回想錄, 11 堀子軍作戰(續編)
軍: 군사 군이다. 집가 자에 수레 거(전차) 다. 쉽게 말해서 집을 지키는 전차라는 뜻이다.
또한, 덮을멱 "冖"(민갓머리),를 "車" 를 보이지 않도록 위장한 군사(軍士).라고도 한다.
집을 지키는 울타리는 차다. 곧 군(軍)인 것이다.
우리나라는 유교사상(儒敎思想) 때문에 말(言=명분 名分)은 앞서고 실리(實利)는 등한시 했다.
그래서 武人(무인)은 업신여기고, 문신(文臣)을 우대했다. 고려 시대는 장군이 무신(武臣)이였다.
우리나라 역사상 국 내외로 건강할 때가 고려 시대다. "코리아" 외부세계에 알려졌다.
조선 시대는 문신(文臣)이 장군이 되여 전선에 나갔다. 그러니 패(敗)할 수밖에 없다.
대표적인 게 임진왜란 때 신립 장군이다.
동양 삼국의 국민성을 돼지에 비교하면 한국사람은 돼지와 2~3일 살다가 도망간다.
일본 사람은 처음부터 돈을 억만금 줘도 돼지와 살지 않는다.
중국사람은 돼지와 같이 살지만, 돼지가 도망가버린다.
필자가 북경의 만부정 들렸을 때, 쥐 고기, 뱀고기, 거북이고기 , 원숭이고기 등 없는 게 없었다.
중국 국민성은 허풍쟁이다. 시제 말로 과장(誇張)이 많다. (예, 6, 25 때 중공군이 60만이 왔다 했다.
실제는 20만이 왔다.)
그리고 남의 밑에 종속된 것을 좋아한다. 중국의 5천 년 약사에 300년 지속한 나라가 없다.
그리고 한족(韓族)이 중국을 운용한 것은 5.000년 중 1.000년뿐이다.
나머지는 이민족이 통치했다.
지금 북경은 연나라(말갈족), 원나라(몽고)와 청나라(만주족)의 수도였다.
중국의 문물은 송나라(고려 때)는 양명학(陽明學)이 발달하였고, 명나라( 조선때) 때는 주자학(朱子學)이 발달하였다.
우리나라에 전례되여 일본에 전파되었다.
일본은 양명학이 발달하였다. 곧 실리(實利)를 따르면서 세로 문화가 근간을 이루었다.
쉽게 표현하면 임금이 부모요, 신하는 자식이다.
이는 자연계를 지배하는 자연의 법칙이다. 곧 칼의 문화다.
강자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습관, 앗사리(깨끗이) 졌다.
이는 대의(大義)가 어버이를 멸(滅)한다와 같다.
한국은 주자학이 발달하였다. 곧 명분을 중시했다. 가로문화가 근간을 이루었다.
쉽게 표현하면, 가족, 가문 중심이었다. 왕은 5대까지 귀족이고, 공신(功臣)은 3대까지 자랑했다.
양반은 먹지 않아도 헛기침을 했다. 서원(書院)의 수는 650개였다. (조선의 인구는 200만 명)
시(詩)의 문학에서 한국은 계곡 바위에 걸터앉아 자연과 어울렸다.
일본은 어깨에 힘을 주거나, 일본도(刀)를 빼 들지 않으면 참맛이 없다.
북유럽의 바이킹족(viking = 해적)과 같다.
어떻든 우리민족은 수세적(守勢的)이다.
춘추전국시대(bc 770년~221년) 관자(管子)' (제나라사람)는 국가(國家)가 멸망할 때는
첫째: 국방(國防)을 게을이 할 때요.
둘째: 무차별 평화주의가 이길 때.
셋째:쾌락주의(快樂主義) 가 세상에 만연할 때.
네 째:정치가 겉으로만 번드래할 때.
다섯째: 금권주의(金權主義)에 판칠 때.
여섯째: 사람들이 이념이 아니라 이해에 따라 도장을 찍고, 파벌끼리 세력다틈일 때.
네가지는 생략합니다.
또한 미국의 예일대 교수 도널드 캐이는 평화를 누리고 싶다면 군축이나, 불개입 원칙 등
소극적인 정책이 아니라 강력한 군사력과 유사시 무력 밖에 없다, 했다.
필자는 후세가 염려되어 굴자군 작전을 회상하게 되였습니다.
제3땅굴은 북한 귀순자 (김부성)의 땅굴 공사 첩보로 1978년 10월 17일 비무장지대에서 발견되었다.
군사분계선 서쪽 1. 2km 지점(지하 평균 73m 암석층을 굴착하여 1. 6km 남쪽으로 내려왔다.
폭과 높이는 2×2m 아치형으로, 시간당 3만 명의 병력이 침투할 수 있다.
서울까지는 52km이다.
이때 전두환 1사단장이 진두지휘했다.
장군은 1951년 5,16혁명당 시 육사 페러드(prod)을 주도했다.
월남전에서 백마부대(9사단) 연대장,
1968년 1, 21 김신조 124군 부대 침투 사건시 청와대 방어(대대장)를 했다.
필자는 서울에 있는 동기들(6명)과 도라산역에서 북 녁을 보면서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대성동 마을은 유일하게 휴전선(비무장지대) 안에 있다.
공동경비구역(JSA) 내에 있다.
세금도 안 내고, 남자는 군대도 안 간다, 딸은 결혼하면 떠나야 한다.
그 외 다소 제약(制約) 사항은 생략한다.
주민은 200여 명이며 논(畓) 농사를 생업으로 하는데, 가구당 1년에 백석(百石) 이상을 수학을 본다.
북한도 맞은편에 선전 마을이 있다.
제4땅굴은 1990년 3월 3일 강원도 양구군 동북쪽 26km 지점 비무장지대 안에서 발견 됐다.
1989년 8월 전초 수색대는 청음 탐지 활동 중 땅굴 굴착 소리를 탐지됐다. (귀순한 북 기술자 첩보 제공)
당시는 땅굴 탐지반이 사단 마다 땅굴 침투 예상지역에 운용했다.
땅굴은 군사분계선에서 1. 2km 떨어진 곳이다.
높이와 폭이 1.7×1.7m, 지하 145m 이다.
안보 관광객이 들어갈 때는 모노레일(monorail)을 타고 간다.
땅굴은 양구군 해안면(亥安面)이다. 돼지 해자에 편안 안자다.
이를 펀치볼이라 부른다.(면적은 61.52㎢, 제주 한경면보다 조금 적다.)
해안면은 5억 년 전에 유성이 떨어져 가마솥처럼 움푹 팼다.
분지는 짙은 안개와 비가 자주와, 물이 많고 습지였다.
사람이 살 수 없는 뱀과 개구리 천국이었다.
옛날에 이를 본 지나가던 스님이 돼지를 기르면 뱀을 없앨 수 있다고 했다.
마을 사람은 돼지를 풀어놓았다.
식성이 좋은 돼지들은 마구잡이로 뱀을 잡아 먹었다.
돼지는 비계가 많아 물려도 독이 퍼지지 않았다.
양구는 7만 명 쯤인데 군인이 4만 5천 명, 군민은 2만 2천 명이다.
6,25 때는 인민군 제 3연대 924고지(김일성고지), 1,026고지(모택동고지)및 스탈린 고지가 있다.
아군쪽은 가칠봉고지, 대우산고지(1,176), 도솔산고지(1,304), 918 고지 등,
동쪽의 달산령(908 고지) 등으로 둘러쌓여 있다.
해안면 둘레는 1.000m 이상 되는 높고 낮은 산봉우리와 고갯길이 신비하고 이색지대 같다.
어쩌면 달나라에 온 것 같이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필자는 작전협조 차원에서 갔었다.
칵테일(cocktail) 컵(cup)과 같다고 해서 외국 종군 기자들과 미국 참전 병사들이 펀치볼(punch bow=산간, 산허리의 우묵한곳. 작은 분지) 이다.
1,026고지와 924(김일성)고지를 반드시 탈활할 목적으로 장병들의 전의를 불태우기 위하여
점령한 고지다.
6.25때 비화(秘話), 김일성은 펀치볼 전투의 의의(意義)에 대하여 1,211고지 전투는 " 한치의 땅도 내놓지 말라" 는
땅의 중요한 전략적 방침을 견지 한데 있다.
펀치볼은 미 해병 제1사단과 한국 해병대 제1연대가 북한군 제3군단과 혈전끝에 확보 했다.
그리고 가칠봉 지구 전투는 주인이 6번 바꿨다.
북한군 1,102명 사망, 아군 667명 전사, 40일 간 전투를 했다.
백마고지와 비견은 안 되지만 혈전을 치루었던 곳이다.
현대전에서 미군(연합군16개국)은 한국전에서 반 타작이다.
그러나 월남전은 하루에 5억달라을 퍼부으면서 수치스러운 페전을 격었고,
아프칸전에서 고배를 마시고 발을 빼기시작했다.
그 외 도솔산지구, 대암산지구, 대우산지구 등 있으나 지면상 생략 하겠다.
필자의 엉뚱한 발상은 통일되면, 제1땅굴은 서울에서 평양으로, 제3땅굴은 서울에서 개성으로,
제2땅굴은 서울에서 원산으로, 제4땅굴은 서울에서 금강산으로 가는 지하철이 된다면
휴전선(DMZ) 자연을 훼손 안 되고 세계적인 생태숲으로 주목 받을 것이다.
만약에 김일성은 후세에 공적으로 빛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