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의 부러진 허리에 아내마저 몸져 눕고
증언자 : 박정성(남)
생년월일 : 1940.(당시 나이 40세)
직 업 : 토목공사 하청업자(현재 무직)
조사일시 : 1989. 1
생각하기도 싫은 1980년 5월
나에게 있어 1980년 5월은 생각하기도 싫은, 미치도록 뼈아픈 고통으로 남아 있다. 악랄한 공수부대에 의해 내 허리는 두 동강이 나 남자 구실도 못 하는 병신이 되어버렸고, 이런 나로 인해 어머님은 화병으로 돌아가셨다.
온갖 좋다는 약은 다 써봤지만 하느님도 무심한지 어긋난 뼈는 좀처럼 아물어 들지 않고 점점 악화만 되어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마누라까지 아파 누워 있어 우리 가정은 거지 같은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다. 운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지만 목이 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몇 번을 죽으려고도 마음먹었다. 그렇게 몸서리치며 지낸 한많은 인생살이 9년째,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아직도 학살의 무리가 권좌에 올라 대통령이라 군림하고 있지 않은가! 다시는 상상하기도 싫은 끔찍한 일이지만 한 순간에 저지른 그들의 만행이 한 가정을 얼마나 처참하게 파탄시켰는지를 온 국민에게 알리고 우리의 자식, 손자 대에서는 다시 이러한 비극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증언한다.
전남 보성군 노동면 대련정신을 차리려고 해도 통증으로 인해 자꾸만 까무라쳤다.
한참 후에 눈을 떠보니 어떻게 집에까지 왔는지 방안에 누워 있었다. 허리뼈가 부러졌는지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으나, "병원에 입원하면 공수부대원들이 환자와 식구들을 죽인다"는 소문 때문에 병원에는 못 갔다. 그것은 유언비어가 아니라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은 능히 그러고도 남을 놈들이었다.
21일 이후 계엄군이 시민들에 의해 쫓겨났음에도 불구하고 언제 보복을 당할지 모르는 불안감 때문에 병원에 가지 못하고 집에서 통증을 참고 지냈다. 몸이 아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6월 12일 전남대병원에 입원하러 갔다. 병원은 대만원이었다. 나는 병실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신문지를 깔고 바닥에 드러누워 있었다. 워낙 환자들이 많아 간호원들조차 정신이 없었으며 병원은 온통 피비리내가 진동하였다. 간신히 진통제는 맞았으나 치료를 받을 수 없어 죽어도 집에서 죽어야 한다는 생각에 서너 시간 후 집으로 왔다.
병원을 전전했지만
그 후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아 한방치료를 했다. 18개월 동안 침을 맞았으나 별차도가 없었다. 허리에 힘이 없어 대소변도 받아내야만 했다. 7, 8월경에는 세수대야로 두 대를 받아낼 정도의 하혈을 했다. 응어리진 검붉은 피였다. 영락없이 죽는 줄 알았다. 살고 싶다는 의욕도 없었으나 어머니보다 먼저 죽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버텼다. 한약을 먹어 다행히 피가 멈춰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 뒤로 몸이 몰라보게 나빠지기 시작했다.
노모와 어린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아니 병신만은 면해 보자는 생각에 무슨 약이라도 써서 일어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10일분의 약이 6만 원, 침 한 대에 4천 원, 소독제 주사 1만 5천 원짜리를 거의 매일 맞다시피 하는 생활을 몇 년간 계속하였다. 이렇듯 좋다는 약, 좋다는 침은 다 써보고 별 짓을 다 했으나 부러진 허리는 좀처럼 나을 줄 모르고 점점 마비되어 갔다. 허리 통증은 여전했으며 하체가 완전히 마비되어 남자 구실도 못 하는 병신이 되어버렸다. 겨우 작대기라도 짚고 걸을 정도가 되었다가 다시 악화되곤 했다.
1984년에 병이 다시 악화되어 원광대학 부속병원에서 통원치료를 받았으나 별로 좋아진게 없어 양동에 있는 영남신경외과에 6일간 입원했다. 행여 수술을 하면 낫지 않겠느냐는 생각에 수술을 하려 했으나 의사가 수슬을 해봤자 후유증이 심하니 자가치료, 물리치료를 하라고 했다. 그 전에는 한가닥 희망을 갖고 살았으나 의사의 말을 듣고 내 팔자려니 하고 체념하고 살았다.
작년에는 나주 삼포에 사는 김종우 씨가 뼈를 잘 맞춘다고하여 1월부터 4월까지 허리뼈를 맞추러 다녔으나 치료할 때는 괜찮다가 또다시 고통이 심했다. 지금은 김두원신경외과와 동구 보건소에서 약을 지어다 먹고 있다. 하루에 열서너 개의 약을 먹는데 약중독으로 인해 속이 정상적인 기능을 하지 못하고 쓰리고 아프다. 10월경에 전남대병원에서 진찰을 했다. 그때는 살고 싶은 마음이 눈꼽만큼도 없었는데 위에 좋지 않는 병까지 생겼다고 했다. 위까지 아프면 목숨만 붙어 있 고 눈, 코만 있지 이미 80퍼센트는 송장이나 다를 게 뭐가 있겠는가! 몇 번 자살을 기도하다가도 여덟 분의 할아버지 산소를 모시고 있는 장남인지라 내가 죽으면 산소가 멀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애들이 찾지 않고 잊어버릴 것 같아 못 죽는다.
어머니는 1981년 화병으로 돌아가셨다. 어머님은 "나는 2차대전도 겪었고 6·25도 겪었으나, 이렇게 비참하게 민간인과 학생을 학살한 것은 처음 봤다. 행여 이웃집에도 맞았다고 알리지 마라. 자식들한테 뒤탈이 생기면 어떻게 하냐?" 면서 시름시름 앓더니 끝내 돌아가시고 말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단돈 10원이 없어 널을 못 사고 후배들이 사줘서 장례를 치뤘다. 누님, 자식들, 마누라와 함께 막대기를 짚고 초라하게 장의차를 타고 갈 때의 비참한 심정이란 그 누구도 알지 못 할 것이다. 내가 다치지 않았으면 좀 더 오래 사실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에 자나깨나 효도 못 한 죄로 억장이 무너진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지금까지 마누라가 한두 번 보따리를 싼 것이 아니다. 먹을 것도 없고 여기저기 빚만 쌓여 있어 집안 살림은 엉망이었다. 도대체 미래가 없는 나와 내 가정에 무슨 의미를 두고 살 것인가.
쌀이 없어 아이들 도시락도 못 싸주는 생활
1982, 83년도에는 마누라가 튀밥장사를 하여 하루에 쌀 반 되, 보리쌀 반 되를 팔아왔는데 그것으로 아침, 저녁으로 여섯 식구가 먹으면 거덜났다. 단돈 일이십 원이 없어 날마다 애들을 울려 보내고 도시락도 못 싸준다. 속모르는 애들은 왜 밥 안 싸주느냐고 묻는다.
그럴 때의 심정은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얘들이 정상적인 발육을 못 해 또래들 중 제일 작다. 기나긴 봄날 아이들이 밥을 못 먹어 얼마나 배가 고프고 눈이 컴컴했겠는가. 남들이 과자나 빵을 먹으면 조금이라도 얻어먹기 위해 침을 흘리면서 책가방을 들어주고 다녔을 생각을 하면 가슴이 찢기는 아픔에 미쳐버릴 것만 같다.
고기가 하도 먹고 싶어 마누라가 오래된 돼지기름, 소기름 등을 주먹만큼 얻어 오면 맹물에 끓여 소금을 치고 하루에 한 그릇도 먹고 두 그릇도 먹었다. 이렇게 산 지 9년, 칼로 가슴을 도려내는 아픔과 시련을 현재까지 겪고 있다. 업친 데 덮친 격으로 1986년에는 마누라조차 아파서 간수술을 했다. 죽느냐 사느냐는 기로에 서서 삼분의 일 정도의 간을 떼어내고 지금도 계속 약을 복용하고 있다. 그래도 내가 신의를 지키고 정의롭게 살아왔기 때문에 친구나 친척의 빚신세를 져 가며 죽지 않고 살고 있는 것이다.
몸이 다친 이후 5·18 부상자회에서 늘 가입하라고 했으나 자식들에게 행여나 피해가 있을까봐 안 했다. 전두환이가 대통령이 되지 않았다면 아마 신고를 했을 것이다. 살인범인 전두환이가 대통령에 앉아 있어 차일피일 미루다가 1984년도에 가입했다.
요즘은 5·18 관계 뉴스나 얘기만 나와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그때의 일이 필름처럼 선명하게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러면 밥맛이 없고 잠을 못 자 절반 송장이 되어버린다. 우리 부상자들은 기상대가 필요없다. 비가 올라치면 몸살을 앓고 쑤시고 아프다가 비가 온 후에는 좀 낫는다.
5·18 부상자회 가입 후에는 관계기관에서 협박전화를 많이 했다. 전두환이나 고위 장관이 올 것 같으면 항상 전화를 걸어 몸조리하고 어디 나가지 말라고 한다. 그래도 나는 약과다. 다른 부상자들은 집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감시를 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에는 이럴 수 없다. 이렇게 육체적으로 고통을 줬으면 됐지 뭐가 부족해 정신적인 타격까지 주는지 모르겠다. 나도 정신이상까지 생겼는지 가끔씩 헛소리를 하고 기억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이젠 광주를 떠났으면 한다. 세상 사는 것이 재미가 없다. 정상적인 남자 구실을 못 해 물 건너 손자 죽은 것 같아 우두커니 무등산만 바라보고 있다. 옛날의 일을 극복해야 하는데 엊그제의 일처럼 절대로 잊혀지지 않고 자꾸 살아 활활 타오르고 있다. 노동청, 금남로 거리 등 시내를 지날 때는 공수부대원들의 짐승 같은 만행이 떠올라 자꾸 내 몸을 죄는 것 같다.
지금 내게 소원이 있다면 아무도 없는 암자나 섬에 가서 책을 쓰는 것이다. 역사에 있어 크나큰 비극인 5·18 같은 사건이 두 번 다시 되풀이되지 않도록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내 목숨이 있는 한 기필코 완성하고 싶다.
(조사.정리 신봉화) [5.18연구소]리가 나의 고향이다. 가난한 시골 농사꾼의 장남으로 태어난 나는 어릴 적에는 부모님의 품에서 살다가 국민학교에 들어가면서 순천 친척집에서 살았다. 순천에서 국민학교를 나오고 매산중학교를 다녔다.
남달리 꿈과 야망이 컸던 나는 부산으로 유학을 가 1960년 부산해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남자로서 포부를 갖고 수산대나 해양대를 가고 싶었지만 집안 형편이 여의치 않았다. 곧바로 군대에 갔는데 군대 제대할 무렵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나이도 나이인 데다가 장남의 의무감 때문에 뭔가 일을 시작해야 했다. 토목공사 하청업자로서 인부들을 데리고 현장생활을 했다. 현장생활을 하다가 29살 때 결혼하여 딸 둘, 아들 둘을 낳았다.
1980년에는 토목공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 풍족하진 않지만 먹는 것에는 구애받지 않고 오손도손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끔찍한 일을 당하고부터 우리 가정은 항상 약 냄새와 가난의 연속으로 웃음이라곤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부 상
내가 그 끔찍한 일을 당한 날은 5월 20일이었다. 그 전에도 대학생들의 시위가 많았다. 나는 그들이 고생한다고 생각했으며 한편으로는 자랑스러웠다. 5월 18일 오후부터는 공수부대가 사람들을 개패듯 구타하기 시작했다. 원래 의리가 강하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나는 내 동생 내 형제 같은 광주시민을 개패듯하는 그들에게 적지 않은 분노를 느꼈다. 그것은 나만의 심정이 아니라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가진 광주시민 모두의 마음이었다.
18일 시내에 약속이 있어 나갔다가 그 뒤부터는 시위대열이 있으면 줄곧 따라 다녔다. 20일 역시 시내에 나갔다. 시외버스 공용터미널과 MBC 방송국 쪽에서 온 시위대열과 조선대 쪽에서 온 20-30명의 시위대열이 합류하여 노동청 삼거리를 막 지나려는 참이었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있거나 혹은 골목골목에 숨어 있던 공수대가 갑자기 나타나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잡고 짓밟았다. 나는 그 광경을 보고 조선대 쪽으로 달리는 순간 너덧 명의 공수부대원이 느닷없이 뒤에서 덮쳐 허리를 냅다 군화발로 차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쓰러진 나를 공수들은 군화발과 방망이로 죽도록 때렸다. 고도의 훈련을 받은 그들은 먼저 허리를 차서 쓰러뜨린 후 허리와 머리, 다리 마디마디를 구타했다. 그때 공수부대원들의 얼굴은 흥분되어 있었다. 술을 먹었거나 흥분제를 복용하여 마치 미친개 같았다. 사람을 무식하게 때리고 짓이긴 그들은 이미 나라를 지키는 군인이 아니라 살인범들이었다.
의식을 잃을 때까지 얻어터지다 한참 후에 정신을 차려보니 도로 이곳저곳은 얻어터져 쓰러져 있는 사람들로 아수라장이었다. 공수부대원들은 보이지 않았다. 공수부대에게 맞을까봐 쉽게 부축해 주지도 못 하는 상황이었는데 몇 사람이 나를 부축하여 일으켜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