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갈라디아서 5장1절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는데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마라 다시는 율법의 종인 것처럼 살지 마라’는 말씀을 터득해야 합니다.
로마서 5장과 6장대로라면 이제는 죄의 종도 아니요 사망의 종도 아니요
마귀의 종도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와 생명의 종입니다.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이며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자로 여기라고 하십니다(롬6:11)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그대로 믿고 계산(count)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세례와 결합이 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하십니다(막16:16)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음으로 수용하므로 구원을 받아 자유를 얻었습니다.
다만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사랑의 종노릇 하라(갈5:13)는
말씀은 우리가 지켜가야 할 의무인 것입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는 우리
양심이 선에 대한 의무를 가지지만 그리스도 안에 거듭난 양심은 영을 좇아
사는 의무감을 느끼므로 영으로 육체의 욕심을 제어하는 의무를 가지게 됩니다.
율법의 종은 수고와 무거운 짐을 지고 있지만 사랑은 행복한 종이 되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의 과정을 보면 애굽의 종에서 광야의 어린아이
그 다음에 가나안의 장성한 자들이 됩니다. 그때그때마다 하나님의 긍휼이
적용되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의 탄식과 신음소리를 항상 들으십니다.
우리도 그리스도 밖에서 죄의 종노릇 할 때에 그 참상의 신음소리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주의 은혜 가운데로 인도하셨고 또 은혜 가운데 있으면서 이게 전부가
아닌 것 같다는 탄식의 신음을 낼 때에 하나님이 들으시고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한 단계씩 업그레이드 될 때마다 우리는 탄식하게 됩니다.
그런데 율법에서 은혜는 어느 순간 뻥하고 열립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듣는 순간 단 번에 이루어집니다. 죄 사함을 받으면 세상을 다 가진 듯합니다.
출애굽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는 밤중에 느닷없이 애굽에서 나가라
하시고, 모세가 나가자고 하니 그들이 앞뒤 잴 것 없이 엉겁결에 나온 것과 같습니다.
홍해를 건너고 난 다음에 그들은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3일 만에 마라의 쓴물 앞에 그만 원망과 불평을 쏟아내고 말았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리에서 진리로 들어가는 것은 반드시 공의가 적용됩니다. 그래서
주님이 자신을 좇으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은혜는 심판이 유예되지만 진리는 구원과 심판이 동시에 일어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은혜의 복음은 좋아하지만 진리의 말씀은 싫어합니다.
마태도, 베드로도, 바울도 그리스도를 쫓았으나 부자 청년은 그만 근심하며
돌아가 버렸습니다. 왜? 부자인 자기를 부인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청함을 받은 자는 많은데 택함을 받은 자는 적다고 말씀합니다.
청함을 받을 때는 그냥 엉겁결에 불려 나옵니다. 그러나 진리 안에 들어갈 땐
반드시 공의가 적용됩니다. 이 공의는 죄인인 나는 반드시 죽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자기를 부인해야 됩니다.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이미 십자가 건너편에
옮겨져 있는 자신을 말씀을 들은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고 자신을 묶고 있는
육신을 포기하고 주님께 항복하고 그 품 안으로 귀순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진리대로 된다고 로마서 2장2절은 말씀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은혜 아래에서 어린아이로 젖이나 먹으려 하고
진리 가운데 들어가는 것은 너무 어렵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다고는
하지만 십자가의 원수의 자리에서 땅의 것을 구합니다. 사람들의 배가 신이어서
요즘은 먹방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루터는 인간들은 부엌이 종교로 여긴다고 말했습니다.
진리는 영원한 자신을 받아들이고 찰나적인 육신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에 거북합니다.
구원에는 원론적인 구원이 있고 개인의 주관적인 구원이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이 작정하실 때 이미 우리 구원은 끝이 났습니다.
원론적입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론 한 걸음 한 걸음 그 길을 걸어간다는 뜻입니다.
주관적입니다. 그리고 점진적입니다. 그래서 계시는 점진적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예수를 믿는다, 예수의 피를 믿는다 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다고 하다가
회개와 세례가 결합된 믿음이어야 죄와 사망의 반대편에 가서 죄 사함을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믿습니다. 그러다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힌 것이 믿어지고 그 곳을 향해 주의 이름을 부릅니다.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 우리를 아들로 택하시기로 이미 예정하신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율법아래 죄의 종으로 있다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 가운데로 건너 왔습니다.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에 무임승차를 한 겁니다.
그 은혜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내 말이 너희 가운데 거하면 너희가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1-32)고 하십니다.
이 말씀이 이루어지려면 반드시 공의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바로
공의와 사랑의 양면입니다. 죄가 심판이 되고 난 다음 구원이 주어지기
때문에 십자가의 한편은 공의이며 다른 한편은 사랑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구원은 반드시 심판이 동반됨을 알아야 합니다.
반드시 심판될 것은 심판된 다음 거기서 부터 구원역사가 일어납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할 때도 너희가 각각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아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주시리니(행2:38)하십니다.
이와 같은 공의가 이루어져야 비로소 구원을 받아 성령 안에서 진리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아버지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는 확실한 믿음을 갖게 되는 겁니다.
우리의 죄인 된 육체가 세례(침례)로 말미암아 심판이 되어야 합니다. 죄의 몸이
세례 곧 죽음에 잠긴 다음 다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에 잠겨야 합니다.
잠긴다는 것은 자기를 포기하고 죽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야만 성령을 선물로
주시리니 하십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구원은 심판을 동반함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영과 육이 함께 구원받는다는 법은 결코 없습니다. 우리의 영이 먼저 구원을
받고 우리의 육신이 영을 좇을 때에 범사가 형통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로마서 8장 10절 말씀을 보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인하여 산 것이라”하십니다. 일단 몸은 여전히 심판아래 둬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은 의로 인하여 영원히 산 것입니다. 믿음은 반드시 성령의
보증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신앙은 현재의 상태가 가장 중요합니다.
엡1:13절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듣고 믿어 성령으로 인침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 있는 믿음입니다. 십자가는 반드시 심판과 구원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그래서 항상 세례와 결합이 된 믿음을
가지고 죄와 사망과 악에서 떠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을 존중히
여길 때에 의가 임하고 성령께서 진리를 알게 하시므로 은혜의 보좌로 나아갑니다.
나의 옛 사람은 주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믿고 시인하는 것이 바로 나의 십자가를 지는 겁니다.
첫댓글 할렐루야! 아멘!
할렐루야 구원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