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언위(崔彦撝)는 처음 이름이 최신지(崔愼之)로, 경주(慶州 :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사람이다. 품성이 너그럽고 후덕하였으며, 어려서부터 글을 잘하였다.
신라 말 나이 열여덟 살 때 당나라에 유학하고, 예부시랑(禮部侍郞) 설정규(薛廷珪)가 주관한 과거에 급제하였다. 당시 발해(渤海) 재상(宰相) 오소도(烏炤度)의 아들 오광찬(烏光贊)도 같이 과거에 급제했다.
오소도가 당나라 조정에 들어갔다가 그의 아들 이름이 최언위의 밑에 있는 것을 보고 표문을 올려,
“신이 예전에 입조하여 과거에 급제하였을 때는 이름이 이동(李同)의 위에 있었으니, 지금 신의 아들 오광찬도 최언위의 위에 올라야 할 것입니다.” 라고 청하였으나
최언위의 재능이 우수하고 학식이 넉넉하므로 허락하지 않았다. 나이 마흔둘에 신라로 돌아오자, 집사성시랑(執事省侍郞)·서서원학사(瑞書院學士)로 임명하였다.
태조가 나라를 세운 후 그가 온 가족을 거느리고 돌아오니, 태자사부(太子師傅)로 임명하고 문한(文翰)의 임무를 맡겼다. 궁원(宮院)의 편액은 모두 그가 지었던 것이며, 그 당시 귀한 가문에서는 모두 그를 스승으로 섬기었다. 벼슬은 대상(大相)·원봉태학사(元鳳太學士)·한림원령(翰林院令)·평장사에 이르렀다.
혜종 원년(944)에 죽으니 나이가 일흔일곱이었다. 부음을 듣고 왕이 크게 슬퍼하였으며, 정광(政匡)으로 추증하고 시호를 문영(文英)이라 하였다. 아들은 최광윤(崔光胤)·최행귀(崔行歸)·최광원(崔光遠)·최행종(崔行宗)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