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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 무리들의 예언과 사울왕의 예언은 선지자의 예언으로 있었던 것인가?
사무엘상 19장 18-24절 / 18다윗이 도피하여 라마로 가서 사무엘에게로 나아가서 사울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다 전하였고 다윗과 사무엘이 나욧으로 가서 살았더라 19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전하여 이르되 다윗이 라마 나욧에 있더이다 하매 20사울이 다윗을 잡으러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이 선지자 무리가 예언하는 것과 사무엘이 그들의 수령으로 선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의 영이 사울의 전령들에게 임하매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21어떤 사람이 그것을 사울에게 알리매 사울이 다른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도 예언을 했으므로 사울이 세 번째 다시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22이에 사울도 라마로 가서 세구에 있는 큰 우물에 도착하여 물어 이르되 사무엘과 다윗이 어디 있느냐 어떤 사람이 이르되 라마 나욧에 있나이다 23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가니라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도 임하시니 그가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걸어가며 예언을 하였으며 24그가 또 그의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하루 밤낮을 벗은 몸으로 누웠더라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하니라
우리가 읽은 본문 20절인“선지자의 무리가 예언하는 것과 사무엘이 그들의 수령으로 선 것을 볼 때에”란 문구에서 보는‘선지자의 무리’와 이들이 하였다는‘예언’, 그리고 역시 20절과 21절에서 사울왕의 전령들도 하나님의 영이 임하므로 예언하였으며, 23절, 24절에서는 하나님의 영이 사울왕에게도 임하시니 그도 예언하였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라는 말이 사람들 입에서 오르내렸다는 것에서 보는 (사울왕의 전령들과)사울왕은 선지자와 같은 사람, 곧 선지자의 직임을 수행하는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이들이 한 예언은 선지자가 하는 예언인‘선지자의 예언’인지를 설명하고, 이렇게 하는 것을 통해서‘선지자’와 ‘선지자가 하는 예언’이 어떤 것인지를 알도록 하고자 합니다.
본문에서 보는‘선지자의 무리’란 말은 사무엘상 10장 5절에서 처음 등장하며, 10절에서도 언급됩니다. 그리고 열왕기하 2장에서는 지금의 개역개정한글성경에서는‘선지자의 제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개역한글성경에서는‘선지자의 생도’(3, 5, 7, 15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선지자의 무리’가 또한‘선지자의 제자들’,‘선지자의 생도’라고 번역되고 있음으로써 이들은 성경에서 말씀해 주시는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이 세우신‘선지자의 제자들’이요‘선지자 학교의 생도’라고 하는 인식과 그로 인한 이해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선지자 사무엘 때부터 선지자 사무엘에 의해서‘선지자의 학교’가 창설되고, 이후‘선지자의 학교’가 운영되어 와 선지자에 의해서 선지자의 교육과 훈련이 행해져 선지자들이 양성되어온 것으로 말해지고 있습니다.
과연 선지자의 제자들이 선지자 사무엘 때부터 선지자 사무엘에 의해서 존재하면서 선지자의 학교가 창설되어 선지자의 교육과 훈련이 행해지며 선지자들이 양성되어온 것일까요? 그래서 그렇게 양성된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이며, 선지자로 활동하며 선지자의 사역에 있어온 것일까요? 그래서 이들이 예언하였다는 것은 선지자의 예언을 하는 것이었을까요?
선지자란 직임은 선지자 학교를 세우고 오늘날의 학교에서 볼 수 있듯이 학교에서 계획하고 운영하는 교과과정에 의해서 배출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닙니다. 선지자는 교육과 훈련을 통해서 선지자 자질이 검증되고 양성되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기 백성의 구원을 행해 나가시기 위한 계획에 의해서 선택하여 부르시고 그에 대한 인정의 표로 기름 부어 세움으로서 그에게 하나님의 뜻을 예언으로 주셔서 선지자 직임을 수행해 나가시게 하시는 자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상 10장에서는 하나님에 의해서 선지자로 세움을 받은 자들이 아닌‘선지자의 무리’라고 불리는 자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의 등장은 사울이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곧 이스라엘의 초대왕으로 등극하는 것과 관련해서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무엘은 선지자이며 또한 사사였습니다. 이런 사무엘이 살아 있는 동안의 이스라엘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을 통해서 평화의 시대를 살았었습니다. 그런 사무엘이 나이 많아 노쇠하여 사사의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두 아들을 자신을 대신하는 사사로 세워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큰 아들의 이름은 요엘이고 작은 아들의 이름은 아비야였습니다. 그들은 유다 남부의 브엘세바에서 사사의 직책을 수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두 아들은 사무엘이 행하여 온 사사의 활동을 따르지 않고 부정하고 부패한 사사로 남았습니다. 두 아들은 사사의 직책을 악용하여 뇌물을 받는 등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 축적을 하였으며, 불의한 재판을 하면서 법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사무엘과 함께 하시며 그에게 선지자요 사사로 활동하는 내내 하나님의 의를 행사하게 하신 동안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의에 사로잡혀 하나님에게 순종하여 나가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음에 있게 하였으나, 사무엘의 두 아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의를 나타내심이 없었으므로 그들이 사사로 활동하는 내내 그들은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통치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육체의 욕망을 따라 자신들이 탐하는 부정한 이익을 쌓아가는 것에 사사의 직책을 악용할 뿐이었습니다.
이처럼 사무엘의 두 아들이 이처럼 부정하고 부패한 사사로 있은 것은 사무엘이 더 이상 사사의 활동을 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의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사하지 않는 것과 관련하여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드러내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사무엘의 두 아들의 사사의 활동에서 의로우신 하나님의 통치가 없음으로 하나님의 의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사되지 않고 있음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음이 없이 자신들 마음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그것으로 있는 것이 사무엘의 늙어 사사의 활동을 할 수 없음과 함께 그를 대신하여 사사로 세운 그의 두 아들의 부정과 부패에 극도로 불만과 불평을 드러내어 사사를 거부하고 이방국가에서 보는 왕을 요구하며 왕의 통치를 받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의로우신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나섰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이 원하는 대로 왕을 세우게 하면서, 이방국가에서 보는 왕을 세우는 것이 그들에게서 어떤 것인지를 사무엘을 통해서 알게 해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왕을 요구하는 것은 사사를 거부하는 것인데, 그것은 사무엘을 버리는 것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버리는 것으로 더 이상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려 하지 않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데리고 나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을 차지하여 하나님이 주신 복을 따라 그 은택으로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들을 찾아다녔다고 말씀합니다. 그럼에도 의로우신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며 사무엘의 사사 활동에서 의를 그들에게 공평하게 행사하여 평화로운 세계를 누리게 하셨는데, 그러한 그들은 이제 하나님을 버린 것처럼 또한 하나님이 세우신 사사 사무엘에게도 똑같이 행동하여 사사를 거부하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이 소원하는 대로 그대로 들어주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었을 때 그것이 그들에게 어떤 일이 되는 것인지를 알게 해 줍니다. 그들이 왕을 세우고 그를 통해서 통치를 받음으로 인해 그들은 그 왕이 행사하는데 따르는 온갖 병폐를 겪게 될 것이니 왕은 백성을 다스리는 특권으로 권세를 행사하여 백성을 압제하여 고통을 겪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구하는 대로 왕을 세울 경우 그 왕은 그들의 아들들을 착출하여 노역을 시킬 것이며, 왕이 필요로 하는 곳에 두고 부려 먹을 것이고, 군대에 동원할 것이며, 딸들도 데려가서는 왕궁에서 왕을 위하여 요리를 하고 떡을 굽게 하고 옷을 만들게 하는 등 온갖 일을 시킬 것이고, 백성이 지은 농사에서 가장 좋은 것을 세금으로 거두어다가 신하들에게 나누어 그들의 배를 채울 것이며, 가장 좋은 가축들을 착출하고 부려 먹고 세로 받아고 남종과 여종도 빼앗을 것이어서 결국은 백성이 소유한 모든 것은 왕의 소유가 되고 그들 자신마저 왕의 종이 될 것이니 그렇게 당하는 날이 오면 지금 자신들이 요구하여 원하는 왕 때문에 하나님께 호소하여 부르짖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알려 주시는데도 이를 무시하고 왕을 세워달라며 그 왕이 자신들을 불의와 전쟁으로부터 보호해 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삼상 8:4-20).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요구하는 왕으로서 이스라엘에 왕으로 세워지는 첫 번째 사람이 베냐민 지파 기스의 아들인 사울입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사무엘을 통해서 사울을 선정하여 이스라엘 백성 앞에 왕으로 세우게 하면서 그가 블레셋 족속의 압박으로부터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는 왕이 될 것임을 사울에게 알게 하는 징조로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아 길을 나선 사울이 라헬의 무덤 근처에 있는 큰 바위 그늘에서 쉬고 있는 두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그들이 사울에게 아버지가 아들 사울을 걱정한다는 소식을 전해줄 것이며, 길을 더 나아가서는 벧엘의 성소로 올라가는 세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니 그들이 사울에게 반가운 인사를 하면서 떡 두덩이를 줄 것이고, 길을 더 나아가 기브아에서는 여호와이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곳으로 삼고 있는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고 비파와 소고와 저와 수금을 타면서 내려오는 선지자의 무리와 마주칠 것인데 그들은 춤을 추며 예언할 것인데 이때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도 임하여 사울도 그들과 똑같이 춤을 추고 예언할 것이니, 이 모든 징조를 겪거든 이 일이 하나님께서 사울과 함께 하는 것에서 있는 일이라고 하는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과연 사울은 사무엘이 말한 그대로 겪습니다. 그래서 사울에게 있었던 일이 사울이 선지자의 무리들과 똑같이 춤추며 예언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로“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라는 속담이 백성들 입에서 회자되었습니다(삼상 10:1-12).
그런데 이렇게 사울이 선지자들의 무리 속에서 그들과 함께 춤을 추며 예언하는 일은 이후에 또 한번 있었습니다. 그것이 본문 마지막에 이르는 구절인 23-24절에서 보는 것입니다. 이때는 사울이 왕으로 등극한 이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블레셋 족속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지켜 가시는 것에서 블레셋에 빼앗긴 땅을 회복하고 전쟁에서 승리하여 나가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 이스라엘에게 약속으로 주신 지경을 넓혀 가시는 것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진행을 가로막을 뿐 아니라 추수 때는 농경지에 침입하여 추수물을 약탈해 가는 아말렉과의 전쟁을 치르게 하여 진멸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울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아말렉 족속과의 전쟁에서 아각왕을 살려주고 소 떼와 양 떼 중에서 살찌고 기름진 짐승들은 남겨 두고 단지 여위고 보잘 것 없는 짐승만 죽였습니다. 사울왕의 이러한 행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탐심을 따라 행동하는 것에서입니다(삼상 13:-16:23). 이는 말이죠. 이스라엘 백성이 요구하는 왕이 하나님에게 마음을 두지 않고 하나님에게서 떠나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머리로 있는 것에 따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요구한 왕이 어떤 것인지를 사울왕을 통해 여실히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은 기름진 제물로 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을 원하나 의로우신 하나님의 통치에서 떠나 있고 사람을 왕으로 세워 통치를 받고자 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이 원하는 왕에서 보는 것은 의가 없는 왕의 탐심뿐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기에 이 사실을 분명히 하신 하나님은 사울이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는 왕이 될 수 없다며 그를 버리실 것을 여러 차례 나타내셨습니다(삼상 16:24-35). 이러한 사울왕은 이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의 등장에 긴장하게 되며 다윗과 갈등 구조를 띠고 호시탐탐 다윗을 죽일 기회를 가지려고 하게 됩니다(삼상 15:-19:17). 그리고 본문에서 사울왕은 다윗이 사무엘에게 피신해 있는 정보를 입수하고서는 군사를 보내 다윗을 체포해 오도록 하였습니다. 그 사무엘이 있는 곳에서 사울왕이 보낸 군사들이 본 것이하나님의 영이 임한‘선지자의 무리들’이 춤을 추며 예언하고 있는 광경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광경을 목격하고 있는 중에 자신들도 하나님의 영이 임하므로 그들과 똑같이 춤을 추고 예언하였습니다. 이런 군사들은 다윗을 체포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다윗을 체포할 생각을 갖지 않고 선지자의 무리 속에서 그들과 같이 춤을 추며 예언한다는 보고를 받은 사울왕은 거듭하여 군사를 보냈지만 그들 또한 같은 상태에 처함으로 다윗을 여전히 체포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사울왕이 직접 나서 다윗을 체포하고자 다윗이 피신해 있는 라마의 사무엘 집으로 쳐들어 왔습니다. 사울이 이렇게 라마의 사무엘 집으로 가는 중에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 임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에서 예언을 하며 사무엘 앞에 이르렀습니다. 그렇게 사무엘 앞에 이른 그는 왕복을 벗어 던지고는 춤을 추며 예언하기를 계속하였습니다. 이런 그를 보고 사람들은“사울이 선지자 중에 있느냐”라는 말을 주고받음으로써 앞서 사무엘상 10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사람들 입에 회자되는 속담이 되었습니다.
사무엘상 10장과 19장에서 보는 선지자의 무리들과 사울왕이 춤을 추면서 한 예언은 선지자의 예언일까요? 과연 이들은 하나님의 예언을 하는 선지자로서 말해질 수 있는 사람들인지요.
선지자의 무리가 처음 언급되며 등장하는 것은 사사로 활동한 선지자 사무엘 때입니다. 사무엘이 있던 라마에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이들은 사무엘의 지도 아래 공동체 생활을 하였으므로‘선지자의 무리’, 곧‘선지자의 한 무리’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선지자 사무엘이 그들을 통해서 선지자의 학교를 세웠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이들은 말입니다. 당시 사울이 이스라엘 왕으로 등극하는 것과 관련해서 선지자의 무리가 처음 언급되고 있는데, 이들이 선지자의 제자들을 의미하는 것에서 선지자의 생도들이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에게로 모여들어 선지자가 하는 예언을 들으며 이 예언에서 하나님이 알게 하여 주고자 하는 뜻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가르치는 것을 듣기 위하여 무리를 이루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개역한글 및 개역개정한글 성경은 이 선지자의 무리들을 열왕기하 2장에 이르러서는 선지자의 제자들, 또는 선지자 생도로 번역함으로써 마치 선지자를 통해서 교육과 훈련을 받으며 장차 선지자로 활동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양성하는 선지자의 제자<생도/학생>라는 잘못된 이해를 갖게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는 대개의 경우는 이 선지자의 제자<생도>를 배출하는 선지자 학교가 세워졌다고 보며, 그 수령<지도자>가 선지자 사무엘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즉, 선지자 사무엘이 선지자 학교의 창설자라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에 따라서 신학교에서나 교회에서 교회 직분자들을 교육하는 자리에서는 공공연히 선지자의 학교와 여기에서 양성되는 선지자의 생도가 있었음을 이야기 하면서 선지자의 생도로서 어떻게 양성되어 배출되며 또한 선지자의 사명을 갖고서 활동해야 할 것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선지자의 무리가 처음 등장하는 사무엘상 10장에서는 앞서에 설명한 바와 같이 이들이 그렇게 선지자가 되기 위하여 선지자의 제자로 있는 것에서 언급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사사를 거부하고 이방국가에서 보는 왕을 세워줄 것을 요구하는 그대로 들어줄 것을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지시하고, 그 왕으로 세울 자로서 기스의 아들 사울이 선택되었으며, 이를 사울이 알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대로 따르도록 하게 하기 위하여 그에게 징조를 주시는 것에서 선지자의 무리들을 등장시키며 그들로 예언을 하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무엘상 19장에서는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세움을 받은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좋아하지 않고 하나님을 따르지 않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인 다윗이 등장하며 갈등과 대립 구도에 있는 것에서 사울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게 되는데, 그 기회를 포착한 사울왕이 다윗을 체포하고자 군사를 보내 다윗이 피신하여 있는 선지자 사무엘이 있던 라마의 나욧에 왔을 때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생명을 보호하고 보존하시는 것에서 선지자의 무리들을 등장시키며 그들로 예언하게 하고 이러한 모습을 사울의 군사들이 목격할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영이 임하므로 예언하는 상태에 있으므로 다윗을 체포하지 못하게 되는 광경에서 말해지고 있습니다. 사울의 군사들이 본 것은 선지자의 무리들이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서 그들의 의식과 의지와는 상관없이 춤을 추며 예언하고 있는 것이었으며, 그 광경을 보는 군사들에게도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같은 상태에 처해지는 것에서 그들 또한 춤을 추며 예언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울이 이 소식을 듣고는 다른 군사를 보냈으나, 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사울이 직접 다윗을 잡으러 선지자 사무엘이 있는 곳으로 갔으며, 가는 길 도중에 사울 또한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예언하는 것에 몰입되어 있었으며, 라마에 도착하여서는 옷까지 벗고1) 춤을 추며 예언하였습니다. 여기서의 사울이 한‘예언’은 선지자들이 예언하는 하나님의 계시의 성격에서 예언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사울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 하나님의 영의 힘에 의해 말하였다는 것에서입니다. 그러니까 사울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하루 종일 밤낮으로 춤을 추며 하나님의 영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함에 빠져있는 몰입의 상태에서 무언가 끊임없이 말함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사울이 보낸 군사와 그 자신마저 선지자의 무리와 함께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힘에 있게 하여 하루 종일 하나님의 영의 권능에 의해서 예언에 있게 하여 나중에는 기력이 쇠하여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을 정도의 상태에 있게 하여 지쳐 쓰러져 있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사울의 손길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피신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선지자 사무엘 시대에 사무엘 주위로 모여든 사람들에 의해서 불려진 선지자의 한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에 의해서 선지 생도들이 배출되는 선지자 학교가 창설되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2) 선지자의 제자들이 언급되고 있는 곳은 구약성경에서 모두 13곳인데 사무엘상에서 4번, 열왕기하에서 9번 등장합니다.3)
이 선지자의 무리들이 한 예언, 그리고 (사울왕의 전령들과)사울왕이 한 예언이 하나님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되어졌다는 것에서 선지자 무리의 예언, 사울왕의 예언이라고 부릅니다만, 이 예언들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로 세우신‘선지자 예언’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사울왕의 예언을 두고서 저들끼리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라고 말하였던가요?
“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가니라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도 임하시니 그가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걸어가며 예언을 하였으며, 그가 또 그의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하루 밤낮을 벗은 몸으로 누웠더라.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하니라.”(삼상 19:23-24)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사울왕이 하는 예언을 두고“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라고 말한 것은 존귀히 여기며 진지함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사울왕이 하는 예언을 가지고 조롱하여 비웃는 말에서 하는 것이었습니다.“사울왕이 언제부터 선지자의 무리들과 한패였느냐? 사울왕이 과연 선지자이기는 한 것이냐?”라고 말입니다.
선지자의 무리들이 한 예언, 그리고 사울왕이 한 예언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어떤 일을 행하시는 의도에 의해서 하나님의 영에 강하게 사로잡힌 상태에서 무언가 끊임없이 말함에 있었다고 하는 것에서 이지 그들이 하는 예언이 선지자 사무엘에게 있었던 예언을 비롯하여서 하나님의 선지자에 의해서 예언되어온 메시야 증거에 있은 하나님의 예언은 아닙니다. 그러니 말입니다. 선지자 무리가 예언에 있었으며, 그리고 사울왕이 예언에 있었던 예언과 선지자 사무엘을 비롯하여서 하나님의 선지자가 예언한 예언과는 구분하여야 하며 그 차이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선지자 무리가 한 예언과 사울왕이 한 예언을 하나님의 선지자가 예언한 예언과 동일시하여 같은 예언의 성격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에 소위 예언하는 은사를 받았다며 예언한다고 하는 자들이 있는 것을 곳곳에서 봅니다만, 이들이 성경 구절을 사용해 가면서 이런 저런 말들을 쏟아내는 것은 하나님의 예언이 아닙니다. 단지 그들이 말하는 예언을 듣고자 하는 자들을 미혹케 하는 말들을 하고 있는 것이죠. 그들이 말하는 예언은 성경구절을 사용하여 주술을 하고 주문으로 사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하는 것을 통해서 실상은 예언을 받는 자들로부터 돈을 뜯어내어 부정한 탐욕을 취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서 선지자의 예언은‘예언자’라고 자칭하는 어느 특정한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임하여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신앙고백하게 하심에 따라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들의 주님이 되신 이후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모두가 사람들이 도무지 알 수 없었던 하나님의 예언에 있는 비밀스런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됨에 따라 그것을 복음으로 전하는 자들에게서 말해지고 있는 것이 성령의 말하게 하심으로 있는 예언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이 예언을 말함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의 은사로 행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을 증거하는 것에서 예언을 말함에 있는 것은 개인별로 지니는 은사가 아닌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받은 교회적 은사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루고 있는 성도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서 예언이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지닌 구원의 능력을 알며 그 믿음에 있는 그리스도인 모두에게서 예언이 말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지자가 예언하여 전한 그 예언을 말함에 있습니다. 확인 차 묻고 대답을 드리지요. 어떻게 말인지요. 우리에게 임하여 함께 하시는 성령께서 말하게 하심을 따라 증거하는 것에서입니다. 그래서 세상 앞에서 성령이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나타내 알게 함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큰 일에 대하여 입을 다물게 합니다. 선지자가 행하여 온 성령이 하시는 사역을 나타내는 직임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하여 그 교회의 몸을 이루고 있는 성도에 의해서 계속되어 세상 끝날까지 지속되어 갑니다. 그래서 마침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십니다. 그것이 마태복음 28장 마지막 부분인 19-20절에서 말씀해 주신 주님의 대분부(대위임명령)입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리고 이를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을 보내셨으며,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증인된 우리들은 사도들이 말하여 온 바에 따라 그대로 말하기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행 2:28, 38-40)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교회가 자신과 함께 하여 오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누려온 은택을 말함에 있는 친밀한 복음의 교제에서 예언의 은사는 참으로 풍성합니다. 우리가 이 은혜를 베푸시는 주님을 어찌 찬양하지 않겠는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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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울 왕이 ‘옷을 벗고…벗은 몸으로’ 선지자 사무엘 앞에서 예언하였다는 것에 대해서 한글성경 중 일부는 ‘옷을 벗어던지고…알몸으로’(공동번역)라고 번역한다. 이와 같은 ‘알몸’의 상태인 ‘벌거 벗은 채(몸)’란 번역의 입장을 취한 한글번역성경은 현대어성경, 이 있다. 반면에 우리말성경은 ‘옷을 벗어 던지고…벗은 채로’라고 완곡하게 표현하고 있으며, 바른성경, 한글킹제임스, 새번역, 표준새번역, 킹제임스흠정역(개정)이 같은 번역의 입장을 취한다. 이는 여기의 ‘옷을 벗었다’와 ‘벗은 몸’이 반드시 ‘벌거 벗은 몸’의 나체로 있었다는 것이 아니고 단지 윗옷으로 입고 있는 겉옷을 벗었으며, 그래서 (겉)옷을 벗은 상태에 있었다는, 곧 속옷은 입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점도 유의해야 하기 때문이다. C. F. Keil & F. Delitzsch,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Vol. 11. 『카일․델리취 구약주석⑧: 사무엘(상)』, 최성도 역,(서울: 기독교문사, 1983), 219. 옷을 벗고 벗은 채로 있었다는 것이 어떤 것으로서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든지 간에 사울 왕이 이처럼 왕복(王服)의 옷을 벗은 상태에서 바깥세상과 차단된 환상의 상태에서 예언하고 있었다는 것은 선지자의 무리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영에 이끌려 그 또한 동일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고 있는 예언에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시는 것에서 이다.
2) 김희보는 선지자 사무엘이 선지자 학교의 창설자이며, 선지자 엘리야도 사무엘과 같이 선지자 학교의 창설자이며, 엘리사는 그 후계자라고 본다. 김희보, 앞의 책, 291. 그러나 열왕기하 2장에서 보게 되는 선지자의 제자들, 또는 선지자의 생도들은 사무엘상 10장과 19장에서 각각 보게 되는선지자를 따르는 무리들을 의미하는 것이지, 이들이 곧 선지자의 직임을 수행하는 선지자라고 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선지자의 제자<무리>들이 선지자와 다른 차이를 갖는 것은 선지자가 하는 하나님의 예언에는 이스라엘의 구원과 관련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이 있었으며, 또한 하나님의 약속과 메시야 사상이 계시되어 있으나, 사무엘 10장과 19장에서의 선지자의 제자<무리>들은 단지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그들의 의식과 의지 밖에서 있는 일인 하나님의 말하게 하심에 의하여 말하는 것이 있었다는 것에서 선지자의 무리들이 예언하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영이 사울왕에게도 임하므로 사울이 춤을 추며 예언하였는데, 그 예언은 그날 해가 저물고 밤애 새도록까지 하루 온종일 행해지는 것에서 나중에 기력이 쇠하여 지침으로써 더 이상 춤을 출수도 말을 할 수도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러 바닥에 쓰러져 있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에서 잘 나타나 있다(참조. 삼상 10:5, 10; 19:20-24). 개역개정 한글성경에서는 선지자의 제자들로, 개역 한글성경에서는 선지자의 생도들로 불리는 이들 무리들은 길갈, 벧엘, 여리고 곳곳에 있었으며, 여리고에서의 선지자의 무리는 그 숫자가 50명에 이를만큼 많았다. 이 많은 숫자를 이루고 있는 이들은 공동체 생활을 하였을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에서는 선지자 공동체, 또는 선지자 학교라고 말하는 것이며, 그들을 선지자들의 제자, 곧 선지자 생도라고 호칭하고 있다. 이들 선지자 생도들은 사무엘의 시기에 있어서는 사울왕을 선지자의 예언에 있게 하는 것과 관련하여서 나올 뿐이며 다른 것으로는 언급이 되고 있지 않다가 엘리야가 승천하는 시점에서 다시 한번 나오는데 이때는 선지자의 무리가 사무엘 때의 라마에서 기브아로 확장되었다가 더욱 확장되어 길갈, 벧엘, 여리고 등에서 상당히 많은 숫자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선지자 엘리야와 엘리사 때의 선지자 생도들은 선지자 사무엘 때의 경우와는 또 다른 모습에 있었다. 이들은 선지자의 한 무리를 이루며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지만, 이들은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있는 것에서가 아니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선지자 엘리야를 하늘로 데려가실 것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엘리야를 따르는 엘리사를 멸시하며 조롱하는 것에서 실상 하나님이 과연 엘리야를 하늘로 데려가시겠는지 두고 보자는 심사에 있으면서 엘리사에게 보는 것과는 달리 엘리야를 따르지 않았다.
3) 삼상 10:5, 10; 19:20(2), 왕하 2:3, 5, 7, 15; 4:1, 38; 5:22; 6:1; 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