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와 성도의 차이
1. 사울이라는 죄인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빚어진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지신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2. 박윤진이라는 죄인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성도로 부르셨습니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빚어진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지신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1.과 2.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만, [성도 박윤진]은 성경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는 [성도]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럼 왜 똑 같은 예수님의 창조물임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사도 바울과 성도 박윤진을 차별 대우 하실까요?
그 이유는 의외로 간단합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께서는 바울을 사도로 부르시기로 작정하셨고, 박윤진을 성도로 부르시기로 작정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계시로 사용하시기로 결정하셨고, 박윤진은 계시로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제 박윤진은 “왜요???”라고 씩씩거리면서 반문할 차례인가요? 아닙니다! 계시가 아닌 박윤진의 글과 말과 삶은 죄라는 쓰레기 봉투에 담기면 족합니다. 이제 해야 할 차례는 주님께서 계시로 사용하시기로 결정하신 사도 바울의 기록을 주의 깊게 살펴보는 일입니다. 계시가 아닌 것을 가지고 논쟁하면 기준이 없기에 소경이 소경을 안내하는 꼴이 되고 맙니다.
사도바울의 주장은 어떤 내용입니까?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이 하나님이시고, 십자가 사건만이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이며, 내가 전한 이 복음 말고 다른 복음을 전하면 나를 포함한 그 어느 누구도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과 저주의 기준을 계시할 목적으로 사도 바울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것이 유일한 의인이신 주님께서 의의 종인 바울에게 독점적으로 맡기신 명령입니다. 이것을 [사도권]이라고 합니다. 사도권(성)의 독점성으로 말미암아 성경계시는 종결성과 통일성을 가지게 됩니다. 사도 아닌 자는 성경을 기록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계 22:18~19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그렇다면 성경계시의 종결(완성)은 왜 이루어져야 할까요? 다시 말해 계시된 [성도]를 채울 실존의 이름(박윤진)은 왜 계시되지 않을까요? 그 이유는 그 안을 채울 수 있는 자격있는 실존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능력이 십자가라고 든든히 세워진 이상 그 안을 비집고 들어갈 수 인간은 아무도 없다는 뜻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만 그 안이 가득 찰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기준을 체험한 죄인의 고백은 사도들의 고백으로 이미 완료되어 종결되어야만 하는 것이죠.
이제 기준은 분명해 졌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그 기준에 의해 책망받을 대상으로 기능하면 그만인 것입니다. 성도라는 핑계로 또 다른 기준을 만들어 낸다면 곧장 다른 복음이 되도록 조치한 것입니다.
갈 1: 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즉, 십자가 안에서의 모든 존재의 모든 행위는 죄로 확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죄로 확정될 수 밖에 없는 인간에게 자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신 분만이 바로 사랑인 것이 확증되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성도 영역에 들어갈 수 있는 기준을 사도성과 바울 등의 실존적 고백을 통해 십자가로 확정하는 유일한 계시가 바로 성경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라는 그물에 걸린 박윤진이 과연 성도인지 아닌 지는 성경에 계시된 십자가를 기준으로 밝혀지는 것이지 박윤진의 삶이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성도]라는 부르심만 계시되어 있는 것은 [성도]라는 이름을 어떤 인간도 소유할 수 없도록 하려는 취지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누구든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불러주신다면 말입니다. 반대로 예수님께서 부르지 않으신다면 그 어떤 육체도 성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라면 이렇게 살아야 한다]라는 주장은 그가 처음 왜 성도라는 영역으로 불려 들어왔는가라는 기준을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성도라는 영역, 즉 [예수 그리스도 안]이라는 고정된 틀은 이미 사도들의 고백과 기준으로 종결, 확정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 확정된 내용인 그리스도 예수와 그의 십자가 지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안에 어떤 사람이 담겨있지만, 그 사람은 늘 그 기준에 의해 성령에게 책망받고 그 책망에 의해 십자가가 밝히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막 살 수 없음을 고백할 수 있는 지 여부가 기준이 될 수 없는 것이죠.
“왜요? 너무 감사하고 너무 기뻐서 보답하려고 하는데요?”
그런 노림수가 차단되어 있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죽음의 영역입니다. 그 어떤 육체도 살아남아 주님에게 돌려드릴 수 없습니다.
욥기 41: 11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갚게 하였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그 돌려드린다는 행위가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다 알고 계신 예수님이십니다.
요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예수 안에서는 내가 죄의 종이었고 - 환언하면, 그 땐 죄의 종이었다는 사실 자체를 알지 못했다 - 내가 마귀의 자식이며, 회칠 한 무덤이요, 말하는 것 마다 거짓말이요, 행하는 것마다 하나님을 저주하는 것이었다는 증거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라는 기준이 단번에 영원히 지속된다면, 그 속에 담긴 죄인의 양상 또한 영원히 지속된다는 의미입니다. 죄를 벗고 의 쪽으로 옮겨간다는 의미는 죄를 용서하신 피로 옮겨간다는 의미입니다. 그토록 지독한 죄를 용서하신 더 지독한 예수 그리스도의 피사랑이 우주의 중심으로 영원히 지속되는 것입니다.
우주의 중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사랑이신 하나님이었음을 증거할 용도로 만들어진 [성도]에게 다른 죄인의 별도이름인 박윤진 따위는 필요없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담겨있으니 그 이름도 그냥 예수만 남게 됩니다.
성도 안에 담긴 그 누군가가 의미없다는 말이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머리되신 예수님에 의해 사랑받는 지체로 되어버린 그 사람이 누구인가가 복음의 초점이 아니라, 그 마귀 새끼마저 자신의 몸에 이식시키신 그 분이 누구신가가 복음의 초점입니다. 도대체 누구시길래 나 같은 죄인까지 사랑하셨는가? 그냥 말로 사랑한다고 하기에도 역겨운 나를, 내가 판단해도 지옥이 딱 어울리는 나를 자신의 살과 피로 먹이시면서 까지 한 몸으로 섞어주신 그 분의 이름이 무엇이지? 그 분이 행하신 일이 무엇이지? 이런 물음들이 계속 됩니다. 영원히.
그림을 한 번 그려 보겠습니다.
계시된 것은 (1), (2), (3)입니다. 계시되지 않은 (4)가 나도 (3)에 들어있다고 주장할 수 있겠죠? 이 때 성도 맞는지 아닌지 기준 역할을 하는 것이 (1), (2)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들이 적은 기록은 보면 (1)의 입장과 (2)의 입장이 십자가라는 기준에 의해 자유롭게 편재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바울 서신이 그렇지요. (1)의 영역에서 튀어나오는 고백 역시 (2) 부르심, 그러니까 크게 보면 예수 안이라는 그 기준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바울 서신 중에 (1)의 대표적인 고백들이 바로 다음의 경우입니다.
고전 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갈 1: 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고후 5: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위 고백 중 [우리]라는 용어가 등장합니다. (1)과 (4)를 우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계시된 (1)은 계시되지 않은 (4)를 담대히 우리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근거가 바로 예수 안으로의 부르심, 즉 십자가인 것입니다. (1)의 고백과 증언이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2)의 영역은 성경 계시의 종결성을 부여하기 위한 것이고 그래서 (4)는 아무리 무슨 짓을 해도 계시가 안됩니다. 계시에 의해 책망받는 역할입니다.
(3)의 영역은 오직 머리되신 분을 증거하기 위한 용도입니다. 그 증거가 복음이냐 다른 복음이냐는 계시인 (1)과 (2)에 의해 결정됩니다. (1), (2) 역시 예수 안이므로 모두 십자가 안으로 소급되어 버립니다. (3), (4)도 역시 예수 안이므로 모두 십자가 안으로 소급되어 버립니다.
그림 완성!
첫댓글 그림이 강렬합니다.
바울과 박윤진의 차이가 잘 그려졌어요.
성도는 실험용 쥐에 불과하네요.
죄를 드러내기 위한 실험쥐
전혀 중요하지 않은 죄인된 성도라고 하면 스스로 존귀한 존재라고 믿는 분들에겐 충분히 반감과 몰이해할 수밖에 없겠지만
성경에 보면 분명히 실험용 쥐에 불과해요.
아멘!
계시되지 않은 나의 삶은 모두 죄...
주여! 이 죄인을 떠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