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상 가롤로(?~1801)
경기도 광주의 마재(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정약종(丁若鍾)과 한산 이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1839년에 순교한 유 체칠리아 성녀는 그의 계모이다. 정하상(丁夏祥) 성인과 정정혜(丁情惠) 성녀의 이복형이며, 포천 출신인 홍교만(洪敎萬)은 장인이다.
정 가롤로는 어려서부터 부친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또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제사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이로 말미암아 집안에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아버지 정약종과 마찬가지로 온 힘을 다하여 천주를 공경하고, 온 마음을 다하여 천주를 사랑하는 데에만 힘썼다.
1794년 말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정 가롤로는 부친과 함께 한양으로 올라가서 세례와 성사를 받았다. 그의 아버지 정약종은 1795년에서 1798년 사이에 마재에서 광주 분원(현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으로 이사하였다. 주 야고보 신부는 이후 경기도 광주에 있는 정 가롤로의 집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정철상도 아버지를 따라 서울의 최창현(崔昌顯) 집에서 여러 번 주문모 신부를 만나기도 했다. 한편 그 무렵 정 가롤로는 포천의 유명한 신자인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20세가량 되었을 무렵 신유박해(1801년)가 발생하였고, 이때 부친과 숙부들이 체포되어 의금부로 끌려가자, 그는 의금부 인근에 머물면서 옥바라지를 하였다. 그러자 이를 본 관리들이 “주문모 신부에 대한 일과 신부가 숨어 있는 장소를 말하면 아버지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며 그를 유혹했다. 그러나 정철상은 결코 이러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정약종이 처형된 1801년 4월 8일(음력 2월 26일), 정철상도 국청(鞫廳)의 명에 따라 체포되어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다. 이후 한 달 이상 옥에 갇혀 있던 정철상은 1801년 5월 14일(음력 4월 2일) 최필제 베드로, 윤운혜 루치아등 5명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었다.
형조에서 정철상 가롤로에게 내린 사형 선고문 내용은 이러하였다. “너는 천주교에 깊이 빠져, 집안 제사에 참석하지 않았으며, 요사한 스승(곧 주문모 야고보 신부)을 보호하려고 송곳으로 찔러도 말하지 않았다.……주문모를 맞이하여 거처하도록 하고, 흉악한 무리들을 불러 모임을 가졌으며, 개나 돼지처럼 행동하면서 인간의 윤리를 무너뜨린 죄는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諡福)되었다.
출처와 참조: CBCK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한국문화 대백과 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