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취의 굴레
<피로사회> (한병철) 를 읽고
이덕재
“선생님 제자 중에 서울대에 간 녀석이 있다. 법학과에 갔었는데, 지금은 검사가 됐지. 그런대 개가하는 말이 사는 게 너무 피곤하덴다. 고등학교 때는, 대학만 입학하면 좀 더 자유로워질 줄 알았는데. 입학한지 얼마 안 돼서 검사하려고 더 빡시게 공부했덴다. 그렇게 열심히 해서 검사가 됐는데, 판 검사가 되려고 더 치열하게 산다. 앞에 보이는 목표만 해치워 버리면 좀 더 편해질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였더라는 거지.” 중학교 때, 선생님이 한 말이다.
현대인들은 이상적인 모습에 닿기 위해 치열하게 달린다. 서울대, 검사, 판 검사. ‘이상 자아’ 를 향해 간다. 트리나 폴러스의 동화, <꽃들에게 희망을>에서 나오는 애벌레의 탑처럼. 조금이라도 더 높은 곳에 올라가기 위해 서로 뒤엉켜 싸운다.
이 과정에서 스스로를 압박하기 시작한다. 마치 사채업자가 빚쟁이에게 돈을 내놓으라고 닥달하듯. <피로사회>에서는 이를 ‘자기 착취’ 라고 부른다. 마치 한 사람이 둘로 나뉘어, 한 쪽이 다른 한 쪽의 등에 채찍을 휘두르며 “어서 일해!” 라고 외치는 격이다. 사람은 이상자아에 닿기 위해 자신을 착취한다.
그러나 ‘자기 착취’를 하는 주체는 결코 만족을 얻을 수 없다. 다른 이와 단절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상만을 바라보기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살펴볼 여력이 없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비로소 나에게로 와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시처럼, 인정해주고, 사랑해주고, 보듬어주는 이 없이 스스로 만족을 얻을 수 없다.
자기 착취는 자신이 완전히 망가질 때 까지 계속된다. 자유롭다는 느낌속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위 선생님의 이야기처럼, 고등학교 때는 대학, 대학가서는 검사, 검사가 돼서는 판 검사가 되기 위해 자신을 압박하는 식이다. 만족 없는 착취는 계속 굴러가고 결국 지독한 압박감에 시달리게 된다. 피로에 시달리고, 우울해지고, 무엇을 위해 달리는지조차 잊어버린다.착취의 굴레를 통해 자아가 마모 되는 것이다.
“시대마다 그 시대의 고유한 질병이 있다.” <피로 사회> 는 말한다. 이 시대를 지배하는 건 우울증이다. 이상자아에 닿기 위한 자기착취, 거기서 오는 억압감, 우울. 한병철이 이 시대에 내린 진단이다.
과거에 우리는 외부의 억압을 받았다. 규율 사회였다. 국가는 우리의 온 갓 것들을 규제 했고, 패거리 싸움의 시대였다. 우리의 적은 저 밖에 있었다. 그러나 이제 시대가 바뀌었다. 더 이상 적은 외부에 있지 않다. 규율사회가 아니라 성과 사회가 되었다. 개인의 성과로 인해 평가 받고 자아를 실현 할수 있다. 현대는 “당신의 경영자는 당신 입니다.” 라고 말한다.
이제 안쪽에서 문제가 생겼다. 밖에서 나를 업악한것과 달리 내가 나를 억압하기 시작한다. 자본가와 착취자. 주인과 노예. 가해자와 피해자. 양분되어있던 역할을 이제 스스로 모두 맡게 된다. 자기 착취. 이제는 저 밖의 ‘부정성’ 에 의해 괴로워 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의 과도한 ‘긍정성’ 에 괴로워 하게 된다.
그래서 한병철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처방전을 찾는다. “무위”이다. 즉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그럴 때 비로소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이루어진다. “광장” 과 “북적대는 군중”에서 벗어 나야 한다. 돌아보고, 생각하고,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자기 착취’는 한병철의 진단과 달리, 저 밖의 부정성에 연유한다. “88만 원 세대”, “7포 세대”, 소위 “중상층” 혹 그 이하의 계층에게 자기 착취를 하는건 살아 남기 위해서다. 지금, 자신을 착취하며, 억누르며, 일하지 않으면 앞길이 캄캄하니까. 불안한 미래, 안정적인 직장을 위해 하루 하루 자신을 착취한다. 규율사회는 형태만 바뀌었다. 자기착취의 요인은 사회의 부정성에 근거한다. 성과사회는 허울 뿐이고, 그 안은 규율사회와 다를바 없다.
이 점에서 <피로사회>는 일부 계층에 국한된 이야기다. 뭘 해도 그럭저럭 괜찮게 살수 있는 소위 “잘먹고 잘사는 분들” 에게. 미래에 대한 불안과 실업으로, 쪼그라들 지경인 궁핍으로, 스스로 압박을 가하게 되는 사람들은 논의에서 열외다.
그러나 “한국 사회를 서구와 모든 점에서 동일시할 수 없다,”(<피로사회> 는 독일에서 출판되었다.) 고 서두에 밝혀 놓은 것이 고무적이다.
“한국 사회 역시 ‘성과 사회’이고 그에 따른 사회적 폐해와 정신적 질환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 한국인이면 누구나 자기를 착취하는 것이 무엇인지 즉각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피로사회> 中
‘자기 착취’는 추상적인 관념이 아닌 피부에 와 닿는 체험이다. <피로 사회>는 일부에 국한 된 이야기 이지만, 이 점에서 공감은 할 수는 있다. 그런 의미에서 독일 철학자가 아닌 한국의 교사의 말로 마무리 하면 좋겠다.
“얘들아 사는 게 다 그런 거야. 힘겹게 높은 산에 오르면, 밑에서는 안 보이던 산이 보이고, 또 그 산을 오르고, 다시 산이 보이고. 그게 반복되는 거지. 그러니 얘들아, 공부하지 마라. 서울대 간 녀석도 그런데 너희들이야 오죽하겠냐.하고 싶은 걸 찾는 게 먼저다. 공부는 그 다음에 해도 늦지 않아. 재수 삼수하면 어때 행복하게 살아야지. 아 물론 집에 가서 부모님한테 이런 소리 하면 안 된다. 선생님 잘릴 수도 있으니까.”
첫댓글 청소년의 글이라 생각되지 않을만큼 깊은 글을 읽었네요 하고싶은 것부터 찾아야 하는데 학교가 그 역할까지하기는 어려운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