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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holic Hymnal: Mary of Walsingham
영국 월싱햄의 성모님
성모발현
영국에서의 성모 마리아의 발현은
노폭 월싱햄(Norfolk, Walsingham)의 대저택에 살고 있던
귀족-미망인이자 독실한 가톨릭신자였던 파브레체스의 리첼디스 부인에게
1061년 세 번에 걸쳐 있었던 발현에서 시작되었다.
세 번에 걸친 발현에서 성모 마리아는 리첼디스 부인에게
가브리엘 천사가 자신에게 가장 높은 지위를 가진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알려준 나사렛의 집을 보여주었다.
성모 마리아는 리첼디스 부인에게 나사렛의 집과 똑같은 집을 지어
자신에게 있었던 '수태고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기념하라고 하면서 이렇게 약속했다.
"어떻든 절망하거나 필요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월싱햄에서 나를 위해 네가 지은, 바로 그 작은 집에서 나를 찾도록 해라.
그곳에서 나를 찾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이 있을 것이다."
원래의 교회
원래의 교회는 제프리(Geoffrey)의 어머니이자 설립자인 리첼디스의
초기 신앙심을 일컫는 '참회왕 에드워드 시대인 1053년경에 건립되었다.
성전을 유지하는 책임을 맡은 아들 제프리는 1169년 '하느님과 성모 마리아'께
자신의 어머니가 월싱햄에 건립한 '성모성당'을 헌정했으며
자신의 집사 에드위(Edwy)에게 수도원을 건립할 것을 지시했다.
그 후에 1174년까지 참사수도회(Canons Regular)에서 수도원의 운영을 맡았다.
곧바로 뒤이어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로버트 드 브루커트와
클레어의 백작 로저에 의해 '월싱햄의 오스틴 법령'으로 확정되었다.
헨리 8세가 통치하던 시기에 개신교의 개혁으로 1538년 파괴될 때까지
월싱햄은 중세에 글리스털베리, 캔터베리 등과 더불어
영국과 유럽에서 가장 위대한 종교적 중심지이자
로마의 바티칸과 스페인의 콤포스텔라에 이어
세 번째로 인기 있는 순례지가 되었다.
순례의 명소
빈번한 전쟁과 정치적 격변으로
로마와 스페인으로의 순례여행이 어려웠던 이 시기에
월싱햄은 가톨릭 순례지로서 적합한 명소가 되었다.
성모 마리아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여 나사렛의 집과 똑같이 지은
그 작은 집의 각 부분을 보호하기 위해 집 주변으로 교회가 신축되었다.
수많은 영국 왕들은 월싱햄으로 순례행차를 했으며,
순례행차를 한 마지막 왕은 헨리 8세였다.
헨리 8세는 세 번이나 순례행차를 했지만
1534년 가톨릭교회와 결별하고 나서 영국교회[성공회]를 형성했다.
그 후 헨리 8세는 영국 내의 모든 가톨릭 기념물과 조형물 및
종교집회 장소 등을 파괴하라는 어명을 내렸다.
이처럼 난푹한 파괴의 시기에 월싱햄의 교회도 파괴되었으며,
수도원 안에 모셔졌던 성모 마리아 상 역시
몇 년 후에 불타버리고 말았다.
월싱햄에서 1마일[1.6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휴턴 성 길스(Houghton St Giles)에는
1340년 '슬리퍼성당'(Slipper Chapel)이 신축되었다.
월싱햄으로 가는 최종 기착지에 해당하는 이 성당에 들어가기 위해
순례자들은 마지막 '홀리마일'(Holy Mile)을 맨발로 걸어가려고
신고있던 구두를 벗기 시작해서 '홀리마일'이라고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 성당은 1920년대에 재건축되었으며
영국의 사제인 알프레드 호프 패튼이 총지휘를 했다.
맨발로 걸어 성전으로 가기 위해 구두를 벗어버렸던
중세의 가톨릭신자들을 기념하여
'슬리퍼교회'(Slipper Chapel)라고 명명되었으며,
재건축된 성전 가까이에 있는 작은 가톨릭교회는
헨리 8세의 개혁기간에 있었던 난폭한 파괴로부터 화를 면할 수 있었다.
바로 이 작은 가톨릭 교회가
영국에서 성모 마리아의 가톨릭 기념물이 되었다.
이 두 장소는 다시 한번 가장 많이 방문하는 순교지가 되었다.
영국 가톨릭의 박해
1538년 후반에 월싱햄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개신교의 주교 M. 휴 라티머는 성모 마리아상을 이렇게 비판했다.
"그녀가 많은 사람들을 영원한 불속으로 데려가는
악마의 도구로 작용해 왔다는 점을 나는 두려워한다.
지금 그녀 자신은 월싱햄의 큰언니[리첼디스], 입스위치(Ipswich)의 여동생,
그리고 돈캐스터와 펜리스의 두 자매와 함께
스미스필드에서 즐거운 집회를 가질 것이다.
그들 모두는 온종일 불타버려도 부족할 것이다."
라티머 주교의 이와 같은 폭언은 성모 마리아에 대한
초기 영국인들의 증오심을 드러내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당시의 영국 왕 헨리 8세는
월싱햄의 성모상에 관련되는 모든 이미지를 태워버리는데 동의했으며,
이러한 동의는 헨리 8세가 신앙신이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불경스럽고 배신적인 폭군이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헨리 8세가 "마음속으로는 가톨릭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기만적인 것입니다.
그는 교황의 지위를 조롱했던 살인마이자 불륜을 저지른 왕이었습니다"
라고 영국 가톨릭계에서는 파악하고 있다.
영국이 가톨릭 국가였을 때에 왕가의 아낌없는 후원으로
월싱햄의 성모상은 더욱 화려하게 장식되었고 더욱 인기있는 방문지가 되어,
헨리 3세, 에드워드 1세, 에드워드 2세, 헨리 4세, 에드워드 4세,
헨리 7세, 헨리 8세 등 영국의 많은 왕들이 친히 방문했다.
1513년 이곳을 방문한 에라스무스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성모상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거기엔 성인들이 살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수많은 금은보화로 너무나 아름답게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성모님은 제대의 오른편 어둠 속에 서 있다.....
그 크기나 재질이나 제작기술
그 어느 것으로도 나타낼 수 없는 아주 작은 모습이다."
월싱햄은 또한 영국 여왕들의 순례지이기도 했다.
아라곤의 캐서린 여왕은 정기적으로 이곳을 방문하는 순례자였으며
후계자 안네 볼레인 역시 이곳을 순례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풍요로움과 특권으로 인해 수도원은 무질서한 장소로 변해갔다.
1514년 수도원을 찾은 닉케(Nicke) 주교는 수도원장 위리엄 로스가
성전을 오만하고 난폭하게 취급할 뿐만 아니라
부끄러운 삶을 살고 있다고 폭로했다.
수도사들은 선술집을 어슬렁거렸고
싸움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수도원장은 교체되었고
1526년 수도원의 질서가 어느 정도 회복되어 안정되었다.
영국에서 한때 유명했던 월싱햄의 성모 마리아 상은
1500년대 프로테스탄티즘의 출현으로 인해 잘 알려지지 않게 되었다.
그럼에도 복되신 성모 마리아에 대한 가톨릭과 영국성공회의
감사와 사랑에 힘입어 더욱 커다란 찬미를 받게 되었다.
"왕의 어명으로 온갖 보석으로 장식된 월싱햄과 입스위치의
두 성모님 상을 런던으로 옮겨온 것은 7월 달이었으며,
일반적인 순례를 위해 사용되었던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다른 모습의 성모님 상도 런던으로 옮겨왔습니다.....
그리고 옥새상서(Lord Privy Seal)에 의해 첼시에서 불태워졌습니다."
1896년 샤롤테 피어선 보이드라는 독실한 가톨릭 여성이, 수세기동안 방치되어 있던
14세기에 지은 '슬리퍼성당'을 구입하여 재건축 하려고 했다.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상은 '예수수난상'의 일부로 조각되어 있다.
그 원형은 월싱햄의 중세 봉쇄수도원에서 발견된
원래의 성모상에 근거하여 제작되었다.
1897년 교황 레오 13세는 14세기에 건축된 '슬리퍼성당'을
로마가톨릭성지로 복원하여 재건축했으며
지금은 '국립월싱햄성모성지'의 중심이 되었다.
발현 시에 성모님께서 부탁했던
나사렛의 집 모양과 똑같이 지었던 원래의 성전은
킹스 린(King's Lynn)의 '수태고지성당'으로 재건축되었다.
"영국이 월싱햄의 성모님께 돌아올 때,
성모님도 영국으로 돌아온다."는 속설이 있다.
따라서 이러한 성모성지는
전 영국인의 정신건강의 축복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1538년 후반 월싱햄의 대지주였던 로저 타운센드 경의 지휘로 시작된
월싱햄 수도원(영국에서 가장 중요한 가톨릭 성지)에 대한 박해는 유명했으며
중세에 지어진 봉쇄수도원의 몰락은 영국에서 가톨릭에 대한 박해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으로 되었다.
교회묘지를 비롯한 경내와 정원을 포함하는 수도원부지는
토마스 시드니 경에게 양도되었으며, 오로지 남게 된 것은
수위실, 성단소 아치, 부속건물 몇 채 뿐이었다.
엘리자베스풍의 발라드 "월싱햄 탄식"은 월싱햄의 성모상 성지를 잃은
노폭(Norfolk) 주민들의 심정을 잘 표현하고 있다.
수도원과 성모상의 수난
가톨릭신자들의 생활에서
그 어떤 작은 불법행위라도 찾아내려고 했던 토마스 크롬웰은
지속적으로 월싱햄을 방문했으며,
그 결과 1536년 아주 작은 신앙조직체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지만
거기에는 아직 월싱햄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1534년 리처드 보웰이 영국 교회가 왕권을 수용하겠다고 서명했지만
그러한 수용이 가톨릭신자들을 구제하지는 못했다.
크롬웰의 행동이 정치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노폭에 상당수의 부속 수도원을 가지고 있던 '참사수도회'에서는
크롬웰의 추적으로부터 자신들의 신앙심이나 의식을
눈치 채지 않게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수도원장은 분명히 순종했겠지만
공동체 구성원 누구나가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다.
1537년 두 명의 성가대원들이 가담한
"드렌트 강 남부에서 발생한 가장 심각한 반역"이 조직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두려워했던 것에 저항하고자 했으며
곧이어 밝혀진 바와 같이 자신들의 기반을 확고하게 하고자 했다.
그 결과 11명이 교수형을 받았고 부 수도원장 니콜라스 밀챔은
작은 규모의 수도원에 대한 박해에
반역을 공모했다는 죄명으로 감금되었다.
불분명한 증거가 대단한 반역죄로 확정되었고
수도원 밖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1538년 존 후시는 군주 리슬에게 이렇게 썼다.
"7월 18일 바로 오늘 월싱햄의 성모상을 람베스로 옮겨왔으며,
군주 챈슬러와 군주 프리비 실 및
수많은 고명한 성직자들이 함께 있었습니다만,
성찬식도 없었고 촛불도 없었습니다.
바로 이 성모상을 어떻게 할 것인지는 아직 결정짓지 못했습니다."
종교사가 홀과 스피드는 그해 9월까지
성모상을 불태우지 않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수도회 건물은 약탈당했고 대부분 파괴되었지만,
수도원에 대한 기억은 그렇게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다.
1564년 로저 경은 크롬웰에게 웰스(Wells)라고 불리는 곳에서
한 여성이 성모상을 런던으로 옮겨간 후에 바로 그 성모상에서
기적이 일어난 것을 목격했다고 주장했다는 편지를 썼다.
로저 경은 바로 그 여성을 인파가 많은 장날에 시장에 내놓아
마을 건달들이 성폭행하게 하려고 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으며
성모상의 이미지는 여전히 맴돌고 있습니다" 라고 결론지었다.
[성모발현과 영국 성공회]
거의 4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영국에서는 물론
해외에서 수많은 순례자들이 월싱햄의 성지를 찾아오고 있다.
오늘날 월싱햄에는 가톨릭 성모상뿐만 아니라 성공회 성모상도 볼 수 있다.
1921년 영국교회의 월싱햄 주교로 임명된 대법관 알프레드 호프 패튼은
개혁 이전의 순례에 대한 성공회의 관심을 고조시켰을 뿐만 아니라
중세 봉쇄수도원에서 찾아낸 이미지에 근거하여
웰싱햄의 성모님 상을 새로 건립할 것을 제안했다.
1922년 '성 마리아 성공회교구 성당'에 새로운 성모상이 건립되었으며
정기적인 순례가 이어졌다.
성모상이 건립되던 날 밤에 신자들은 성모상 주변에 모여 기도하면서
자신들과 함께 성모님께서도 기도할 것을 간청했다.
1920년대를 통해 뜸했던 순례자들의 숫자는 대홍수의 물결로 바뀌었으며
이들 순례자들을 위한 '순례호스피스'가 문을 열었다.
1931년 작은 순례성당 부지에 새로운 성전을 신축하여 봉헌되었으며
엄숙한 의식 속에서 성모상을 새로운 성전으로 옮겨왔다.
1938년 새로 지은 성전은
월싱햄의 성모상을 성공회의 성모상으로 모셔오려고 확장되었다.
패튼 신부는1958년 선종할 때까지
월싱햄의 대리교구직과 성공회 성모상에 대한 사제행정직을 겸했다.
리치보러(Richborough)의 성공회 주교를 역임한 뉴턴 신부는
'성직자치단'의 구조와 목적을 좀 더 이해해달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모두에게 성직자치단이 어떻게 성장하고 발전하고 있는지에 대한
진정한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는
이런 기회를 갖게 되어서 아주 행복합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2009넌 11월
'성공회신자단체'에 대한 '사도규범'에서 새로운 교회규범 골격을 세웠다.
첫댓글 영국에서는 성모님상이 헨리 8세의 수장령 때문에
엄청난 수난을 겪고 있었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