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 20:35-43
찬송가 321장 ‘날 대속하신 예수께’
눈을 가리고 변장하는 선지자(35-38절
아합의 하나님을 향한 불순종과 국정 운영의 미숙함으로 인해 북이스라엘은 국가적 운명이 걸린 위협을 여러차례 직면해야 했습니다. 특별히 열왕기상 20장에서는 아람 왕의 침공을 받은 경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방비를 하지 않았다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도우심 덕분에 승리하게 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아합이 여기까지 경험했다면 응당 하나님께 겸손함으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순종의 사람이 되기로 결단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당장의 문제만 해결하는데 관심이 있을 뿐 더욱 근본적인 문제, 즉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자신의 죄의 문제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 결과 어제 본문 34절의 내용처럼, 아합은 벤하닷이 자기 목숨 보전을 위한 뇌물을 받고서 그를 풀어주게 됩니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와 그분의 뜻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고, 오직 자신의 명예와 외교적 실리만 중요할 뿐이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지독한 영적 우매함을 가진 아합을 향해 심판의 메세지를 전하고자 하십니다.
(35, 36) 선지자의 무리 중 한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그의 친구에게 이르되 너는 나를 치라 하였더니 그 사람이 치기를 싫어하는지라 그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나를 떠나갈 때에 사자가 너를 죽이리라 그 사람이 그의 곁을 떠나가더니 사자가 그를 만나 죽였더라
아합에게 심판의 메세지를 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한 선지자를 세우십니다. 그런데 이를 위해 그 선지자는 자신의 동료 선지자에게 자신의 몸을 치라고 합니다. 요청을 받은 동료는 자신을 때려달라는 선지자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악감을 가지고 있지도 않은 사람에게 폭행을 행사해달라는 요청은 어느 누구라 할지라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한가지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이 모든 행위가 본문에서 증언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명령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아합에게 어떠한 중요한 메세지를 전하기위해 사전 작업으로 선지자들에게 명령을 하신 것인데, 요청을 받은 선지자는 그것을 개인적인 이유로 거절했던 것입니다. 결국 불순종했던 동료 선지자는 사자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중요한 사명을 감당해야할 선지자들에게 높은 수준의 순종을 요구하셨습니다.
또한 다소 과격해보일 수 있는 이 명령은, 하나님의 메세지를 들어야 할 아합의 죄악이 그만큼 중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료 선지자의 몸을 상하게 해야할 만큼, 아합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눈과 귀를 닫고 자기 자신의 경험과 능력을 의지하며 국정을 운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를 깨닫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이해하기 힘든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37, 38) 그가 또 다른 사람을 만나 이르되 너는 나를 치라 하매 그 사람이 그를 치되 상하도록 친지라 선지자가 가서 수건으로 자기의 눈을 가리어 변장하고 길 가에서 왕을 기다리다가
첫번째 동료 선지자와는 달리 두번째 동료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요청한 선지자의 몸을 상하도록 칩니다. 그렇게 몸이 상한 선지자는 수건으로 자기 눈을 가리어 변장을 합니다. 눈을 가린다는 것은 시각장애인처럼 변장했다기보다 얼굴을 적절하게 가린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렇게 하였을 때 전쟁을 수행하고 돌아온 군인처럼 보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싫어하는 아합이 이미 초면이 아닌 선지자를 보게 된다면 말씀을 듣기도 전에 회피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의 변장 덕분에 아합은 선지자가 전하는 하나님의 심판의 메세지를 온전히 전해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근심하고 답답해하는 아합(39-43절)
(39, 40) 왕이 지나갈 때에 그가 소리 질러 왕을 불러 이르되 종이 전장 가운데에 나갔더니 한 사람이 돌이켜 어떤 사람을 끌고 내게로 와서 말하기를 이 사람을 지키라 만일 그를 잃어 버리면 네 생명으로 그의 생명을 대신하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은 한 달란트를 내어야 하리라 하였거늘 종이 이리 저리 일을 볼 동안에 그가 없어졌나이다 이스라엘 왕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스스로 결정하였으니 그대로 당하여야 하리라
부상당한 군인인것처럼 변장한 선지자는 아합을 보자 소리를 지르며 걸음을 멈추게 합니다. 그리고 준비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그 이야기인 즉 슨, 자신이 전쟁 중에 포로 관리하게 되었는데 자기의 다른 일을 하다가 그만 포로가 탈출했다는 것입니다. 군인이 어떤 사람입니까?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사는 사람입니다. 포로를 지키라고 명령을 받았다면 하늘이 두쪽나는 수가 있어도 끝까지 책임지고 그 명령을 지켜야하는 것이 바로 군인입니다. 이 군인은 포로의 생명을 잘 지켜서 권한 있는 자가 처분할 수 있도록 인계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인데도 불구하고 자기의 일을 하느라 명령을 지키는데 등한시 하였습니다. 그만큼 이 군인은 상관의 명령을 가볍게 여겼고 자신의 사명을 온전하게 지키지도 못했으며, 더 나아가 자신의 잘못으로 생긴 문제를 왕이 해결해달라고 소리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 군인의 말에 아합은 어이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합은 너무나 당연하고 상식적인 답변을 그 군인, 즉 변장한 선지자에게 내놓습니다. 그것은 바로 스스로 결정하였으니 그대로 당하라는 답변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닫고 있던 아합이라 할지라도 이 문제에서 만큼은 바른 답변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전쟁 중에 상관의 명령을 지키기보다 자기의 뜻대로 행하는 군인은 처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런데 아합은 그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을 못합니다.
(41) 그가 급히 자기의 눈을 가린 수건을 벗으니 이스라엘 왕이 그는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인 줄을 알아본지라
이제서야 이 선지자가 왜 몸을 상하게 했는지, 수건으로 눈을 가렸는지에 대해 알게됩니다. 이 선지자는 아합과 구면이었고 그렇기에 그냥 다가갔다가는 아합의 회피와 거절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게 되었을 것입니다. 명령에 불순종한 군인처럼 변장하고 왕에게 신원하여 줄 것을 요청함으로써 역설적이게도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아합 자신을 객관화시켜 볼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40절에 기록된 ‘스스로 결정하였으니 그대로 당하여야 한다’는 아합의 답변은 바로 자기 자신을 향한 답변이 되었습니다. 이는 마치 다윗에게 밧세바를 범한 죄를 선명하고 분명하게 깨닫게 하기위한 나단의 화법을 떠올리게 합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다윗은 진심으로 회개하였다는 것이고 아합은 근심하고 답답해 했다는 것입니다.
(42, 43) 그가 왕께 아뢰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멸하기로 작정한 사람을 네 손으로 놓았은즉 네 목숨은 그의 목숨을 대신하고 네 백성은 그의 백성을 대신하리라 하셨나이다 이스라엘 왕이 근심하고 답답하여 그의 왕궁으로 돌아가려고 사마리아에 이르니라
여기서 ‘멸하기로 작정한 사람’에는 원문에서는 ‘헤렘’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 물건이나 사람을 나타낼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여호수아에서는 여리고를 헤렘으로 규정하며 거기서 나온 모든 전리품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에 불순종했던 아간과 그의 가족은 돌에 맞아 죽음으로써 죄값을 치러야 했습니다. 즉 아합은 불순종한 군인처럼, 벤하닷의 생명이 하나님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유익을 위해 자기 마음대로 처분하는 죄를 저질렀던 것입니다.
사실 벤하닷과의 전투에서 아합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었다면 북이스라엘은 명망하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합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찬양하기보다 또다시 자기 생각과 자기 욕심대로 하나님께 불순종하였습니다. 변장한 선지자는 바로 이러한 지점을 아합에게 이야기 했던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아합은 자기 자신을 객관화시켜 보여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있음에도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가 보인 반응에 대해 성경은 ‘근심하고 답답해 했다’라고 증언합니다. 이 말을 원문의 뉘앙스를 살려 다시 표현하자면 ‘완고하게’, 그리고 ‘언짢아하는’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즉, 아합은 불순종의 죄를 저지르는 자기 자신의 객관화된 모습을 보면서도 끝까지 고집을 부리고 짜증을 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의 결정과 판단에 대해 선지자도, 하나님도 간섭하지 말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온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신뢰하기보다 하나님 앞에 분명한 선을 그으면서 하나님께 넘어오지 말라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사랑하는 교우님들. 아합의 어리석은 모습이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 반성해보십시다. 혹시 하나님께 받을 복은 구하면서도 순종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는 귀를 닫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마치 십자가에 달리신 영원한 생명되신 예수님은 아랑곳 하지 않고, 그저 곧 썩어 없어질 천 조각을 쥐어잡는데 정신이 팔린 로마 군인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나의 구원자시요 유일한 치료자 되시는 주님을 믿음으로 붙잡는 혈루병 여인의 모습이십니까? 바라기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아합의 모습을 과감히 버리고, 우리의 진정한 왕이시요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을 꼭 붙잡으십시다. 주님의 이 땅에 오심과 다시 오심을 소망하는 대림절, 세상을 이기신 주님과 함께 오늘 하루도 믿음으로 세상을 승리하시는 우리 모든 교우님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 도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앞에 자신의 불순종을 객관화시켜 보여줬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기보다 오히려 근심하고 답답해하는 아합의 모습을 봅니다. 주님 우리 모두 아합을 반면교사 삼아 주님의 통치에 순종하고 맡겨진 사명에 충성할 수 있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또한 하나님의 말씀과 지혜보다 나의 생각과 경험을 우선시여기는 어리석음을 과감히 버리게 하옵시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일하심을 온전히 경험하게 하옵소서. 다시 오실 주님을 묵상하며 은혜 가운데 대림절을 보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주님을 증거하고 찬양하는 오늘 하루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사소한 명령을 어긴 선지자는 불순종을 이유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성숙할 수록 더 높은 믿음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나에게 적용해봅시다.
2.다른 사람은 잘 평가를 하면서 정작 나 자신을 객관화시키지 못했던 경험이 있다면 떠올려 봅시다. 또한 그로부터 배운 교훈은 무엇입니까?
3.하나님이 정해주신 선을 넘으려했던 적이 있습니까? 반대로 하나님께 선을 긋고 넘어오지 못하게 하신적이 있으십니까? 구체적인 경험을 떠올려 봅시다.
4.하나님의 음성에 예민하게 반응하기 위해 지금 당장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작성 : 김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