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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9월부터 영월에서는 조선시대 충절의 대표적 인물 중에 한 명인 성삼문 존중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고 있음을 영월의 모 주간신문에서는 기사로 다루고 있었습니다. 타당성을 기술한 정치인사의 칼럼의 글이 실려 있었으며, 실천을 위한 위원회가 조직되고 영월읍에 있는 봉래산 정상에 '이 몸이 주거 가셔' 시석을 세우겠다는 계획이었습니다.
봉래산에 세우려는 근거로는 한시에 표기된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인데 원문을 보면,
이 몸이 주거 가셔 무어시 될 하니,
蓬萊山 第一峯에 落落長松되야 이셔
白雪이 滿乾坤제 獨也靑靑리라. 입니다.
영월과 성삼문은 아무런 인연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는 기록들이 있으나, 논리의 전개와 당위성을 기술한 시조 한편이 11월5일 문학회 카페에 '매죽헌 성삼문의 봉래산 ' 이라는 제목으로 창작방에 올려져 있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임 향한 일편단심 거열형도 마다않고
영월 땅 봉래산에 낙락장송 되시어
오늘도 만고 충절을 우뢰같이 전한다.
임에게 바친 단심 만대에 전할 적에
절명시를 남기면서 죽임을 재촉하니
매죽헌 만고 충신을 봉래산은 알고 있다.
매죽헌: 성삼문 공의 아호.
거열형: 우 마차에 두 손과 두 발을 묶어 찢어 죽이는 죽음의 형벌
절명시: 성삼문 공이 죽기 전에 읊은 시
봉래산: 단종 임금님의 능이 있는 영월읍의 주산이다 (영월 별마로 천문대가 있는 산이다)
*봉래산은 상상의 산 혹은 신의 산이라 부르나 영월에서 단종임금이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곳이며 또한 영월의 주산이 봉래산으로 단종 임금 의 복위를 하다가 거열형으로 일생을 마감한 성삼문 공의 봉래산은 결코 삼신산이 아니라 영월의 봉래산을 가리킨 것으로 여겨진다.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창작 방에 오른 글이라 창작으로 볼 것이냐? 이었습니다.
역사를 바탕으로 창작된 시 인데 논란의 핵심은 세 가지였습니다.
- 첫 연에 '거열형'이 ,
- 봉래산은 단종임금의 능이 있는 영월읍의 주산
-봉래산은~ 성삼문 공의 봉래산은 결코 삼신산이 아니라 영월의 봉래산을 가리킨 것으로 여겨진다. -였습니다.
시에서 이야기 하는 '절명시'라는 것은 성삼문이 처형을 당하기 전에 지었다고 알려지고 있는 한시로서, 본문은 -
擊鼓催人命(격고최인명) 북소리는 목숨을 재촉하는데,
回首日欲科(회수일욕과) 고개를 돌려 서산을 보니 지는 해 넘어가려 하네.
黃泉無一店(황천무일점) 황천에는 주막도 없을 것이니,
今夜宿誰家(금야숙수가) 오늘 밤은 뉘 집에서 잠을 잘꼬? - 입니다.
성삼문과 단종 그리고 영월의 봉래산의 관계에 있어서 역사적 근거를 바탕으로 논의되어야 하기에 이에 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성삼문은 1456년 6월 8일 능지처참(난도질하여 죽음에 이르도록 하는 형벌)으로 생을 다했으며, 단종대왕은 1457년 6월28일 영월 땅에 도착했다 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성삼문 사후 1년 뒤에 영월과 단종의 인연의 역사는 시작되었기에 '이 몸이 주거 가셔'에서 표현된 '봉래산은 영월의 봉래산이다' 주장하기에는, 아니 주장할 수 없다 하겠습니다.
만약 관련이 있는 것으로 되자면, 단종이 영월에 도착한 이후 성삼문이 처형을 당 했다 던지 시조를 지었다든지 했다면 당위성을 주장 할 수 있다 하겠습니다.
그래도 무언가 있지 않았을까요?
세 살 때 (?부모의 등에 업혀 오밤중에)직동리를 떠난 김어수 시조시인처럼 단 하나라도 건더기가 될 만한 인연은 없었을까요.... 저도 있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역사는 기록 그대로가 말하고 답하고 있는데 왜 영월의 봉래산에 시비가 서야한다 하는지?
만약 그가, 역사가 기록하는 충절의 표상으로 칭송받는 인물이 아닌, '김질'과 같은 인물이었다면 오늘날 아주 작은 끄나풀이라도 잡으려 했을까요...
차라리 이렇게 논리를 전개하여 설득을 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단종대왕 복위에 관련된 인물 6인에 대하여 단종의 능이 영월에 있으니 이들에 대한 기록들을 찾아내어 충절 시비공원을 조성, 충신들의 지조를 기억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로 한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Frank Sinatra의 my way 노래를 들으면서 성산문의 지조와 절개에 대한 한시를 접하고 보니 저도 글을 쓰고 싶어집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92125274AFA0ADE4C)
my way / 心鄕
가는 길이
배고프고 고달파도
대신 갈 수 없어
가야할 길이라면
남이 가든 아니가든
가야 하니
나의 인생 my way
왜 몰랐을까
함께 가면 we way
따라가면 남의 인생
my way my way
we way 되는 것을
첫댓글 논란이 있을수록 충분한 고증이 필요합니다. 신속도 중요하지만 신중이 더 중요하겠지요. 심향님께서는 이 점을 참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