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세사표 공자
몰락한 가문, 초라한 탄생
주나라의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킨 후, 은나라의 마지막 왕 주왕(紂王)의 서형(庶兄) 미자계를 은나라 유민의 왕으로 삼아 송나라를 세우도록 했다. 세월이 흘러 불보하(弗父何, 공자의 10대 조)는 아우에게 군주의 자리를 양보했다. 불보하의 증손인 정고문(正考文, 공자의 7대 조)은 송나라의 군주를 현명하게 보좌하여 이름을 남겼으며, 은나라(상나라)의 조상을 기리는《시경》의〈상송(商頌)〉편을 편찬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고문의 아들 공보가(孔父嘉)가 태재(太宰) 화독(華督)에게 독살되면서 집안이 기울기 시작했다. 당시 공보가는 송나라의 대사마(大司馬, 군사령관)였는데, 부인이 절세미인이어서, 이 부인을 탐낸 화독은 공보가를 독살하고 나서 그 부인을 차지한 후 아들 목금보(木金父)까지 죽이려 하자, 목금보는 화를 피해 노나라로 도피했고, 성을 공(孔), 이름을 방숙(防叔)이라 하였다. 공방숙은 공자의 5대조가 된다. 이 후로 이 집안은 서서히 몰락해 갔다.
이런 공자의 족보가 사실일까? 많은 학자들은 이 ‘족보’는 유가에서 공자의 가계를 높이려는 의도적인 가필로 보고 있다. 하지만 몰락한 귀족의 후손이라는 것과 조상이 송나라 출신이라는 것은 믿어도 좋을 것이다.
공자의 아버지 공흘은 두 차례의 전공을 세운 당당한 무인이었다. 첫 번째 전공은 기원전 563년, 노나라와 몇몇 제후국이 핍양성을 공격했을 때, 성문을 밀어 올려 공격대의 탈출에 결정적인 전공을 세운 것이다. 두 번째는 기원전 556년 한 밤중에 두 명의 장교와 3백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제나라 군대의 포위망을 뚫은 것이었다. 그래서 노나라의 영웅이 되기는 했지만 그에게는 마음에 드는 아들이 없었다. 시(施)씨와 결혼 했지만 딸만 아홉(!)을 얻었고, 다시 첩을 들여서 아들 백니(伯尼, 孟皮라고도 함)를 얻기는 했지만, 불행하게도 절름발이였다. 무인으로서 당당한 체구를 지니고 있었고, ‘가문의 부활’을 염원했던 공흘로서는 이런 아들로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스무 살도 안 된 처녀 안징재(顔徵在)에게 청혼을 한다. 놀랍게도 이 청혼은 받아들어졌다. ‘원조교제’라는 표현도 민망할 정도로 나이 차이가 많은 결혼(이란 표현을 써야 할지 모르겠지만)이라, 사실상 팔려간 것이 아니냐는 견해도 많지만 최소한 축복받지 못한 커플인 것은 확실하다. 그래서 사마천은 공자의 전기인《공자세가》에 공흘과 안징재의 커플의 만남을 ‘야합(野合)’이라고 표현한 것이리라. 지금은 뜻이 많이 바뀌었지만 당시에는 남녀가 집에서 정상적으로 정사를 나누지 않고 들(野)에서 만나 합(合)쳤다는 뜻이다.
안징재는 늙은 신랑의 나이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곡부에서 남동쪽으로 30km 떨어져 있는 이구(尼丘)산에 가서 아들을 얻도록 열심히 기도하였고 그래서 태어난 아들이 바로 공자였다. 때는 기원전 551년,《춘추 공양전》과《춘추 곡량전》은 기원전 552년이라 하고,《좌전》과《사기》는 기원전 551년이라 하는데, 여기서는 조금 더 많이 통용되는 551년 설을 따르기로 하겠다. 공식적인 공자의 탄생일은 1952년, 중화민국 교육부에서 저명한 학자들의 의견을 종합하여, 기원전 551년 음력8월 27일 (양력 9월 28일)로 정했으며, 우리나라 성균관도 이 날 대례를 지낸다.
태어난 아이의 머리 한가운데가 오목하여 그 모습이 尼丘산과 비슷하다 하여 이름
을 丘라 지었다. 즉 짱구였다는 이야기 인데 그래서인지 공자의 초상 중에는 이마가 튀어나와 있는 작품들이 많다.
고대 중국인들이 이름보다 더 많이 쓰는 字는 둘째 아들이란 의미의 仲과 산 이름에서 尼를 따서 仲尼라고 지었다. 하여튼 이렇게 축복받지 못했고 생물학적으로 건강한 아이가 태어나기 어려운 커플을 부모로 둔 아이가 인류의 대성인이 된다니 참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사실이니 어찌하겠는가?
공자의 키는 아버지의 당당한 체구를 물려받아 2m가 넘었다고 한다.《사기-공자세가》에서는 9척 6촌 (대략 225cm) 이라고 하지만 도량형도 차이가 있고 정확한 기록으로 믿기는 어렵지만 굉장히 큰 체구였다는 것은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