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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 9:1-11
찬송가 419장 ‘주 날개 및 내가 편안히 쉬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지켜줄 안전지대를 갈망합니다. 가족이 안전한 울타리라고 생각할 수 있고, 돈, 많은 재산이 나를 안전하게 만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의 능력이 나를 지켜줄 유일한 보루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만 있으면 나는 안전하다' '이곳에 있으면 어떤 위험도 나를 덮치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믿는 최후의 보루가 모두의 마음속에 하나씩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유다 공동체가 가진 유일한 보루는 무엇이겠습니까? 유다 백성들에게 예루살렘은 난공불락의 요새였습니다. 솔로몬이 세운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고, 바벨론 군대가 이미 두 차례나 쳐들어왔었음에도 이상할 정도로 태평했습니다.
남유다 백성들의 마음속에는 시온 신학이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계신 성소가 있는 예루살렘이 가장 안전한 장소다.', '거룩한 도성을 어떤 이방 군대도 침략할 수 없다.', '성전이 있는 한 우리는 안전하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살펴볼 에스겔 9장의 환상은 이 생각을 깨뜨리고, 예루살렘에 찾아온 위기의 정체를 보여줍니다.
구원의 표를 이마에 그리다(1-4절)
(1-2) 또 그가 큰 소리로 내 귀에 외쳐 이르시되 이 성읍을 관할하는 자들이 각기 죽이는 무기를 손에 들고 나아오게 하라 하시더라 내가 보니 여섯 사람이 북향한 윗문 길로부터 오는데 각 사람의 손에 죽이는 무기를 잡았고 그 중의 한 사람은 가는 베 옷을 입고 허리에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찼더라 그들이 들어와서 놋 제단 곁에 서더라
본문 1절에서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큰 소리로 내 귀에 외치셨다고 합니다. 조용히 귓속말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마치 귀청이 떨어져 나갈 듯한 천둥소리처럼 하나님의 압도적인 존재를 보이시면서 외치십니다. 하나님은 성읍을 징벌할 사람들을 불러 모으도록 하는데, 에스겔 선지자의 역할은 명령을 내리는 입장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지켜보고 말씀을 전하는 입장일 뿐입니다.
그리고 2절에서 여섯 명의 사람이 북쪽으로부터 내려와서 성전으로 들어옵니다. 여섯 사람이 들어오는 북쪽은 바벨론이 있는 방향이고, 구약에서 언제나 침략은 북쪽에서부터 내려왔습니다. 재앙과 침략의 군대가 밀려오는 길목이 북쪽입니다. 원래 '성읍을 관할하는 자들'은 성을 지키고 백성들을 보살피는 역할을 해야 하는,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성읍을 관할하는 자들은 손에 무기를 들고서 옵니다. 어떤 무기냐면 '죽이는 무기'입니다.
'죽이는 무기'는 상대를 제압하거나 위협하는 방어용 칼이 아닙니다. 원어로 '켈리 마쉬헤토'는 사람의 머리를 깨뜨리는 철퇴, 쇠뭉치를 가리키거나, 끝에 무게를 많이 달아서 내려치는 도끼나 망치, 워해머를 의미합니다. 철저하게 부수고 파괴하고 학살하는 병기입니다.
그런데 그중에 특별히 다른 옷차림을 한 사람이 보입니다. 가는 베 옷을 입었고,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차고 있습니다. 이 모습은 하얀 옷을 입었다는 의미이고, 제사장의 옷차림입니다. 먹 그릇은 쉽게 말해 필통으로 이해하면 되는데, 서기관들이 펜대와 잉크와 조그만 사무용 칼과 종이, 가죽 조각 등 필기도구를 담아 다니는 통을 뜻하고, 짐승의 뿔로 만들었습니다.
가는 베 옷을 입은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뭐라고 명령하시는지 이어지는 본문 3절과 4절이 잘 보여줍니다.
(3-4) 그룹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에 이르더니 여호와께서 그 가는 베 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을 불러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 하시고
4절에서 하나님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가증한 일 때문에 탄식하며 우는 자들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고 하십니다. 이 표는 여호와의 소유임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후 본문까지 보면 이 표를 받은 사람은 죽음에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때 문지방에 양의 피를 발라 장자의 죽음을 피할 수 있던 것처럼, 라합이 창문에 붉은 줄을 달아 죽음을 면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증표가 있으면 죽지 않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도 마지막 날에 사람들이 어린 양의 표를 받고 살아납니다.
이 표는 히브리어의 마지막 알파벳 '타브'를 그리는데, 이 시대에 타브는 오늘날의 'X' 모양과 비슷하게 쓰였습니다. 그러니까 이마에 가위표가 그려진 사람들을 살려주는 것입니다. 이 표를 받는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성행하는 우상 숭배에 동요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지키며 영적인 슬픔과 아픔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 사람들이 구함을 받는 이유는, 종교적인 예식을 잘 따라서가 아니라 그 마음의 자세 때문이었습니다. 종교적인 예식을 토씨 하나까지 잘 지키는 바리새인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 때문에 영적인 슬픔과 아픔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을 구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3절을 보시면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갑니다. 성전의 가장 깊은 곳, 지성소에는 언약궤가 있는데, 언약궤 뚜껑, 속죄소 위에 날개를 펴고 있는 천사들의 형상, 그룹 날개 사이에 머물러 있던 하나님의 영광이 움직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을 넘어갑니다. 예루살렘이 거룩했던 이유는, 성전이 거룩했던 이유는 건물의 화려함 때문이 아니라, 그곳에 계시는 하나님의 임재 때문이었습니다. 주인이 떠나버린 집은 아무리 화려한 대리석과 금으로 도배되어 있어도 빈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은 예루살렘의 심판을 이루시기 전에, 먼저 살려야 하는 사람을 구별하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은 어느 시대에든지 주님 앞에 신실한 사람들을 지켜주십니다. 에스겔에서도 그렇고, 요한계시록에 이 세상 끝날에도 그렇고, 범죄하는 세대가 일어나 하나님을 믿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거역하는 시대 속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가며 심판의 칼날이 우리 앞에 닥쳐오더라도, 주님은 주를 사랑하는 성도들이 있음을 기억하시고 위로하시고 지켜주십니다.
성전 안부터 시작되는 심판(5-7절)
(5-6) 그들에 대하여 내 귀에 이르시되 너희는 그를 따라 성읍 중에 다니며 불쌍히 여기지 말며 긍휼을 베풀지 말고 쳐서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이와 여자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하지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지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더라
이제 죽이는 무기를 든 여섯 사람에게 사람들을 심판하도록 하십니다. 무기를 든 사람이 다섯 명인지 여섯 명인지에 대한 견해가 다른 경우가 있습니다. 북문에서 들어온 인원이 총 여섯 명이고, 그중에 한 사람이 가는 베 옷을 입고 표를 그린다는 견해가 있고, 아니면 무기를 든 인원이 여섯 명이고, 가는 베 옷을 입은 1명까지 총 7명이라는 견해입니다.
이것을 구별하는 것은 크게 유의미한 논쟁거리는 아니지만, 5절을 보시면 무기를 든 '그들'에 대해서 말하기를, 가는 베 옷을 입은 '그'를 따라 성읍을 다니면서 심판하라고 하시는 내용에 비추어 볼 때, 총 7명으로 보는 것이 전통적인 해석입니다.
이 모습을 보시면, 하얀 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이 먼저 예루살렘 거리를 두루 다니며 살려야 힐 사람들에게 표를 그리면, 그 뒤에 여섯 사람이 뒤따라가면서 이마에 표가 없는 사람들을 다 죽이는 것입니다. 6절을 보시면, 늙은 자와 젊은 자, 처녀, 어린이, 여자 할 것 없이 모든 살아있는 사람을 다 죽이도록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 정복을 시작하며 여리고성을 함락시킬 때 이렇게 모든 살아있는 사람을 다 죽였는데, 이번에는 그 대상이 이방인들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진멸되고 있을 때, 일상적으로 보호 대상이 되는 연약한 약자들까지도 이 심판에서는 예외가 아닙니다. 오직 예외가 되는 사람은 가는 베 옷을 입은 사람에게 표를 받은 사람뿐입니다.
그리고 심판이 시작되는 장소도 중요한데, 성전의 문지방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 앞에 명령을 듣고서, 성전으로부터 심판을 시작합니다. 심지어 성전이 가장 주요한 심판의 장소가 됩니다.
(7) 그가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성전을 더럽혀 시체로 모든 뜰에 채우라 너희는 나가라 하시매 그들이 나가서 성읍 중에서 치더라
고대 근동 문화에서 신전은 아무리 흉악한 죄인이라도 제단 뿔을 잡으면 함부로 죽일 수 없는 절대적인 도피처입니다. 율법에서도 시체를 만지는 것을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제사장들에게 시체를 접촉하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성전의 모든 뜰에 시체로 채우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의 집, 성전에서부터 심판을 시작하여 성전을 더럽히고 시체로 채우게 하십니다. 성전에서 살육을 마친 뒤에 예루살렘 성읍 곳곳에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 죽이고 심판하십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임재하신 성전의 영광을 바라보며, 자신들은 망하지 않을 것이라 여겼지만, "하나님이 정말 당신의 집을 부수시겠는가? 하나님이 설마 우리를 심판하시겠는가? 예루살렘이 망하겠는가?" 이렇게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거룩함과 공의를 잃어버린 성전을 사람들의 피난처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를 시작하는 장소로 만드셨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17절에서도, 심판이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 시대에 일어날 세상의 심판에서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심판을 시작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고자 할 때, 겉으로는 경건의 모양을 갖추었으나 골방에서 세상의 욕심과 똑같이 행하고, 약자를 짓밟으며, 은밀한 쾌락에 젖어 있는 우리의 거짓된 모습부터 하나님은 들추어내시고 우리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우리 안에 숨겨진 우상의 신을 벗으십시다. 겉으로는 거룩을 바라지만, 속으로는 세상의 욕심을 따르는 이 세상의 구습을 버리십시다. 심판의 날에 살아남는 유일한 길은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자세입니다. 이 세상의 불순종과 탐욕과 우상 숭배의 모습을 보고 탄식하고 울며, 골방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성도를 하나님은 지키십니다.
의인과 악인을 모두 기억하시는 공의의 하나님(8-11절)
이제 이 탄식의 기도를 에스겔이 구합니다.
(8) 그들이 칠 때에 내가 홀로 있었는지라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아하 주 여호와여 예루살렘을 향하여 분노를 쏟으시오니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모두 멸하려 하시나이까
본문 8절에서 집행관들이 성전 안뜰에서부터 나이 많은 노인, 장로들을 모두 쳐 죽이고 온 성읍을 향해 칼을 빼어 들고 나갔습니다. 그 아수라장이 지나간 성전 마당에 에스겔이 홀로 남겨졌습니다.
"내가 홀로 있었는지라"라는 8절 말씀에 에스겔은 '살아남아 다행이다'라는 안도의 의미가 아닙니다. 사방에 목이 잘리고, 철퇴를 맞아 머리가 함몰된 끔찍한 시체들과 붉은 피가 흘러내리는 처참한 폐허 속에서, 이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 같은 공포에 남겨져있습니다.
최소한 성전 안에서 표를 받은 사람은 에스겔 외에 아무도 없습니다. 에스겔은 엎드려 부르짖으며, "아하 주 여호와여"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절규합니다. "아하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을 멸하시려고 하십니까? 에스겔은 질문합니다.
하나님,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두 죽이신다면, 아브라함과의 언약은 어떻게 되는 거냐고, 다윗과의 언약은 어떻게 되는 거냐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에스겔은 교회가 무너지고 세상이 타락할 때, 참된 중보자의 모습을 보입니다. 다른 교회들의 삐걱삐걱 흔들릴 때, 우리는 너무 쉽게 제3자의 자리에 서서 팔장 끼고 냉소적인 비판을 보이기도합니다. "저러니 교회가 욕을 먹지", "내 저럴 줄 알았다." 그러나 에스겔은 비판자가 아니라 중보자였습니다. 에스겔은 죽어가는 백성의 시체 곁에, 피가 흘러내리는 땅 바닥에 엎드려 얼굴을 묻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에스겔의 중보를 단호하게 기각합니다.
(9-11)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의 죄악이 심히 중하여 그 땅에 피가 가득하며 그 성읍에 불법이 찼나니 이는 그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땅을 버리셨으며 여호와께서 보지 아니하신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고 그들의 행위대로 그들의 머리에 갚으리라 하시더라 보라 가는 베 옷을 입고 허리에 먹 그릇을 찬 사람이 복명하여 이르되 주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내가 준행하였나이다 하더라
출애굽기에서 이와 같은 눈물의 기도를 들으시고 뜻을 돌이키셨던 하나님께서 에스겔의 중보를 단호하게 거절하십니다. 9절에서 하나님은 그 이유를 말씀하시는데, 백성들이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 땅을 버리셨으며 여호와께서 보지 아니하신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죄를 짓고, 우상을 숭배하고, 약자들을 괴롭히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하나님이 안계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제사를 지내지만, 하나님은 이 땅에 관심이 없으시다, 이 땅을 버렸다, 하나님은 내가 골방에서 무슨 짓을 하든지 전혀 알지 못하신다. 이렇게 확신하는 이유였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지워버렸기 때문에 그들은 거리낌 없이 죄를 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질서의 회복입니다. 하나님은 악인의 죽음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는 사람을 방치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공의를 세우기 위해 칼을 빼 들고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11절, 본문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가는 베 옷을 입은 사람이 성읍을 다 돌고 돌아와 하나님께 명령대로 준행하였다고 보고합니다. 온 성읍이 심판을 당하고 성전이 더럽혀지는 그 혼란 속에서도, 하나님의 일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이뤄졌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어둡고 혼란스러울지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애통하는 자들은 머리털 하나 상함 없이 구별되어 보호받을 것이고, 하나님께 범죄하고 돌이키지 않은 사람은 그 어디에 숨어 있든 심판의 칼날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이 새벽에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생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며 두려운 마음입니까? 아니면 우리의 일상을 내 힘으로 살아내기 위한 내 생각입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시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세상이 행하는 편법과 눈속임으로 우리의 일상의 성공을 해내려고 하지 않으십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현실판 무신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숨소리 하나, 은밀한 골방의 인터넷 검색창 하나, 아무도 보지 않는 우리의 부정한 돈과 탐욕의 생각 하나까지 불꽃 같은 눈동자로 지켜보고 계십니다.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은 절망 속에 예루살렘에서 죄악을 슬퍼하며 남몰래 눈물 흘리는 우리의 눈물 한 방울도 놓치지 않고 기억하십니다. 오늘 이 새벽에 하나님 앞에 드리는 우리의 마음 속 전심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십니다. 추석 명절에 우리의 마음이 부딪치는 온갖 상황 속에서도 사랑으로 오래 참고 인내하며 온유함으로 참아내었던 우리의 모습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십니다.
세상이 하나님을 거절하고 믿지 않는 곳으로 치닫는다 해도, 우리 주님의 빛을 잃지 않고 우리의 삶을 살아내십시다. 세상이 주는 두려움에 우리의 마음이 스러진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표를 붙잡고 살아나십시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서서 거룩을 지켜내는 오늘 우리의 삶으로, 주님께서 공의의 날개 아래 우리를 지키실 줄 믿습니다.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예루살렘이 붙잡았던 성전이라는 최후의 보루가 가는 베 옷 입은 자와 죽이는 무기 든 자들 앞에서 무너지는 것을 봅니다. 주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을 떠나가시고 심판이 다른 곳 아닌 주님의 집에서부터 시작됨을 보며 우리는 두렵고 떨립니다. 그러나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려 살리신 주님이 있기에, 우리도 오늘 그 표를 구하며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다 여기며 지어온 은밀한 죄들을 오늘 주님 앞에 낱낱이 내어놓고 기도하며, 에스겔의 중보처럼 홀로 엎드려 '아하 주 여호와여' 부르짖던 기도를 본받아 기도하오니 우리도 이 시대를 향해 엎드려 부르짖는 자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우리의 눈물 한 방울도 놓치지 않고 기억하시는 주님을 의지하여 100주년기념교회 우리 공동체가 이 새벽의 골방에서부터 정직하게 살아내게하여 주시옵소서. 공의의 날개 아래 거하는 오늘 하루를 살아내기로 결단하고, 주실 은혜를 믿으며, 우리를 끝까지 지켜주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이것만 있으면 나는 안전하다'고 믿는 나만의 최후의 보루(돈, 능력, 배경, 인맥 등)는 무엇입니까?
2. 아무도 보지 않는다는 확신으로 골방에서 은밀히 짓고 있는 나의 죄는 무엇이며, 오늘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내놓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3. 오늘이 심판이 있다면, 내가 탄식하고 울며 기도할 기도 제목은 무엇입니까?
(작성: 송주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