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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존창의 생애와 신앙
한성준 (신례원 본당 성지개발위원, 예산여고 역사 교사)
충청도에서 최초로 복음의 빛이 전파된 곳, 여사울 성지. 충청도 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의 발상지이며 못자리가 된다. 그 주역으로서 내포의 사도 이존창(루도비꼬)이 있어기에 복음이 이 땅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이존창(루도비꼬)은 단원이라고 불리웠고 충청도 여사울 (지금의 충남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의 농가에서 중인 계층으로 출생했다. 그는 1780년대에 서울에 올라왔다가 김범우의 집에서 권일신을 만나 그의 제자가 된다. 그는 스승으로부터 천주교의 교리와 계명 그리고 신심생활을 배우고 루도비꼬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스승 권일신으로부터 고향으로 돌아가 복음을 전파하라는 사명을 듣고 충청도 선교에 전력을 기울이게 된다.
게다가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재주가 있었고 학덕과 신망이 두터워 입교자의 수가 계속 증가하였다. 그리하여 무려 300 여명의 신자가 생긴다. 그의 복음 선포에 귀를 기울이는 이는 양반층에서 서민층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다. 지식층과 양반들이 실학연구로 시작한 천주교가 그로 인해 대중화를 꾀하게 된다. 신앙의 말을 듣기위해 이곳 저것에서 사람들이 단체를 이루며 이존창의 집에 모여 들었고, 영세 후에 돌아갔다. 단원은 선교활동과 함께 가성직 교계의 교회시대에 충청도를 담당한 신부로서 활약했다.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공주에서 체포되었다가 배교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자유의 몸이 되자 자신의 잘못을 통회하고 더 적극적으로 전교활동에 들어간다. 고향을 떠나 홍산으로 가서 전교에 열을 올린다. 곧 이곳도 천주교 마을이 되었다. 그 후 가성직 제도가 잘못된 것을 알고 주문모 신부의 입국을 적극적으로 돕게 된다. 주문모 신부가 귀국한 후에 이존창은 주신부로부터 꾸지람을 들었다. "그대의 배교로 교우들에게 나쁜 본보기를 보였으니 어떻게 넉넉히 보속을 하겠는가? 순교만이 그대를 용서받게 할 것이다." 단원은 주 신부의 훈계를 명심하고 순교를 준비하고 있었다.
마침내 1795년 말에 이존창은 공주 감영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에도 굽히지 않고 그의 고향 관할인 천안 감영으로 옮겨 연금생활을 한다. 이 때 다른 교우들의 배교 소식을 들으며 과거의 자신을 생각하고 마음 아파하였다고 한다. 1801년 신유대박해가 일어나자 이존창은 다시 공주 감영에 끌려가 심문을 받고 서울로 이송되어 사형선고를 받는다. 조정에서는 그 당시 교세가 가장 컸던 충청도 도민들에게 경각심을 일으키기 위해서 공주 감영에서 처형하도록 지시한다. 단원은 1801년 2월 28일(음력)에 참수형을 받았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친척들이 그의 시체를 거두러 갔을 때 여섯번 칼질에 잘라진 목이 다시 굳게 붙었고 목에 실낱 같은 흉터가 둘러처져 있었다고 한다.
우리 교회 최초의 신부들인 김대건과 최양업의 집안이 바로 이존창에게서 교리를 배우고 입교하였다. 김신부는 이존창의 조카딸의 손자이고 최신부는 그의 조카의 손자가 된다. 단원 이존창은 우리 교구와 한국 교회의 기틀을 잡아가는데 더 큰 역할을 한 분이다. 충청도는 그 당시 가장 큰 교세를 형성했고 이들은 박해시 전국으로 퍼져 복음의 씨앗을 뿌리게 된다. 달레 교회사에서는 "오늘의 우리 교우들 대부분이 그가 그 때 입교시킨 사람들의 후손이다. 그러므로 내포와 그 이웃 여러 고을에서는 그의 기억을 우러르고 있다" 고 전한다.
1. 출신 배경과 유학 공부
충청도 지역에 처음 복음을 전파한 ‘내포의 사도’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혹은 곤자가의 루도비코)(李存昌, 1759~1801) 사도는 충청도 내포평야의 한가운데 ― 현재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여사울)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지형상 아산만의 갯벌이 내륙 쪽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어 예로부터 내포평야를 굽이굽이 가로질러 흐르는 삽교천과 무한천을 통한 내륙 수운(水運)이 발달함으로써 육지와 바다의 산물이 만나면서 경제적으로 풍요를 누리던 곳이었다.
부모님과 집안에 대해 전해지는 자료가 거의 없어서 확실치는 않지만, ‘단원(端源)’이라고도 불린 존창의 성장 과정과 행적으로 미루어볼 때, 부모님은 양인(良人) 신분으로서 대대로 이 지역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땅을 개간하여 상당한 경제력을 쌓은 부농(富農)이었다. 아마 농사를 크게 지으면서 밀물을 이용해 올라오는 수산업 선박과 관련된 일에도 관여했을 가능성도 있다.
왜냐면 나중에 존창이 여사울에서 복음을 전파할 때 마을이나 주변 사람들이 쉽게 복음을 받아들이고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몰려와 이 마을에서 유숙(留宿)했다는 기록과, 천안 감옥에 있을 때 스승 이기양에게 새우젓을 보내주었다는 기록으로 봐서 짐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농업과 상업으로 번성한 지역의 하나여서, 마치 서울처럼 부유한 기와집이 많았다고 해서 ‘여(如) 서울’이라고도 불리던 이곳에서, 존창의 집안은 농사를 크게 지으면서도 좀 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는 업종을 겸업해 왔을 것이다. 그리고 재산이 넉넉했던 것 이상으로 후한 인심을 베풀어 이웃에 두터운 신망(信望)을 쌓아왔다. 그래서 존창 역시도 어려서부터 그러한 부모님의 행동을 보고자라면서 자신의 내면에 간직한 선한 양심과 덕망을 키워 실천하는 삶의 바탕을 마련했기 때문에 장차 하느님께서 맡기신 ‘내포의 사도’라는 막중한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존창은 경제적 어려움 없이 자랐으며 또한 어려서부터 총명했기 때문에, 무거운 국역(國役)의 부담을 지고 살아가던 양인 신분이면 누구나 꿈꾸었던 ‘양반 가문으로의 신분 상승’을 공부를 통해 이루려는 마음을 품었다. 집안에서는 이러한 존창의 공부를 적극적으로 뒷받침하였고, 존창은 그 기대를 업고 열심히 공부하였다. 아마 부모님은 일찍 세상을 떠나신 것 같다. 형과 함께 상당한 재산을 물려받은 존창은, 가업(家業)에 전념했던 형과는 달리 학업에 정진하여 날로 학문이 성장해 갔다. 존창은 학문을 통해 인간과 세상의 근본적 문제를 탐구하고 진정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였다. 그리고 공부를 통해 터득한 예절과 도리를 나눔의 생활로 실천해나갔다. 그러다 보니 약관(弱冠)의 나이에 들기도 전에 동네와 지역의 신임을 얻었고, ‘덕망(德望)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에 비해 그의 형은 비록 인색한 사람은 결코 아니었지만, 마음에 이상을 품고 살기보다는 현실적 삶을 더 중시했던 인물이었던 것 같다. 나중에 형은 동생으로부터 복음을 전해듣기는 했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박해가 다가오자 신앙을 배척하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동생이 박해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을 때, 함께 그 고통을 나누어지기보다는 멀리 이사갈 것을 강요함으로써 자신의 현세적 안위를 지키려고 하였다.
아마도 어려서부터 인근의 서생(書生)을 독선생으로 모셔다가 글을 깨우치고 유교 경전을 하나 하나 익혀갔을 존창은, 홍유한(洪儒漢)을 만나서 글을 배웠고, 그의 영향을 어느 정도는 받았던 것 같다. 후에 권철신이 홍유한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충분히 짐작이 간다. 홍유한(1726~1785)은 한국천주교회 ‘신앙의 대 선조’, ‘첫 수덕(修德)자’로 불리는 분이다. 예산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16세부터 조선후기 실학의 선구자 성호 이익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1750년경 이익이 제자들과 함께 중국에서 들어온 천주교 서적 《천주실의(天主實義)》, 《칠극(七克)》을 연구할 때 다른 이들과는 달리 거기에 담긴 내용을 신앙으로 받아들여서 그 계명을 지키기 시작했고, 1757년 부친이 돌아가시자 서울의 집을 정리하여 친척들이 살고 있는 예산으로 내려와 1775년 경상도 순흥으로 떠나기까지 18년 동안 살았다.
존창의 나이 16세가 되던 1774년경, 조선의 상민(常民)에게 부과되었던 군역(軍役)의 부담으로 인해 공부를 계속하기가 어려워지자, 직접 군수(郡守)에게 청을 하여 면제받았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존창의 그릇 됨됨이와 집안의 경제적 능력이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존창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학문에 대한 의욕을 불태울 수 있었다. 그래서 더 큰 배움을 얻고자 덕산에 내려와 살던 이기양(李基讓)을 찾아갔다. 이기양은 성호 이익 계통으로, 당시 예산에 살던 대학자 이병휴(李秉休)로부터 양명학을 배우고자 경기도에서 내려온 학자였다. 존창을 조금 가르쳐 본 이기양은 덕과 총명함을 겸비한 이 젊은이가 마음에 쏙 들어서 자신의 수제자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존창은 그의 집에 기거하며 학문에 정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기양의 영향으로 존창 역시 조선 왕조의 사회 지배 이념이었던 성리-주자학을 비판하고 학문의 실천성을 강조한 양명학을 익혀 당시 사회 모순을 비판하면서 장차 양반 관료로 진출하여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데 일조(一助)하고자 하는 꿈을 지닌 지식인으로 성장하였다.
이존창이 18세가 되던 1776년, 스승 이기양은 진사(進士)시에 장원 급제하여 정치에 뜻을 두고 경기도 이천으로 이주하면서 같은 성호 학파 동문으로 평소 학문적으로 친밀하게 교류하던 권철신, 일신 형제를 소개해주었다. 이제 존창에게는 스승이 셋이나 생긴 것이다. 이 때쯤 결혼했을 존창은 그들의 제자가 되어 해마다 여러 달씩 경기도 이천으로 가서 장기간 이기양의 집에 머무르며 수학하였고, 또한 양근의 권씨 댁으로 가서 학문을 연마하기도 하였다. 존창을 신임하고 아껴주던 권철신, 이기양 두 스승은 1777년 여름에는 여사울 존창의 집에 와서 머물기도 하였다. 이렇게 존창은 권씨 형제에게 배우면서 이미 이기양 밑에서 그 바탕을 마련했던 개혁적 지식인의 면모를 더욱 다져나가게 된다. 녹암(鹿菴) 권철신은 이기양과는 달리 관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여 ‘녹암계’라 부리는 학파까지 형성했던 당대의 석학(碩學)이었는데, 그의 인품과 학문 수준, 개혁성은 존창에게 또 다른 감동과 사명감을 주었다.
2. 영세를 받고 초기 조선 교회 선구자로 활동하다
1779년 겨울경부터 권씨 형제들은 이벽, 이승훈,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권상학, 김원성, 이총억 등과 함께 주어사 천진암에서 이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천주교 서적들을 본격적으로 연구․토론하는 강학회(講學會)에 참여하였다. 강학회를 주도하고 가장 열성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여 실천한 분은 이벽(李檗)이었는데, 그의 적극적 주장과 권유에 의해서 권씨 형제 중에는 일신이 형보다 먼저 신앙을 받아들였고, 그 신앙은 그대로 존창에게 전도되었다. 1784년 북경으로 가서 최초로 영세를 받고 돌아온 이승훈으로부터 그 해 겨울에 이벽과 함께 영세를 받은 스승 권일신은, 곧바로 제자에게 교리를 가르쳐 1784년 겨울이나 1785년 봄에는 ‘루도비꼬 곤자가’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과거 시험에 뜻을 두고 공부를 시작했던 존창은 하느님의 뜻에 의해 개혁적 지식으로 성장하였다가 26세에 이르러 복음의 진리를 받아들여 주님의 사도가 되었다. 그 후 존창은 중인 김범우의 집에서 이루어진 신앙 집회에도 참여하였고, 초기 한국천주교회의 선구자로 활동하게 된다.
존창이 쉽게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바탕을 유추하자면 이러하다. 이미 예산에서 공부할 때 홍유한이나 이병휴, 이기양을 통하여 ‘서학(西學 - 천주교)’에 관한 이야기나 서적을 접해 본 일이 있던 존창은 천주교에 대해 호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권씨 형제가 천진암 강학회에 참여하고 있을 때도 간간히 그 소식을 접하면서 자신도 참여하고픈 갈망을 느꼈다. 마침내 스승 권일신으로부터 복음에 대해 자세히 배우고 신앙을 권유받자 지금까지 유학을 공부하면서 느끼지 못했던 진리의 빛을 발견하게 된다. 우주 삼라만상의 이치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모든 것을 리(理)와 기(氣)의 상호작용으로 설명하는 유교의 가르침, 그리고 당시 사회의 각종 모순을 유교의 큰 틀 안에서 바꾸고자 했던 ‘실학자’들의 개혁안은 이존창의 마음에 못내 채울 수 없는 부족함을 안겨주고 있었다. 그런데 천주교는 간단명료한 근거를 들어 인간과 우주의 원리를 설명하였으며, 인간은 가장 존엄한 존재이면서도 스스로는 절대로 극복할 수 없는 한계를 지닌 나약한 존재임을 솔직히 인정하였고, 결국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그 분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음과 하느님 앞에 모든 인간이 평등(平等)함을 가르쳤다. 이러한 ‘복음(福音)’은 양인 출신으로서 유교적 신분 사회의 모순을 잘 알고 비판하면서 변혁을 꿈꾸던 존창의 사상적 허전함을 채워주고 가슴 속 깊이 후련함을 가져다준 ‘기쁜 소식’이었던 것이다.
3. 여사울에서의 전교 활동으로 내포 신앙 공동체를 이루다
세례를 받은 존창은 “고향으로 돌아가 전교하라”는 스승의 명에 의해 바로 고향 여사울로 내려와 복음 전파에 전력을 기울였다. 거기에 살던 그의 친척 30여 가구와 300가구나 되는 이곳의 사람들이 첫 전교의 대상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내포의 신앙 공동체는 1785년 ‘추조(秋曹) 적발사건’으로 인해 서울에서 김범우가 순교의 영광을 받게되는 사건이 있었음에도 오히려 계속 증가하여 갔다. 평소부터 쌓아온 인격과 덕망에다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진실하고 감동적인 설교는 그의 복음을 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을 신앙으로 이끌었다. 이 때의 일을 1866년 병인박해 때의 순교 성인 다블뤼 주교는 1860년에 그가 정리한 ‘한국천주교회사에 관한 기록’에서 이렇게 표현하였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잠깐 동안에 자기 가족과 친척과 친구, 그리고 그의 지식과 덕행의 평판에 이끌려온 많은 사람들을 입교시켰다. 저 유명한 내포 천주교회의 기초는 이렇게 던져졌다. ... 그는 위대한 재능에다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특별한 재주까지 겸비하였으므로 날마다 새로운 청중이 그에게 이끌려왔다. 그의 전교 활동에 저항하는 자는 극히 적었다. 그러므로 충청도 지방의 신자 숫자는 현저하게 증가하였다. 신앙을 받아들이는 것은 양반과 선비 집안뿐만이 아니었고, 농부․노동자․서민․가난한 사람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받았다. 그들은 기쁜 소식을 듣기 위해 멀리서 떼를 지어 몰려왔고, 종종 여러 날 머물며 신자들 집에서 먹고 자고 하였다.
이처럼 이존창의 전교 활동은 점차 신분과 지역의 범위를 넓혀갔으며, 그만큼 많고 다양한 이들이 진리의 빛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이존창은 단지 여사울에만 머물며 전교한 것이 아니라 인근의 덕산, 면천, 홍주, 보령 등을 돌아다니며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파하였다. 이 때 신자가 된 사람들 중에 기록을 통해 알려진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① 이존창의 딸 멜라니아 : 김진후(金震厚) 비오에게 시집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조모가 된다.
② 사촌 누이 이 멜라니아 : 최양업(崔良業) 신부의 모친 이성례 마리아의 숙모가 된다.
※ 김대건 신부의 조모 이 멜라니아가 이존창의 사촌 누이라는 주장도 있다.
③ 최한일(崔漢馹) : 최양업 신부의 증조부가 된다. 이 때 그의 동생 한기(漢驥)도 같이 입교하였으며, 아들(최양업 신부의 조부) 부부도 같이 영세를 받았다.
④ 김종현(金淙鉉) : 김대건 신부의 큰할아버지가 된다.
⑤ 김광옥(金廣玉) 안드레아 : 여사울의 부유한 양인 출신으로 면장 직책을 맡고 있었고, 1801년 신유박해 때 공주에서 순교하였다.
⑥ 홍필주(洪必周) 필립보 : 덕산 출신 양반 홍지영(洪芝英)의 아들로 입교 후 계모인 강완숙 골롬바와 함께 상경하여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도와 활동하다가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⑦ 원동지(元同知) : 내포의 부유한 양인으로 전교 활동을 재정적으로 크게 후원하였다. 1793년 내포의 첫 순교자가 된 원시장 베드로․원 야고보와는 같은 집안으로 여겨진다.
⑧ 유군명 시메온 : 면천의 양반 출신으로 덕산 황모실(현재의 고덕면 호음리)에 와서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며, 신유박해 때 유배형을 받았다.
⑨ 최필제(崔必濟) 베드로 : 서울 최필공 토마스의 사촌 동생으로 중인 약사(藥師) 출신이며, 1791년 신해박해 때 체포, 석방되었다가 신유박해 때 순교하였다.
⑩ 김순재(金順才) : 면천 출신 김부봉의 아들로 김대건 신부 집안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존창의 전교 활동을 더욱 열성적으로 만든 사건은 1786~1787년에 시행되었던 ‘모방성직제도(模倣聖職制度, 일명 가성직제도)’였다. 존창은 여사울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중에도 간혹 서울에 올라가 스승 권일신을 비롯한 서울의 신자들과 만나 교류하곤 하였는데, 당시 교회의 지도층이 천주교 교리를 잘못 이해한 나머지 10명의 지도자를 사제(司祭)로 임명하였을 때, 존창도 사제가 되어 여사울에 내려와 미사를 드리고 성사(聖事)를 집행했던 일이 있었다.
비록 정약전의 지적으로 잘못을 깨닫고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문의하여 1년만에 그만두기는 하였지만, 이 사건은 금잔을 사용하여 매우 정성스럽게 미사를 드렸던 존창의 마음에 꺼질 줄 모르는 신앙의 열정을 북돋았고 금욕과 모범의 생활로 그를 이끌었다.
다시 평신도로 돌아온 존창은, 성직자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깨닫게 된 초기 한국 천주교회의 지도층이 1789~1790년에 성직자 영입 운동을 벌이게 되자 재정적 후원을 하는 등, 윤유일(尹有一) 바오로를 북경에 파견하는 일에 적극 가담하였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1795년 정월에 주문모 신부님이 한국 교회 최초의 성직자로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1790년말, 북경 주교로부터 ‘조상 제사 금지령’이 떨어지자 이승훈 등 상당수의 양반 지도층이 마음이 약해져서 신앙으로부터 멀어져 갔을 때도 그는 굳건하게 내포 교회를 지키며 전도 활동에 전념하였다.
그것은 서울 경기 지역과는 달리 존창이 하층민을 중심으로 전도한 결과라고도 볼 수 있고, 그만큼 내포 지역 신앙 공동체가 사랑과 나눔의 울타리 안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5~6년 가량의 짧은 기간이긴 했지만, 내포에 형성된 초기 신앙 공동체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 교회의 모습을 많이 닮고 있었다. 여사울에는 존창의 친인척이 많이 살고 있었다. 이 혈연을 바탕으로 한 공동체에 사랑의 복음이 전해지자, 그 공동체는 더 나누고 아껴주고 희생하는 공동체로 발전하였으며, 그러한 ‘사랑의 공동체’는 점차 더 많은 이웃과 지역으로 전파되어 나갔다. 그래서 오랜 동안 관리와 토호들의 착취와 압박에 시달리던 많은 백성이 소문을 듣고 그 공동체 안으로 달려와 얼굴을 내밀었고, 곧 그 일원이 되었던 것이다. 부유했던 신자는 기꺼이 손님 접대와 빈민 구제를 위해 재산을 내어놓았으며, 신자들 각자는 자신의 성덕(聖德)을 닦고 이웃에게 권면함으로써 예수님의 복음을 실천하고 전파하였다. 이러한 내포 신앙 공동체의 모습을 샤를르 달레 신부는 《한국천주교회사》의 몇 몇 곳에서 이렇게 전하고 있다.
신자 중 하나인 원동지라는 사람은 너그러운 손님 접대로 유명하였는데, 나중에 순교의 화관(花冠)을 받았다. 그는 존창 곤자가 루도비꼬의 청강생들을 많이 집에 받아들여 대접하였다. 그때부터 “이 단원의 집에 가서는 지식을 얻고, 원동지의 집에 가서는 음식을 얻는다”는 속담이 생겼다. ...
원시장 베드로... 사람들은 그가 특히 가난한 이들에게 자기 재산을 나누어주어 그들을 구해주고 자기의 지식으로 외교인들을 권고하는 열성에 감탄하였다. ...
강완숙 골롬바는 ... 신자 생활의 첫걸음부터 영웅적인 덕행을 갈망하였다. ... 그의 부지런함과 열심과 극기는 감탄할 만하였다. 그는 자기 가족과 친척과 친구들을 입교시키는 데 골몰하였고, 그의 열성은 이웃 동네에까지 미쳤다. ...
정산필 베드로는 ... 입교하기 전에는 성격이 격렬하고 힘이 비상하기 때문에 모두가 그를 무서워하였다. 그는 천주교인이 되어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는 행복을 누렸다. 그 때부터 그는 겸손하고 온순하고 친절하여졌다. ... 내포 지방 회장으로 임명되어, 기도와 신심 독서를 부지런히 하고 자기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끊임없이 가르치고 격려하는 데 전심하였다. ...
김광옥 안드레아 ... 비록 훌륭한 자질을 타고났으나, 지나치게 사나운 성질로 인하여 그를 아는 사람들이 모두 무서워하였다. ... 천주교를 배워 모든 이가 몹시 놀라는 가운데 입교하여, 교의 본분을 매우 열심히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 사순절에는 엄한 금식을 하고 여러 가지 극기 행위를 실천하였다. 그리고 여러 가지 천주교의 덕행을 매우 부지런히 닦음으로써 마침내 어떻게 자기의 성격을 꺾게 되었던지 사람들은 그가 젖먹이같이 되었다고 말할 지경이었다. ...
유군명은... 내포에서 신부의 직책을 수행하던 이존창으로부터 영세한 후 언제나 교우들의 모범이 되었고, 모든 수입을 가난한 이와 불행한 이들과 나누어 가졌다. 그는 자기 종들을 모두 해방시켜주었으며, 집으로 찾아오는 많은 교우들을 가르치고 권면하는 일을 가장 중요한 일과로 삼았다.
4. 최초의 시련 ― 형식적인 배교
이렇게 좋았던 존창과 내포 신앙 공동체에 모진 칼바람이 몰아닥쳤다. 1791년 진산에서 제사 문제로 일어난 신해박해가 닥친 것이다. 많은 신자들이 잡혀갔고, 배교(背敎)하여 목숨을 건지는 사람들도 늘어갔다. 충청도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정부로부터 ‘충청도 사학(邪學)의 괴수’로 지목받았던 존창도 체포되어 공주 감영으로 끌려가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이 때 그는 마치 끌려가신 예수님을 뒤따라 제사장의 집으로 갔던 베드로의 심정이 되었다. 마음으로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음에도, 계속되는 고문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배교를 선언하고야 만 것이다. 그의 배교는, 다른 신자를 밀고하거나 배교시키겠다고 말하지 않았던 점과 석방 후의 행적으로 미루어 형식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배교했다는 충청도 관찰사의 보고를 받은 조정은 크게 기뻐하면서, 그를 신앙의 모범으로 여기며 탄압을 견디어 내던 신자들을 회유하는 선전거리로 이용하였다. 당장 비겁하더라도 일단 목숨을 건져서 다시 전교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려는 뜻을 품고 있었더라도, 그의 배교는 내포 교회에 막대한 타격을 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다블뤼 주교는 “내포 천주교회 신자들이 가장 슬퍼하고 창피스러워했던 배교는 그들의 사도 이존창 곤자가 루도비꼬의 배교였다”고 기록하였던 것이다.
박해의 칼날은 1801년 신유박해라는 더 강력한 광풍(狂風)이 몰아닥칠 때까지도 간간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내포 신앙 공동체는 더 이상 초기의 모습을 유지할 수가 없게 된다. 대신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전라도나 경상도, 혹은 경기도, 강원도 등지로 뿔뿔이 흩어짐으로써 신앙이 더 넓은 지역으로 번져나가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다가 박해가 좀 수그러들었을 때 내포는 곧바로 다시 신앙의 중심지가 되어, 몰래 조선에 들어온 서양인 사제들에게 휴식과 연구의 안식처를 제공하였으며, 다른 지역에 복음을 전파할 하느님의 일꾼들을 길러내는 ‘조선 천주교회의 못자리’가 되었다.
5. 홍산과 고산에서의 전교 활동, 주문모 신부와의 만남
공주에서 풀려나 내포로 돌아온 존창은 베드로가 주님을 배반한 자책감에 가슴을 쥐어뜯으며 뼈저리게 괴로워했던 그 심정으로 눈물을 흘렸다. 박해자들의 감시가 계속되었고, 형이 천주교를 금할 것과 여사울을 떠날 것을 강요한 탓도 있었지만, 이제 이곳에서 떳떳한 얼굴로 전교 활동을 한다는 것이 신자들에게 못내 미안하기도 했다. 그래서 1791년 12월 30일날 충청도의 남쪽 지방인 부여 홍산(鴻山)으로 이주하였다. 존창이 여사울을 떠나던 날 그로부터 영세를 받은 동네와 인근의 많은 친지들이 나와 배웅해주었다.
홍산 지역에서 그는 전보다는 덜 드러나게 활동하였지만, 자신의 나약함과 비겁함으로 인한 손해를 하느님께 보상해드리려는 듯 그전과 다름없는 신앙심으로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전교하였다. 이곳에서의 전교 활동은 내포에서 활짝 피어난 복음의 꽃에서 씨앗을 거두어 남부 지방으로 뿌린 효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활동은 다시금 관가에 포착되었고 체포의 위험이 커지자, 존창은 1795년에 홍산을 떠나 잠시 금산(錦山)에 머물렀다가 전라도 고산(高山)으로 이사하였다. 이 때 고산으로 이주한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그 해 정월에 밀입국한 주문모 신부를 안전하게 모실 근거지가 필요해졌기 때문이었다. 내포에 살다가 서울로 이사간 강완숙(姜完淑) 골롬바의 집에 머물면서 활동하던 주 신부는 그의 입국 사실을 파악한 조정에서 5월 11일 체포령을 내리고 대대적인 수색작전을 전개하자, 서울을 떠나 피신해야 할 처지에 있었다. 그래서 존창은 전주에 살던 ‘호남의 사도’ 유항검(柳恒儉)에게 연락하여 “주 신부님을 모셔오자”고 제안하였다. 고산으로 이주한 직후 존창은 유항검의 동생 관검(觀儉)과 함께 서울의 최인길(崔仁吉) 마티아의 집으로 가서 주 신부를 뵈었으며, 일단 신부님을 경기도 양근을 거쳐 충청도 연산에 있던 이보현(李步玄) 프란치스코의 집으로 모셨다.
그리고 얼마 후 전주 유항검의 집으로 모셨다가, 신해박해 때 순교한 윤지충과 권상연의 묘지를 참배한 뒤, 고산의 자기 집으로 모셔왔는데, 주 신부는 거기서 윤지충의 동생 윤지헌(尹持憲) 프란치스코와 서산 출신 김강이(金綱伊) 시몬 등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어서 존창은 주 신부가 남포, 공주, 온양과 내포 지역을 순방할 때 모시고 안내하게 되는데, 이 순방은 관헌의 추적을 피해 피신을 다니면서도 동시에 여러 지역을 사목(司牧) 방문하는 뜻 깊은 여정이었다. 그 지역들은 이미 존창이 전교 활동을 벌인 곳들이었고, 특히 내포를 떠나 있으면서도 여전히 그 곳 신자들과 긴밀한 연락을 해왔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존창이 주 신부를 안내할 적임자였다. 주 신부는 이 기간 동안 덕산 출신 인언민(印彦敏) 마르띠노와 정산필(鄭山弼) 베드로 등에게 세례를 주었는데, 특히 정 베드로를 내포의 회장으로 임명하여 박해로 내포 교회가 입은 심한 상처를 치유하려고 애썼다.
이 사목 방문 기간을 통해 존창은 주신부로부터 깊은 감화를 받아 새로운 마음으로 전교하면서 장차 순교의 영광을 받을 결심을 하게 된다. 주 신부는 존창에게 자격도 없이 사제가 되어 성사를 집행한 일과 신해박해 때의 배교에 대해 깊이 참회하고 순교의 보속을 준비하라고 명하였으며, 존창은 성심으로 순명을 다짐하였던 것이다. 이 때의 상황을 달레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는 1791년 배교한 뒤에 진실로 뉘우쳐 다시 열심히 교회의 본분을 시작하였었다. 그는 주 신부를 볼 수 있었고, 얼마 동안 그의 곁에 머무를 수도 있었다. 신부는 그에게 자주 이런 말을 하였다. “그렇게 많은 죄를 범하고 자격도 없이 성사를 행하고, 그대의 배교로 교우들에게 나쁜 본을 보였으니 어떻게 넉넉히 보속을 하겠는가! 순교만이 그대를 용서받게 할 것이다.” 그래서 루도비꼬는 끊임없이 순교를 준비할 생각을 하였다.
이 시기에 존창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된 사람들 중에 기록을 통해 알려진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① 최여겸(崔汝謙) 마티아 : 전라도 무장(茂長)의 양반 출신으로, 처가인 한산(韓山)에 머물 때 진산의 윤지충과 교류한 적이 있으며, 이존창으로부터 영세를 받아 신자가 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하였다.
② 고윤득(高潤得) : 공주에서 나막신을 만들어 팔러 다니던 사람으로 박해를 피해 공주 인근의 교우촌에 숨어 살면서 이존창의 집을 왕래하며 교리를 배워 영세를 받았다. 신유박해 때 유배형을 받았다.
③ 김명주(金明柱), 인철(仁哲), 홍철(弘喆) 일가 : 공주 출신의 양인으로 영세한 후 서울로 이주하였다가 신유박해 때 유배형을 받았다.
④ 황심(黃沁) 토마스 : 덕산 출신 양인으로 연산으로 이주하였다가 신자가 되어 1795년부터 교회의 밀사(密使)로 활동하다 신유박해 때 순교하였다.
⑤ 황일광(黃日光) 알렉시스 : (후에 양인으로 신분이 상승된 것으로 추정되는) 홍주의 백정 출신으로 1798년에 세례를 받고 경상도로 이사갔다가, 1800년에 경기도 광주로 가서 정약종과 가깝게 지내다 그를 따라 서울로 가서 살다가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홍주에서 순교하였다.
⑥ 이가(李哥) : 청양 사람이다.
⑦ 김유산(金有山) 토마스 : 청양 금정역(驛)의 천민(賤民)인 역졸 출신으로 중이 되었다가 환속하여 홍산에서 짚신 장사를 하다가 이존창의 머슴에게서 복음을 전해듣고 교리를 배워 영세를 받았다. 그 후 존창을 따라 고산으로 갔다가 진잠으로 이사하여 살던 중에, 존창이 공주 감영에 갇혀있을 때 두 번(1798, 1799년) 부탁을 받고 대박청래(大舶請來) 운동에 참여하여 청나라에 밀사로 갔다왔고, 신유박해 때 전주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⑧ 최억명(崔億明) : 천안 출신으로 ‘최구두쇠’라 불린 최거두의 아들이다. 이존창을 따라 금산에서 살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홍산에서부터 신자가 된 듯하다.
6. 공주와 천안에서의 수감 생활, 마침내 순교의 영광을 받다
배교한 죄책감에 괴로워하면서도 진리의 빛으로 나아가기를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 앞에 참회하여 더욱 열심한 신앙의 모범을 보였던 존창은, 1795년 말에 주문모 신부를 추적하던 관헌들에게 고산에서 다시 체포되어 본음에서 1차로 문초를 받은 다음 공주 감영으로 압송되었다. 이번에는 온갖 문초와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켜낸 존창은 감영의 옥에 갇혀 지내게 된다. 그가 죽음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천주학 죄인을) 직접 가르치고 경계하여 개과천선한 효과가 있으면 방면하고, 그렇지 않으면 법을 적용하는 한이 있더라도 기필코 고치게 하라”는 정조 임금의 명 때문이었다. 그러한 명을 내린 것은 이존창 같이 중요한 인물은 장기간 고통을 주면서 계속 설득하여 배교의 자백을 받아내는 것이 처형하는 것보다 훨씬 가치가 있을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이가환(李家煥), 정약용(丁若鏞) 등 천주교와 관련 깊은 기호지방의 남인 학자들을 신임하고 아꼈던 정조 임금은 천주교도 처형을 일정 선에서 마무리하고 싶었기에, 같은 학파로 영의정의 지위까지 올랐던 채제공(蔡濟恭)이 천주교도 처벌을 완화해야 한다고 건의하자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렇듯 그를 두둔하는 세력의 도움과 천주교도를 유교적으로 ‘교화(敎化)’시키는 쪽에 무게를 둔 정조의 방침 덕에 죽음을 면하고 수감 생활을 하게 된 존창은, 옥중에서도 스승 이기양 등 그를 아끼는 이들이나, 존경하고 따르는 신자들과 계속 접촉하고 교류하였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그의 수감 생활을 편하게 해주라는 상부로부터의 압력이 있었거나, 존창의 집안에서 재물을 써서 형리들로 하여금 그를 관대하게 대하도록 손을 썼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조건이었기 때문에 존창은 옥중에서도 ‘양박청래(洋舶請來)’ 계획(서양-프랑스나 독일의 큰배가 와서 조선 정부에 압력을 행사하여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완화하거나 신앙의 자유를 얻을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한 일)에 가담하여 비용의 일부를 부담함으로써, 1796년과 97년에는 황심을, 1798년과 99년에는 김유산을 북경에 파견하여 구베아 주교에게 편지를 전달하도록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양박청래’ 계획은 구베아 주교의 부정적인 견해로 인해 실현되지 못하였고, 존창도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어려운 가운데서도 교회 발전을 위해 일하던 존창이, 조선 정부측의 기록에 의하면 1799년 충청 감사 이태영(李泰永)에게 “다시 ‘사학(邪學-천주교)’을 하지 않겠다”는 진술을 하였고, 감사가 그 사실을 조정에 올려 ‘이존창을 석방하여 천안에 유치한 뒤 동정을 살펴서 날마다 추조(秋曹-형조)에 보고하라’는 회답을 받았다는 것이다.
과연 존창은 천안으로 이송되었는데, 거기서 연금(軟禁) 생활을 하면서 하급 장교의 직책을 맡아 관가에 나가 복무하게 된다. 그가 장교가 된 것은 ‘다시 배교한 대가로 정부에서 내려준 일종의 포상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장교‘라는 직책은 이름뿐인 것이었으며, 사실상 그는 형리(刑吏) 생활을 한 것이라는 기록도 있다. 이 때 존창이 다시 배교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그는 천안에서 생활할 때도 여전히 공공연하게 신앙 생활을 하고 있었고 전교하려고 노력하였기 때문이다. 달레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존창은) 천안으로 송환되어 매 때리는 형리의 일을 하게 되었다. 조선에서는 흔히 있는 이 징벌은 양민(良民)의 신분을 가진 사람에게는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군수는 루도비꼬에게 이런 천한 직분을 시키지 않고, 어떤 개인 집에 보석하여 두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 매달 초하루와 보름날에 그를 신문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아전들은 자기들이 존경하고 자기들의 자식에게 헌신적으로 글을 가르쳐주었던 사람을 과히 괴롭히지 않은 것 같다. 루도비꼬는 이 오랜 시련 중에도 꿋꿋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꾸준히 모든 사람이 알게 종교의 본분을 다하였고, 말과 모범으로 그 지방에 큰 이익을 주었다.
하였고, 다른 기록에 의하면 천안에 살던 존창이 1800년에 일어난 박해 때 병영(兵營-조선의 군사 행정 단위)으로 끌려가 곤장을 맞고 석방된 적이 있었는데, 이는 존창이 배교하지 않았고, 신앙을 지키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존창은 심지어 고향 여사울을 방문할 허락을 받아 갔다온 적도 있었다. 달레는 그 일을 또한 이렇게 기록하였다.
하루는 여사울에 있는 자기 가족을 보러 갈 허락을 받아 거기 가서 교회의 상황을 알아보았다. 그 때 그는 교우들이 무서움에 못 이겨 그들의 천주교 서적을 모두 동네 마당에 모아놓고 불살랐다는 말을 들었다. 이 소식을 듣고 그는 눈물을 금할 수 없었고, 마음이 몹시 아파 한 권도 불태우지 않은 것이 없느냐고 물었다. 어떤 교우가 몰래 감추어 두었던 두 권을 그에게 가져다 주었다.
그가 진실로 배교했다면 있을 수 없는 장면이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존창이 죽음을 면하고 옥중이나 연금 상태에서도 계속 신자들과 첩촉하고 교회를 위한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조정에 참여하고 있던 남인 세력의 보호와 그를 회유시켜 천주교를 없애는 본보기로 삼고자 했던 정조 임금의 비교적 관대한 정책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가 다시 ‘배교했다’는 보고는, 오랜 연금 생활과 양박청래 계획의 실패로 마음이 약해졌던 존창이 일시적으로 감사의 처분에 맡기는 발언을 했던 것을 과장하여, 역시 존창의 목숨을 살리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꾸며진 일이었다고 이해해야 이치에 맞다.
그러다 드디어 존창에게 순교의 화관을 받을 날이 왔다. 1799년 채제공이 죽었고, 1800년에는 정조 임금이 사망하고 어린 순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정국은 급변하게 된다. 어린 왕을 대신하여 정순대비(貞純大妃) 김씨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게 되자 권력은 정조 임금 때 한 발 뒤로 물러나 있던 노론 벽파(僻派)에게 돌아갔다. 벽파 세력은 상대 세력인 남인을 제거하기 위한 방법으로 천주교를 대대적으로 탄압하였다. 바로 ‘신유박해’였다. 보호막이 사라지자, 1801년 2월 9일 존창은 다시 체포되어 공주로 압송되었다가 16일에는 서울로 이송되어 추국(推鞫)을 받게 되었다. 정부측 기록에 의하면 이 때 존창이 이렇게 자백하였다고 한다.
저는 10여년 전에 서양의 사학(邪學-천주교)을 하여 수년간 미혹되었으나, ... 사학을 단념한지 5년 되었으며, 3년 동안 천안 관문을 한 발작도 벗어난 적이 없으며 ... 이미 살길을 찾았는데, 어찌 다시 사학하는 사람들과 상통하겠습니까? ... 호서(湖西-충청도)에는 지금 이 학을 하는 사람이 없어 진실로 고할 자가 없습니다.
이 기록만 본다면 존창은 또 다시 마음이 약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해한다면 결코 그렇게 판단할 수 없다. 존창은 ‘양박청래’에 관한 사실을 철저히 숨겨서 교회를 보호하려고 했으며, 자신과 관련된 사람들을 보호하려고 애썼다. 호된 추국에도 불구하고 이미 순교한 이들 말고는 절대로 이름을 대지 않았다. 다음 기록에서 존창은 이렇게 말한 것으로 나온다.
이기양이 문의(文義) 현령으로 있을 때, 저는 천안의 옥(獄)에 있었는데, 이기양이 본 군의 수령에게 편지를 보내 ‘저를 매우 다스려야 한다’고 하였답니다. ... 홍낙민의 농장이 예산과 홍주에 있었으므로 어려서부터 서로 알고 지내다가, 제가 홍산으로 이주한 뒤 다시는 못 보았습니다.
이렇게 존창이 관련자들을 보호하면서 더 이상 말할 것이 없다고 버티자 조정에서는 다음과 같은 결안(結案)으로 추국을 마무리하였다.
죄인 존창 너는 ... 요사한 사설(-천주교 신앙을 말함)에 빠져 향촌의 백성들을 그릇되게 하였고, 이를 경기 충청 지방에 전하였다. ... 연전에 다행히 하해와 같은 성은을 입어 특별히 석방하여 스스로 고치도록 허락하였으니, 진실로 사람다운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어찌 차마 전날의 습성을 되풀이하였겠는가! 요망한 천성 때문에 감화되기 어려워 묵은 습성(-신앙 전도 활동)을 바꾸지 못하였고, 끝내 마음을 고치지 않아 죄를 되풀이하여 저질렀다. 그 죄악을 논하자면 만 번 죽여도 오히려 가볍다. 죄를 자복(自服)받고 본도(本道-충청도 감영이 있는 공주)로 하송한다.
이렇게 조정에서도 존창이 한 번 배교한 것말고는 끝내 신앙을 지켰다고 파악하고 있었다.
마침내 존창은 최창현, 정약종 등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고, 1801년 2월 26일(양력 4월 10일) ‘호서 사학의 괴수 이존창을 충청도로 압송, 처형하여 민중을 타이르라’는 왕명에 따라 공주 황새바위 부근에서 만인이 보는 가운데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 43세였다. 그의 순교에 대해 달레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필자는 나중에 그의 순교 이야기를 하는 기쁨을 가지게 될 것이다. ...
그는 서울의 순교자들보다 이틀 후인 2월 28일 참수되었다. 그의 머리는 여섯 번 째 칼질에 가서야 떨어졌다고 한다.
그의 친척 중 몇 사람이 사형집행 현장에 있었으나, 며칠이 지난 뒤에야 그 귀중한 유해를 거두어 가족 묘지로 옮길 수 있었다. 그의 몸을 거둘 때 머리가 목에 단단히 붙어 있었고, 희끄무레한 실날같은 흉터가 둘러쳐 있는 외에 다른 흔적이 없었다고 한다. 이 단원 루도비꼬는 첫 번 박해 때 나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에 있어서 복음 전파에 가장 많이 활동한 이들 중의 한 사람임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위 기록의 바탕이 되는 다블뤼 주교의 기록은 이러하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 비난받을 어떠한 나약함도 보이지 않았다. ... ... 그의 친지 여럿이 사형집행 현장에 와 있었다. 그의 머리는 여섯 번째 칼에 떨어졌으니, 거기 모인 사람들은 모두 그 광경에 아연실색하였다. 그의 가족은 얼마 지나서 그의 유해를 거두었다. 사람들은 그의 몸을 거둘 때 머리가 목에 붙어 있음을 확인했다! 그의 형제들의 말에 의하면 목둘레에 흰줄만이 칼자국을 나타냈을 뿐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그를 옮겨가 선산에 이장했다.
이처럼 이존창 루도비꼬는 젊은 나이에 진리의 복음을 깨닫고 죽기까지 하느님께서 맡기신 ‘사도’의 소중한 소명을 받들어 전교 활동을 함으로써 초기 조선천주교회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특히 내포 지방이 ‘신앙의 못자리’가 되어 오늘날까지 수많은 신자와 성직자가 거기서 나오게 만든 샘파기를 하였다.
비록 한 번의 배교를 하였고, 교회와 다른 신자들을 살리기 위해 거짓 자백을 함으로써 신앙을 의심받기도 하였으나, 분명 그는 신앙을 끝까지 지켰고 그랬기 때문에 조선 정부에 의해 ‘더 이상 용서할 수 없는 극악한 죄인’으로 처형을 당한 것이다.
신분 상승을 위해 들어선 학문의 길에서 내내 진리의 빛을 찾다가, 드디어 26세에 찾게 된 그 빛을 좌절과 박해 속에서도 끝끝내 지키고 가꾸어 전파시킴으로써 오늘날 한국천주교회의 탄탄한 초석을 놓은 그의 삶과 업적은, 작은 십자가만 닥쳐도 쉽게 좌절하고 원망하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깊은 성찰과 불굴의 용기를 불어넣어 준다. 이렇게 이존창 루도비꼬 사도와 같은 훌륭한 선조들을 많이 모시고 있는 우리 한국천주교회가 이런 분들의 삶을 적극적으로 발굴해서 현양하는 일은 후손된 우리의 의무이자 은총의 복된 선물이 될 것이다.
시성(諡聖) 시복(諡福)과 여사울 성지 성역화를 위하여
지금까지 이존창 사도가 시성은 물론 시복조차 되지 못한 것은 1791년 신해박해 때의 배교 사실과, 그 후에도 두 번 이상 배교를 했다는 정부 측 기록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정부측 기록을 사실로 인정하기에는 많은 무리가 따르며, 오히려 한 번 배교한 사실을 깊이 반성한 후에는 루도비꼬 사도가 변함 없이 꾸준하게 열정적 신앙 생활을 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 훨씬 더 믿을 만하다. 물론 천주교회에서 시성 시복 대상자를 정하고 심사하는 과정을 매우 엄격하고 신중하게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신앙의 씨앗을 뿌리고 모범을 보이다가 순교함으로써 후손들에게 지극한 감동을 주는 신앙 선조를 현양하는 일을 소홀히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스라엘인들이 그들 선조의 실패와 좌절의 역사를 부끄러워하지 않듯이, 그리고 우리 교회에서 베드로 사도가 인간적인 약점으로 세 번씩이나 주님을 배반한 사실을 감추지 않듯이, 우리도 내포의 사도 이존창의 인간적인 약점을 숨길 필요가 없다. 아니 오히려 ‘그 분은 오늘을 사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인간적인 약점을 많이 지니고 있었던 분’이라고 정정당당하게 말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항상 그런 인간적인 약점을 지닌 이들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오시지 않았던가? 한 점의 티끌도 없이 살다가 그 혹독한 고문 속에서도 한 번도 배교를 입 밖에 내지 않은 분들만 시복, 시성한다면 아마도 이미 시복, 시성된 분들 중에서도 그것을 취소해야 할 사안들이 발견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존창 사도와 함께 주문모 신부 입국을 주도하는 등 초기 교회를 이끌다가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서울의 총회장 최창현(崔昌顯) 요한도 추국(推鞫)을 받을 때 “내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권일신, 정약종, 이존창입니다.”라고 진술하였고, 달레 신부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오늘 우리 교우들 대부분이 그가 그 때 입교시킨 사람들의 후손이다. 그러므로 내포와 그 이웃 여러 고을에서 그의 기억을 우러르고 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당시 사람들이나 수 십년 지난 후의 사람들이 모두 그를 존경하고 우러렀다면, 오늘날 우리가 일부 기록을 문제삼아 순교자로서 그 분을 현양하는 일을 소홀히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마땅히 이존창 루도비꼬 사도는 시복, 시성되어야 하며, 그 분의 고향 여사울을 성지로 잘 가꾸어서 그곳을 찾는 우리와 후손들이 그 분에 관한 소중한 기억을 떠올려 신앙 생활에 보탬을 받도록 해야 할 것이다.
여사울 - 신앙의 못자리
이존창의 생가터
천안에서 예산 쪽으로 한참을 가다 보면 신례원 삼거리가 나타난다. 이 곳에서 우회전하여 서해안의 합덕 쪽으로 향하다가 십 리쯤 되는 곳 오른편에서 여사울 마을을 만날 수 있다. 바로 그 곳에는 현재 이존창 생가 터가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생가 터에서 다시 서쪽으로 가다 보면 두 개의 첨탑으로 유명한 합덕 성당이 나오며, 성당을 조금 지나 왼편으로 십리쯤 가다 보면 신리 교우촌이 나온다. 이처럼 이 지역에서는 한국 천주교회에서도 유명한 사적지들을 자주 만날 수 있으니, 바로 이곳이 내포(內浦)라 불리던 충청도 교회의 요람지였다.
충청도의 복음 전파는 '여사울'(餘村,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에서 시작되었다. 내포의 사도,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의 고향이다. 경주 이씨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25세 되던 1776년에 양근 지역의 유명한 남인 학자 권철신(암브로시오)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그러다가 권철신의 아우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과 중인 김범우(토마스)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 뒤, 다음과 같이 여사울로 내려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이존창은 '루도비코 곤자가'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하고, 자기 스승(권일신)에게 고향에 돌아가 이번에는 자기 스스로 전교하라는 사명을 받았다. 그는 고향에 돌아가 잠깐 동안에 자기 가족과 친천과 친구, 그리고 그의 지식과 덕행의 평판에 끌려오는 많은 사람들을 입교시켰다. 저 유명한 내포 천주교회의 기초는 이렇게 다져졌다. 그때부터 내포 지방은 늘 열심한 천주교인들과 훌륭한 순교자들의 못자리가 되어 왔다(샤를르 달레, [한국 천주교회사] 상, 312면).
고향으로 돌아간 이존창의 활동은 참으로 눈부셨고, 그 결과는 곧 내포 공동체의 설립으로, 차령 산맥 동쪽으로 복음이 확대되어 나갔다. 또 이존창은 한국 천주교회의 지도층에 끼여 1786년 이래 약 2년 동안 지속된 가성직제(假聖職制) 아래 신부로 임명되어 성사를 집전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여사울 이존창의 집은 자연스럽게 교우들의 집회소이자 숙소가 되었다.
그러나 박해가 시작되면서 이존창은 자주 시련과 좌절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1791년의 신해박해와 1801년의 신유박해로 연이어 고통을 받게 된 그는 배교와 회두를 거듭하였다. 특히 처음 박해 때 형벌과 회유가 번갈아 계속되면서 그의 마음은 점차 흔들리게 되었고, 마침내 천주교를 요술이라고 비판하고 말았다. 교회 기록에서는 이 사실을 두고 "내포 교우들에게 가장 슬프고도 가장 창피스런 배교였다." 하고 설명하였다.
우리는 이존창의 배교를 여러 가지로 해석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의 마음에 진정한 회두(回頭)가 있었음을 기쁘게 생각한다. 신유박해로 서울로 압송되어 판결을 받고 공주로 이송된 그는 4월 10일(음력 2월 28일)에 희광이의 칼을 받게 되었다. 이 때 그의 목은 여섯 번째 칼날을 받고서야 떨어졌는데, 친척들이 그의 시체를 거둘 때는 머리가 목에 단단히 붙어 있었고, 단지 실날같은 훙터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 후 1984년 가을에 신례원 본당에서는 구전을 토대로 하여 여사울의 생가 터를 찾게 되었다. 그런 다음 서울 정릉 본당의 협조를 얻어 생가 터를 발굴한 결과 중국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고상, 성모상, 성의패들이 나옴으로써 생가 터가 분명함을 입증할 수 있었다. 이 때 발굴된 유물들은 절두산 순교 기념관으로 옮겨져 보관되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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