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여산송씨 『지장록』(1937년) 전문이다.
武城鄕學堂跋 (盤谷 宋世珩跋)
堂卽盛周之鄙序也,草創於丁逸民,大備於吾仲氏先生,其所以明日用彛倫之敎,而成誘掖之方,視古無讓,予以末學,從事於下風,忝竊科第,直情忤時,遭禍,斥居數三年于玆,斯堂不古,滿目悲感,予於是忘其覊苦,濫懷繼作之謀,沙其壁垣,其外凡修葺之功,經時告訖,陳其受業於先生者,鋟梓而掛之,賤姓名亦與其中,又請申靈川八分大字,揭爲堂題,
靈川之謫居南荒,亦有年矣,越十年,甲辰靈川拔爲本縣宰,予亦衣錦還鄕,則靈川手跡完然如新,予之姓名猶在楣間,盈庭逢掖,濟濟揖讓,髣髴白鹿之遺風,逸民與吾仲氏先生爲斯道美意,庶幾不墜,而申靈川興衰之功,亦有所賴焉,
人生之屈伸,斯文之興衰,其若是夫,雖他日重來吾儕屈伸,固不知何如,史斯文愈盛而愈振,吾之望也,嗟呼士子所可學者,不在文也,勉乎哉.
“무성향학당 발”(번역문)
학당은 곧 성대했던 주나라의 작은 마을의 학교이니, 丁逸民(정극인)이 창건되었고, 나에 吾仲氏(송세림) 선생이 크게 갖추어져, 그 자리에서 일용의 떳떳한 윤리의 가르침을 밝히고, 권유하여 돕는 방도를 이룬 바가, 고대를 보아도 양보함이 없었는데, 내가 말학으로써, 아랫바람(낮은 곳)에서 종사하다가, 과거급제를 욕보여 훔쳤는데, 심정을 곧게 하며 때를 거스르다, 재앙을 만나, 여기에서 수삼 년을 물리치고 사는데, 이 집이 옛날 같지 않아서, 눈을 가득 채움이 슬픈 감정이라, 내가 이에 그 나그네의 고됨을 잊고, 이어서 지을 꾀함을 참람되이 품고는, 그 벽과 담을 흙바르고, 그 외의 뭇 보수한 공들이, 시간을 지나 마침을 고하였으니, 그 선생에게서 수업받은 것을 늘어놓아, 책판에 새기어 그것을 매달고, 천한 성명(본인의 성명)도 또한 그 가운데에 더불었으며, 또 신영천(영천자 신잠)에게 팔분체의 큰 글자를 청하여, 높이 들어 학당의 제목으로 하였었다.
영천(경상북도 고령(高靈)의 옛 이름)의 남쪽 황무지에서 귀양살이함이 또한 여러 해가 있었는데, 십년을 넘어 갑진년(1544)에 영천(신잠(申潛))이 본 현의 현감으로 발탁되고, 나도 또한 금의환향하였다면, 영천의 손자취가 완연히 새로움과 같고, 나의 성명도 아직 문미간에 있는데, 뜰을 가득 채운 학자들이, 성대히 읍하고 사양함이, 백록(주자의 백록동서원)의 유풍을 방불케 하여, 일민(정극인)과 나에 둘째(송세림) 선생이 이 도를 위했던 아름다운 뜻이, 거의 떨어지지 않았으며, 신영천이 쇠함을 일으킨 공도, 또한 힘입은 바가 있었다.
인생의 굽어지고 펴짐과, 이 도의 흥하고 쇠함이, 그 이와 같은가. 비록 다른 날에 다시 올 우리들의 굽어지고 펴짐을, 진실로 어떠할지 알 수 없지만, 이 도가 더욱 성대하고 더욱 떨쳐 짐에 역사가 되는 것이, 나의 바램이다. 오호 선비가 가히 배울 바의 것은, 문장에 있지 않음이니, 힘쓸지라.(송세형 발)
정읍시 칠보면 향토사(조선시대 태인현 고현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