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연산군(1494~1506)
요즘 기준으로 보면 아이돌급 외모를
지녔던 것 같다.
<죽창한화>에 백세가 넘은 노인이
열세 살 때 한양에 갔다가 본 연산군의
외모를 언급한 내용이 나오는데
'얼굴이 희고 마른 체형에 키가 컸으며
눈가가 붉었다'라고 회상했다.
아버지 성종을 닮아 키가 컸으며
허리가 버들가지처럼 낭창한 스타일에
서늘한 미녀였다는 엄마 폐비 윤씨처럼
얼굴은 희고 이목구비는 곱상했던 것 같고
야사에 전해져 오는 얘기로는
왕의 위엄이 없었다고도 한다.
눈가가 붉었다는 걸 보면 광증이 있었던 건지.
곧잘 시를 읊기도 하고 연기력도 뛰어나서
그의 연기를 보며 울었다는 사람도 있었다는데
왕이 되기보다 차라리 남사당패가 되었더라면 어땠을까.
얼굴이 중간 정도를 넘지 못했고
나이도 연산군보다 훨씬 많았던 장녹수는
서열 2위 파워를 가지고 연산군을
쥐락펴락했는데 심지어 연산군을
'꼬마야' 라고 부르며 희롱을 해도
처벌은 커녕 총애를 독차지했다.
그의 마더 콤플렉스를 채워준 게
주효했던 거겠지.
중종반정이 일어났을 때
도주하려고 하지도 않고
옥새를 순순히 내주면서
“내 죄가 중하여 이리 될 줄 알았다.
좋을 대로 하라” 라고 했다.
그 뒤로도 자기 죄를 변명하지도 않았고
저항도 전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중종반정 있기 열흘 전 후원에서 놀다가
“인생은 풀에 맺힌 이슬 같아서
만날 때가 많지 않은 것” 이라고
시조를 읊으면서 우니까
장녹수랑 전비가 따라 울었는데
장녹수와 전비의 등을 어루만지며
“지금 태평한 지 오래이니
어찌 불의의 변이 있겠느냐마는,
만약 변고가 있게 되면 너희들은
반드시 면하지 못하리라” 라고 하였다.
그런 걸 보면 본인이 스스로 막장 짓을
하고 있다는 것과 얼마 못 가리라는 점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는 뜻일 텐데
아마도 가늘고 길게 가는 것보다
짧고 굵게 가는 것을 선택했었던 게 아닐까?
눈치 볼 것 없이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휘두르며 막 나갔던
연산군 시대는 조선시대 역사 중
가장 왕권이 강했던 시대였다.
그 미쳐 돌아가는 와중에도 인품이 훌륭했던
부인 폐비 신씨에 대해서는 늘 존중해 주며
부인의 말에는 고분고분했다는데
엄마를 닮아 영민하고 성군의 기질이 있었던
폐세자 황이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아버지가 처신을 조금만 잘 했더라면
무사히 자라나서 좋은 왕이 되었으련만..
그는 아버지의 죄로 불과 열 살의 나이에
사약을 받고 사망했으며 이 소식을 들은
연산군도 실의에 빠져 얼마 못 가
그의 생을 마감하였다.
카페 게시글
용띠들동행
다이내믹 조선 왕(1)
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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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50
24.03.23 21:59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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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무비님이 역사 공부를 많이 하신 것 같아요~
저는 사가들이 기록한 것 보다 비하인드 스토리가
더 흥미로워요~^^
"세상은 남자가 지배하고 그 남자는 여자가 지배한다"~ㅎㅎ
ㅎㅎ
요즈음 세상은 여자가지배하고
그 여자는 돈이지배하는 세상
되었다고 하든데요~
역사공부 시간이 다가왔군요^~ㅎㅎ
즐거운 온괭일 보내시길요
무비님
즐거운 휴일 만드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