철 감독의 춘부장 강종수 옹의 자택이 바로 가까이 있었다. 당연히 그분이 짓는 벼농사의 논도 바로 지척에 위치했고. 90년도에 대저초등학교 교감으로 승진하여 부임했을 때, 그분은 여든이 넘은 연세인데 동창회장 일을 보고 있었으니, 9년 동안이나 끈질긴 인연이 이래저래 계속되었던 것이다.
교감 시절에 만난 분은 또 있었다. 금수현 선생. 본래 그분은 김 씨였다더라. 네 번째 어머니슬하에서 자라 세계적인 음악가로 발돋움했다는 사실을 나는 당시 학구 내에 거주하는 그분들의 옛 친척들을 통해 알았다. 금수현 선생과 가끔 통화를 했던 터라, 그분의 생가에 가끔 들르기도 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강서구와 나의 첫 인연을 반추해 본다. 무엇 하나 남보다 나을 게 없는 나로서는 교감 승진까지의 과정이 가시밭길이었다. 그래도 경남에서 부산에 전입하고 보니, 일광초등학교에서 미감아반을 담임했던 게 결정적인 점수가 되었으니, 나는 한센 씨 병이라는 게 오히려 은혜였던 셈이다. 내가 처음 현장 쓴 현장 연구 논문 주제도 ‘미감아들의 생활과 인성에 r 였다. 산청 성심 인애원에도 더러 다녔고.
어쨌든 대한민국에서 가장 되기 힘든 ‘벼슬’이라는 교감이 되어 부임한 데가 대저초등학교였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점잖은 노인들이 몇몇 나를 찾아왔다.
“이 교감님, 7년 동안 토요일 오후마다 노인학교를 운영한다는 얘기 들었소이다. 우리 민요를 중심으로 수업한다는 신문 보도 자료도 갖고 있어요. 우린 강서 노인학교에 와서 수업 좀 해 주구려. 물론 강사 수당을 지불하지 못해 미안하지만….매주 목요일 오후 한 시간씩만 오면 됩니다. 내가 강병철의 아버지 강종수요, 이 학교 1회 졸업생입니다. 동창회 회장이고.”
“제가 그런 자격이 되겠습니까? 시원찮은데요. 그러나 무엇보다 교장 선생님의 허락이 있어야 되구요. ”
“걱정 마오. 그이 김동규 교장님과는 우리가 협의하도록 할 테니까.
그래서 나는 내 명함에 강서노인대학 무료 강사라는 직함이 하나 더 들어가게 되었다. 나는 녹차를 대접하면서 한마디 우스운 이야기를 건넸다.
“회장님, 승진해서 처음 학교로 들어서서 화단 옆을 지나치는데, 비석이 보이지 뭡니까? 개교육십주년기념비! 애견가라 자처하는 제겐 그게 ‘개(犬) 교육 십 주년 기념비’로 보이는 겁니다. 곧바로 ‘개교(開校) 육십 주년 기념비’로 바로 해석하긴 했습니다만.”
그래서 우린 한바탕 웃었다. 학교의 선배이기도 한 김동규 교장은 지역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건 학교로 봐서도 좋은 일이라며 격려를 해 주었다. 그로부터 2년 반, 부암초등학교로 옮기기 전까지 나는 정말 부지런히 강서 노인학교 강사를 일했다.
<경향 신문>에 우리 학교 시조창부 기사가 크게 보도된 것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나는 일찌감치 국창 정인경 선생을 모셔다가 평시조를 가리치도록 했는데, 이게 노인학교를 통해 소문이 난 모양이었다. 거제도의 노인들이 이 기사를 읽고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말했다는 것이다.
“임자, 부산 대처 초등학교에서 시조창을 가르친답니다. 이 고유의 정악(正樂) 달리 보급할 방법이 없겠소?”
귀임하자마자 김영삼은 문교부에 일러 검토하라고 지시했고, 그 다음 교육과정이 바뀔 때 ‘시조창 감상’이 포함된 것이다. 나는 그 주역으로서 아직 긍지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위에 들먹인 몇 가지 일화는 그로부터 28년간의 소용돌이 서막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가락초등학교 시절 이야기로 되돌아간다.
교장으로 부임한 지 두어 서너 달 되었을 무렵이다. 열한 시쯤 되었을까? 누가 날 찾아왔다. 마침 교장실에 승진을 축하하러 온 최향숙 아동문학가와 강정화 시인(현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한국전쟁문학회 자문위원)이 왔다 일어선 직후였다.
나는 그를 맞이하였다. 학교 앞에서 죽림가든을 경영하는 본교 출신 하태수 씨였다. 그는 젊었을 때 국가 대표 축구 선수로도 명성을 날렸고, 아시아 게임 조직위원회 사무실에 나가는, 말하자면 지역 사회 유지 되는 이였다.
나는 그와 총동창회 체육대회 때 인사를 이미 나눈 적이 있었다. 그날 모든 행사를 마치고 나서 운동장 청소를 말끔히 책임지고 해 주어서 깊은 인상을 주었던 그이!
그보다 그는 그의 자당이 강서 노인학교에 나가는 공분도 학생이었다는 점을 더 강조하는 게 좋겠다. 아흔 살이 넘었지만, 우스갯소리도 곧잘 하고 노래를 정말 ‘기똥차게’ 하는 자랑스러운 내 제자였던 것. 그러니 그는 내 제자인 아들인 셈이 된다.
우린 굳게 손을 잡았다. 내가 상석(上席)이 없는 내 방에서 여느 때처럼 녹차를 달여 대접했다. 이윽고 그가 약간은 심각한 표정으로 머뭇거리더니 반쯤 일어서서 허리를 90도로 꺾고, 운을 뗀다.
“교장 선생님, 정말 어려운 부탁이 하나 있어 왔습니다.”
“말씀하시지요.”
“2주일 뒤 일요일, 학교를 빌려 경로잔치를 하고 싶은데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당연히 학교 운동장을 빌려 드려야지요. 김건태 동창회장님이 왔다 가셨습니다. 식당도 쓰십시오.”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날 운동장 가에 동네별로 솥도 걸고 국밥도 끓이거든요. 제가 강서구 요식업(料食業) 친목회 회장입니다. 모든 걸 주관합니다. 멀리 가덕도에서도 상당수 주민이 오지요. 물론 주로 노인들입니다. 교장 선생님 제자들…. ”
“큰 행사 치르느라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시겠군요.”
“정작 저희로서는 해결하지 못할 과제가 있어서요.”
“뭡니까?”
그의 말인즉슨 당일 가수를 한 사람 초청하고 싶다는 거였다. 누구냐고 물었더니 잠시 머뭇거리는 그의 입에서 뜻밖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김상국 가수입니다. 하지만 그와 인연이 닿는 사람이 지역사회에 없다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다시 그의 이야기.
“교장 선생님은 발이 넓으니까 가능할 것이라고들 입을 모으더군요. 가수협회에 가입해 있으시지요?”
“부산연예협회 창작 분과 및 가수 분과 회원이긴 합니다만, 미미한 존재라….”
“PSB 부산방송 개국 기념 ‘부부 가요 쇼’에 출연하시던 모습을 지역 주민들이 많이 시청했습니다. 이택림 가수가 사회를 봅디다.”
“어쨌든 제가 나서 보겠습니다. 지금 김상국 선배는 시민회관에서 ‘악극 홍도야 울지 마라’에 출연 중이니, 제가 직접 만나고 올게요. 한데 출연료로 얼마를 계상(計上)하고 있습니까?”
“부끄럽습니다. 30만원입니다. 무리인 줄 압니다.”
성급하기만 했지 사려 깊지 못한 나는, 덜컥 이런 무모한 약속을 하고 만 것이다. 사실 김상국 가수에게는 30만원이란 턱없이 부족한 액수였다. 그러나 이미 엎어진 물이었다. 돌이킬 수 없는 내 허풍 내지 엄포의 과정을 생각하면 지금도 식은땀이 난다.
나는 하태수 씨가 돌아가고 난 뒤에 수첩을 뒤졌다. 하마터면 현직 교감으로 일과 시간에 가요 쇼에 나가 며칠 씩 녹화에 매달렸던 그 무렵, 구성 작가 신수옥 작가의 전화번호를 찾기 위해서였다. 가나다 가나다 순으로 적혀 있었던 터라 신수옥의 이름 석자는 내 눈에 쉬 발견되었다. 다짜고짜 김상국 가수의 휴대 전화 번호를 좀 일러달라고 다그쳤다.
신수옥 작가는 망설이지 않고 내 부탁을 들어 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신수옥 작가 또한 ‘부부 가요쇼’ 제작 때문에 고생을 이만저만 한 게 아니었으니 말이다. 사옥이 마련되지 않았던 터라, 허심청에서 처음 녹화를 하였다. 하지만 사장이 결과물을 보더니 시원찮다면서 다시 제작하라고 호통을 친 것. 1천 8백 만 원이 허공에 날아갔으니 어쩌면 당연한 귀결. 하지만 출연한 네 팀이 의기투합, 다시 응하는 조건으로 스태프 들을 그대로 쓰는 걸 내세웠으던 터, 신수옥 작가인들 어찌 불감청인정 고소원의 심정으로 되레 내 문의를 고마워하지 않을 수 있으랴.
나는 김상국 가수에게 당장 다이얼을 돌렸다. 신호가 갔다. 조마조마했는데, 그의 반응은 의외로 시원했다. “예, 김상국입니다. 누궁교?”
“김상국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강 건너 가락(駕洛)초등학교 교장 이원우입니다.”
“반갑십니다. 그런데 우짠 일잉교?”
5분만 통화하자고 운을 뗀 다음, 강서 요식업 친목회에서 개최하는 경로 잔치에 초청 가수로 모셔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이야기를 건넸다. 날짜를 말했더니 잘 되었다며 시민회관에서 만나잔다. 그 전날 가덕도에서 숭어제 녹화가 있는데, 그게 끝나면 바로 달려오겠다는 것이었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당신 아까 노인학교 무료 운영한다고 얼핏 했는데, 내 ‘쾌지나칭칭나네’ 알아?”
“아이고 알다마다요. 그건 내 노인학교 레퍼토리 중 하나입니다. 내가 불러 볼게요. 김 선생님은 후렴이나 해 보세요. 강원도 땅에는 감자도 많고….”
그는 ‘쾌지나칭칭나네’를 이어 붙였다. 여기까지기서야 끝이 났다. 영도섬 다리가 끄 떡끄떡 하루에 두 번씩 끄떡끄떡…!
“시민회관으로 오소. 만나서 조율하자구.”
출연료 이야기는 끄집어내지 않았다. 내가 먼저 30만원이라 밝히려하다가 그만두었다. 다 된 밥에 코 빠지는 형국이 되면 어쩌나 싶어서였다. 마음을 졸이면서 전화를 그렇게 끊었다. 만나서 그가 출연료 때문에 불만을 토로하면, 내가 점 보태기라도 해야 하겠다고 결심하였다.
약속한 날 토요일 오후 내 노인학교 수업을 마치고 자원봉사자인 백이성 북구 문화원장과 함께 시민회관으로 들렀다. 미리 이야기가 되었는지 뒷문에서 여고생 같은 느낌의 애들 서넛이 우리를 안내했다. 내가 물었다.
“자네들은 누군가?”
“양산대학 학생들입니다.”
“여긴 어쩐 일로?”
“도중에 춤을 춥니다. 백댄서에요.”
녀석들의 얼굴엔 그늘이 하나 없었다. 그만큼 하는 일에 긍지를 느낀다는 뜻이었으리라. 마침내 김상국 가수와의 첫 대면이 이뤄졌다. 그는 휴식 시간이라 발을 냉수에 깊이 담근 채, 조연들로부터 어깨 마사지를 받고 있었다.
“김상국 선생님, 제가 이원우입니다.”
“아, 그래. 수고 많구먼. 몇 살인교?”
“42년생입니다. 선생님은 34년생이시니 저보다 여덟 살 더하시는 셈이군요. 삼랑진 출신 남백송 형님이 37년생이시죠. 제가 형님이라 부릅니다.”
“좋지. 그렇다면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노 마. 나 보고 형님이라 불러. 난 이 교장을 아우로 부르고. 남백송도 나를 형님이라 부르거든.”
내가 마다할 리가 없다. 그로부터 나는 그가 작고하기 전까지 년 동안 그를 따랐다. 나는 형님이란 호칭을 떼고 그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내가 맺어왔고 맺고 있는 가요계와의 인맥(?)도 그의 덕분이리라. 한명숙 ‧ 고(故) 금사향 ‧ 고 남백송 ‧ 오기택 ‧ 차도균 ‧ 남진 ‧ 김흥국 ‧ 태진아 ‧ 정훈희 등등.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호사다마라고 할…. 당시만 해도 토요일은 쉬는 날이 아니었다. 오전 열 시쯤 하태수 씨가 학교로 나를 찾아왔는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하는 말이다.
“교장 선생님, 다른 준비는 다 됐습니다. 대개 백 명 정도의 노인이 모이리라 전망되는데, 간이 화장실 몇 개까지 만들었습니다. 조금 전 김상국 가수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녹화를 마치고 현장에서 마무리를 하고 나면, 아무래도 열 시가 넘어야 도착할 수 있겠다는 게 아닙니까? 30분 가량 늦겠다는 겁니다. 그 자투리 시간을 교장선생님이 좀 메워 주실 수 없을는지요. 어차피 교장 선생님은 출근을 하신다는 말씀 들었습니다.”
나는 짐짓 곤혹스런 표정을 지어 보이곤,
“제가 그것을 해 내겠습니까?”
고 손사래를 치는 시늉을 내어 보였지만, 속으론 이게 웬 떡이냐 싶었다. 강서구 전체 노인들 앞에서 내 실력(?)을 뽐낼 기회이기도 하니까.
“교장 선생님은 이미 강서구 토박이과 같습니다. 교장 선생님을 모르는 노인은 간첩이란 이야기까지 들린 지 오랩니다. 호흡이 척척 맞을 거구요.”
나는 못 이긴 척 승낙을 하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자조 섞인 고소를 나에게 날렸다. 아, 점점 괴짜 교장이 되는구나. (계속)
< 2> 그날의 난장판!
드디어 일요일 나는 이른 아침을 챙겨 먹고, 아내가 모는 아반테 승용차에 몸을 ㄹ은 체 학교로 향했다. 이상하게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차창 밖으로 저 멀리, 나와 깊고 깊은 인연을 맺어온 공군 제5전투비행단(5672부대)가 눈에 들어 왔다. 나는 아내에게 중얼거리듯 한마디 했다.
“양하윤 부사관이 오기로 했지, 오늘 말야.”
“당신 그분 너무 혹사시키지 말아요. 덕성토요 노인대학 무료 봉사가 이미 10년이 넘었을 텐데. 오늘은 덕성 토요노인대학 행사가 아니잖아요?”
“하긴 그래. 하지만 그가 오고 싶어 하는 데다, 마침 맥도 부락 노인학생 등 우리 노인 학교 노인학생들 등 30명 가까이 모인다니,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 모른 척 했어.”
여기서 잠깐 양하윤 부사관 이야기를 해야 하겠다. 88년이었으리라. 나는 교감 자격증을 얻은 뒤 내 집 가까운 화명초등학교에 부장(주임)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곧 발령이 나게 되어 있었다.
부대에서 실시하는 호국 문예에 참가하는 어린이들을 실으러, 공군 버스가 왔다. 인상 좋은 하사가 책임자였다. 나도 부대에 한 번가 봤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던 터라, 출장을 끊고 버스에 올랐다. 그가 내게 먼저 말을 걸었다.
“이원우 선생님, 저는 선생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 어떻게 나 같은 장삼이사를 안단 말이오.”
“선용 선생님 친구이시잖아요? 이래봬도 저 부산문협 회원입니다.”
“이거 반가우이. 장르가 동시야?”
“아닙니다. 시(詩)입니다.”
“김진삼 장군님이 단장이시잖아?”
“아십니까?”
“아다마다. 작년 말 내가 운영하는 노인학교 학생 87명을 인솔하여 대북시 여행을 했을 때, 공항까지의 버스 두 대를 지원해 주셨잖아. 그때 백차에 선임탐승한 장교가 있었지. 정주석 소령이라고. 자네 아나?”
“그럼요. 하지만 지금은 타 부대로 전출하셨습니다. 안 그래도 제가 선생님의 노인학교에 자원 봉사를 하고 싶었는데, 오늘 그 소원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허락해 주시지요.”
그게 발단이 되어 그는 나와 함께 마치 다투기라도 하듯, 노인학교에 근 20년 동안 발을 스스로 묶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나는 공군5672부대 호국문예심사위원장을 도맡아 했다. 10년을 넘겼다 물론 양하윤 시인도 동참했고. 어느 해엔 여군 중위가 원고 뭉치를 들고 우리 집에 찾아오기도 했다.
여담 또 하나.
호국 문예에 참가하는 어린이들 중 더러는 공군 장교 및 부사관 자제들이 섞여 잇었다. 심사를 하다 보면 녀석들의 신분(?)이 드러나기 되어 있어서 오히려 불이익을 당하기도 했다.
다시 그날 이야기. 학교에 도착해 보니 교문으로는 차가 들어가지 못할 정도였다. 학교의 상징인 푸르른 대나무 밭이 안 보일 정도로 운동장이 인파로 뒤덮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초청받은 노인들뿐만 아니라 심부름하는 사람, 식당 주인, 앰프 관계자, 기타 보조자, 일반 주민, 졸업생 등이 모여들었으니까. 게다가 어린이들도 상당수 와서 참새처럼 재잘거리고 있었다.
운동장 열기는 충분히 달아올라 있었다. 그제야 두근거리던 가슴이 진정되는 걸 느꼈다. 아니 차라리 얼른 저 간이 무대에서 수백 명 청중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으면 하는 특유의 근성이 꿈틀거렸다. 앰프에서도 경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양하윤 부사관이 약속대로 전투복을 입고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교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 둘에게 녹차 한 잔을 대접하고 작전 계획을 세웠다. 참, 녹차는 한 통에 30만원 주고 구입한 춘분차다.
“여보, 내가 오늘 30분 동안에 어떤 짓을 하든지 당신 이해하겠지?”
“다만 하나, 제발 ‘각설이타령’만은 하지 말아요.”
이윽고 하태수 씨가 노크를 하더니 문을 열고 하는 말이다.
“교장 선생님, 나오시지요. 준비 다 되었습니다. 노인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종종걸음으로 나아갔다. 거짓말 좀 보태면 노인들 중 반 정도는 내 얼굴을 아는 터라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내 주었다. 그래도 처음엔 약간 몸을 사려야 하겠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나는 자문자답을 했다.
“너, 현직 교장이지?”
“그렇고말고.”
“애들도 있는 데서니까 자중할 것! 알았어?”
“그래볼게.”
그러나 아침부터 완전 잔치 분위기였다. 이미 술기운이 얼굴을 불콰하게 만든 노인들이 왁자지껄 떠들기도 헸고.
나는 마이크를 잡고 두 개의 원형 무대 중 오른쪽에 올라서서, 맨 처음 아리랑을 뱃속 깊숙한 데서부터 뽑아 올렸다. 그런 자리에서 반주기 따윈 필요가 없다. 노래는 매들리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언제 번호 누르고 하나 말이다.
서산에 지는 해는 지고 싶어 지나/ 날 버리고 가시는 님(임) 가고 싶어 가나
후렴은 관중 몫이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바야흐로 1천명이 한덩어리로 뭉치기 직전이었다. 나는 다시 목청에다 2절을 실었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로 못 가서 발병 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청천 하늘에 잔별도 많고/ 우리네 살림살이 희망도 많다/ 아리랑…
내가 기대했던 반응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노인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나더니 내 무대 앞으로 몰려나오는 것이다. 얼른 보아, 강서 노인학교 학생들인 듯 얼굴이 익었다. 나는 계속 ‘아리랑’을 선보이다가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을 겸 여유를 갖기로 했다. 이렇게 부르짖은 것이다.
“여러분! 통일이 되어야지요. 모두의 숙원이지요. 그날, 다시 말해 남북한 겨레가 같이 어깨동무를 한다고 가정하십시다. 7천만이 같이 부를 노래로 우리 민요 외에 무엇이 또 있겠습니까? 통일을 앞당기기 위해서는 남녀노소 우리 민요를 불러야 합니다. 맞습니까?”
사방에서 와 하는 함성이 터졌다. 걷잡을 수 없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나는 민요를 계속해서 불렀다. ‘노들강변’과 ‘진도아리랑’ 등. 물론 그 정도야 대한민국 국민은 모두가 안다. 어린들조차도 따를 수 있는 우리 모두의 노래다. 나는 ‘진도 아리랑’을 입 밖에 내기 전에 부르짖었다.
“민요는 지역감정을 타파하는 데도 기여를 합니다. 경상도 사람이 ‘진도 아리랑’을 줄기차게 입에서 뿜어내는데, 그런 망국적인 정서가 발을 들여 놓겠습니까?”
‘노들강변’과 ‘천안삼거리’에 이어 내가 꼭 선사하고 싶은 ‘군밤타령’을 1천 명 앞에 쏟아내었다. 빠른 템포라서 신이 나기 때문이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연평 바다에 어어허 얼싸 돈 바람 분다/ 얼싸 좋네 하 좋네 군밤이여 에헤라 생율밤이로구나
나는 총각 너는 처녀/ 처녀 총각이 어허어 얼싸 신바람 났네(원래는 '막 놀아난다'다)/ 얼싸 좋네 하 좋네 군밤이여 에헤라 생율밤이로구나
시계를 들여다보니 어느덧 30분이 지나고 있었다. 만약 약속대로 그때 김상국 가수가 도착했더라면, 나는 무대에서 내려왔으리라. 맥도 부락에서 온 내 노인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거의 200명쯤 되는 구름 인파가 내 앞에서 흐느적거리고 있었지만, 그날 행사의 주빈은 김상국 가수였으니까. 이미 양하윤 부사관도 평소처럼 노인들 사이사이에서 손도 잡아 주고 춤도 추고 있었다.
그러나 내게 주어진 시간은 자꾸 연장되었다. 나도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마이크를 놓지 않았다.
나는 마침내 대중가요를 뽑아들었다. 내가 아는 흘러간 옛 노래가 5백곡 아니던가. 태국에 갔을 때 버스 안에서 나흘 동안 불러제끼던 추억이 새로웠다. 그 전가의 보도를 쥐고 휘젓기로 한 것이다. 워낙 잘 알려진 ‘비 내리는 고모령’
어머니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엔/ 부엉새도 울었다고 나도 울었소/ 가랑잎이 휘날리는 산마루턱엔/ 넘어오던 그날 밤이 그립습니다// 맨드라미 피고지고 몇몇 해던가/ 물방앗간 뒷전에서 맺은 사랑아/ 어이해서 못 잊느냐 망향초 신세/ 비내리는 고모령을 언제 넘느냐
숫제 눈을 감았다. 밀양군 단장면 국전리에서 삼십 리 고갯길을 걸어서 형님 댁으로 공부하러 가는 나를 앞을 잘 못 보는 엄마가 눈물만 흘리던 모습이 어른거렸다. 내 의지와는 달리 온 몸에 전율이 흐르고 목소리는 흐느껴져 세찬 물결처럼 허공을 갈랐다.
2절을 끝내고 보니 별천지가 내 앞에 전개되고 있었다. 스탠드 위와 천막 앞에 몇몇 젊은 부인네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거의 무대 앞으로 나와 내 앞에서 흐느적거리는 게 아닌가! 앙코르, 앙코르 소리 한 번 우렁차더라. 그때까지도 김상국 가수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큰소리를 쳤다.
“에라 모르겠습니다. 갈 데까지 갑시다!”
나는 지역감정 타파를 명분으로 앞세우고, ‘목포의 눈물’을 그야말로 절창했다.(절창이라는 표현이 거슬리지만, 혼신의 힘들 쏟았다는 것으로 이해해 줬으면)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 아씨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반응은 시간이 갈수록 가속도가 붙었다.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로….나는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두려움 따윈 잊고 있었다. 난 신음했다. 루비콘강은 이미 건넜다!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헤어지지 말자고/ 맹세를 하고 다짐을 하던 너와 내가 아니냐/세월이 가고 너도 또 가고 나만 혼자 외로이/ 그때 그 시절 그리운 시절 못 잊어 내가 운다.
호남에 목포의 눈물이 있다면, 영남엔 ‘해운대 엘레지’가 있다. 그 뉘라서 이를 모르리오. 때 아닌 ‘해운대 엘레지’가 꽃잎이 되어 운동장을 가로질러 날아다니고, 그 아래에서 백의(白衣)를 입은 ‘겨레’들이 한껏 춤사위(?)에 취해 즐긴다!
그렇게 20분이 흘렀건만 김상국 가수는 나타나지 않았다. 다행인 것은 내 귀에 이런 소리가 안 들린다는 점.
"김상국은 왜 안 와? 누가 교장 노래 들르려고 모였나? 원 참!"
아니 오히려 운동장에서의 내 비중은 오히려 확실하게 커져만 갔다. 나는 다시 ‘홍도야 울지 마라’를 잽싸게 후속탄으로 내던졌다.
사랑을 팔고 사는 꽃바람 속에/ 너 혼자 지키려는 순정의 등불/ 홍도야 울지 마라 오빠가 있다/ 아내의 나갈 길을 너는 지켜라
그때쯤엔 어린이들까지 일어섰다. 가락초등학교와 해포분교장은 물론 다른학교에서 구경 온 어린이들까지 말이다.
나는 약간 섬뜩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세상에 공개된 운동장에서 교장이라는자가 ‘홍도야 울지 마라’에 매달리고, 수십 명 어린이들이 손뼉을 친다? 저러다가는 급기야 녀석들마저 군무(群舞)에 합류할 게 아닌가 말이다.
나는 다시 불안에 휩싸였지만, 이미 망아지는 고삐가 끊어졌다. 나는 ‘앵두나무 처녀’를 수류탄처럼 운동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 처녀 바람났네/ 물동이 호미 자루 나도 몰래 내던지고/ 말만 들은 서울로 누굴 찾아서/ 이쁜이도 금순이도 반봇짐을 쌌다네
한 시간이 그렇게 흘렀다. 흐르는 땀을 훔치면서 교문 쪽을 바라보았더니 그제서야 김상국 가수가 약간은 지친 표정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나는 계속해서 ‘해조곡’을 불렀다.
갈매기 파도 위에 날지 말아요/ 연붕홍 저고리에 눈물 젖는데/ 저 멀리 수평선에 흰돛대 하나/ 오늘도 아아아아 가신 임은 아니 오시나
잠사 본부석에서 휴식을 취해야만 했다. 내빈들과의 정식 인사도 그때에서야 초처음으로 나누었음은 물론이고말고. 나는 그 자리에서 '괴짜'라는말폭탄 세례를 연거푸 듣기도 했다.
그런데 70대 중반으로 보이는 할머니가 찾아온 것이다. 할머니는 내게 가까이 다가오는가 싶더니
"상수야, 내 알겠나?"
난 미처 대답할 사이가 없었다. 주위에서들 모두 어리둥절해 했고. 그런데 어쩐지 낯이 익다. 할머니의 다음 말이 속사포처럼 이어졌다.
"내 추(秋)서방네 아줌마다. 기억나제?"
"아이고 아즈매, 여기 우짠 일이니꺼? '아침에 우는 새' "
나는 아주매를 끌어안았다.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가출 직전 붙잡혀 고향에 유배(?)되어 재수하는 1년 동안, 아즈매의 집에 가서 일가 친척들과 엄청나게 노래를 불렀었다. 5백 곡의 첫 단추인 셈이다. 북 치고 창구 치고 갈치 밥국 끓여 먹고--.
'아침에 우는 새'는 아즈매의 애창곡이었다.
아침에 우는 새는 배가 고파 울고요/ 저녁에 우는 새는 임 그리워 운다/ 나냐 너냐 두리 둥실 안고요/ 낮이 낮이나 밤이 밤이나 참사랑이로구나
그로부터 수십 년이 흘렀는데,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는 게 내 고백이다. 제목은 변함 없이 '아침에 우는 새'. 한참 뒤에 김정애 국악협회 부산지부장으로부터 그게 제주도 민요이면며 정식 곡목은 '너영 나영 타령'이라는 걸 들었다. 그런데 아즈매를 만났으니 그양 넘어 가겠는가? 나는 아즈매의 손을 잡고 무대로 가서 사회자에 아즈매를 소개했다.
물 이러 간다고 술 걸러 이고요/ 오동나무 나무 수플 속에 님 찾아 간다/ 나냐 너냐 두리둥실 안고요 낮이 낮이나 밤이 밤이나 참사랑이로구나
오동나무 열는 왈각달각 하고요/ 젖가슴은 몽실몽실하다/---
아즈매는 우리 종친이었다. 본래 김 씨 성을 가진 사람에게 시집 갔으나, 사별하고 제혼한 사람이 추 씨다. 사이에 딸 아이 하나가 있었는데 예쁘장했다, 나와 서로 좋아하는 사이, 그 사랑은 그러나 이루지 못했다.
아즈매는 우리 학구를 벗어난 곳에서 장어구이집을 한단다. 그 뒤로 교장 회의 등이 있으면 그리로 갔음은 물론이다. 참, '상수'는 어릴 적 내 이름이다.
여담인데, 이 ‘해조곡’이 김상국 가수와 나 사이의 인연을 끈끈하게 이어줄 줄을 몰랐다. 그가 알토 색소폰으로 연주하고 내가 노래를 불러 비디오로 만들어 각 경로당에 배포하자는 얘기까지 오갔으니….비 오는 날 밤 영도다리에서 연습도 했다. 하지만 오호 통재라, 지금은 그가 이승에 없으니 오로지 슬플 따름이다. 대신 나 혼자 ‘해조곡’을 부르고 색소폰 연주를 한다.
내가 속죄(?)해야 할 일이 그날 이어서 벌어졌다. 밤을 새워 녹화에 시달린 김상국 가수는 목소리조차 잠겨 있었다. 사회를 맡은 중년 남자가 모처럼 자기에게 넘어온 마이크를 잡고 김상국 가수를 소개했다.
“드디어 ‘국민 가수’ 김상국 선생이 도착하셨습니다. 숭어제 녹화 때문에 극도로 피곤하실 텐데, 여러분과의 약속을 지키시러 온 겁니다.”
박수 소리가 예상 외로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짐작한 대로 그의 전매특허인 ‘쾌지나칭칭나네’로 답례를 시작했다.
하늘에는 별도 많고 (쾌지나칭칭나네)
우리네 살림살이 희망도 많소이(쾌지나칭칭나네)
여기까지는 천천히 엿가락 늘이듯이 뽑더니, 갑자기 템포를 쁘르게 한다.
강원도 땅에는 감자도 많고(쾌지나칭칭나네)
그래서 별영이 감자 바우 아닝교(쾌지나칭칭나네)
서울 땅에는 빌딩도 많고(쾌지나칭칭나네)
그래서 그런지 아이도 많서(쾌지나칭칭나네)
가는 곳마다 바글바글(쾌지나칭칭나네)
산아제한을 해야겠소잉( 쾌지나 칭칭 나네)
그러고 나서 그는 진짜 문자 그대로 절창을 했다. ‘불나비’!
얼마나 사무치는 그리움인가/ 밤마다 불을 찾아 헤매는 사연/차라리 재가 되어 숨진다 해도/ 아아 너를 두고 가련다 불나비 사랑
그러나 그는 적어도 그 자리에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천하의 얼치기 교장인 나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모인 노인들은 상당수 나와 인간 관계가 있는 터이고, 스승과 학생 사이니 죽이 맞아떨어졌는데, 낯선 객 김상국 가수가 어찌 흥 돋우기를 나만큼 하랴.
이윽고 김상국의 노래는 끝났다. 그리 유쾌한 표정은 아니었다. 일흔을 이미 넘긴 그로서는 무리였으리라. 30만원의 출연료도 기덥잖게여겨졌을 테고.
나는 그를 교장실로 안내하였다. 아내가 물을 끓여 놓았던 터라 춘분차를 대접하렸고. 양하윤 부사관이 동석했음은 물론이고말고. 내가 입을 열었다.
"형님, 임진왜란 이듬해 일본 사람들이 이 근처의 우리 조상들을 동원하여 축조한 죽도성이 바로 저기 보입니다.바로 엎어지면 코 닿을 데에--"
"그래서?"
"가또 기요마사 즉 가등청정이 거기 관여를 한 겁니다. 그자는 우리나라 왜성 여러 곳을 쌓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
"형님, '쾌지나칭칭 나네'가 무슨 뜻인지 잘 아시지요?"
"아니 우리 민요이고 내가 가사를 바꾸어서 부른 것일 뿐이지. 무슨 뜻인가?"
"장사훈 박사가 쓴 <민요대사전>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그분은 그 책 찰고를 하고 나서 바로 한쪽 눈을 실명했다던데. 하여튼 가등청정이 얼마나 악랄하든지, 그자가 나타나면 '가등청정 오네.'하고 경계를 하다 보니 굳어졌다는 얘깁디다."
"아, 이 교장 물건이네. 고맙소."
우리 넷은 그길로 왕복 20분여 걸리는 죽도성(오봉산 45미터)를 향해 출발했다. 나는 김상국 가수가 달라지는 모습을 눈여겨 보았다. '영도섬 다리가 끄떡끄떡'이니, '싱싱한 칼치 사이소" 등이 줄어 들고 본래 가사를 좇은 것이다.
(3)허태열‧ 노무현과의 만남/ 그 의미
그 뒤로도 나는 목요일과 토요일에는 어김없이 노인학교에 나갔다. 그건 사실 버거운 일이고도 남았다. 특히 토요일엔 오후에 쉬어야 할 텐데, 그러지 못하니 항상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그래도 남들 앞에서는 큰소리를 쳤다.
“노래를 부르면 스트레스가 풀리니 오히려 내 건강에 도움이 되니, 노인학교 운영은 일거양득이야.”
물론 일리가 있긴 하다. 하지만 그 지론(?)에 수긍할 이웃이나 동료가 얼마나 되었을까? 아마 손가락질을 되레 더 많이 받았으리라. 만 7년째 난 노인학교 운영을 해 온 데다가, 주 1회는 남의 노인학교에서 강사 노릇을 해 왔으니 회의를 느낄 만도 한 터?
게다가 아내마저 목요일 오후마다 내 노인학교에서 무료로 한글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한 번씩 가 보면 마흔 명 안팎의 노인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노인 학교 건물?
참으로 사연이 많다. 83년도에 덕성초등학교의 교실 한 칸을 빌려 문을 열었던 게 그 시초였다. 유흥조 교장에게 건의를 하였더니 전적으로 협조를 해 주는 게 아닌가? 토요일 오후를 반납하고 학구 내 노인들을 모셔다가 민요를 가르치겠다는 내 의견! 언뜻 누가 교장이라도 찬성 쪽에 방점을 찍겠지 짐작하겠지만, 그건 아니다.
나는 내친김에 북구청 등록 2호인 진짜 노인대학의 책임자(학장)으로 취임(?)한다.
단 1원도 회비 따위를 안 받는다는 조건으로. 만약 내가 수익성이 있는 일을 한다면, 그건 공무원법에 위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무원은 두 가지 직업을 가질 수 없다는 것쯤 알고 있었다. 참, 1호는 북구 노인회에서 개설한 ‘북구 노인학교’였다.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단연 인기를 얻은 노인학교로 발돋움했다. 학구 내 어쩌고저쩌고 하지만, 그건 아무 제약이 될 수 없었다. 스무 평 짜리 교실에는 항상 120명 이상의 노인들이 모여들었으니까.
양하윤 부사관을 비롯한 백이성 북구 문화원장, 이병수 경성대학교 이과대학장(노인대학 부학장으로 자청), 이숙례 색동어머니회 부산 지회장, 정옥희 바이올리니스트, 황정혜 피아니스트, 김광종 색소포니스트 등등의 자원 봉사자도 몰려들었다.
공군 부대 강상길 중사가 이끄는 군악대(임의 단체)가 공연을 왔을 때는 170명의 노인들이 교실을 가득 채우고 복도까지 점령했다. 연일 신문에 보도되고, 방송에도 나갔다. 몇 해가 그렇게 흘러간 거다.
그런데 세 번째 부임한 이원희 교장(가명)이 브레이크를 건 것이다. 이미 다른 학교 교감으로 나간 사람이, 남의 학교 교실에서 떠들고 하는 게 거슬린다는 것. 한겨울에 그는 우리를 거리로 몰아내었다.
마침내 유네스코 부산협회에서 초청한 오노다 시 무용단 공연도 취소해야 할 형편이었다. 전국대회에서 선보였으나, 우리 노인학교에서 한 번 더 공연하고 싶다는 소원이어서, 교실 문을 열어 달라고 애원했으나 이 교장은 끝내 거절했다. 그러나 죽으란 법은 없는 모양, 문정수 전 의원의 개인 문화원 공간에서 우리는 그 공연을 관람했다. 우리 측에서는 색동 어머니회의 입체 구연동화로 화답했고.
아무튼 이 사건으로 이원희 교장에 대한 여론이 악화 일로를 걷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교육감의 압력까지 견뎌냈으니, 그 배짱 하나는 알아 줄 만했다 하자. 여기서 잠깐. 내가 학생들로부터 회비를 징수하고 거기서 수당을 챙겼더라면? 이원희 교장은 나를 형사 고발하기라도 했으리라. 그만큼 그는 집요했다. 몸서리쳐질 정도로….
그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나를 도와 준 사람이 둘 있으니, 정형근 국회의원(북 강서갑)과 권익 구청장이었다. 둘이서 내 딱한 사정을 알고 협의, 특별교부금인가 뭔가 하는 예산 1억 3천 9백 만 원을 확보, 덕천동 경로당 2층에 조립식 건물 2층을 올려 준 것이다. 연면적 34평, 의자 80개, 최신 앰프, 기타 집기 등. 우리는 그렇게 마침내 최고 노인학교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단 목요일과 토요일 오후만 문을 열고 평소에는 비운다. 누구든 활용을 하려면 내 허락을 얻어야 한다. 아내도 그렇게 동화되어 가던 참이다.
해가 바뀌었다. 내가 외근을 끊어 놓고(근무 상황부에 자필 사인만 하면 된다.), 학구를 한 바퀴 돌고 돌아오니 마치 최근 시간이 되어 있었다. 왜 외근이냐고? 조그만 사고라도 나면, 그 책임을 면하기 위해서였다.
마침 김해시로 들어가는 버스가 보이길래 손을 들어 세웠다. 도중 불암동에 내려서 갈아 타면 집으로 가기 쉬워서다. 그런데 불암동에서 나는 삼랑진 출신 부산 중고등학교 손기덕 선배를 만났다. 그가 말을 건넸다.
“이원우 씨, 교장이 되었다면서?”
“예, 형님, 여긴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아, 나는 여기서 미곡 상회를 열고 있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그걸 제가 모르고 있었군요.”
어쨌거나 그는 나를 가게 안으로 끌어 들였다. 커피를 끓이는가 싶더니, 부산 중고등학교 동창회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본래 자기는 평강 부락(대저초등학교 학구 내)에서 같은 장사를 했는데, 오래 전에 이리로 옮겼다더니, 그래도 청조회(부산중고등학교 동창회) 북구 강서구 지회 월례회에 나간다는 것. 나더러 거기 왜 얼굴을 내밀지 않느냐는 은근한 질책이었다.
나는 얼버무리듯 대답했다.
난 부산 중학교를 겨우 졸업했고, 부산사범학교에 진학했다. 물론 부산중고등학교가 동창회를 통합해서 운영하는 걸 알고 있지만, 어쩐지 이질감을 가진다. 청조회 회원들은 의사 등 출세한 사람이 많다. 일종의 자격지심 탓이다, 내가 거기 안 나가는 것은….
내 고백을 듣고 그가 보인 반응이다.
“여보, 교장이 미곡상 주인보다 못하오? 다음에 나오시오. 그건 그렇고 당신 허태열을 아나?”
“아뇨. 처음 듣는 이름입니다.”
“한나라당(새누리당) 북 강서을 위원장에 임명된 친구요.”
“그가 어떤 인물입니까?” “우리 동창이야. 이 교장이 통산 24회라 했지? 이 친구는 17회요. 서른아홉 살에 충청북도 지사를 지낸 인물이지.”
“아, 그래요? 똑똑하군요.”
“내가 당의 일을 조금 본다네. 얼마 안 있어 그가 당신을 찾을 거요. 차나 한 잔 대접하고 이야기 나누소.”
“예.”
나와 허태열의 만남은 그렇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에게서 전화가 왔길래 약속 날짜를 잡은 것이다.
똑똑 노크를 하고 들어선 그는 퍽 몸을 사렸다. 혼자서였다. 90도로 허리를 꺾어 인사를 하는 그에게 나는 맞은편 의자에 앉기를 권했다.
“선배님, 저 허태열입니다.”
“늦게 인사를 나누게 되어 유감입니다.”
“제가 게으른 탓이지요. 용서하십시오.”
“별 말씀을.”
“형님으로 부르게 해 주십시오. 잘 모시겠습니다.”
“…….”
허태열의 첫 인상은 좋았다. 그리고 겸손했다. 여러 가지를 화두로 시간을 보냈다. 이윽고 그는 내 노인학교와 강서 노인학교 이야기도 들었다고 덧붙였다. 그가 또 입을 연다.
“형님, 왜 교장석이 없습니까?”
“어쭙잖은 내 철학이 있어서입니다.”
나는 그 사연을 설명했다.
“배상도 선배님(시의회 부의장 및 북구청장 역임)이 말씀하셨어요. 시장이 구청장실에 오면 당연히(?) 구청장은 자리를 양보한다. 구청장이 동장실에 오면 마찬가지다. 그러나 문교부 장관이 교장실에 오면 교장석을 탐하지 않는다. 그것도 모른다면 장관 자격이 없다!”
“아, 맞는 말씀이군요. 저도 지사로 있었지만, 시장이나 군수 자리에 당연한 것처럼 앉았거든요.”
“어쨌거나 그런 오해가 없게 하기 위해서 교장석을 없앴는데, 마음이 편해요. 그건 그렇고.”
“예? 말씀하십시오.”
“이해창이 말이오. 그 친구 미워하는 소리가 하늘을 찌를 듯합니다.”
“아니 형님, 그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 당 총재님을 그렇게 욕하시다니….”
“아 위원장님 미안! 내가 ‘이해찬’이라 했는데, ‘이회창’으로 들으셨구려.”
우리 둘은 그야말로 파안대소했다. 행정실장이 창문을 들여다보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올 정도였다.
사실 그 무렵 교장들에게 이해찬의 인기는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교육공무원의 정년을 65세에서 62세로 만든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나 자신 2년 반 ‘손해’를 봐서 8년 동안 교장으로 근무할 수 있었는데, 그가 들어 5년 반 끝에 물러나게 만들었으니 그의 얼굴을 쳐다보기도 싫은 건 너무나 당연했다. 대신 이회창 총재는 정년을 되돌린다는 약속을 해 오고 있는 터였다.
어쨌거나 이회창과 이해찬의 극명한 오해는 두고두고 화제가 될 수밖에. 지금도 우습다. 그 뒤로 자연스럽게 우리 둘의 만남은 이어졌음은 물론이다.
그걸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보자.
난 노인학교와 문학을 초등학교 교육보다 우위에 두고 삶을 살았다. 어디 가든지 76년도부터 문학을 해 왔으니, 그 또한 그런 명분을 쌓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고나 할까?
그런데 내 노인학교 건물이 정말 희한하고 묘한 위치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게리맨더링(Gerrmanderng)인가 뭔가 하는 제도를 여기서 예를 들어 들먹여 보자.
부산 북구 강서갑 선거구(1)와 북 강서을 선거구(2). 내가 정확히 기억해 내지 못해서 오류가 있을지 모르겠다만, 1선거구는 구포 1‧2‧3동, 만덕 1 ‧2‧3동과 덕천 1‧ 3동을 포함한다. 2선거구는 강서구 전체와 화명 1‧2 동이다.
그런데 2선거구의 선거권자가 기준에 약간 미달한다. 그래서 덕천 2동은 따로 떼어 2선거구에 갖다 붙였다.
내 노인학교는 덕천 1동에 새 건물을 지어 그리로 옮겼지만, 옛날 학생들이 다니던 덕성초등학교는 덕천 2동에 위치해 있다. 말하자면 덕천 2동과 3동의 학생들이 제일 많으니, 국회의원 출마자들은 그 ‘황금어장’을 외면할 수가 없다. 적어도 1천 표는 왔다갔다 하게 하는 키를 우리 노인 학교가 쥐고 있었던 것이다.
그걸 간파한 정형근 의원과 허태열 위원장은 수시로 부부 동반하여 노인학교에 드나들었다. 노인학생들은 열렬히 환영하였고. 문정수 전 의원도 마찬가지였다.
인사를 하기 전에 통과 의례가 있었다. 부부가 손을 잡고 ‘부산 노래’를 한 곡 부를 것! 그건 내가 부산 노래를 취입한 적이 있고, 부산을 사랑해야 다른 지방도 사랑한다는 내 지론 때문이었다. 물론 강제 사항은 아니었지만, 누구든 경청은 해야 할 불문율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노무현은 지혜롭지 못했다. 정보에도 어두웠고.
내 노인학교는 방학도 공휴일도 없이 토요일엔 문을 연다. 허태열과 정형근은 기회가 있으면 무조건 토요일 오후에 노인학교를 방문한다. 북구에서는 최고 많은 학생이 모여드는 노인학교, 때로는 200명이 수업을 받을 때도 있는데….
그렇게 몇 달이 또 지나갔다.
어느 날 허태열 위원장한테서 전화가 왔다.
“형님, 저 허태열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3월 20 일, 강서 노인학교가 개학식을 한답니다.”
“이미 소문을 들었어요, 나더러 강사 대표로 나오라던데….”
“꼭 나오세요. 노무현 후보와 같이 참석하기로 했습니다."
“걱정하지 말아요. 그러나저러나 그 친구와는 처음 만나는 셈이 되겠군요.”
약속 날짜 시간에 맞추어 나는 강서 노인학교에 나갔다. 택시를 탔다.
그날따라 학생들은 빈자리가 없을 아니 보조 의자를 들여놓아야 할 만큼 많이 모였다. 내빈석에 보니 구청장이며 시의회 의장 등이 앉아 있다. 약간 떨어져 내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 시의원 및 정당 관계자, 비서 등이 자리를 잡았고.
주인공이랄 수 있는 노무현과 허태열이 들어섰다. 당연히 나도 일어서서 인사를 건넬밖에. 그런데 허태열의 말이다.
“형님, 오늘도 수업하실 거지요? 강사로 혼자 오셨으니 당연하지요.”
이 말을 듣는 노무현의 표정이 달라진다.
이어서 식이 시작되었다. 사무국장이 몇몇을 소개했다. 그러곤 그가 말을 맺는다.
“오늘도 여러분을 위해 이원우 교장 선생님이 오셨습니다. 노래나 실컷 부르십시오.”
노무현은 어리둥절해 했다. 이원우 교장? 교장이 여기 뭣 하러 온단 말인가? 하여튼 노인학생들은 다시 한번 박수를 보냈다. 허태열은 먼저 일어났다. 나가면서 크게 소리 질렀다.
"형님 수고하이소."
노무현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드디어 내 수업이 시작되었다.
“오늘 제가 귀한 분을 모시고 수업하게 되었습니다. 노무현 후보에게 박수 한 번 보내십시다. 노무현 후보의 애창곡 중 하나인 ‘외나무 다리’를 제가 부르겠습니다. 복사꽃 능금꽃이 피는 내 고향/ 만나면 즐거웠던 외나무 다리/ 그리운 내 사랑아 지금은 어디….”
표 앞에서 장사(壯士) 없다는 명제를 노무현이 실증해 보이기 시작했다. 그가 노래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전혀 세련되지 않은 어색한 폼이었다.
내 학구 둔치도에서 온 김영란 학생이 손을 들더니, 하는 말이다.
“교장 선생님요. 우리 둔치도 경로당에 화투 치러 온다고 하더니 왜 약곡을 안 지키는 기요.”
“그랬군요. 미안합니다. 대신 황금심의 ‘낙화유정’을 부를게요.”
낙화 유정 뒷골목에 누구를 찾아/ 정든 고향 뒤에 뒤고 흘러온 타향…화투장에 점을 치며/ 맺은 날짜 애태우며 맺은 날짜/ 애태우며 기다리는 여자라오
일국의 대통령이 될 사람인 줄 몰랐지만, 그 앞에서 현직 교장이 일과 시간에 노인학교에 나와 화투장 어쩌저저쩌고 하는 노래를 부르다니 좀 심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이왕지사는 나에게도 노무현에게도 마찬가지. 둘은 그렇게 이어 나가다가 ‘허공’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 우리 소설가협회 상임이사가 ‘맺은’ 날짜가 아니라 ‘내도(來到)’ 날짜가 맞단다.
하여튼 나는 유세 장소에 두 번 가 봤다. 한 번은 합동 한번은 노무현 단독.
내가 다음 임지가 되고 만 명덕초등학교 운동장에 연설을 들으러 갔을 때, 허태열은 지역감정을 너무 부추기는 듯한 발언을 했다. 나는 저게 아닌데 싶어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누가 등을 두드리기에 돌아봤더니 정형근이다.
“교장 선생님, 저거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허허”
나는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노무현은 항변으로 지역감정을 불식시키자고 강조했다.
내가 사는 금곡동 어린이 놀이터에서 노무현의 단독 유세가 열린다는 홍보를 듣고 나가 봤다. 연설이 끝나고 나서 비교적 앞자리에 앉은 나를 발견하고 노무현은
“아 교장 선생님?”
하고 알은체를 하였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사후에 그를 만난다.
선거 결고 득표수까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허태열이 이겼다. 그 뒤로 그는 내리 3선을 했다. 나에 대한 호칭이 바뀌어 갔는데 형님에서 선배님으로 다시 교장선생님으로--. 별 의미은 없다. 다만 그 과정에서 자칫하면 내가 선거법을 어겼다는 소릴 들을 법도 한데, 그런 일이 없었다. 하늘의 도우심이다.
여기서 잠깐 ‘허공’은 엄청난 파장을 뒷날 이끌어 온다. 후일담이 만만찮다는 걸 예고라도 해야 할 것 같다.
(4) 노무현의 죽음/ ‘따라 죽고 싶다’니…
아래는 09년 6월 3일자 조선일보 <편집자에게>에게 실린 내 졸고다. 전문을 그대로 옮겨 놓고 이야기를 전개해야 누구든 오해가 줄어들리라.
지금은 신문을 읽지 않으니 그 <편집자에게>에게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 하여 튼 그 당시만 해도 상당히 비중이 있는 칼럼 비슷한 논조의 글이었다. .
참, 같은 지면에 (오피니언) 숙명여대 언론 정보학부 강미은 교수의 ‘오바마밖에 없나’/ 이철행 전국 경제인 연합회 규제개혁팀 이철행 차장 ‘학교 용지 무상 공급 부당’)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거(死去)하기 며칠 전 오후였다. 나는 김해 노인회 진영분회의 노인대학에서 ‘목포의 눈물’ 등 일제 강점기의 우리 노래를 지도하고 있었다. 노 전 대통령이 졸업한 대창초등학교가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물론 박연차 게이트 수사가 한창이라 그것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일주일 뒤 다시 그곳에서 노래 수업을 하고 있었다. 추모의 뜻을 담아 노 전 대통령의 애창곡 중 노인학생들에게도 친숙한 ‘부산 갈매기’, ‘외나무 다리’, ‘허공’ 등을 골랐다. 인터넷을 뒤져 찾은 건 것이다. ‘상록수’는 악보를 구할 수 없어서 그만두었다.
칠판 한쪽에 고인을 애도하는 글귀도 적어 보았다. 10년 전 부산 강서노인대학에서의 추억이 떠올랐다. 당시 국회의원에 출마한 노 전 대통령과 초임 교장이던 나는 그곳에서 나란히 ‘외나무다리’를 불렀다. 하니 진영노인대학에서 노래 수업을 하는 동안 만감이 교차할 수밖에.
실망스럽게도(?) 노인학생들은 평상심을 잃지 않았다. 동향인, 그것도 대통령을 지낸 분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이 작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데 몇몇 할머니(‘여학생’이라 부른다.)들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그래도 자살은 안 되지….청소년들이 본받을까 두렵습니데이.”
그런 의미에서 보면 5월 30일자 A26면 시론 ‘슬프다 슬프다 슬프다’의 필자는 언어 선택에 신중을 기했어야 했다. 물론 그 필자의 참뜻은 마지막 문장에 압축된 대로 “죽은 뒤 그 관을 두드렸을 때에 나는 소리의 청탁(淸濁)에 의해 역사가 평가를 내린다”일 것이다. 그렇더라도 “지금 우리는 슬프다 슬프다 못해 노 대통령을 따라 죽고 싶다”라는 그의 표현은 안 된다. “따라 죽고 싶다” 운운은 망발이다.
물론 갑남을녀라도 그 말을 액면 그대로 해석하지는 않으리라. 그러나 고인이 떠나는 모습을 텔레비전을 통해 지켜보던 여대생이 스타킹으로 목을 매 자살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벼랑 끝에 선 사람이 이런 정황을 접하고 모방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또 하나, 고인에 대한 예우 차원이라고 해도 ‘-께서’, ‘세상을 버리셨다’는 등 지나친 경어 사용이 거슬린다. 공적인 글에서 지나친 경어 사용은 거듭 신중을 기해야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로 족하다.
노무현의 사거에는 다른 의미에서 이 땅의 많은 젊은이들에게 전하는 메시지 또한 담겨야 한다. 그는 가톨릭 신자로서 하느님께 죄를 지은 것이다. 송기인 신부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장례식에서 하던 말이 다시 귓전을 맴돈다.
“주님, 죄인 유스토의 영혼을 받아 주소서.”
고인의 염원 중 하나가 지역주의 타파였다. 영호남을 번갈아 넘나들며 ‘목포의 눈물’이나 ‘부산 갈매기’ 등을 부르고 싶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여기서 잠깐.
앞서 강서 노인학교 개학식 이야기를 했었다. 그걸 다시 더듬으며 이어나가야겠다. 황금심의 ‘낙화 유정’을 그날 노무현 후보 앞에서 부른 건 일종의 몽니였다. 거기에는 이런 뜻이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당신이 노인 학교의 의미를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세월을 다시 선거 직후로 되돌린다. 나는 여전히 노인학교에 줄기차게 나갔다. 목을 맸다는 표현이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미쳤다는 이야기가 오히려 어울렸다고나 하자.
학교 울타리 밖의 일에도 여기저기 관여했다. 학교를 명덕초등학교로 옮기고 나서 북구 문인협회를 창립하고, 내 노인학교에서 출판 기념회를 열었다. 정형근 의원이 참석했다. 동시에 북구 문화예술인협회장 직도 맡았다.
유네스코 부산협회 사무국장을 거쳐 부회장에도 취임했다. 전국 대회가 있으면 참석할 수밖에. 금요일 밤일 경우 엄청난 택시비를 쓰고서라도 귀가했다. 토요일엔 노인학교 수업을 해야 하니까.
북구의 거의 모든 문예 행사(백일장 및 독후감 공모 등) 심사 위원장을 하느라 코피를 쏟다시피 했다.
아시아 경기대회 성화 봉송 주자로 선임되어 연습에 돌입하고, 때맞추어 ‘부산 가요제’(가칭) 준비위원장으로 취임(?)했다. 권익 청장에게 건의했더니, 북구 특색 사업으로 선정하여 각 동사무소를 통해 홍보까지 한 것이다.
북구 문화원 자문위원도 내게 부여된 임무였다. 어디서든 노래를 부르고, 가요 대회 심사에 참여했다. 경찰 악대에 맞춰 노랠 부른 가수로 현철을 문화원 이도희 사무국장이 섭외하는 대신, 나는 대학의 두 교수를 만나 출연을 약속받았다. 소프라노 김문희(부산대), 테너 장원상(경성대)….
그 외에 자질구레한 것은 오히려 밝히지 않는 게 나을 듯하다. 다만 하나만 덧붙이라면 이거다. 10월 중순경에 북구 시민 문화제가 열리는데, 거기 조선 시대의 곡물 하역 작업을 재현하는 행사가 포함되었으렷다?
나는 추위도 모르고 속옷 하나에 얇은 간편복을 걸치고 구포역 앞 앞 옛날 나루터로 나갔다. 낙동민속보존회 여자 회원들이 모여서 노 젓는 흉내를 내고 있었다.
그런데 세상에 나더러 아래위로 홑바지 저고리를 입으라는 게 아닌가! 하는 수 없이 그대로 따랐다. 상투도 올렸다. 물론 실제가 아니고 그런 모자 비슷한 것을 썼다는 뜻이다. 하지만 날씨가 너무 추웠다. 아래윗니가 맞부딪쳤다. 나는 민속보존회 회원들을 앞에 두고 뱃노래 앞소리를 외쳤다.
만경창파 풍랑 헤치며 노 젓는 뱃사공/ 갈매기 벗을 삼고 흘러만 가누나
어기야 디여차 어기야 디여 어기 여차 뱃노래 가잔다(후렴
작년 같은 흉년에도 이밥을 먹었는데/ 올 같은 처녀 풍년에 장가를 못 드나
어기야 디여차…
강바람이 세찼다. 내 입술이 새파래진 걸 보고 어느 여학생(노인학생)이 소리로 외쳤다.
“우짜노? 우리 선생님 불알 얼겠다!”
그런데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조선 시대 공물 하역 작업을 할 무렵에 ‘뱃노래’라는 민요 자체가 없었으니 그게 모두 난센스였으니까. 정형근 의원은 안다.
내 행복은 그리 길지 않았다. 나는 큰 불행을 당하는 것이다.
간질을 앓는 어린이가 내 방에 와서 쓰러지고, 병원에 옮겼지만 끝내 깨어나지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되고 만 것! 나도 그 충격으로 거리에서 졸도하고 이 세상에 있는 병이란 병은 다 앓게 된다.
지구 교장 회의를 마치고, 일행은 음식점에서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앉아서 고스톱을 치고 놀았다. 다른 때라면 거기 계속해서 앉아 있었을 텐데, 그날은 기분이 영 나지 않았다. 나는 서둘러 일어서고 말았다.
거리가 얼마 안 되어서, 걷기로 했다. 30분쯤 걸려 학교에 도착해 보니, 오후 일과가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알코올램프에 불을 붙이곤 석간수를 주전자에 담아 얹었다. 이내 물이 끓었다.
그때 한 어린이가 들어선 것이다. 평소에 내 교장실로 심심하면 찾아오는 정학선이었다. 나는 녀석을 자리에 앉혔다. 그런데 얼굴 표정이 심상치 않다. 내가 물었다.
“학선이 왜 어디 아프니? 얼굴빛이 안 좋구나.”
“교장 선생님, 맞았…”
“뭐라고?”
녀석은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그대로 무너지고 말았다. ‘맞았…’이라는 대답을 나는 해석하지 못했다. ‘마잗’ 혹은 ‘마자’으로만 들렸으니까. 맞았다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도 있지만, 임의로 더 이상을 덧붙일 수도 없었다.
어쨌든 교감이 와서 녀석을 부축해 나가고 나는 불길한 생각에 휩싸인다. 인근 종합 병원으로 급히 옮긴 것까지 확인하고 난 뒤에 한참 있으려니, 동아대학교 부속 병원으로 이송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리고 두어 시간 후 보건 교사가 청천벽력 같은 녀석의 부음을 전해 왔다.
“교장 선생님, 학선이가 숨을 거두었습니다. ”
보건 교사(당시 양호 교사)는 울먹였다. 비상 대기해 있던 전 교사는 일제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어린이의 사체 앞에서 학부모 둘과 그의 친척들이 몰려와 앉아 있는데, 모두지 말을 건넬 수 없을 정도로 살벌하다.
여기까지가 당일의 이야기다,
그 다음부터는 정말 인간의 힘으로는 견디기 어려운 일을 겪는다. 학선이가 5교시 시작 종소리를 듣고 교로 들어가면서 친구들한테 흙먼지를 던진 게 사고의 발단이었다. 친구들이 화가 나서 주먹으로 장난 삼아 몇 대 쥐어박았는데, 그길로 학선이는 교장실로 찾아온 것이다.
뒷일은 이런 자리가 아니면 다시는 들먹이지 않아야 할 정도로 비참하게 진행되어 갔다. 검사가 육안으로 보더니
“구타가 사인이 아니야.”
라고 했는데도 학부모는 학교 측에 항의를 했다. 나의 빈맥을 동반한 공황 장애는 그때 시작되었다. 사체 부검도 했다. 주먹 운운에 관계되는 어린이들은 무혐의로 사건에서 벗어난 게 다행이었지만, 사체를 운동장에까지 싣고 들어와 아이를 살려달라며 울부짖었다.
나는 제대로 대응할 능력을 잃고 있었다. 이런 이야기가 들려왔지만, 그걸 학부모에게 되돌릴 엄두도차 못 냈다. 짧은 전말이 이렇다.
학선이는 평소 간질병 약을 복용해 왔다. 일주일 전에 놀이터에서 늦게까지 놀고 있는 학선이를 아버지가 붙잡아 와서 꾸짖는다는 게 그만 몇 대 쥐어박고 구석으로 밀어넣다가 냉장고에 머리를 세게 부딪히게 했다는 것. 그일주일 동안 간질약 대신 항생제를 먹여왔는데, 그 전날 병원에서 실밥을 뺐다는 게 아닌가?
그러니 내가 교장으로서 직접 책임을 질 일은 아니었으되, 길 道와 옳을 義. 과녁 的이라는 세 음절이 그렇게 무거운 짐인 줄 깨닫지 못했다. 의사만 자그마치 70명이 내 몸에 손을 대고, 크고 작은 수술 내지 시술만 네 차례. 정신과까지 무시로 출입했다. 공황 장애. 우울증, 대인기피증, 극심한 불면증 등의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나머지 벼은 수십 가지.
그러니 내 생을 내가 스스로 마감한다는 생각인들 왜 아니 가졌으리라. 세상에 필설이 무슨 소용이 있나? 그 비참한 상황의 반의반도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식물 교장으로 내 방에 병풍을 치고 그 뒤에 간이침대 위에 드러누워 집무 아닌 집무를 했다. 눈물을 흘릴 힘도 없었다. 교육청에서는 사표를 받아 주지도 않았다.
그러나 하늘은 나를 첫 번째로 살려 주었다. 겨우겨우 정년퇴임까지 버텨내고 야인 아니 폐인으로 집에 돌아와서도 차도는 없었다. 학부모에게는 3천만원의 위자료를 지불했는데, 우리가 모은 1천 1백 만원, 부산 교육청에서 구상권 청구 않는 조건으로 1천 9백 만원….
6개월 교리 교육을 받고 천주교 영세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택시를 타고 중앙 성당(주교좌) 노인학교에 가서 한 시간 수업을 했다. 서지도 못하고 앉지도 못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살아 계신 주’(복음 성가)를 불렀다.
주 하느님 외아들/ 예수 날 위하여 오시었네/ 내 모든 죄 다 사하시고/ 무덤에서(지금은 ‘죽음에서’다) 부활하신 나의 구세주/ 살아 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 근심 전혀 없네/ 사랑의 주 내 갈길 인도하니/내 모든 삶의 기쁨 늘 충만하네
나는 눈물을 바가지로 쏟았다. 교감 교장 시절에 가끔 강사로 초청을 받아가 노랠 지도했으므로 정이 들 대로 든 노인학생들도 여기저기서 통곡을 했다. 월남하여 국제시장에서 포목 장사를 하여 더러는 성공한 학생들과 더 울고 싶었다. 그래서 부른 노래가 ‘함경도 사나이’
흥남 부두 울며 찾던 눈보라 치던 그날 밤/ 내 자식 내 아내 잃고 나만 외로이/ 한이 맺혀 설움에 맺혀 남한 땅에 왔건만/ 부산 항구 갈매기의 노래조차 슬프구나/ 영도 다리 난간에서 누구를 기다리나
그건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이애치애’이란 말을 나는 어느 새 만들어 머릿속에서 굴리고 있었다. 슬픔으로 슬픔을 없앤다?
거짓말 같지만 그로부터 나는 기운을 차리기 시작한다. 퇴임할 때 학교에서 얻어온 낡은 오르간(폐기 대상)을 서투르게 연주하면서, 복음성가를 밤낮으로 불렀다. 그리고 녹음하여 잘 때도 들었다.
예서 고백하자. 지금 내가 한 달에 한 번씩 개신교 방송인 부천 경찰 방송에서 복음 성가를 부르고 녹화하는 것은 그때 쌓은 실력(?) 덕분이다.
나는 서서히 모든 병에서 회복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내게 손을 내미는 곳이 있었다. 이미 물러난 내 노인학교가 아닌, 시내 천주교 부선 노인대학이며 개신교 부선 노인대학에서 강사로 오라는 요청이 쇄도한 것이다. 천주교 부산 교구에서는 내게 ‘천주교 부산 교구 은빛 사목 지원 단장’이라는 벼슬을 하나 주었다. 부산 교구 노인대학의 전체 노인대학 강사 발굴 및 지원, 이게내 임무였다.
참으로 많이 다녔다. 부산 경남 곳곳에. 단 시간당 5만원이라는 수당이 따라다녔다. 수월찮게(?) 돈을 벌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범학교 동기인 박건수가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이 교장, 당신 시간 좀 내 줘야겠네.”
“무슨 소리야?”
“내가 일찍이 학교를 그만두고 시청에 근무하다 정년퇴임한 걸 자네도 알잖아?”
“알다마다.”
“지금 김해시 노인회 사무국장 일을 보고 있으이. 우리 노인회에서 김해노인대학과 진영노인대학을 운영하네.”
“그것 참 좋겠네. 그런데?”
“자네가 수업을 좀 해 줘야겠소. 주 1회. 한번은 김해 또 한번은 진영에 말일세.”
“그러지 뭐. 나도 노인학교라면 신바람 나지. 건강도 회복되었고.”
“고마우이. 수당은 5만원일세.”
처음 간 곳이 진영노인대학이었다. 120명 정도 되어 보이는 노인학생들로 교실은 비좁았다. 내 잔뼈가 굵었었고 통산 12년 근무했었던 삼랑진 출신이 두서넛 보였다.
출발은 역시 노래였다. 내게도 그들에게도 천당이나 낙원이 따로 없었다. 흘러간 옛 노래를 마구 쏟아내고 주워 담았다.
“와 대단하다!”
“괴짜 아니 스타가 따로 없네.”
이런 탄성이 사방에서 터졌다.
마침내 ‘이별의 부산 정거장’, 그걸 토하면서 내 특유의 막춤을 선보였다.
슬픈 노래에 2/4박자 폭스트로트라니 안 맞는 조합이다. 그러나 그런 그냥해 보는 소리지, 대중가요의 정체성이 본래 그런 거 아니던가?
수업이 끝날 무렵에 노무현 이야기가 나왔다. 나도 그가 도로 건너 대창초등학교 출신이란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의 부인 권양숙이 동창이란 것도. 다만 하나 더 김영삼 대통령 부인 손명순도 대창초등학교를 졸업했다는 건 처음 들었다.
아무려면 어때? 나는 솔직히 말해 그들 세 사람에게 관심이 별로 없었다. 내가 부산에서 지하철에서 버스로 환승해서 한참 오다 보면 노무현이 사는 마을 봉하 부락 안내 표지판이 있다. 나는 그걸 건성으로 보고 지나쳐 왔던 것이다. 노무현을 머리서나마 다시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일지 않았던 것!
언론에서 떠드는 것과는 달리 노인학생들의 노무현에 대한 정서도 생각보다 담담했다. 노인학생들은 담이라도 쌓은 듯 노무현을 외면하는 눈치 같았다. 그들의 대화 속에서 가끔 노무현의 장인 이야기가 튀어 나오기도 했다.
어쨌거나 나는 진영 노인대학과 김해 노인대학에 번갈아 다녔다. 김해에 가면 학교 바로 밑 경로당에 들어가 학생들과 고스톱을 쳤다. 진영에서는 반드시 대창초등학교에 들렀다. 손명순이 기증한 게시판도 보았다.
하기야 이런 탄성인들 왜 아니 터지랴.
“와, 한 학교에서 대통령과 영부인 둘이 나오다니!”
그러던 중 노무현이 부엉이바위에서 투신해서 유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그 주일에도 어김없이 진영노인대학에 가서 수업을 했다. 칠판에 분필로 이렇게 써 놓고.
謹弔
노무현 전 대통령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결코 ‘서거’라 하지 않았다. 바로 이웃 삼랑진에 사는 송기인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으니, 선종(善終)이라고 하려다가 그것도 그만두었다. 그는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노무현과의 과거 인연을 소개하며 ‘허공’을 부르자고 제안했다. 그의 애창곡이어서기도 하지만, 워낙 명곡이라 노인학생들 모두가 찬성했다.
그 뒤로도 반드시 우리는 ‘허공’을 입에 올렸다. 말이 필요 없는 추모의 곡으로서 그 이상은 발견할 수 없을 정도인 ‘허공’
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장 죄가 많은 나에게 하느님은 벌을 주셨다. 아이가 먼저 저승으로 떠난 것이다. 조선일보에 실은 그 못된 기사를 아이에게 보여 준 것이 빌미가 되었다고 강변하자.
세상에서 가장 큰 불행이나 슬픔은 부모가 참척(慘慽)을 당하는 거다. 마리아도 예수님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냈기 때문에 ‘참척’ 운운하지만, 인간의 세계와 비교할 수 없다. 나는 죄인이다.
(5)어릴 적 얘기(산 손님/공비)
나는 모든 걸 정리하고 부산을 떠났다. 물론 고향 밀양과의 이별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정이 들었던 진영노인대학과도 마찬가지. 실로 어처구니없는 천리 타관에서의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 온 이후 초등학교 동기들과의 만남이 자주 이루어지니 그게 좋았다. 나는 밀양시 단장면 태룡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중학교에 응시했으나, 처음엔 실패했다. 다시 한 해 삼랑진 송진초등학교에서 재수를 해서 그 명문 부산중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자연히 초등학교 동창회 두 군데에 나간다. 태룡 26회, 송진 9회…. 이상하게도 송진 쪽은 친구들이 워낙 저세상으로 먼저 별로 남지 않았다. 하지만 한 해 후배인 노윤길과 안창회가 서울에 산 지 오래라, 가끔 근교의 산에 오르기도 한다.
자, 우선 삼랑진 이야기를 해 보자.
예로부터 삼랑진이라면 좀 별난 고장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시제(時制)며 순서 따윈 뒤죽박죽이 되어도 좋으니, 그야말로 배꼽을 잡게 하는 큰처남의 ‘일갈(一喝)’부터 추억 삼아 소개해 보자.
난 29살에 송진초등학교에서 십여 리 떨어진 숭진(崇眞)초등학교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그리고 몇 달 후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교사로 발령을 받은, 스무 살 배경숙을 만난다. 부산 토박이인데, 나는 배경숙을 공략한다. 내 구애에 넘어간 배경숙과 나는 그로부터 3년 동안 연애를 했다.
좁은 학구 내에 소문이 날 대로 났으니 결혼을 해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막상 그 지경에 이를게 되었는데, 큰처남 될 친구(나보다 세 살 아래)가 브레이크를 건 것이다.
“경숙아, 신랑이 어디 사람이라고?”
“오빠, 삼랑진요.”
“나는 반대다. 하나뿐인 여동생을 삼랑진 사람에게 시집보내다니. 삼랑진 사람 정말 못됐다. 해병대에서도 삼랑진 사람은 별도 취급한다.”
“…….”
어쨌거나 나는 배경숙에게 면사포를 씌우는 데 성공했다. 내 아니 서른두 살 때. 아내는 스물아홉 살. 그로부터 3년 더 한 학교에 둘이 같이 있었으니, 참 인심 좋은 시절 신혼 생활을 한 셈이다. 결혼 전 3년과 합하면 6년! 73년도였으니 그로부터 49년이 지난 셈이다.
나는 학창 시절 총 6년간 기차 통학을 했다. 경전남부선 열차를 타고. 부산에서 삼랑진을 거쳐 마산까지 왕복하는 깨진, 창문이 태반은 된다고 해야 할 정도의 형편없는 객차를 ‘미카’며 ‘파시’ 이름을 단 기관차가 끌고 있었다.
악명 높은 역이 있었으니, 진영과 삼랑진, 구포 등 세 개였다. 거기엔 두서너 명씩의 소위 ‘가다’들이 있었다. 지금까지 나는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지만, 더러는 고인이 되었으니 밝힐 수가 없다.
하나만 부연하자. 통학생들의 수로 봐서는 구포, 삼랑진, 진영 순이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주먹다짐이며 박치기로 바람을 가르던 그 가다들의 모습이 눈에 떠오른다. 그들은 전설과 다름없었다.
그들은 걸핏하면 플랫폼이나 객차 안에서 치고받기를 해댔다. 자귀 등 흉기도 동원했고. 가끔 ‘곱배’라고 화물을 싣는, 그러니까 측면에 오르내리는 문 하나만 만들어 놓은 것도 달고 다녔는데, 그 공간은 폭력으로부터 치외 법권이었다. 현역 군인들과 학생들이 패싸움을 벌이면, 후자들은 린치를 가하고 달리는 그 곱배에 매달려 올라탄다. 다음 역에서 하차하여 유유히 사라지기도 하였다.
나야 뭐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그런 풍경에 익숙해 있었다. 예비교사라 할 수 있는 사범학교 3학년 때까지. 20세기 칠성파 두목(이강환?)이 이끄는 폭력배 몇몇과 혼자 맞서 싸우는 김용만(가명) 형을 보고 혀를 내두르던 생각도 난다. 나도 사범학교 때는 기율부장을 지냈으니, 소위 일대일 ‘다찌 플레이’를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열차 안 등에서 소란을 피운 적은 없다.
노무현은 대창초등학교와 진영중학교를 거쳐 부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던 걸로 알고 있다. 말하자면 진영 사람인 것이다. 하지만 그가 나처럼 악동으로 지냈다는 기록은 읽지 못했다. 품행에 대해서 남들로부터 얘기를 들어 보지도 못했다.
반장의 가방끈을 칼로 끊어버린 적이 있었다? 아서라 그 정도로는 그런 세계에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
출신 학교 이야기를 좀 해보자.
진영중학교와 나의 부산중학교를 비교한다는 건 무리다. 부산중학교는 당시만 해도 경남중학교와 함께 영남 최고의 명문이었다.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한들 이의를 걸 사람이 없으리라.
부산사범학교와 부산상업고등학교는? 글쎄다. 취업 면에서는 어땠을는지 모르지만, 사회 통념상 항상 전자가 우위에 있었다. 졸업 후 무시험검정으로 초등학교 2급 정교사 자격증을 주고 바로 임용했으니까. 그리고 말이다. 부산사범학교는 특차였다.
경남고등학교와 부산고등학교 시험을 보기 전에 우선 선발하는 ‘특차’. 그러니 두 학교와 부산사범학교 신입생들의 기초 학력이나 두뇌를 갖고 따지자면, 그 결과야 뻔했다.
부산상업고등학교는 4위쯤에 해당되었다. 인문계 남고등학교와 또 다른 실업계 부산공업고등학교 등등이 좋은 학교로 이름나 있었다.
진영중학교나 부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노무현. 나는 그저 그가 모범 청소년이었다고 생각한다. 착각은 자유?
내가 임의로 상상해서 소설처럼 꾸민 면도 있지만, 노윤길이나 안창회 같은 친구들도 동의하리라. 그리고 가끔은 이와 비슷한 논리를 우리는 펴기도 한다. 하여든 삼랑진과 진영은 별나다.
여기서 잠깐!
사범학교 졸업을 할 때 내 성적은 최상위, 덕분에 발령을 진해 대야초등학교에 받았다. 4위까지가 부산 시내가 첫 임지였고, 내가 5위라진해 대야초등학교에 적을 두게 되었다. 6위인 문성호가 마산이었다.(남학생 120명 중)
삼랑진에 살 때였으니 집에 왔다 갈 땐 경전남부선 열차를 탄다. 어김없이 진해를 지나야 했고. 가끔 진영에 내려 학창 시절을 되돌아보곤 했다.
그로부터 반세기 뒤에 진영노인대학에서 늙은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다니, 어쩌면 인생은 장난 같다는 생각을 첫 강의 때 했다. 내가 우스갯소리를 던졌으니….
“여기 앞에 앉은 남학생 중에서 옛날 저를 진영역 대합실에서 때린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요.”
학생들은 기대(?) 이상의 폭소를 터뜨렸다. 진영! 그런 고장이다.
대신 태룡초등학교 동기생들을 만나면 화두가 엉뚱하게 공비(共匪) 쪽으로 몰리기 예사다. 김무원, 김인섭, 김정철, 강성룡, 안우상 등등이다. 앞이 넷은 무릉동 출신인데 그 친구들도 어지간히 공비들을 보면서 자랐다. 우리는 흔히 저들을 빨갱이 아니 뺄갱이로 불렀다. 저들은 우리에게 ‘산 손님’이라 내세웠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호칭은 ‘뺄갱이’가 대세였다.
하여튼 그 시절 저들과의 접촉 면면이 영화처럼 재현되어 오누나. 새삼스럽게 흥분되기도 하지만, 뭐 주저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다. 그래 이왕 내친김이다. 써 내려 가보자.
어릴 때 아주 어릴 때부터 밤중엔 30호쯤 되는 우리 동네의 개들이 일제히 짖어대기 시작했다. 그건 뺄갱이들이 약탈을 목표로 입구에 들어섰다는 신호였다.
이윽고 저들은 다발총을 앞세우고, 저들이 우리 집 사립문을 밀친다. 아버진 면사무소 호병계장을 그만두고 낙향해 있었는데, 빨갱이와 맞닥뜨리기 전에 뒷밭으로 몸을 숨겼다.
저들은 신발을 신은 채 방문을 열어젖힌다. 그리고 엄마와 누나들을 윽박지른다. 양식을 내어 놓으라는 것이다. 앞을 잘 모지 못했지만 엄마는 지혜를 발휘, 쌀독 바닥을 긁는 척 하면서 약간의 곡물을 떠서 저들에게 건넸다.
우리 집에는 음지 양지 섬땀 등 국전리 3개동 가운데 유일하게 재봉틀이 하나 있었는데, 그걸 안 빼앗기려고 거름더미 속에 감추는 걸 나는 보았다.
하지만 저들의 모습이 그때까지만 해도 뚜렷하게 각인시키지 못했다. 워낙 어린 데다가 무섭기만 해서 눈을 제대로 뜨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윽고 나는 저들의 생생한 강탈 현장을, 그것도 대낮에 보게 된다. 그날 나는 친구들과 논바닥에서 막대 치기를 하고 있었다. 친구가 막대를 진흙에 힘껏 뿌려 박히게 하면, 내가 다시 내 막대로 그것을 덮친다. 상대의 것이 바닥에 수평으로 닿는다 치자. 내가 이기는 그런 놀이다.
그렇게 몰두해 있는데, 석유 장수가 기름통을 메고 큰소리로 외치며 우리 가까이 오고 있었다.
“석유 사이소. 석유요.”
석유 장수는 지게를 내려놓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한눈에 보아도 눈길이 사나운 사나이 둘이 뒷짐을 지고 사나이에게 다가가는 게 아닌가! 그러면서 쑥 내미는 게 다발총이었다.
“동무 돈 다 내어 놓으라우.”
우린 정말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각자의 집으로 도망쳤다. 바로 등 뒤에서 다발총이 불을 뿜는 듯하였다. 집에 와서도 사시나무 떨 듯 하는 나를 보고 엄마가 달래 주는 바람에 겨우 진정이 되었다. 그 시절을 되새기면 지금도 모골이 송연해진다.
그래도 저들은 함부로 동네 사람의 목숨을 잔인하게 빼앗는 일 등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녀자를 겁탈하는 일 따위도 없었다.
그러나 저들도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강탈해 갔다. 한 번은 여남은 빨갱이들이 동네에 들이닥친 것 같다는 엄마와 누나의 이야기더니, 이튿날 우깟 댁 암소를 몰고 같다는 게 아닌가? 저들은 소를 끌고 가다가 도중에서 도축해서 머리와 내장, 껍질만 남겨 주고 살코기는 몽땅 아지트로 운반했다고 했다. 우깟 댁은 그렇게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소를 잃어버렸다.
내 고향 밀양시 단장면 국전리는 그렇게 뺄갱이들에게 모든 게 노출되어 있었다. 위의 소 강탈이 거짓말 같다고? 아니다. 사실이다. 저들은 단장면과 양산군 사이의 거점에 정미소까지 차려 놓을 정도로 세(勢)가 이만저만 아니었다. 그러니 십 리쯤 더 들어가는 갓꼴의 피해야 오죽했겠는가? 몸서리가 쳐진다.
그래 봤자 그걸로 끝이었다. 경찰들이 와서 먼 산을 보고, 엠원인지 뭐지 모르지만 수십 발의 총탄을 날리곤 철수하기 예사였으니까. 대신 군인들은 달랐다. 그들은 용감하게 저들과 싸웠다. 그리고 이겼다.
가끔 그 교전에서 빨갱이들이 사살되는 겨우 그 사체를 우리 동네 입구 야산에 묻었다. 그 무덤 위에 얹힌 이상한 색깔의 빨갱이 모자를 보면서, 우리는 혼비백산하여 그 자리를 벗어나기도 했다.
그 와중에 아버지가 어느 날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김진필(가명)이 뺄갱이 단장면 총책이데이. 나는 그 놈과 친구였능기라.”
“요즘 우리 국전리에 출동한다 카더라.”
우리에게 그 이상의 두려운 일이 없었다. 그가 아버지를 찾는다면? 눈앞이 캄캄한 일 아니고 뭔가. 하지만 다행히 저들이 아버지를 해코지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김진필은 그 서슬 퍼런 위세를 실제 한 번 동네에 와서 보여 주었다. 그날은 태서댁 아즈매 집에 잔치가 있었는데, 우리 일가여서 엄마와 누나 둘은 일을 도와주고 있었다. 나도 따라가 저녁까지 얻어먹고 졸려서 평상에 누워 있었다.
그때에 갑자기 김진필 일행이 들어선 거다. 15명쯤 되는 병력을 이끌고서. 전부 다발총을 들었다. 양지 마을은 경주 이 씨 집성촌이라서 그날 태서댁 아즈매 집에서 노래도 일손도 도우고 집안이 왁자지껄 했다.
김진필은 모든 행동을 중지하고 자기들을 따라 나서라고 했다. 어느 명령이라고 거역할 것인가? 게다가 저들은 도망이라도 치면 사살할 거란 엄포를 놓았다.
우리는 후들거리는 걸음으로 저들을 따라갔다. 그러자 김진필은 장광설을 늘어놓는데, 내가 알아들을 수 있을 턱이 없다. 도중에 그가 하는 말이다. 누나의 설명이다.
“이종탁이라고 나와 동문수학하던 친구가 있었는데, 서당을 운영한다는 말도 들었소. 면사무소 호병계장을 지냈으니, 반동분자지. 하지만 보고 싶소. 내가 가까운 시일 내에 찾아오겠다고 전해 주시오.”
엄마와 누나는 와들와들 떨었다. 나는 영문도 모르고 울었고.
이튿날 야단이 나고 말았다. 지서에서 순경이 나오더니
“엊저녁 냇가에 따라 간 사람은 모두 오후에 지서로 나올 것!”
라고 한 것이다. 어린이도 예외가 아니란다. 수십 명이 그렇게 지서로 끌려갔다. 때로는 한 사람씩 때로는 두서넛씩 다 들여다보이는 지서 사무실에서 취조를 받았다. 양지 마을에서 머슴으로 지내던 장년 둘은 그날 지서에서 많이 맞기도 했다.
가장 곤욕을 치른 사람은 엄마와 누나였다. 그들은 끝도 없이 꼬치꼬치 캐물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버지는 명망 있는 한학자요 면내에서 인심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별탈은 없었다. 다만 그 충격으로 아버지는 정신력이 많이 약해진 것 같았다. 일제시대 호병 계장으로 지냈던 게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모르겠다.
그 뒤로도 공비들 때문에 상상조차 못할 피해를 입었으니, 엄마가 섬땀에서 아버지와 함께 음지로 건너오는 중, 적과 아군의 교전이 있어 엠원 유탄이 뒷목에 박힌 것이다. 아버지는 소피를 본다고앉은 채 바지를 내리고 있었단다. 다행히 탄환은 반쯤 들어갔기 때문에 손으로 빼고 된장을 발라 치료하였다.
그러나 엄마는 그 사건으로 인해 일상에서 엄청나게 공포심을 느꼈다. 밤중에 큰소리를 질러댔는데, 마구 흔들어 깨워야만 했다. 엄마가 그랬다.
"상수야, 니가 깨워라이, 안 그라면 내가 죽는다. 뺄앵이한테 총 맞는 꿈 꾸는기라."
다행히 김진필은 명을 다하게 되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말했다.
“진필이 그자가 사살되었다 카더라. 양산 깊은 곳 아지트에서….”
“정말 다행이네요.”
“그자가 기역자로 된 바위굴에 숨어 있었는데, 아군이 아무리 투항을 권해도 꼼짝 않더라는 거야. 총을 아무리 쏘았지만 r 자로 꺾어졌으니 총알이 미치지도 못했다는 기라. 양식도 몇 달 먹을 걸 준비했다 안 카나. 아군이 굴 입구에 생솔가지르 불을 지펴 연기를 안으로 들여보내고 보니, 숨이 막혀 그자가 뛰어나오는 걸 쏘아 죽였다 안 카나? 빨갱이 다섯 명이 죽었단다.”
“인자 아버지 진필이 걱정 안 해도 돼겠네요.”
“그렇다. 너거들 걱정 많이 했제?
빨갱이들이 저지른 최악의 만행은 수틀리면 집에다 불을 질렀다는 사실이다. 내가 지금도 기억하기로는 두 집이 방화로 인해 완전 소실되었다. 동네 사람들의 불이야
하고 울부짖늕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머리속에 각인되어있다.
그 뒤로도 동네는 뺄갱이들의 출몰로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경찰 병력으론 저들을 막아내기 역부족이라 군인들이 주둔한 것이다. 많은 병력은 아니지만, 군인들은 소위 경비실이라는 돌로 축조한 건물(?)에서 지냈다. 그러고 나서 빨갱이들의 출현이 조금은 잦아들었다.
나는 어린 나이에도 군인들이 신기해서 경비실에 친구들과 놀러 가기도 했다. 군인들은 우리를 반겨 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상한 광경을 목격한다.
누가 남루한 옷차림, 그것도 반나(半裸)의 여자를 붙잡아 경비실에 인계한 것이다. 어린 내가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미친 여자?
그런데 그 여자를 군인들이 가혹하게 다루는 것이다. 공비라는 혐의를 씌우는 것 같았다. 여자는 이쪽에서 뭐라고 해도 횡설수설이었다. 기괴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마침내 군인들은 여자를 발가벗겼다. 나는 생전 처음 여자의 맨몸을 보았다. 물론 치부도….그 충격이 지금도 잊어지지 않는다. 여자는 지서로 인계되어 갔는데 그 후문은 못 들었다.
‘미친’이라는 형용사는 또 다른 사건으로 나를 나락으로 몰아넣는다. 동네에 이상한 개가 한 마리 와서 으르렁거리고 쏘다녔다. 군인들을 보고도 짖었다. 군인들은 단순해서 그런지 ‘미친개’ 즉 광견으로 간주했다. 총으로 사살하기로 결정할 수밖에.
낌새라도 차린 듯 냇가로 도망가는 개를 엠원으로 쏘았다. 그러나 녀석이 쉬 맞을 리 없었다. 총알이 피해 가는지 녀석은 까마득히 사라지는 듯했다. 그러나 숨을 돌린 군인들의 추격도 만만찮았다.
양지에서 음지로 건너온 놈은 입구의 열녀문 (우리 경주 이 씨 문중 것) 뒤로 치달았다. 워낙 쫓기던 녀석이라 잠시 멈추어 선 사이에, 어느 병사가 뿜은 불질에 고꾸라지고 만 것.
근데 그 뒤가 문제였다. 미확인 소문에 의하면 군인들이 녀석을 삶아 보신탕으로 먹었다는 것! 모두가 전쟁의 상흔이다.
우리들의 그 시절 놀이 하나가 생각난다. 여러 거지 총알 껍데기 측 탄피를 주워서 갖고 노는 것도 재미있었다. 인민군 장총은 발사 시 ‘따콩’소리가 난다. 학교까지 십 리를 뛰어가다 보면 밤새 일어났던 교전으로 저들의 장총 알 탄피가 여기 저기 쌓여 있기 예사였다. 그건 먼저 보는 사람이 임자였다. 그렇게 주워 모은 탄피를 호주머니에 넣고 달리면 철꺼덕철꺼덕 하는 묘한 금속음이 났고, 거기서 짜릿함을 느꼈다. 등굣길이나 하굣길에 그걸 따먹는 놀이! 그 시절이 오늘 따라 그리운 건 웬 까닭일까?
그로부터 60년 뒤에 진영에 나타나 내가 그 노인학교 학생들에게 생생하게 이야기를 전하다니 불가사의하다. 역사가 잔인하다는 느낌도 든다.
(6) 노무현의 장인과 장모
사실 노인 학교에서의 강의란 그리 쉽지 않다. 아무 열심히 해 봤자 학생들이 못 알아듣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21년 동안 매주 토요일 오후 죽자사자 운영해 왔었던 내 덕성토요노인대학이라고 해서 예외일수 없었다.
어느 해 부산에서 유명한 장경자(가명) 수필가가 온 적이 있다. 82년도에 <한국수필>로 등단한 장 수필가가 ‘구운몽’을 해설하는데, 수준을 높여 이야기하는 바람에 모든 이가 곤욕을 치렀다. 강의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노인학교 관계자 모두가 엇박자였다. 도중에 몇몇이 나가는 바람에 내가 낭패감에 젖어 계속 시계만 들여다봐야만 했다.
마침 중국의 세계적인 석학 장석생 교수(경성대)와 함께 온 재혼한 부인이 함께 다음 강의를 준비하고 있었다. 부인도 걱정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우리 노인 대학 부학장인 경성대 이병수 이과대학장과 함께…. 장석생 교수는 수학 전공이고 경성대에 교환 교수로 와 있었다. 수학 전공이다.
그 지루하던 구운몽이 끝났다. 내가 물었다.
“재미있었습니까?”
노인학생들은 그런 일을 한두 번 당해 본 것이 아니어서, 내 눈치 하나는 빠르다. 일제히
“예!”
하고 대답한 것이다.
통역은 이병수 교수의 몫이었다. 세월이 흐른 지 오래 되어 지금 기억이 확실하지 않지만, 부인은 거두절미하고 노래부터 한 곡 선물했다. 오스트리이 민요 ‘동무들아 오너라’였다. 물론 우리말이 아니고 중국말로 불렀으니 장 교수 부부 외에는 아무도 입을 닫고 있어야 했다.
이윽고 2절까지가 끝났다. 내가 나섰다.
“윤석중 선생 아시지요? 그분이 작사한 이 동요를 우리는 지난날 수없이 불러 왔습니다. ‘동무들아 오너라’라는….우리 이왕 만났으니, 체창하십시다. 참, ‘동무들아 오너라’는 사실 오스트리아라는 나라의 민요입니다. 왜 우리나라 초대대통령 이승만 박사 부인, 기억 나시지요? 그분이 그 나라 사람이이었습니다.”
장경자 수필가가 가고 난 뒤여서 오히려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노인학생들듸 얼굴에서 씁쓸한 표정도 사라졌다. 여기서 나는 다시 ‘동무들아 오너라’를 흥얼거려 본다.
동무들아 오너라 오너라 오너라 오너라
동무들아 모여서 같이 놀자
어여쁜 새들이 방긋이 웃는다
동무들아 모여서 같이 놀자
동무들아 오너라 오너라 오너라 오너라
동무들아 모여서 같이 놀자
즐겁게 즐겁게 방긋이 웃는다
동무들아 모여서 같이 놀자
우리 노인학교 학생들처럼 춤을 잘 추는 노인들은 없다. 아니나다르랴 여기저기서 학생들이 일어서더니 덩신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건 장관이었고말고. 장석생 교수 내외도 덩달아 우리나라 노인들의 특유의 ‘관광춤’에 동화되어 갔다.
그날 역시 대한항공사우회 음악 반장이었던 김광종 색소포니스가 와 있었던 터다. 그가 색소폰 연주로 분위기를 돋울 대로 돋우었으니, 그 열기는 짐작 혹은 측정 불가능!
장석생 교수의 부인은 다음 노래로 클레멘타인을 목청에 실었다. 이번엔 영어다.
In a cavern, in a canyon,
Excavating for a mine
Dwelt s miner, forty-niner
and his daughter Clementine
Oh my darling, Oh my darling
Oh my darling Clementine
You are lost gone forever
Dreadful sorry Clementine
부인이 1절을 채 끝내기 전에 노인학생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우리말로 ‘클레멘타인’에 동승했다.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고기잡이 아버지와 철모르는 딸 있네
내 사람아 내 사랑아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늙은 아비 홀로 두고 영영 어디 갔느냐
부인은 화들짝 놀라는 표정이더니 만면에 웃음을 짓고 영어로 2절을 맞춰 끝냈다. 노인 학생들은 클레멘타인을 ‘클레멘틴’으로 발성했다. 장 교수의 부인은 '클레멘타인'이었고. 그 묘한 간극에 나는 미소를 머금었다.
조선 민중 사이에 미국 민요 클레멘타인이 어떤 경로를 통해 들어와 대유행이 되었는지는 뒤에 다시 들먹이기로 하자.
하지만 여기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지표 혹은 통계 하나. 내가 노인 학교에 미쳐 있을 때, 노인들의 애창곡을 순서대로 따져 보면 ‘클레멘타인’이 항상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더라. 어디 내 노인 학교에서 뿐이었으랴. 노무현의 정신적 지주인 송기인 신부가 은퇴 후 주일 미사에 참예하는 삼랑진 성당 노인학교에 가면 학생들은 마칠 때 조르고 또 졸랐다.
“선상님, 클레멘틴‘ 부릅시데이.”
‘나의 사랑 클레멘틴’이 아리랑과 그 버금간다? 그런 게 다 아이러니가 아니고 뭔가? 그래서 나는 부르짖는다.
“노래가 역사를 좌우한다!”
내 노인학교에서든 남의 노인학교에서든 나는 그래서 ‘동무들아 오너라’와 ‘나의 사람 클레멘틴’ 을 들고 학생들과 어울렸다.
진영 노인대학에서라고 해서 예외일 수 있으랴.
물론 내 노인학교를 그만두고 남의 노인 학교에서 수업도 수도 없이 했지만, 가장 정서가 맞는 데는 진영노인대학이었다. 명예 훼손으로 걸면 걸릴 이야기 하나 하자. 대중가요 사상 가장 저속한 노래 가사가 ‘죄 많은 내 청춘’이다. 남백송이 불러 히트한 것. 그것도 선생이란 사람이 학생들과 열창했으니 실로 가관이었다.
청춘아 내 청춘아 죄 많은 내 청춘아
하룻밤 그 고개를 넘은 것이 한이 되어
죄 없는 그 사람을 못 쓰게 하고
보고도 못 본 체로 돌아서는 내 청춘을
꾸짖어 본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괜찮다. 다음이 문제다.
청춘아 내 청춘아 죄 많은 내 청춘아
못 만질 그 가슴을 만진 것이 한이 되어
봉오리 그 사람의 청춘을 뺏고…
그러면서 희희낙락했으니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그 노래를 들고 진영노인대학에 가고 싶다, 몹시도…!
그날 나는 수업의 도입 단계에서 ‘동무들아 오너라’를 끄집어냈다. 교직 생활 43년이니 항상 ‘도입’ , ‘전개’, ‘정리’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가끔은 칠판에 ‘학습 목표’를 칠판에 적어 놓고 같이 읽어보기도 했다. ‘무턱대고 놀고 노래하고 떠들다가 마치는 한 시간’ 그런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야겠다는 강박관념의 발로라고나 할까? 나는 교사 교감 교장 자격증이 있는 노인학교 강사다!
나는 칠판에다 빠르게 분필로 썼다.
학습 목표: 동무들과 친하게 지내던 어린 시절을 생각해 보자
그러고 나서 나는 3/ 4박자를 지휘봉으로 저어 나갔다. 순조롭게 1절을 마치고 내가 목소리로 짠짜라라라 하면서 간주를 넣는데 어느 여학생이 손을 든다.
“선상님요, ‘동무’라니 북한 사람들이 쓰는 말 아닙니꺼? ‘친구로 하입시더.’
고 하는 게 아닌가? 얼른 보아 여학생은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옆의 친구에게 동의라도 구하는 듯 귀엣말을 하기도 했고. 학생들은 웅성거렸다. 그런데 가만히 눈치껏 상황 판단을 해 보니, ‘동무’를 ‘친구’로 하자는 쪽이 우세한 것 같았다.
그날 수업은 둘째 시간이었는데, 마치고 귀가하려는 나를 붙잡는 여학생이있었다. ‘동무’를 ‘친구’로 바꾸자는 제안을 한 바로 그였다. 친구 두서넛이 모여 있으니, 저녁이나 함께 먹고 가란다. 분위기를 보니 거절하시 힘들 것 같았다. 대통령상을 받은 저 유명한 서예가 양진니 선생의 세필 궁체 글씨의 액자가 벽면에 걸려 있는 계단 옆에서 나는 말했다.
“알겠습니다. 대신 비싼 건 안 됩니다. 국밥이라면 좋겠습니다.이 글씨를 쓴 양진니 선생님은 형님 친구지요. 그 옛날 삼랑진 초등학교에 가사로 근무한 적이 있습니다. 그립군요,”
우리는 시장 통으로 자리를 옮겼다. 돼지국밥 집이었다. 돼지 국밥 네 그릇과 수육 한 접시, 그리고 학생들 자신이 마실 소주 한 병이 식탁 위에 차려졌다.
“선상님, 놀랐지예? 지가 너무 당돌했습니더. 용서하이소.”
“괜찮습니다. 사실 ‘동무’라는 말이 좋다고 다시 쓰자는 사람도 있지만, 북한 용어가 맞아 끼꿈(께름직)하던 참이었습니다.”
“우리 둘은 아들을 월남전에서 잃어버린 거라예. 이 할마시는 아들이 군 장교로 있습니더,”
“아, 그렇습니까?” “여기 노인학교 학생들 중 상당수는 노무현에 대해 감정이 곱지 않습니더.”
“…….”
“밖에서는 노무현이 영웅처럼 대접받는지 모르지만, 노무현의 장인이 이상한 사람이었는기라예.”
“예, 저도 조금은 압니다.”
“우리가 뭐라 카더란 얘기는 하지 마이소. 노인학교에 불이익이 오면 안 되니까예.”
내가 거기 이의가 있을 수 없었다. 나는 그저 미소를 지으면서 돼지 국밥 국물을 떠마시고 있었다. 그들은 입을 모아 얘기했다.
“선생님의 공비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고생도 많이 하셨데에. ”
“하나 빠뜨린 게 있었습니다. 뺄갱이가 불을 질렀던 그날, 여주인이 화가 나서 낫을 들고 공비에게 달려들엇다 아닙니까?”
“그랬어예?”
“공비가 갖고 있던 장총으로 주인을 겨누어 쐈는데, 불발이었답니다. 공비가 언뜻 생각하기로, ‘이상하다. 내가 자수를 해야겠다!’ 정말 그는 총을 내려 놓고 이어 출동한 경찰에 자수를 합니다. 나중에 경찰에 특채되어 혁혁한 공을 세웠답니다.”
“재미있네예. 노무현 장인에 대해 잘 압니꺼?”
“잘은 모르지만, 그 양반 때문에 내 친구 교장의 장인이 죽었다는 소리는 들었습니다. 월간 <조선>이라는 잡지에 상세히 소개되기도 했지요.”
“오늘 우리가 아는 그 권오석을 선생님한테 말해 드리려 합니데이.”
나는 약간 느낌이 들었지만 귀를 기울이기로 했다. 그들이 전하는 노무현 장인 권오척(가명)의 생애를 요약하면 이랬다.
1918년 생(*우리 아버지와 13년 차이였다.)
남로당 당원이었고 71년 생을 마감할 때까지 비전향
창원군 진북면 출신이었다.
마산 교도소에서 사망(폐결핵이었단다)
밀양 농잠고등학교를 졸업한 당시로서는 대단한 고학력의 소유자였다.(밀양 농잠고등학교는 내 고향 밀양의 명문학교였다)
면사무소 서기 시험에 합격하여 근무할 만큼 머리가 좋았다(*여기서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지금 같았으면 아버지와 서로 아는 사이가 될 수 있었으리라고 넘겨짚었기 때문이다.
빨치산 출신으로 양민을 몇 명 죽이는 데 간여했다.(화학 약품을 알코올에 섞어 마시다가 실명했는데, 대상자를 선별할 때 손바닥을 만져 보았단다. 거친 사람은 살려 주고 보드라운 사람은 외면했다고 한다.)
세 살 아래인 배우자 박덕남이 차녀 권양숙과 살고 있다. 봉하마을에. 그런데 박덕남은 다행히 전향했다.
이야기가 거의 끝날 무렵 나는 노무현에 대한 지역 주민 특히 노인 일부의 뚜렷한 호오(好惡)의 정서를 이해할 것 같았다.
집에 와서 앞서 들먹인 바 있는 친구 박청렬 교장(부산 교대 2기, 우리 모교인 부산중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에게 노인학교에서의 이야기를 전했더니 그는 불같이 화를 내었다.
"아주 나쁜 사랍이었어요. 나의 장인어른이 희생자 중 한 명이지 뭡니까?"
"사실 나도 엄마 생각을 하면 빨갱이 들에게 치가 떨립니다. 우리 동네 국전리 양지 음지 섬땀에서 유일하게 시각 장애인이었던 엄마의 뺼갱이에 대한 공포는 필설로 표현할 수 없었으니까요. 아버지가 호병계장으로 지내셨고, 형님이 교사로 있었으니 빨갱이들의 표적이 되었지요. 엄마는 주무시다가 고함을 지르곤 하셨습니다."
"이 교장도 잊지 마시오, 저들의 악랄한 만행을--"
그러다가 노무현이 죽은 것이다. 몇 년이 지나서 나도 큰 불행을 겪는다
난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박덕남에게 편지를 쓴다. 사위자식도 자식이니, 참척을 겪은 박덕남에게 위로를 전하고 싶어서….하지만 부치지를 못했다. 내가 캄보디아에 가족 여행을 하면서 여기 용인 비구니들의 도량 화운사 주지스님에게 쓴것도 마찬가지, 찬불가를 부르고 싶다는 소원을 적었었다.
두 통의 편지는 지금도 갖고 있다.
박덕남도 이윽고 17년 2월24일 죽는다. 박덕남이 전향하지 않았더라면 사후에 그의 빈소를 정치인들이 찾지는 않았으리라.
‘허공’으로 노무현을 만나리라
지금 이 시간 나는 내 집에서 몇 백 미터 떨어진 실용 음악 학원 제일 깊은 교습실에 들어 앉아 있다. 1제곱미터 남짓한 그야말로 손바닥 만만한 공간이다. 11층이다. 창문을 통해 내려다보자. 영락없이 ‘허공’이 느껴지는 것은 노무현 때문이다. 우엉이 바위 위에 올라서서 신음 소리를 내던 십년 전 생각이 난다.
며칠 전에 수술한 어깨의 통증이 아직도 심해 조심스레 보조기를 벗어 놓고 색소폰을 조립한다. 그리고 도서 출판 ‘다라’ 에서 낸 <가요 색소폰 명곡집> 182쪽을 펼쳐 든다. ‘허공’이다. 리드에 침을 묻히기 전에 악보에 눈길을 주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초점이라도 잃은 듯 멍한 표정으로 재빨리 읽는 다. 아니 왼다는 표현이 맞을 듯하다.
도레라솔파라 솔라솔파 레파도/ 파파파솔 라도레라도/ 파파파파파 레파레도라/솔솔솔레 도라라솔파/ 솔솔솔솔 파라라/솔파레파 솔라솔/ 라라라솔 파파 레도라 레솔파 레파도/ 파파파솔 라도도/ 파파파라 레도라/ 도파파파 솔라 도레파
가사로 한 번 아래에 적어 보자.
꿈이었다고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아쉬운 남아/ 가슴 태우며 기다리기엔/ 너무나도 멀어진 그대/ 사랑했던 마음도 미워했던 마음도/ 허공 속에 묻어야만 될 슬픈 옛 이야기/ 스쳐 버린 그날들 잊어야 할 그날들/ 허공 속에 묻힐 그날들
몇 번이나 이 짓을 계속하고 난 뒤에라야 색소폰 피스를 입에 문다. 때로는 눈물이 흐르려 해 입술을 지그시 깨문다. 누군가 내 이 모습을 훔쳐본다 치자. 나를 돈 사람으로 치부하지는 않을는지….
이제 아니 연습 차례다. 나는 얼굴에 까닭 모를 미소를 띤다. 말하자면 표변한 것이다. 그리고 오른 손 추억을 쥐고 소리 없는 파이팅을 외친다.
인간이 이토록 간사스러운가 싶어 흠칫 놀라면서 전주를 넣는다.
전주(前奏)는 쉽다. 자다가 일어나도 계명은 달달 기억해 낼 정도이니 더 말해 무얼 하랴. 그것까지 어렵다고 고백하면 지나친 겸손이다. 그래 그 여덟 마디는 색소폰으로 연주하고말고.
여기서 잠깐.
색소폰이란 목관 악기는 최저음이 인간의 목소리를 따라내지 못한다. 다시 말해 남자가 보통 ‘솔’까지 편하게 발성하는 데에 비해 색소폰은 ‘라’ 샤프가 한계다. 따라서 내가 가진 위 교본엔 ‘도’가 최저음이다. 그 음은 내게 참 편안하다.
내 최고 음의 무난한 한계는 한 옥타브 높은 ‘파’다. 아니 ‘파’도 무리일 때가 있다. 당일의 컨디션에 달렸다. ‘라’는 아예 포기해야 한다. 위에서 고딕체로 표시한 것을 보면 누구든지 내 이 고백을 쉽게 이해하리라. 가족들이 한바탕 박수를 보내 준 것을 보면, 이건 내 지혜다.
다시 말해 고딕체로 표시한 마디만 색소폰으로 연주하면 되는 것이다. 전주와 간주까지 포함하니 그 양도 결코 적지 않다. 듣는 이는 노래나 색소폰이 차지하는 양을 가늠하지 못한다. 나는 가슴속 스트레스를 있는 대로 날린다. 각오로 목청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는 어느 테너의 독창을 방불케 한다. ‘허공’을 간드러지게 입 밖으로 내보낸다? 나는 그런 옹종한 생각에서 벗어난 지 오래다.
그 옛날 창원에서 훈련을 마치고 부관학교 교육을 받기 위해 삼랑진에서 환승을 하기 위해 플랫폼에 앉아 ‘해운대 엘레지’를 부를 때를 나는 늘 생각한다. 눈 어두운 엄마가 먼발치에서 울기만 하고 다가오기조차 못했는데, 우리는 ‘해운대엘레지’에 군가 같은 힘을 실었지 않았던가?
이 소란 내지 소동을 혹시 누가 감지하거나 눈치 채지 못하느냐고? 천만에! 워낙 구중궁궐처럼 깊은 곳에 위치해 있고 문도 겹겹이라 그럴 염려는 눈곱만큼도 없다.
내 교습실에서의 연습은 두어 시간 계속된다. 땀이 나도 나는 훔칠 줄 모른다. 물론 도중에 한두 번 물을 마시러 나온다든가 소피를 보러 화장실로 가는 수가 있지만, ‘허공’은 나를 그렇게 붙박이로 만든다.
어깨 인대 봉합 및 뼈 충돌 증후군 수술 뒤의 통증도 반감되는 120여 분 그래서 나는 그 공간에 드나들기를 마치 미친 듯이 한다. 일주일에 세 번 약속을 했는데도 하루 정도 빠지기 예상이니 내가 봐도 정상이 아니다. 이럴 때 혼자 중얼거리는 말은 이거다.
“노무현 탓, 아니 노무현 덕분이다.(허허)” 66
드디어 모든 걸 털고 일어선다. 심호흡을 하면서 악기 정리를 하여 가방에 넣을 때는 기쁨과 아쉬움이 반반 교차하는 심경이라 하자.
문을 열고 또 열고 하고선 커피 한 잔을 타 먹는다. 물론 백 원짜리 봉지 커피다. 그걸로 나는 족하다. 피아노 교실로 들어선다. 아무도 없을 때라면 나는 건반을 두드린다.
도레라 솔파레/ 솔라솔라 솔파 레파도/ 파파파솔 라도레라도…도라라라 솔라 도레파
물론 피아노 실력이 형편없으니, 오른손 다섯 손가락으로 단음(單音)으로 연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분은 한껏 낸다. 그러다 창문을 통하여 바깥을 내려다보면 섬뜩한 충동을 느끼는 것이다.
아니 착각이 먼저라는 게 맞겠다. 부엉이 바위 위에 내가 서 있는 것이다.아득해 내려다보이는 길바닥에 노무현이 있다!
그러다가 나는 노무현의 정신적 스승이라는 송기인 신부가 머리에 떠오르는 걸 보고 까무러치게 놀란다. 나는 행인지 불행인지 송기인 신부를 잘 안다. ‘너무나’라는 부사를 동원해도 괜찮을 정도다. 그는 일제 시대<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논조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그는 삼랑진 성당(부산 교구에서 두 번 째로 오래 된 성당)의 주임신부로 있었다. 나는 삼랑진 성당과 담벼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송진초등학교에 몇 년 근무했으니, 그와 자주 만날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 나는 불자였지만, 그게 무슨 장애가 될 수 없었다.
정말 소개하지 않고서는 못 베길 일화다.
내가 첫 수필집 <밀려나는 새벽>을 내고, 학교 간이 강당에서 출판기념회를 열었을 때 그는 5만원이라는 거금으로 축하를 해 주었다. 일반인들은 3천원 정도였는데--. 82년도였다.
내가 삼랑진을 떠난 지 30년 만에 그는 은퇴하여 용전 마을에 집을 짓고 살더라. 그리고 한국 최초의 순교자라는 김범우의 묘소를 관리하는 능참봉으로 자처하고 관련 되는 일을 했고.
나는 내가 살던 부락에서 2킬로미터 떨어진 미전리의 오순절 평화의 마을에서 장애를 가진 300여 명 가족들과 더불어 3년 동안 지냈다. 물론 거기 같이 살았다는 게 아니라 2주일에 한 번씩 가서 자질구레한 심부름 따위를 했다. 정신 지체를 가진 형제자매들과 떠들고 노래하는 게 네 주된 임무였다. 내가 원장 신부와 함께 무료로 분양받아 온 삼살개가 출산하면 어미개의 젖무덤을 할퀴는 새끼들을 발톱을 다듬어 주고 개똥 치우는 일 등등이다.
가끔 삼랑진 성당에 들렀다. 거기 노인학교에서 무료 강의를 했다. 학생들은 거의 내가 아는 사람들이었다.
주일에 가면 송기인 신부가 미사에 참예하러 나왔다. 그는 여전히 과묵했고, 30년 전의 인상 그대로였다. 그에게서 느낀 게 많지만, 정말 제대로 배운 거 하나만 들라면 이거다. 신자들은 성체를 왼손 바닥에 받아서 오른쪽 혹은 왼쪽으로 돌아서서 곧장 걸어가면서 입안에 모셔야 하는데, 실은 그렇지 못하다. 반은 십자고상을 보고 절까지 하니, 그게 낭패라른 것이다.
예수님의 몸을 모셨으니, 예수님을 보고 다시 절을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명동 성당에도 가보라. 그 기본적인 예절을 모르는 신자가 태반인 것이다. 송기인은 달랐다. 그래서 나는 그를 다시 보게 되었다고 하자.
노무현은 송기인 집에 한 번씩 들른다는 소문이었다. 진영과 삼랑진! 그래서 나는 떼려야 뗄 수 없다는 명제를 머리에 떠올린다. 노무현과 송기인도 마찬가지라 하지 않고 어찌 베기랴. 108
그 런데 송기인이 노무현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 낌새라도 차리지 못한 것 같다. 신앙생활을 다그쳤다면, 노무현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높은 음악 학원에서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노무현을 보는 것은 아직도 나약한 내게는 자연스러운 현상인지 모른다.
시간이 있으면 마침내 이런 참혹한 과거사에 휩쓸리기도 한다.
교장 시절 그렇게 아플 때 나는 우연히 ㅇㅇ 연수원을 알게 되었다. 지금의 음악 학원처럼 조그만 방이 이어져 있었다. 수속을 마치고 나니 강사가 하는 말이었다.
“죽는 연습을 합니다. 아침에 출근하다가 거리에서 자동차에 치입니다. 즉시 내 혼은 육체에서 빠져 나와 하늘에 떠 있습니다.”
“무섭습니다.”
“죽어야 사는 거지요. 들으세요.”
“말씀하십시오.”
“혼은 하늘에서 시체를 내려다보는 것과 동시에 이 세상에서 가장 까마득한 기억부터 떠올리는 겁니다. 눈을 감아 보십시오.”
어느 안전이라고 거역할 건가? 나는 눈을 감았다. 참, 앉지도 눕지도 못하는 자세로. 그땐 난 반불구자였으니까.
“기억나는 게 있습니까?”
“예!”
나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뭡니까?” “낙향하신 아버지를 따라 밀양군 단장면 국전리 음지로 왔을 때입니다. 도리우찌를 쓰고, 옆집 덕수라는 친구와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그 다음은요?”
“울 엄마와 너무나 닮았다는 외할머니가 온다는 연락을 받고 눈 어두운 엄마랑 마중을 나갔습니다,” “그래서요?”
“한데 엄마를 그대로 뺀 외할머니가 갑자기 무서워서 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리고?”
“친구와 막대 치기를 하고 노는데, 이상한 옷차림을 한 사람 둘이 뒷짐을 지고 동네로 들어섰습니다.”
“야, 잘하고 있습니다. 누구였지요?” “앞서 동네에 와서 석유를 팔고 있는 아저씨에게 다발총 총구를 내밀고 돈을 강탈했지요.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하던 기억이 납니다. 불을 뿜는 줄 알고 혼비백산했습니다. 그자들이 빨갱이였지요. 그로부터 빨갱이라면 몸서리를 쳤습니다.”
“자, 요령을 알았으니, 그렇게 기억해 나가세요. 기억한 것은 즉시 블랙홀로 집어던지십시오.”
나는 속절없이 그들의 노예가 되고 말았다. 남들은 점심이라도 먹는데, 나는 갖고 간 도시락에 몇 숟가락 손을 대고는 그만두고 말았다. 마로 앉을 수 없을 정도로 아팠으니까. 방안에서의 수련 자세로 엉거주춤! 안지도 못하고 눕지도 못하는….
쓴웃음조차 안 나올 사건 하나를 밝혀 보자. 이 세상 아무도 그런 체험을 못하였음이 틀림없으리라.
그 수모의 기간은 딸애가 부산대학교에 다닐 때였다. 나는 이미 폐인이 되었다고 절망하고 있었다. 그래도 연수원에는 나갔다. 아니 노인 학교에는 빠질 수 없었음을 더 강조하자.
박강자 학생은 내 노인학교 학생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춤 하나는 기똥차게 추는….그런데 박강자 학생의 아들 정경석 교사가 내 딸의 담임을 초등학교 때 맡은 바 있었다. 내 딸은 정경석 교사의 제자이고 정경석 교사의 어머니는 내 제자다! 정말 기가 찼다.
그런데 정경석 교사가 연수원과 일선 학교 교사의 연결 고리 비슷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부산교육대학교로 치면 내가 동문 선배이고.
어느 날 박강자 학생이 내게 하는 말이다.
“선생님요. 내 말 잘 들으이소오.”
“말씀하시지요.”\
“내가 천주 교회에 25년 동안 다녔는데, 몸 아픈 거 못 낫수데예. 그런데 여기 나오고 나서부터 거짓말처럼 나은 기라예. 잘 왔습니더.”
“…….”
“선상님, 교리교육 받는다 카던데예.”
“예, 받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댕기지 마이소. 아무 필요 없는 기라예. 여기 나오이소오.”
“…….”
“내 말 믿으이소오. 그라고 여기 나오다가 안나오면, 더 아픕니데이.”
간이 덜컥 내려앉는 순간이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그날 수련을 마치고 짐에 돌아와서 그 말을 딸과 아내에게 전했더니, 둘이 펄쩍 뛰며 보인 반응이다.
“큰일 나겠습니다. 안 그래도 그 연수원에 대해 알아보았는데, 폐해가 이만저만 아닙니다. 세상에 교리 교육을 받지 말라니 사탄의 유혹이지요.”
그걸로 나는 연수원에 발을 끊었다. 어릴 때 공비들한테 시달리던 악몽 같은 추억이 제일 많은 것 같아 나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다시 피아노 실 창가
나는 아찔한 기억을 하나 더 떠 올린다. 부산시에서 개최하는 순회 백일장 심사를 가끔 맡았었다. 이문걸 전 동의대학교 인문대학장과 함께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느 날 그가 내게 하는 말이었다.
“이 교장님, 담배 안 피우시지요?”
“아직 못 배웠습니다.”
“난 그 좋아하던 담배를 얼마 전에 끊었습니다.”
“대단하시군요.”
“무척이나 힘들었지요. 처음 며칠 동안 금연을 한답시고 어금니를 깨물었는데, 금단 현상이 온몸을 휩싸는 겁니다. 문득 창가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됩디다.”
물론 나는 미소로 답했지만 보이지 않는 코웃음을 쳤다. 까짓 담배 하나 못 끊어서 어떻게 사나이 대장부라 하겠는가!
그런데 지금 나는 담배가 아니라 ‘허공’이 내게 덮어씌운 갈등으로 괴로움 아닌 괴로움과 섞바뀐 유혹을 느끼는 것이다.
물론 내가 ‘허공’을 안전 무결하게 노래와 색소폰으로 연주할 지경에 이르면, 그 따위 사소한 것은 하나의 기우에 지나지 않게 되리라. 살기 위해 나는 귀가하는 걸음마다에 ‘허공’을 싣는다. 기가 막힌다는 소릴 들으려는 그 각오는 승화를 위한 몸부림이다.
그러고 보니 이번 노무현 기일 무렵에 맞추어 진영노인대학에 ‘허공’을 잦고 들르지 못한 것이 반드시 불행한 노릇만은 아닌 것 같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이럴 때 써야 할 것 같다. 내년이면 사소한 임시표까지 샅샅이 소화시키면서 정든 진영노인대학 무대 위에 설 수 있으리라는 전망이다.
물론 노무현과의 추억을 생각해서 ‘외나무다리’도 우리 모두 절창한다. 가슴에 설렌다. 수당을 받을 게 아니라 노인학교 발전 기금으로 20만원쯤 기부하고 온다면 학생들이 좀 좋아할까?
여기서 빠뜨려서는 안 되는 얘기. 황금심의 ‘낙화 유정’은 지금도 나 혼자 부르다는 사실! 세상은 좁디좁으니, 황금심은 마리아라는 세레명을 가진 천주교 신자였다. 내가 사는 용인, 이 용인에 있는 천주교 공원묘지에 황금심 ‧ 고복수 내외의 묘소가 있는 것이다. 나는 이미 거기 수차 들렀다 왔다. 혼잣말로 노무현에게 뭐라고 중얼거렸음은 물론이다.
최희준 묘소도 거기 있다. 가야금 명인 황병기도 마찬가지. 김수환 추기경가까이 갈 수 있는 그런 묘소 참배가 참 좋다. 그날 제자 말을 따랐더라면? 모든 게 불행으로 끝났으리라.(계속)
(7)‘허공’으로 노무현을 만나리라
지금 이 시간 나는 내 집에서 몇 백 미터 떨어진 실용 음악 학원 제일 깊은 교습실에 들어 앉아 있다. 1제곱미터 남짓한 그야말로 손바닥 만만한 공간이다. 11층이다. 창문을 통해 내려다보자. 영락없이 ‘허공’이 느껴지는 것은 노무현 때문이다. 우엉이 바위 위에 올라서서 신음 소리를 내던 십년 전 생각이 난다.
며칠 전에 수술한 어깨의 통증이 아직도 심해 조심스레 보조기를 벗어 놓고 색소폰을 조립한다. 그리고 도서 출판 ‘다라’ 에서 낸 <가요 색소폰 명곡집> 182쪽을 펼쳐 든다. ‘허공’이다. 리드에 침을 묻히기 전에 악보에 눈길을 주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초점이라도 잃은 듯 멍한 표정으로 재빨리 읽는 다. 아니 왼다는 표현이 맞을 듯하다.
도레라솔파라 솔라솔파 레파도/ 파파파솔 라도레라도/ 파파파파파 레파레도라/솔솔솔레 도라라솔파/ 솔솔솔솔 파라라/솔파레파 솔라솔/ 라라라솔 파파 레도라 레솔파 레파도/ 파파파솔 라도도/ 파파파라 레도라/ 도파파파 솔라 도레파
가사로 한 번 아래에 적어 보자.
꿈이었다고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아쉬운 남아/ 가슴 태우며 기다리기엔/ 너무나도 멀어진 그대/ 사랑했던 마음도 미워했던 마음도/ 허공 속에 묻어야만 될 슬픈 옛 이야기/ 스쳐 버린 그날들 잊어야 할 그날들/ 허공 속에 묻힐 그날들
몇 번이나 이 짓을 계속하고 난 뒤에라야 색소폰 피스를 입에 문다. 때로는 눈물이 흐르려 해 입술을 지그시 깨문다. 누군가 내 이 모습을 훔쳐본다 치자. 나를 돈 사람으로 치부하지는 않을는지….
이제 아니 연습 차례다. 나는 얼굴에 까닭 모를 미소를 띤다. 말하자면 표변한 것이다. 그리고 오른 손 추억을 쥐고 소리 없는 파이팅을 외친다.
인간이 이토록 간사스러운가 싶어 흠칫 놀라면서 전주를 넣는다.
전주(前奏)는 쉽다. 자다가 일어나도 계명은 달달 기억해 낼 정도이니 더 말해 무얼 하랴. 그것까지 어렵다고 고백하면 지나친 겸손이다. 그래 그 여덟 마디는 색소폰으로 연주하고말고.
여기서 잠깐.
색소폰이란 목관 악기는 최저음이 인간의 목소리를 따라내지 못한다. 다시 말해 남자가 보통 ‘솔’까지 편하게 발성하는 데에 비해 색소폰은 ‘라’ 샤프가 한계다. 따라서 내가 가진 위 교본엔 ‘도’가 최저음이다. 그 음은 내게 참 편안하다.
내 최고 음의 무난한 한계는 한 옥타브 높은 ‘파’다. 아니 ‘파’도 무리일 때가 있다. 당일의 컨디션에 달렸다. ‘라’는 아예 포기해야 한다. 위에서 고딕체로 표시한 것을 보면 누구든지 내 이 고백을 쉽게 이해하리라. 가족들이 한바탕 박수를 보내 준 것을 보면, 이건 내 지혜다.
다시 말해 고딕체로 표시한 마디만 색소폰으로 연주하면 되는 것이다. 전주와 간주까지 포함하니 그 양도 결코 적지 않다. 듣는 이는 노래나 색소폰이 차지하는 양을 가늠하지 못한다. 나는 가슴속 스트레스를 있는 대로 날린다. 각오로 목청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는 어느 테너의 독창을 방불케 한다. ‘허공’을 간드러지게 입 밖으로 내보낸다? 나는 그런 옹종한 생각에서 벗어난 지 오래다.
그 옛날 창원에서 훈련을 마치고 부관학교 교육을 받기 위해 삼랑진에서 환승을 하기 위해 플랫폼에 앉아 ‘해운대 엘레지’를 부를 때를 나는 늘 생각한다. 눈 어두운 엄마가 먼발치에서 울기만 하고 다가오기조차 못했는데, 우리는 ‘해운대엘레지’에 군가 같은 힘을 실었지 않았던가?
이 소란 내지 소동을 혹시 누가 감지하거나 눈치 채지 못하느냐고? 천만에! 워낙 구중궁궐처럼 깊은 곳에 위치해 있고 문도 겹겹이라 그럴 염려는 눈곱만큼도 없다.
내 교습실에서의 연습은 두어 시간 계속된다. 땀이 나도 나는 훔칠 줄 모른다. 물론 도중에 한두 번 물을 마시러 나온다든가 소피를 보러 화장실로 가는 수가 있지만, ‘허공’은 나를 그렇게 붙박이로 만든다.
어깨 인대 봉합 및 뼈 충돌 증후군 수술 뒤의 통증도 반감되는 120여 분 그래서 나는 그 공간에 드나들기를 마치 미친 듯이 한다. 일주일에 세 번 약속을 했는데도 하루 정도 빠지기 예상이니 내가 봐도 정상이 아니다. 이럴 때 혼자 중얼거리는 말은 이거다.
“노무현 탓, 아니 노무현 덕분이다.(허허)” 66
드디어 모든 걸 털고 일어선다. 심호흡을 하면서 악기 정리를 하여 가방에 넣을 때는 기쁨과 아쉬움이 반반 교차하는 심경이라 하자.
문을 열고 또 열고 하고선 커피 한 잔을 타 먹는다. 물론 백 원짜리 봉지 커피다. 그걸로 나는 족하다. 피아노 교실로 들어선다. 아무도 없을 때라면 나는 건반을 두드린다.
도레라 솔파레/ 솔라솔라 솔파 레파도/ 파파파솔 라도레라도…도라라라 솔라 도레파
물론 피아노 실력이 형편없으니, 오른손 다섯 손가락으로 단음(單音)으로 연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분은 한껏 낸다. 그러다 창문을 통하여 바깥을 내려다보면 섬뜩한 충동을 느끼는 것이다.
아니 착각이 먼저라는 게 맞겠다. 부엉이 바위 위에 내가 서 있는 것이다.아득해 내려다보이는 길바닥에 노무현이 있다!
그러다가 나는 노무현의 정신적 스승이라는 송기인 신부가 머리에 떠오르는 걸 보고 까무러치게 놀란다. 나는 행인지 불행인지 송기인 신부를 잘 안다. ‘너무나’라는 부사를 동원해도 괜찮을 정도다. 그는 일제 시대<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논조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그는 삼랑진 성당(부산 교구에서 두 번 째로 오래 된 성당)의 주임신부로 있었다. 나는 삼랑진 성당과 담벼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송진초등학교에 몇 년 근무했으니, 그와 자주 만날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 나는 불자였지만, 그게 무슨 장애가 될 수 없었다.
정말 소개하지 않고서는 못 베길 일화다.
내가 첫 수필집 <밀려나는 새벽>을 내고, 학교 간이 강당에서 출판기념회를 열었을 때 그는 5만원이라는 거금으로 축하를 해 주었다. 일반인들은 3천원 정도였는데--. 82년도였다.
내가 삼랑진을 떠난 지 30년 만에 그는 은퇴하여 용전 마을에 집을 짓고 살더라. 그리고 한국 최초의 순교자라는 김범우의 묘소를 관리하는 능참봉으로 자처하고 관련 되는 일을 했고.
나는 내가 살던 부락에서 2킬로미터 떨어진 미전리의 오순절 평화의 마을에서 장애를 가진 300여 명 가족들과 더불어 3년 동안 지냈다. 물론 거기 같이 살았다는 게 아니라 2주일에 한 번씩 가서 자질구레한 심부름 따위를 했다. 정신 지체를 가진 형제자매들과 떠들고 노래하는 게 네 주된 임무였다. 내가 원장 신부와 함께 무료로 분양받아 온 삼살개가 출산하면 어미개의 젖무덤을 할퀴는 새끼들을 발톱을 다듬어 주고 개똥 치우는 일 등등이다.
가끔 삼랑진 성당에 들렀다. 거기 노인학교에서 무료 강의를 했다. 학생들은 거의 내가 아는 사람들이었다.
주일에 가면 송기인 신부가 미사에 참예하러 나왔다. 그는 여전히 과묵했고, 30년 전의 인상 그대로였다. 그에게서 느낀 게 많지만, 정말 제대로 배운 거 하나만 들라면 이거다. 신자들은 성체를 왼손 바닥에 받아서 오른쪽 혹은 왼쪽으로 돌아서서 곧장 걸어가면서 입안에 모셔야 하는데, 실은 그렇지 못하다. 반은 십자고상을 보고 절까지 하니, 그게 낭패라른 것이다.
예수님의 몸을 모셨으니, 예수님을 보고 다시 절을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명동 성당에도 가보라. 그 기본적인 예절을 모르는 신자가 태반인 것이다. 송기인은 달랐다. 그래서 나는 그를 다시 보게 되었다고 하자.
노무현은 송기인 집에 한 번씩 들른다는 소문이었다. 진영과 삼랑진! 그래서 나는 떼려야 뗄 수 없다는 명제를 머리에 떠올린다. 노무현과 송기인도 마찬가지라 하지 않고 어찌 베기랴. 108
그 런데 송기인이 노무현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 낌새라도 차리지 못한 것 같다. 신앙생활을 다그쳤다면, 노무현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높은 음악 학원에서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노무현을 보는 것은 아직도 나약한 내게는 자연스러운 현상인지 모른다.
시간이 있으면 마침내 이런 참혹한 과거사에 휩쓸리기도 한다.
교장 시절 그렇게 아플 때 나는 우연히 ㅇㅇ 연수원을 알게 되었다. 지금의 음악 학원처럼 조그만 방이 이어져 있었다. 수속을 마치고 나니 강사가 하는 말이었다.
“죽는 연습을 합니다. 아침에 출근하다가 거리에서 자동차에 치입니다. 즉시 내 혼은 육체에서 빠져 나와 하늘에 떠 있습니다.”
“무섭습니다.”
“죽어야 사는 거지요. 들으세요.”
“말씀하십시오.”
“혼은 하늘에서 시체를 내려다보는 것과 동시에 이 세상에서 가장 까마득한 기억부터 떠올리는 겁니다. 눈을 감아 보십시오.”
어느 안전이라고 거역할 건가? 나는 눈을 감았다. 참, 앉지도 눕지도 못하는 자세로. 그땐 난 반불구자였으니까.
“기억나는 게 있습니까?”
“예!”
나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뭡니까?” “낙향하신 아버지를 따라 밀양군 단장면 국전리 음지로 왔을 때입니다. 도리우찌를 쓰고, 옆집 덕수라는 친구와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그 다음은요?”
“울 엄마와 너무나 닮았다는 외할머니가 온다는 연락을 받고 눈 어두운 엄마랑 마중을 나갔습니다,” “그래서요?”
“한데 엄마를 그대로 뺀 외할머니가 갑자기 무서워서 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리고?”
“친구와 막대 치기를 하고 노는데, 이상한 옷차림을 한 사람 둘이 뒷짐을 지고 동네로 들어섰습니다.”
“야, 잘하고 있습니다. 누구였지요?” “앞서 동네에 와서 석유를 팔고 있는 아저씨에게 다발총 총구를 내밀고 돈을 강탈했지요.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하던 기억이 납니다. 불을 뿜는 줄 알고 혼비백산했습니다. 그자들이 빨갱이였지요. 그로부터 빨갱이라면 몸서리를 쳤습니다.”
“자, 요령을 알았으니, 그렇게 기억해 나가세요. 기억한 것은 즉시 블랙홀로 집어던지십시오.”
나는 속절없이 그들의 노예가 되고 말았다. 남들은 점심이라도 먹는데, 나는 갖고 간 도시락에 몇 숟가락 손을 대고는 그만두고 말았다. 마로 앉을 수 없을 정도로 아팠으니까. 방안에서의 수련 자세로 엉거주춤! 안지도 못하고 눕지도 못하는….
쓴웃음조차 안 나올 사건 하나를 밝혀 보자. 이 세상 아무도 그런 체험을 못하였음이 틀림없으리라.
그 수모의 기간은 딸애가 부산대학교에 다닐 때였다. 나는 이미 폐인이 되었다고 절망하고 있었다. 그래도 연수원에는 나갔다. 아니 노인 학교에는 빠질 수 없었음을 더 강조하자.
박강자 학생은 내 노인학교 학생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춤 하나는 기똥차게 추는….그런데 박강자 학생의 아들 정경석 교사가 내 딸의 담임을 초등학교 때 맡은 바 있었다. 내 딸은 정경석 교사의 제자이고 정경석 교사의 어머니는 내 제자다! 정말 기가 찼다.
그런데 정경석 교사가 연수원과 일선 학교 교사의 연결 고리 비슷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부산교육대학교로 치면 내가 동문 선배이고.
어느 날 박강자 학생이 내게 하는 말이다.
“선생님요. 내 말 잘 들으이소오.”
“말씀하시지요.”\
“내가 천주 교회에 25년 동안 다녔는데, 몸 아픈 거 못 낫수데예. 그런데 여기 나오고 나서부터 거짓말처럼 나은 기라예. 잘 왔습니더.”
“…….”
“선상님, 교리교육 받는다 카던데예.”
“예, 받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댕기지 마이소. 아무 필요 없는 기라예. 여기 나오이소오.”
“…….”
“내 말 믿으이소오. 그라고 여기 나오다가 안나오면, 더 아픕니데이.”
간이 덜컥 내려앉는 순간이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그날 수련을 마치고 짐에 돌아와서 그 말을 딸과 아내에게 전했더니, 둘이 펄쩍 뛰며 보인 반응이다.
“큰일 나겠습니다. 안 그래도 그 연수원에 대해 알아보았는데, 폐해가 이만저만 아닙니다. 세상에 교리 교육을 받지 말라니 사탄의 유혹이지요.”
그걸로 나는 연수원에 발을 끊었다. 어릴 때 공비들한테 시달리던 악몽 같은 추억이 제일 많은 것 같아 나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다시 피아노 실 창가
나는 아찔한 기억을 하나 더 떠 올린다. 부산시에서 개최하는 순회 백일장 심사를 가끔 맡았었다. 이문걸 전 동의대학교 인문대학장과 함께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느 날 그가 내게 하는 말이었다.
“이 교장님, 담배 안 피우시지요?”
“아직 못 배웠습니다.”
“난 그 좋아하던 담배를 얼마 전에 끊었습니다.”
“대단하시군요.”
“무척이나 힘들었지요. 처음 며칠 동안 금연을 한답시고 어금니를 깨물었는데, 금단 현상이 온몸을 휩싸는 겁니다. 문득 창가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됩디다.”
물론 나는 미소로 답했지만 보이지 않는 코웃음을 쳤다. 까짓 담배 하나 못 끊어서 어떻게 사나이 대장부라 하겠는가!
그런데 지금 나는 담배가 아니라 ‘허공’이 내게 덮어씌운 갈등으로 괴로움 아닌 괴로움과 섞바뀐 유혹을 느끼는 것이다.
물론 내가 ‘허공’을 안전 무결하게 노래와 색소폰으로 연주할 지경에 이르면, 그 따위 사소한 것은 하나의 기우에 지나지 않게 되리라. 살기 위해 나는 귀가하는 걸음마다에 ‘허공’을 싣는다. 기가 막힌다는 소릴 들으려는 그 각오는 승화를 위한 몸부림이다.
그러고 보니 이번 노무현 기일 무렵에 맞추어 진영노인대학에 ‘허공’을 잦고 들르지 못한 것이 반드시 불행한 노릇만은 아닌 것 같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이럴 때 써야 할 것 같다. 내년이면 사소한 임시표까지 샅샅이 소화시키면서 정든 진영노인대학 무대 위에 설 수 있으리라는 전망이다.
물론 노무현과의 추억을 생각해서 ‘외나무다리’도 우리 모두 절창한다. 가슴에 설렌다. 수당을 받을 게 아니라 노인학교 발전 기금으로 20만원쯤 기부하고 온다면 학생들이 좀 좋아할까?
여기서 빠뜨려서는 안 되는 얘기. 황금심의 ‘낙화 유정’은 지금도 나 혼자 부르다는 사실! 세상은 좁디좁으니, 황금심은 마리아라는 세레명을 가진 천주교 신자였다. 내가 사는 용인, 이 용인에 있는 천주교 공원묘지에 황금심 ‧ 고복수 내외의 묘소가 있는 것이다. 나는 이미 거기 수차 들렀다 왔다. 혼잣말로 노무현에게 뭐라고 중얼거렸음은 물론이다.
최희준 묘소도 거기 있다. 가야금 명인 황병기도 마찬가지. 김수환 추기경가까이 갈 수 있는 그런 묘소 참배가 참 좋다. 그날 제자 말을 따랐더라면? 모든 게 불행으로 끝났으리라.(계속)
(8)공군비행학교 습격 사건 & 전우 개념
나는 65년 3월 25일 창원 훈련소에 입대했다. 앞을 잘 못 보시는 엄마 혼자 형님 댁에 남겨 두고 떠나려니, 참으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폐결핵 진단을 받아 2년 연기를 했으니 조금 늦은 나이였다. 그때까지 나는 엄아 젖을 만지고 잘 정도로 철부지였다.
66년 6월 초, 나는 26사단 부관부에서 상병 계급을 달고 사단장 표창장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관보’가 온 것이다. 아침부터 예감이 좋지 않았다.
모 위독 급래
아마 내용은 이랬으리라. 휴가를 얻어 십이열차를 타고 내려가는데 눈물이 앞을 가려 밤새 계속 손수건으로 훔쳤다.
그런데 집에 도착해 보니 그게 아니었다. 엄마가 4월 초파일 큰엄마 손을 잡고 절에 가다가 미끄러져 넘어지는 바람에 왼쪽 손목을 부러뜨린 거란다. 하지만 당신은 자식 걱정한다고 그 모진 통증을 참고 치마폭에 그걸 감춘 채 며칠을 버텨냈다는 게 아닌가?
엄마가 자꾸 울기만 하는 걸 본 형님이 까닭을 물어 본즉 일이 그 지경에 이르렀던 것! 병원에 갔으나 이미 팔이 부러진 채로 굳어져 가는 중이었다. 시퍼렇게 멍이 든 채 말이다. 삼랑진 전체에 병원이라곤 앞서 소개한 안창회 친구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삼랑진 의원 하나뿐인데, 전문적인 치료를 받을 수도 없었고….
울다가 엄마가 하는 말,
“야야, 원우가 보고 싶데이.”
“바로 형님한테 말도 안 하고 와 그랬노? 누나들한테 연락할 거 아니가?”
“전화도 없는데 우째 하노?”
하여튼 위독한 건 아니라서 안도는 했다. 그래서 나는 닷새쯤 엄마와 함께 집에서 지낼 수 있었다. 엄마의 인고(忍苦)는 차라리 무지막지하다는 걸 나는 깨달았다.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나는 나를 찾아온 선배 문유태(가명)를 만나게 된다. 악명 높은 해병대를 제대했지만, 그도 세상사와는 죽이 맞지 않은 듯 떠돌이 비슷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왕년에 그는 주먹이라면 경부선에서 둘째가라 할 정도였다. 하지만 의리로 뭉친 사나이였다.
몇 년 전 여름 방학 때, 그는 경북 보경사에서 상좌 노릇을 한다면서 나더러 한 번 다녀가라고 했다. 나도 심적으로 괴로운 일이 있어 그의 말을 듣고 경내에 있는 여관에서 묵기로 했다. 원고지를 들고 가서 이런저런 잡문을 끼적거리는 일로 2박3일을 보낸 것….
둘째 날 초저녁이었다. 그가 나를 찾아온 것은….
“야 이 선생!”
“예, 형님 왜 그라요?”
“몇 시간 있다가 무슨 소리 들리거든 절로 온나.”
“왜요?”
“글쎄 이는 오기만 하면 된다.”
아니나다르랴, 열한 시가 되었을 무렵 절에서 비명이 들렸다. 나는 한달음에 스님들의 숙소께로 달려갈밖에.
“이 새끼 주지한테 빌붙어 고자질이나 하고. 중이라도 의리가 있어야지. 맛좀 바라.”
유태 형의 목소리였다. 이어서 아이고 나 죽네 하는 비명이 들리고.
유태 아니 그 선배는 무슨 불만이 많은 모양이었다. 그 상세한 내용을 알 길 없는 나는 여관에서 잠을 청했으나, 눈조차 붙일 수가 없었다. 이튿날 날이 밝기 무섭게 나는 여관을 떠나고 말았다. 참, 내 방에서 술에 취해 곯아 떨어져 드르렁거리는 유태 형을 깨운 생각조차 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그런 그는 태어난 싸움꾼이었다. 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 통학 열차를 타고 우리한테 무용담을 들려주고 있었다.
그 이야기가 어찌나 재미있는지 주위에 학생들이며 승객들이 모여 열심히 듣는다. 그런데 물금쯤 기차가 지나갈 때였다. 얼른 보아 운동깨나 한 듯한 덩치 큰 해병 수병 두너섯이 입을 모아 한마디 한 것이다.
“야, 학생! 거 좀 조용히 할 수 없어?”
이내 기차는 터널로 진입했다. 그 짧은 순간에 가방을 후배들에게 맡긴 유태 형은 수병들 앞으로 다가가더니 오른 쪽 주먹을 한명의 얼굴에 날렸다. 한 방에 수병은 쓰러지고 말았으니 낭패다. 입가에 피가 흘렀다.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객차 안에 수병들이 여기저기 앉아 있었으니까. 그들은 우르르 몰려왔다.
“저 놈 죽여. 학생이 군인을 때려?”
그러나 유태 형은 버텨내었다. 수병 여럿이 달려들었으나 발길이며 주먹질로 맞받아친 거다. 그리고 원동역에 열차가 닿자 재빨리 내려 곱배로 옮아 타고 말았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고 만 수병들은 객차에서 20여 명으로 세를 불려 다음 삼랑진역에서 유태 형을 잡기로 할밖에. 그거야말로 독안에 든 쥐 꼴이었다.
하지만 그건 계산 착오였다. 깐촌(작원간이라는 유적지가 있다)을 지나 기차가 속도를 약간 줄이나 싶었을 때 유태는 무시무시한 기술(?)을 발휘하여 곱배에서 뛰어내리고 만 것!
지나간 얘긴데 통학생들은 그런 것쯤 누워서 떡 먹기다. 정도의 차이가 있었을 따름이지 그 느릿느릿 달리는 완행열차에서는 하나의 문화(?)였다 하자. 특히 그 시절 ‘진해콩’ 따위를 파는 잡상인들은 서커스 단원처럼 묘기를 부렸다.
그렇다고 해서 일이 쉽게 끝날 리는 없는 법. 소문이 쫘 펴져 유태 형은 군헌병대에 붙잡혀 가서 경을 치고 말았다. 무수히 폭력을 당한 것은 물론, 격파를 하느라고 단련된 오른쪽 주먹의 볼록 튀어나온 살점을 펜치로 뜯기는 수모까지 당하고 만다. 얼마 뒤에 만난 그의 전언이 기가 막힌다.
“이번에 공부 좀 했다이. 나한테 맞은 수병이 뭐라는지 알아?”
“뭐랍디까?”
“나더러 징역을 살아도 몇 년 살 텐데, 혼자서 여러 명을 상대하는 그 기백에 놀라서 놓아 주었다는 거야. 복싱 선수였어. 38회 전국 체육대회 미들급 금 메달리스트!”
유태 형은 입맛을 쩝쩝 다시더니
“그러면서 그날 수병들이 학생 하나를 얼른 제압하지 못한 게 부끄럽다는 거야. 자성한다던가? 그라고 떼를 믿고 남에게 위해를 가한다는 건 비겁하다는 거라고 하더라. 그 양반 대단한 철학을 가졌더라.”
“얼굴에도 상처가 좀 있네요.”
“뭐 이것쯤 견뎌내야지. 대단한 선배라 형님이라 부르기로 했어. 헌병이야.”
다시 형님 집 앞.
“휴가 왔다면서?”
“예, 형님. 엄마가 다쳤습니다.” “며칠 있을 거야?”
“일주일 받았으니 사나흘 남았네요.”
“그래, 내일 나하고 김해에 좀 갔다 오자.”
“왜요?”
“나 결혼했대이”
“축하합니다. 누군데요? 미자?”
“아니다.” 그러곤 귀엣말로 술집에 나가는 아가씨가 하도 참해서 청혼을 했더라는 것. 예쁘고 마음씨도 착하단다.
“근데 김해는 왜요?”
“처가에서 농사 조금 짓는데, 일손이 조금 부족하다 안 카나?” “좋습니다. 가지요.”
“그라고 오다가 진해까지 내리자이. 거기 암자에 내 친구가 있능기라. 하루 저녁 자고 오자. 니 초임지가 진해 대야초등학교 아니가?”
그게 김해 비행장 습격 사건을 목격하는 단초가 될 줄이야. 어쨌든 유태 형과 나는 김해 평가 마을 공군비행학교(지금 제5공중기동비행단) 입구에 있는 유태 형 처가에 갔다. 종일 일손을 거들고 진해 행 마지막 버스를 타게 된다. 1966년 8월 7일 오후 일곱 시 무렵이었다.
우리 둘은 덕두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땅 흘리고 일한 뒤 깨끗이 씻은 덕분에 기분이 매우 좋았다. 통학 시절 우리가 부르던 ‘경상도 아가씨’도 흥얼 거렸다.
사시 계단 층층대에 혼자 우는 나그네
울지 말고 속 시원히 말 좀 하세요
피난 살이 처량하게 동정하는 판자집에
경상도 아가씨가 애처러이 우는구나
그래도 대답 없이
슬피 우는 이북 고향 언제 가려나
우리는 남백송 형의 히트곡 ‘전화 통신’도 흉내내었다. 그때만 해도 삼랑진에 극장이 있어 심심찮게 쇼단이 왔다. 남백송 형은 스타였다.
이윽고 버스가 덜컹거리며 달려와 멎었다. 우리 둘은 비좁은 버스에 힘겹게 올랐다.
버스가 출발하려는 찰나, 공군 장교 3명이 헐레벌떡 달려 왔다. 소위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그런데 이미 버스에 타고 술에 취한 채 노래를 부르고 야단이었던 해병대 장교 8명이 시비를 건 것이다. 아니 아예 공군 장교들이 버스를 못 타게 방해를 한 것.
공군 장교들은 다시 억지로 승차했다. 해병대들은 다시 공군을 조롱했다. 어깨를 치고
“귀관, 귀관!”
하며 모자를 빼앗아 던지곤 했다. 차 안에서 승객들이 웅성웅성했다.
“야, 해병대답지 못하다. 저기 무슨 우사(우세)고? 일대일이라면 모르지만 8:3이라니 해병대 우사다. 더구나 장교가….”
버스는 그 등쌀에 도중에 몇 번 멎었다. 정류소가 아닌 데서도. 그런 와중에 유태 형이 내게 귀엣말을 한 것이다.
“해병대 참 개병대가 됐네. 다음 정류장에서 다시 시비가 붙으면 내가 해병대 한두 명을 쓰러뜨릴 거야. 일찍이 없던 우사를 저 넘들이 하는구나.”
버스가 웅천에 닿기 전에 다시 한 번 소란이 일어났다. 버스는 잠시 멎었다. 해병대들이 공군에게 노골적이 수모를 주고 있었다. 여남은 명의 장교들이 한데 어울려 몸싸움을 벌였다. 그때 유태 형이 나선 것이다.
“야, 해병대 장교들! 나 해병대 사병 출신이야. 나이는 너희들 비슷하다. 이게 뭐꼬?”
승객들이 박수를 보냈다. 그러자 해병대 중 하나가 유태 형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는 길가에 나둥그러지고 말았다. 태권도 공인 4단, 산전수전 다 겪은 천하의 진정한 싸움꾼인 유태 형의 현란한 주먹질과 발길질을 참으로 오랜만에 보았다. 해병대들은 유구무언이었다. 그도 그럴 게 해병대 장교가 해병대 출신 예비역 사병한테 맞았다? 생각조차 못할 일이었으니까. 누워서 침을 뱉어도 그렇게 뱉어서는 안 된다.
나는 그 옛날 유태 형이 기차 안에서 수병을 때려눕히던 광경이 머릿속에서 되살아났다.
그 다음은? 대폭 생략하자.
우리 둘은 웅천에 못 미친 그 자리에서 몸을 피했고, 공군 장교들이 20명 가량 탄 닷찌 버스가 지나가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만 해병대 장교 8명은 그들로부터 집단 폭행을 당했음은 후문을 통해 알았다. 그 이튿날인가? 해병대 장교들은 부대를 이탈하여 공군 비행학교를 습격한다. 많은 부상자가 나타나게 되고, 급기야는 해병대 소위 하나가 목숨을 잃고 만다.
참 기구한 나의 5672부대와의 인연이었다. 거기서 파생된 것이 교감 교장 시절을 그 부대 가까이서 보낸 것이라 하면 궤변일까? 내 노인대학과 강서 노인대학과의 그 수많은 사건.
노인학교 학생들의 해외여행 때와 부산일보사에서 개최한 졸업식 때의 버스 지원, 여러 번에 걸친 군악대 연주, 120명 노인학교 학생 초청 점심 식사 대접, 부대 설립 후 처음으로 50명 초등학생 초청 내무반 생활 기회 제공(6‧25 50주년 기념식 및 8킬로 행군 기회) 및, 군견 훈련 견학, 대형 선풍기 두 대 지원…. 나는 교사 시절에 87명 노인학생을 인솔 대북에 갔다 왔다. 교감 승진 후에도 30명과 더불어 태국 방콕에, 80명과 같이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를 주마간산 격이지만 방문하고 무사히 귀환한다. 여태껏 전무했고 앞으로도 전무하리라. 그 공군부대 김진삼, 주창성, 김부곤, 김영곤 단장을 만났거나 만나기로 한다.
아무튼 그날 공군 장교와 해병대 장교들의 충돌 현장에서 나는 많은 것을 깨달았다. 중과부적의 현장을 본다면 약자 편을 들어야 한다는 교훈도 그때 습득했다. 육해공군은 각기 다른 군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그러고 나서 나는 일흔의 나이를 넘기고 육군 최전방 1사단 1*연대까지오르내리며 안보 강연을 해 왔다. 마흔 시간을 훌쩍 넘겼다. 주로 내가 제대했던 26사단 7* 여단과 예하 3개 대대 및 직할 부대 장병들이 대상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등병에서 대장까지 급기야는 국방장관까지 만났다. 전(前)‧ 현(現)을 구분 짓지 않는 표현이다. 예비역과 현역을 합해서 하는 말이기도 하다. 백선엽과 같은 생년이지만 건강은 더 좋은 장경석 예비역 준장을 기자로서 인터뷰하기도 했다.
그 얘기를 이번에 전자책으로 낸다. 사진 자료는 출판사에 다 넘어갔다. 팔만 나으면 일주일 정도 작업으로 끝날 것이다.
마지막 맺는말이다. 노무현은 내게 철저한 애증(?)의 대상이다. 한 자연인으로의 입장에서 보면 말이다. 그의 군 생활의 면면을 찾아보았다. 노무식이라는 예비역 장성이 12사단 대대장으로 있을 때 통신병으로 노무현이 전입했더란다. 그를 폄훼할 생각도 미화할 생각도 없다.
다만 단순한 맺음이 아니라 결론 하나는 이렇다.
“모든 군인은 내 전우다. 그가 죽었든 살아 있든….육군이든 해군이든 공군이든 해병대든 마찬가지다. 이등병이든 대장이든! 내 아이도 공군이었다. 사정이 있어 군에 못 간 사람도 그가 군을 사랑하면 내 전우다. 모든 전우의 가족도 전우다. ‘그래도 노무현과’는 전우 사이다.”
아무튼 나는 군을 위해 산다. 누가 뭐래도….이제 다시는 배낭에 책을 스무 권씩 넣어 짊어지고 일선 부대를 찾는 일은 글렀다. 설사 어깨가 낫더라도 말이다. 대신 색소폰을 짊어지고-중국제 케이스를 하나 샀는데, 알토 색소폰이라 합해서 3킬로그램 미만이다-가까이 있는 특전사 군악대를 방문할 수는 있다. 명예 분대장으로 위촉해 달라는 떼를 쓸 참이다. 소설 같은 이야기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
다시 한 번 혼잣말을 해 보자.
“그래도 노무현과는 전우 사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