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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가락 한 마디 >
간밤에 얼어서 / 손가락이 한 마디 / 머리를 긁다가 땅 위에 떨어진다
이 뼈 한 마디 살 한 점/ 옷깃을 찢어서 아깝게 싼다. / 하얀 붕대로 덧싸서 주머니에 넣어둔다.
날이 따스해지면/ 남산 어느 양지터를 가려서/ 깊이 깊이 땅 파고 묻어야겠다.
<보리피리>의 시인 한하운(韓何雲),
그는 ' 천형(天刑)'이라 불리는 문둥이 시인이었습니다.
천지 사방 떠돌이의 어느 찬 겨울 아침, 그는 무심코 머리를 긁다가 얼어서 땅에 떨어지는 손가락 한 마디를 봅니다.
비록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갔어도 분명한 내 뼈 내 살점, 햇볕 따슨 양지터에 묻을까, 울음 삼키며 옷깃을 찢어 쌉니다.
1월 27일,
소마미술관 전시장 들어가는 입구에 조각작품 <엄지손가락> 하나, 겨울의 꽁꽁 언 땅 속을 뚫고 솟아 꼿꼿이 섰습니다.
씨앗인양 땅 속에 묻고 손바닥 두드려 떠나 보낸 시인의 손가락이 이 날 홀연 땅을 뚫고 솟아오른 양, 충격적입니다.
가로 3.6 m 세로 2.7 m 높이 6 m 크기의 청동으로 만든 작품.
" 현실을 논쟁하지 않고 그대로 기록한다."는 표어를 내건 누보 레알리즘(Nouveau Realism)의 대표적 조각가,
프랑스의 세자르 발다니치의 연작, <엄지손가락>의 일곱 작품 중 한 작품입니다.
* 라데팡스에 전시된 높이 12m의 <엄지손가락> - 세자르 자신의 손가락을 형상화했다.
엄지 손가락 하나가 내 몸에서 차지하는 분량은 얼마일까요 ?
백분의 일, 아니면 천분, 만분, 십만 분의 일 ? ,
손가락을 내려다 보며 다시 내 몸과 비교해 보면 아이들 쓰는 말 그대로 "게임이 안 돼 !" 입니다.^^^
그러나 여기 신체의 극히 작은 그런 손가락이 6m의 높이와 크기와 부피로 우리들을 압도하며 우뚝 서 있습니다.
얼마나 큰지 주름살 하나하나가 이 산 저 산 깊게 파인 산골짜기 같고, 손톱에는 하얀 초승달 실날만큼도 없습니다.
세자르는 파리에서 8Km 떨어진 신도시 라데팡스에 높이가 12m나 되는 큰 엄지손가락도 만들어 세웠습니다.
사람들은 산처럼 거대한 이 엄지손가락을 보며 생각에 빠집니다.
" 왜 세자르는 엄지 손가락 하나를 이렇게 크게 확대했을까 ? "
정답의 실마리가 나왔습니다.
평소 누구도 찬찬히 들여다보지 않았던 엄지손가락을 이렇게 크게 확대했을 때에야 사람들은 놀란 눈으로 외계에서 온
우주인 바라보듯 큰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 보게 됩니다.
이 때 사람들이 손가락을 바라보며 떠올리는 생각들은 손가락의 일반적인 사전적 의미가 아니라,
바라보는 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 각자 다르게 부여한 의미, '오브제'[ objet] 로 바뀌게 됩니다.
부연하자면, 왜 확대했을까 묻지 말고, 손가락을 보며 느끼는 생각에 의미를 가져달라는 작가의 주문입니다.
한하운 시인이 옷깃을 찢어 아깝게 싼 <'손가락 한마디>도 '그냥 손가락'이 아닌, '절규와 애착'의 다른 이름입니다.
사이먼 샤마가 말한 " 예술은 아름다움의 구현을 넘어 익숙함을 파괴하려 한다."와 같은 맥락입니다.
* 팽창작품
* 압축기법을 사용해 만든 작품들과, <세자르영화제>의 트로피에 입 맞추는 캐나다 여배우 샬롯 르 본.
세자르는 엄지손가락 말고도 브리지트 바르도 같은 여배우의 유방을 직경 5.4m 높이 2.4m로 사실적으로 확대하여
작품을 만들었고 - 그래서 "세자르 영화제"의 상패는 자동차를 압축한 세자르의 작품을 모델로 하여 만들었습니다-,
또 손 하나를 확대 조각하여 모래 위에 전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947년 시도한 세자르의 초기작품은 동판이나 철사 같은 금속을 소재로 한 추상조각에서 시작,
고철을 재료로 곤충이나 새를 조각하였습니다.
1957년부터 냄비와 통조림통을 압축한 작품을 선 보이던 그는,
60년대 들어 폐차장에서 발견한 압축기와 찌그러진 자동차에 착안하여 좁은 공간 안에 최대한의 폐차를 압축해 보여
주는 경향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엄지손가락> <유방> <손> 처럼 실물을 확대하여 보여주는 기법에서,
폴리우레탄을 흘려 부풀려 만든 전위적인 작품들도 잇달아 전시하여,
" 익숙함이라는 일상적 생각을 끊어낼 때만 새로운 가치가 보인다."는 오브제의 제작 의도를 이어 왔습니다.
압축과 팽창, 확대와 축소라는 수법은 얼핏 보면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왜 ? 라는 관점에서 보면,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당겨 의미를 부여하는 오브제의 수법에서는 동일한 것입니다.
* <세자르영화제> 기념 우표
구덩이를 파고 시체들을 쓰레기처럼 묻어버리듯,
좁은 공간 안에 찌그러져 눌린 폐차 압축 연작물를 보면 현대 산업사회의 소비 행태를 증언하는 비판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1995년 전시했던 《520 t》이라는 작품은 제목 그대로 수백 대의 폐차를 압축해 만들었는데 작품의 무게만 무려 520톤,
그의 기념비적인 작품입니다.
세자르는 고철을 현대사회의 진정한 채석장으로 규정하고 자동차, 냉장고, 세탁기, 컴퓨터 등 다양한 고철들을 용접하거나
압축하는 방법으로 현대소비사회의 단면을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신사실주의의 대표적 조각가입니다.
세자르의 주문대로 <엄지 손가락>을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먼저 주름살, 오랜 세월 온갖 풍상을 겪으며 견뎌온 흔적이 전쟁터에서 얻은 상처처럼 일그러져 있습니다.
갈라지고 찢겨지고 부풀어 오른 저 손가락은 '투쟁의 시대'를 살아가는 주인공의 승리와 패배를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손톱, 하얀 반달 무늬 실마리조차 없으니 삶의 무게에 짓눌려 허덕이며 살아온 고통의 또다른 징표입니다.
그러나 저 손가락의 엄청난 크기를 보십시오.
손가락 하나가 저 정도 크기라면, 손가락의 주인은 도대체 얼마나 큰 거인일까요 ?
거인이 저 큰 손으로 만들어낸 역사와 문화와 철학과 예술은 또 얼마나 상상을 초월하는위대한 산물일까요 ?
손가락을 덮고 있는 황금빛 도색도 예사로워 보이지 않습니다.
산전수전 다 겪어 이겨낸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황금 트로피처럼, 승자에게 주는 신의 영광의 색상입니다.
<엄지손가락>은 위대한 인류 문명을 창조하며 살아온 우리들, 인간에게 바치는 세자르의 찬사[讚辭]입니다.
여기 소마미술관 앞에 서 있는 <엄지손가락>도 88올림픽 당시 세자르가 두 번이나 위암 수술로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며
완성한 작품이기에 , 그의 예술 투혼[鬪魂]은 그로부터 10년 후인 1998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올곧차게 이어졌습니다.
<엄지손가락>이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위대한 인간" 답게 당신은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는가 ?
우주에서 '넘버원' 인 당신은 이 아름다운 지구를 지키기 위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
<엄지손가락>은 우리들이 살아가야 할 방향을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는 삶의 이정표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