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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아질 자와 높아질 자
-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 비유 -
누가복음 18장 9-14절 / 9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어느 날 예수께서는 자기들만 옳다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비유를 들어 말씀해 주셨습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자기가 옳은 사람이라는 것을 자랑하는 바리새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백성이 내는 세금을 부당하게 포탈하는 세리다. 바리새인은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하나님, 나는 죄인들과 같지 않은 것을 감사합니다. 나는 이제까지 남의 재산을 절대로 강제로 빼앗지도 않았으며, 의롭지 않은 일은 하지 않았으며, 간음한 일도 없습니다. 또 이 세리처럼 행하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내가 얻은 모든 소득에서는 십일조를 하나님께 철저하게 바쳐왔습니다.”그러나 세리는 감히 바리새인과 가까이 있지를 못하고 그에게서 멀찍이 떨어져서는 하늘을 우러러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눈물로 기도하였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시고 나서 다음과 같이 물으며 이야기 해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각각의 기도에 있은 이 두 사람 중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서 자기 집으로 돌아간 사람이 누구이겠느냐? 바리새인이겠느냐? 아니면 세리이겠느냐? 너희는 내가 하는 말을 귀담아 잘 들어라. 하나님에게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서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저 바리새인이 아니라, 이 세리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바리새인과 세리 두 사람을 들어서 이 두 사람이 각각 기도하는 모습을 비유로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인지요.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게 된 것은 앞서의‘불의한 재판장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있는 1-8절과 연계해서입니다. 앞서에서 예수님은 인자가 오실 날까지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구함에 제자들의 믿음이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에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함에 믿음이 있은데 따라 그 응답을 볼 것이니 그들의 믿음의 주님에 의해서 하나님의 나라에로 데려감을 받음에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과는 달리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여기서의‘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은 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보면서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그 의가 하나님에게서 의롭다함을 받는 의인지, 하나님에게서 의롭다 함을 받는 의는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해주는 말씀을 하시는 것으로 비유를 들어 설명해 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자신을 옳게 보이려고 외식적인 의를 행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마 6:1). 이런 그들은 다른 사람을 멸시하였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하는 까닭은 의에 대한 이해를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자신들의 도리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또한 이웃에 대한 의무를 짊어짐의 책임을 다하는 것에서 의를 행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에 따라서 이 의의 행함의 여부로 불의한 자와 구별된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생각한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말하며 가르친 대로 온전히 살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의무도 온전히 행하지 않았으며, 이웃에 대한 의무도 온전히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 어느 것에서도 온전한, 곧 완전함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마가가“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막 7:6. 병행구절 마 15:8)라고 말한 것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공경함은 무엇인지요. 요한이 이에 대하여서 말해 줍니다.“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요 5:23).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을 공경함에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손으로 만들어 세운 전통을 따르는 것으로 하나님을 공경함을 보이려고 하는 외식에 있었습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그대로입니다.“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 29:13). 이렇게 하나님을 공경함이 없는 불의함에 있는 것에서 또한 사람에게서도 불의를 행하니, 자신의 부모와 이웃에게서 행해집니다.“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엡 6:2, 참조. 출 20:12; 신 5:16)인데,“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마 19:19)이 열 가지 계명에 나타내신 하나님의 언약이기에, 모세는“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욕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막 7:10, 병행구절 마 15:4) 하였으나,“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마 15:5-6) 악에 있었습니다. 이는 이웃에게로도 확대되니 하나님을 무시함이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는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참조. 눅 18:2). 이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서 남은 것은 종교의 외형적인 모습뿐이었습니다. 즉, 자신들이 만든 전통을 따라 지키며 사는 것인데, 여기에 하나님을 공경함도 이웃을 공경함도 그 어느 것도 없으니 형식뿐인 종교인 외식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눈에 옳게 보이려고 선을 행하여 나갔으며, 이것을 행함에 있는 것을 자신들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라고 여기고서, 이것으로 의를 쌓는 공적 신앙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기준이었습니다. 즉,“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또는“누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겠습니까?”에 대한 답 제시로 삼았습니다.
이러한 그들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행하는 기도와 세리가 갖는 기도를 비유로 들어서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그 의가 하나님에게서 의롭다함을 받는 의인지를 알게 해주시면서 또한 하나님에게서 의롭다 함을 받는 의는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해주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구함에 있는 믿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을 의롭다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을 멸시함에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이러함은 그들이 행하는 기도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에, 그들이 행하는 기도의 행태를 비유로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는 죄인들과 같지 않은 것을 감사합니다. 나는 이제까지 남의 재산을 절대로 강제로 빼앗지도 않았으며, 의롭지 않은 일은 하지 않았으며, 간음한 일도 없습니다. 또 이 세리처럼 행하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내가 얻은 모든 소득에서는 십일조를 하나님께 철저하게 바쳐왔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기도하기를 눈물을 흘리면서 하였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바리새인의 이 기도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의로운 기도인지요. 그 사실을 알게 해 주기 위해서 예수님은 다른 한 사람의 기도를 역시 비유로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그 기도는 세리의 기도였습니다. 그는 감히 바리새인과 함께 가까이 있지를 못하고 그에게서 멀찍이 떨여져서는 하늘을 우러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면서 기도하기를,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고 눈물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할 뿐이었습니다.
이 두 기도의 비유에서 어떤 차이점을 발견하는지요. 예수님이 이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자기를 의롭다고 여기는 까닭에 그들이 하는 기도에는 한껏 자기를 높여 자랑하는 말로 가득 찼을 뿐이지 하나님 앞에 자신이 죄인 됨을 인식하고서 그 죄의 용서가 있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자비를 구함이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세리가 하는 기도를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에게 자신의 죄인됨을 고백하며 그러한 자신에게 하나님의 자비가 베풀어지기를 구함에 있었습니다.
이 둘의 기도에서 보게 되는 차이점이 무엇인가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기도에는 하나님의 자비를 구함이 없었습니다. 반면에 세리의 기도에는 하나님의 자비를 구함이 있었습니다. 왜 이렇게 다른 기도에 있는지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마음에는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가 없고 온통 자기를 위하는 것으로 마음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런 그들은 자기들이 의로워야 하기에 의의 자리에 앉아서 자신의 의로움을 사람들에게 보여 그러한 자신을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세리와도 같지 않다는 것으로 말이죠. 세리가 하지 않은 경건을 그들은 철저하게 가져 나갔던 것입니다.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아주 작은 것까지라도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는 것을 가지고 말입니다. 이렇게 이러한 것들로 자신을 의롭게 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기에 이러한 것들로 자신의 모습을 보여 나가려고 합니다. 인자가 오시는 날까지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를 바라봄에 있어 죄의 용서 받음에 있고자 하나님의 자비를 구함에 있는 믿음에 의한 의에 있지 않고 말입니다.
이러한 바리새인과 서기관 앞에서 세리는 그들과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세리가 어떤 자인지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세리를 지칭하기를,“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않으며, 이 세리와도 같지 않습니다”라고 하였으며, 세리장 삭개오가 예수님에게 말한 바인“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 19:8)에서 보는 대로, 그의 부자 됨에 있음이 남의 재산을 토색한 것에서 였습니다. 이는“도둑질하지 말라”(출 20:15)고 하신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것보다 더한 행동에 있는 것이요, 또한“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출 20:17) 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악한 죄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말이죠. 자신의 행동을 잘 아는데, 그러한 것을 하지 않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곁에 감히 가까이 하지를 못하는 것이죠.
이 둘에게서 누가 의로운 자인가요. 남의 재산을 강제로 빼앗지 않은 사람은 세리가 아닌 바리새인이며, 의롭지 않은 일은 하지 않은 사람은 세리가 아닌 바리새인이며, 간음한 일도 없는 사람은 세리가 아닌 바리새인입니다. 이렇게 남의 재산을 강제로 빼앗은 사람은 바리새인이 아닌 세리이고, 의롭지 않은 일을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 아닌 세리이고, 간음한 일이 있는 사람은 바리새인이 아닌 세리입니다. 그러니 누가 봐도 의로운 사람은 세리가 아닌 바리새인입니다. 그 뿐인가요. 바리새인은 세리가 하지 않는 경건에도 있었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자신이 얻은 모든 소득에서는 십일조를 하나님께 철저하게 바쳐왔습니다. 그러니 말입니다. 사람들이 의롭다고 인정하는 사람은 누가 봐도 바리새인입니다. 세리는 가까이 해서는 안 될 죄인이구요.
그런데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둘의 기도를 비유로 드시고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에게서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사람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아니고, 세리입니다. 그에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여 하나님께서 베푸신 잔치 상의 떡을 먹는 기쁨에 있는 사람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아니고 세리입니다.
이는 자신들을 의롭다고 여기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생각을 완전히 깨부수는 일입니다. 그렇듯이 그들을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생각 또한 완전히 깨부수는 일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자신이 의롭다고 인정하는 그 의를, 그리고 사람들이 의롭다고 여기는 그 의를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의로 전혀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반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불의하다고 여기는 세리를, 또한 불의하다고 여겨 그들과 가까이 하지 않는 세리를 하나님은 의롭다고 인정하십니다. 어째서 그런지요.
바리새인은 남의 재산을 강제로 빼앗지 않은 의가 있는 사람입니다. 바리새인은 의롭지 않은 일은 하지 않은 의가 있는 사람입니다. 바리새인은 간음한 일도 없는 의로운 사람입니다. 또한 바리새인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자신이 얻은 모든 소득에서는 십일조를 하나님께 철저하게 바쳐온 의가 있는 사람입니다. 이 모두는 바리새인이 옳지 않은 일을 한 것이 아니고, 자신들이 지켜 나갈 것을 정한대로 행동하는 옳은 일을 한 의입니다.
그러한 그를 하나님께서는 왜 의롭다고 여기지 않는 것인지요. 바리새인은 자기가 한 행동이 옳은 일을 한 것이기에 그 자신 스스로도 생각하기를 자기를 의롭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그 옳은 일을 한 행동을 불의하다는 것에서 의롭다고 여기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행동의 옳음은 그것대로 인정하십니다. 문제는 그들의 그 옳은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것이냐는 것이죠. 그러한 그는 하나님 앞에 죄인 된 인식이 없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고백할 죄가 없으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죄 인식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에게는 죄에서 구원을 받고자 하는 어떤 생각도 없습니다. 그는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고 있으며, 이러한 생각에 있는 그는 자신을 죄에서 구원을 받아야만 할 어떤 불의도 없다고 보기에 당연히 하나님의 나라가 베푸는 잔치에 참여하여 떡을 먹을 것으로 알고 있을 뿐이지 자신을 죄에서 구원 받아야 할 상태에 있는 죄인으로 여기지를 않습니다. 이런 바리새인은 말이죠. 하나님의 자비를 전연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자비의 베푸심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름에 있는 죄로부터의 구원에 대하여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 그에게서 예수 그리스도는 미움의 대상이며, 배척의 대상일 뿐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미워함에 있으며, 배척함에 있는 것에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심으로 그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시니,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들 모두를 다시 살리실 것(요 6:40) 을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여 불순종하는 악한 죄에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그러한 바리새인을 의롭다고 여기지 않으십니다.
반면에 세리는 바리새인에게서 멀리 떨어져 서서는“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였습니다. 여기서‘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란 말은“감히 하늘을 우러러볼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생각도 못하였다.”는 뜻입니다. 세리가 이러한 것은 부당하게 세금을 많이 거두어 그 일부로 치부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사고, 그 돈으로 호의호색 한 불의에 있은 자신을 보면서 이런 자신이 미워지며 감히 하나님의 자비를 입을 수 있겠는가라는 자책에서만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기도와 대조적으로 비교되는 비유로서 이 이야기를 하시는 것을 통해서 세리의 마음 깊이에 있는 참회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모든 죄악들이 나쁘다는, 또는 잘못이라는 것을 아는데, 그 모든 죄악들을 산출해 내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데서 갖는 참회입니다. 그런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그는 잘 알며, 또한 그 자신이 결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피할 수 없을 것임도 잘 압니다. 그러한 그는 하나님의 자비를 구합니다. 예수께서 세리의 간구로 사용하신“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란 말은“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편 51편을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하나님의 마음이 누그러지시기를 바라는 것이며, 그렇게 자신을 용서해 주시는 마음에 있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이죠. 비유로 말씀하신 세리의 이 기도를 통해서 이제 해 주고자 하는 본론의 말씀을 끄집어내십니다.“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겠는지요.“내가 이야기 해 준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를 너희가 잘 들었느냐? 그렇다면 이 두 사람 중에서 하나님의 은혜/긍휼을 입은 사람이 누구이겠느냐? 바리새인의 기도에 있은 사람이냐? 아니다. 그렇다면 세리의 기도에 있은 사람이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나님의 용서/긍휼/자비를 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에서‘의롭다 함’을 받음에 있는 것은‘하나님의 용서/긍휼/자비’에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기도에서 보는 토색하지 않고, 불의를 행하지 않고, 간음을 하지 않고, 일주일에 두 차례 기도하고, 십일조를 철저하게 하는 등에 있는 그 모두를 행하는 것은 그가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당연한 것이며, 그것은 참으로 옳은 일을 하는 것이기에 잘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그의 이러한 옳은 행실로 자기 자신을 의롭게 함에 있는 것은‘자기 의’에 한정된 것으로, 이것으로 하나님으로부터‘의롭다 함’을 받음에 있지는 못합니다. 자기 의를 이루는 그 모두는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는 요인이요 조건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의로움의 가치는 그러한 것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음에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의 본성에 자리하고 있는 하나님에게서 떠나 있는 죄를 용서하시는 긍휼/자비를 입음으로써 입니다. 의롭다 함은 죄 용서와 같은 공식이요 또한 하나님의 긍휼/자비와 같은 공식입니다.
예수께서는“이 사람/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으로 내려갔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을 통해서 죄 많은‘세리’를 자기 의에 사로잡힌 바리새인보다 더 낫고 우월하게 보시며 강조하시고 있는 것이 아니라,“인자가 오실 때까지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은혜를 입기를 구함에 있는 의에 누가 있는 것이냐?”라고 하는 것에서“이 사람/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고”라고 세리를 가지고 말씀하시는 것에서 죄의 회개에 있게 하시며 그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긍휼/자비를 강조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결론은 이제 바리새인이나 세리의 특정한 사람이 아닌 제자들과 그리고 자신을 따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서 다음과 같이 내립니다.“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바리새인의 기도에서 보는 것처럼 자기 의를 자랑하며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높이는 자는 그들 자신이 하나님 나라에서 높은 자로 있을 것으로 속고 있는 것으로서 그들의 기대는 무너져 해를 입음이 심할 것입니다. 그들은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으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서 오는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감에 있지 못하고 그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영한 불못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사람들에게서 멸시를 받은 세리의 기도에서 보는 것처럼 자신의 죄와 그 비참함을 보며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예수 그리스도께 구함에 있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서 오는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음에 있음으로써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감에 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결론인“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는 교만하지 말 것을 말하며 겸손의 도리를 가르치는 교훈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을 통해서 누구든지 예수께 자기를 낮춰 복종하는 자는 후에 크게 높여 칭찬하고 영광의 자리를 내어주실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은“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은 이래야지!”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은 바리새인들이 거부하고 배척하는 예수님이 사람들을 천국에 들이는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이심을 말하며, 바리새인들이 거부하고 배척한 그 예수님이 사람들을 하나님의 나라에 들이시는 죄 용서의 긍휼/자비이심을 말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께 나아와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에 있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죄의 회개의 하나님의 자비를 구함을 하나님은 받으시고 그를 믿음에 의한 하나님의 의에 있는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그는 하나님에 의해서 의롭다 함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이후에 예수께서 자신에게 나아오는 어린아이들을 금하지 말게 하며 축복하신 것도, 그리고 한 부자 청년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하나님이 하시는 일임을 말씀해 주심을 통하여 그 이해를 가져나가게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서 남의 재산을 강제로 빼앗지 않고 불의를 행하지 않고 간음을 행하지 않고, 기도하고 헌금을 드리며, 이런 저런 경건에 있는 것은, 이것으로 자신이 옳게 행하며 의롭게 살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며, 이것으로 하나님께 칭찬을 받으며 영광과 상급을 얻기 위해서도 아니며, 또한 이것으로 구원에 합당한 생활의 기준으로 삼고 해나가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선을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우리 안에 계신 거룩한 하나님의 영의 소원을 따름에 있는 우리입니다. 우리가 그 모두에 있어도 우리가 붙들고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의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용서하여 구원하시는 자비를 바라보며 그 의존에 있습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구함에 있습니다.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구하기를,“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합니다. 여기서 가슴을 치는 행위는 자신이 이렇게 살고 저렇게 온갖 누림 속에서 살아도 인생의 종국은 죄와 그 비참함이 가져오는 파멸뿐임을 알기에 자신의 무가치에 대하여 강력하게 인식한데 따른 것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를 외치며 하나님의 자비를 구함은 하나님의 자비를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입고 나감에 있는 것에서입니다. 이 구함이 메마른 마음에 있는지요. 이 구함이 우리 목구멍 끝에 걸려 터져 나오지 않고 있는지요. 우리 안에서 성령의 소욕을 따름이 있는데 혹, 우리 육에서 나오는 갈망으로 강력하게 거스려지고 있어서가 아닌지요. 이 모두가 죽어져 나가는 현장이‘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말해지는‘그리스도 안에서’인 교회입니다. 우리에게서 죽어져 나간 그 품목을 날마다 일목요연하여 쭉 나열해 보시지요. 그러한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증거가 참으로 많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