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楚汉志 18
○ 食客을 양성하다
子楚라는 청년을 이용하여 <사람 장사>를 하려는 큰 뜻을 품은 지 불과 9년 만에,
吕不韋는 이제 天下에 군림하는 권력자가 된 것이다.
(역시 장사 치고는 사람 장사가 최고였구나.
나에게 사람 장사의 비법을 가르쳐 준, 두메 산골에서 만났던 70객 老翁은 지금 어디 있을까.
그 노인을 만나기만 하면 커다란 감투라도 하나 씌어 주고 싶은데.)
성명조차 모르고 헤어진 노인이 새삼스러이 고마울 지경이었다.
权力이란 참 좋은 것이어서, 吕不韋가 丞相의 자리에 오르자,
그날부터 그의 집에는 축하객과 아첨배들이 千客万来하였다.
그 중에는 백발이 성성한 중신들도 있었고, 명성이 혁혁한 선비들도 있었다.
천하의 재사 贤士들이 앞을 다투어 모여 들었다.
거기 따라 家僮과 奴仆(노복)들도 삼백 명이 넘게 되었고, 여불위의 시중을 드는 侍女만도 백명이 넘었다.
(영화를 이만큼 누리게 되었으니,
나도 이제는 吕氏家门을 영원히 빛낼 수 있는 사업을 하나 일으켜 보았으면 싶은데, 뭐가 좋을까.)
吕不韋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지혜로운 四公子>가 머리에 떠 올랐다.
지혜로운 사공자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을 말하는 것일까.
그 무렵, 여러 나라의 세도 있는 王族들은,
天下의 재사들을 자기 집으로 초청해서 宾客(빈객)으로 접대해 오는 풍습이 있었다.
그들을 속칭 食客이라고 불렀다.
그런 식객 중에는 경륜이 탁월한 政客도 있었고, 명성이 혁혁한 선비도 있었고,
辩舌이 능란한 论客도 있었고, 심지어 힘이 세거나 도적 솜씨가 비상한 사람도 있었다.
뭐든지 남보다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이면, 신분의 귀천을 막론하고 집으로 모셔다가 융숭히 대접하였다.
주인의 대접이 융숭하고 보니, 식객들도 주인을 소중하게 받들어 왔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따라서 주인의 신변에 무슨 어려운 일이라도 생기면,
식객들은 자기 일처럼 각자의 지혜를 짜내어 주인을 도와 주었다.
말하자면, 주인과 식객 간의 인간 관계가 同志的인 의리로 결합되어서,
은연중에 하나의 세력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어찌 보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하나의 울타리라고도 볼 수 있었는데,
울타리 치고는 그렇게 믿음직한 울타리가 없었다.
그 무렵,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세도 있는 왕족 치고 식객 이삼백 명쯤 거느리지 않은 왕족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齐나라의 孟尝君(맹상군)과 魏의 信陵君, 楚의 春申君과 趙의 平原君등 네 사람은
식객을 무려 3천여 명씩이나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그들 네명을 <지혜로운 사공자>라는 통칭으로 불러오고 있었다.
吕不韋 자신도 文信侯라는 작호를 받았기에, 이제는 자기도 <지혜로운 사공자>를 본받아,
养客(양객)으로 家名을 높여 보고 싶었다.
(우리 나라에서도 조선 왕조 때에는 엔간한 대감댁에서는 식객을 수십 명씩은 반드시 거느리고 있었고,
특히 大院君은 식객들을 곧잘 정치에 이용해 왔었는데,
그런 풍습은 멀리 중국 전국시대의 사공자들의 유풍을 본받은 풍습이었다.)
승상 여불위가 养客을 시작했다는 소문이 한번 알려지자,
원근 각지에서 내로라하는 志士,贤士, 论客, 学子, 术士 등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모여들어,
불과 두세 달 사이에 식객은 천여 명으로 불어났다.
거기에 따라 家僮과 奴仆(노복)들도 천 명으로 늘리지 않아서는 안 될 형편이었다.
养客을 하려면 막대한 돈이 들어야 한다.
여불위는 워낙 理财에 밝은 사람인지라,
막대한 돈을 써 가면서 유능한 인재들을 그냥 놀려 두는 것은 국가적으로 커다란 손실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리하여 하루는 식객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이런 제안을 했다.
"귀공들은 모두가 학문이 해박한 선비들이오.
선비가 학문을 게을리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니,
오늘부터는 여러분이 힘을 모아, 책을 저술해 보는 것이 어떠 하겠소."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떤 분야의 책을 저술하오리까."
"내가 알기로, 孔子는 일찍이 《春秋》라는 역사책을 편찬한 일이 있었소.
그러므로 귀공들은 춘추 이후의 역사를 편찬해 보는 것이 어떠하겠소.
비용은 얼마든지 대 드릴 테니, 후세에 길이 남을 역사책을 한번 편찬해 보도록 하오.
그래서 그 책이 완성되거든, 책 이름을 《吕氏春秋》라고 부르기로 합시다."
말하자면 문화적인 측면에서 또 여씨 가문의 명성을 길이 빛내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도 <사람 장사>에 속하는 사업의 일부였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吕氏春秋》는 그로부터 7년 후에 식객들의 손에 의하여 26권이라는 방대한 부피의 책으로 발간되었다.
그것은 오로지 여불위의 착안으로 저술된 史书인 것이다.
여불위는 문화적인 식견도 그만큼 높았다고 볼 수 있겠다.
...♡계속 18회에~~~
● 楚汉志 18
○ 준비된 놈이 재수좋은 놈!
그야 어쨌건 어느 날 吕不韋는 莊养王의 부름을 받고 입궐을 서둘렀다.
"大王殿下! 불러 계시옵니까?."
여불위가 허리를 굽혀 인사를 올리자, 장양왕은 반갑게 맞아 말한다.
"丞相에게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王이 臣下에게 부탁이란 당치 않는 말이었다.
그렇건만, 어려서 쫓긴 병아리 같아, 吕不韋에게는 王의 행세를 하기가 거북했던 것이다.
"무슨 분부이시온지, 하명하시옵소서."
"승상께서도 잘 알고 계시다시피,
내가 볼모로 잡혀 가서 趙王에게 7년 동안이나 가혹하게 박해 당한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이가 갈리오.
따라서 다른 나라는 내버려 두더라도, 趙나라만은 기어이 원수를 갚아야 하겠소.
丞相은 나의 심정을 짐작하여, 趙나라를 정벌하기로 합시다."
荘襄王이 趙나라에 원한을 품고 있는 심정은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지당하신 말씀이시옵니다.
그러면 어명에 따라 곧 군사를 일으켜, 趙나라를 치기로 하겠습니다."
吕不韋는 물론 武将은 아니다.
그러나 승상으로서의 권위를 세우려면 무엇인가 뚜렷한 공적을 세워 놓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다행히 秦나라에는 기라성 같은 名将들이 수다하다.
여불위는 그들을 수족처럼 움직일 수 있도록 미리 주물러 두었으므로 军事를 일으키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싸우면, 우리가 승리할 자신은 있겠지요."
"趙나라를 송두리째 멸망시키기는 당장은 어려울 것이옵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국경 지대의 城邑 몇 개쯤 빼앗기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옵니다."
"그렇게라도 해서 나의 원한을 다소나마 풀어 주면 고맙겠소이다."
吕不韋는 머리를 조아리며,
"조속히 군사를 일으켜, 宸襟(신금)을 평안하게 해 드리겠나이다."
여불위는 물러나오는 길로 蒙骜, 章邯, 王剪 등의 세 장수를 한자리에 불러 놓고 명한다.
"우리는 어명에 의하여 趙나라를 쳐야 하게 되었소.
몽오蒙骜 장군은 元帅가 되고, 章邯 장군과 王剪 장군은 左右翼 사령관이 되어,
军事 20만을 줄테니 趙를 치도록 하시오.
세분이 합심하면 승리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오."
그리고 세 사람에게 각각 前祝金을 두둑하게 건네 주며 이렇게 격려하였다.
"나는 세 장군의 풍부한 지략과 탁월한 전술을 전적으로 신임하고.
그래서 세 장군에게 특별히 중책을 맡기는 터이니, 일치 단결하여 기필코 승리하도록 하오.
이번에 승리하고 돌아오면,
세 분의 명성은 청사에 길이 남을 것이고, 자자손손까지 무한한 영화를 누릴 수 있게 될 것이오."
吕不韋는 사람의 심리를 파악하는 재주가 남달리 비상하여,
엄격할 때에는 秋霜烈日같이 엄격하다가도, 怀柔策(회유책)을 쓸 때는 어머니보다도 자애로운 일면이 있었다.
세 장수는 과분한 知遇에 크게 감동되어,
"丞相의 뜻을 받들고, 신명을 다해 기필코 승리하고 돌아오겠습니다."
하고, 굳은 맹세를 남기며 장도에 올랐다.
秦나라의 20만 大军은 3부대로 나누어 趙나라로 쳐들어가는데,
骑马는 산야에 넘치고, 旌旗는 하늘을 덮어서, 그 위풍이 장엄하기 이를 데 없었다.
趙나라는 戦国七雄 중에서 齐, 楚 등과 함께 비교적 강한 국가이기는 하지만,
秦나라와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게다가 오랜 세월을 두고 秦에게 수없이 시달려 왔기 때문에,
秦军이 또다시 쳐들어 온다는 소식을 듣고, 趙의 军事들은 싸우기도 전에 겁부터 집어 먹었다.
그리하여 秦军은 이렇다 할 싸움조차 하지 아니 하고,
불과 한 달 남짓 사이에 37개 城을 무혈점령하고, 趙나라의 要冲인 太原城을 포위해 버렸다.
태원성이 함락되는 날이면, 도성인 邯郸이 위태로와질 형편이었던 것이다.
태원성을 포위하고 십여 일이 경과하자,
이번에는 태원 성주가 백기를 들고 제 발로 걸어 나와, 蒙骜 장군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趙王은 그 비보를 받고, 대책 회의를 긴급히 열었다.
"태원성이 함락되어, 이제는 도성이 위태롭게 되었으니, 이 일을 어찌했으면 좋겠소."
승상 蔺相如가 머리를 조아리며 품한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제는 城垒를 높이 올려 쌓고, 외곽으로 못(池)을 깊이 둘러 파서,
적이 접근을 못하게 하는 방법 밖에 없을 것입니다.
적은 도성을 포위하더라도 식량 관계로 오래 지탱하지 못할 것이오니,
우리는 그 사이에 魏와 楚에 사신을 보내 應援军을 청하도록 해야 합니다."
왕은 그 말을 옳게 여겨, 军事를 총동원하여 늪을 파고 성누를 높이 올려 쌓았다.
秦军이 한단성으로 진격해 온 것은 그로부터 며칠 후의 일이었다.
그러나 진군이 아무리 싸움을 걸어도 조군은 죽은 듯이 성안에 틀어박힌 채 일체 응전을 하지 않았다.
인상여가 예언한 대로 진군은 20만 大军을 끌고 왔기 때문에 군량이 몹시 궁핍하였다.
게다가 때마침 겨울 철이어서 군사들은 冻伤(동상)과 혹한으로 연달아 죽어 나가고 있었다.
몽오 장군이 그 사실을 본국에 보고하니,
본국에서는 <37개 성을 점령한 것 만으로도 흡족하니, 즉시 회군하라>는 왕명이 내려 왔다.
몽오는 <명년 봄에 다시 와서 한단성을 기필코 함락시키고야 말겠노라>는 장담을 남기고 돌아오니,
荘襄王은 크게 기뻐하며 말한다.
"우선 37개 성을 점령한 것 만으로도 나의 원한이 많이 풀렸소.
吕丞相과 将军들이 모두 힘을 합쳐 나의 뜻을 받들어 준 결과이니 고맙기 그지 없소이다."
이리하여 吕不韋는 丞相으로서 공로를 크게 세운 셈이 되었다.
여불위는 세 장군을 따로 불러서, 그들의 전공을 극구 치하해 주기를 잊지 않았다.
그 모양으로 진나라의 국세가 크게 확장되어 나가자
吕不韋에 대한 국민들의 신망은 날이 갈수록 높아가고 있었다.
정말이지, 吕不韋는 재수가 억세게 좋은 사나이였다.
...♡다음 19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