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소리·죽비소리·철부지소리(213)
인생의 아름다움이란
지혜 있는 사람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십 분의 육만 뜻에 맞으면 그에 만족하고 감사를 느끼며 살아가는 존재이고, 또한 뜻에 맞을지라도 그 만족한 일을 혼자 차지하지 아니하고 세상과 같이 나누어 가짐으로 해서 그로 인하여 재앙을 당하지 않을뿐더러 나눔 정신으로 충만한 축복이 항상 자기 것이 되는 법이다.
인생은 고락(苦樂)이 언제나 반반이라 했다. 고(苦)가 있으면 낙(樂)이 그에 상응하리만치 따른다. 우리가 십 분의 육에 만족한다 하는 것은 현실의 삶에 안분(安分)하고 감사하며 사는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십 분의 사를 위해 최선을 다하여 인생의 꽃자리이자 희망 자리를 만들어 가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또한 모든 것을 100% 다 얻은 사람일지라도 혼자 차지하지 아니하고 은혜를 나누며 살므로 복을 영원하게 장만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라는 뜻이 아닐까 생각되기 때문이다. 인생에는 영원한 낙(樂)도 없고 영원한 고(苦)도 없다. 고락이란 것은 언제나 반반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걸 모르고 나의 과거 젊은 시절은 즐거움만 찾아 헤맨 어처구니없는 삶이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 낙(人間樂)만 있는 줄 알고 또 다른 천상낙(天上樂)이 있는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천산락은 도학(道學)에서 연유한 말이다. 여기에 그 인간이 누리는 낙과 천상낙 즉 도학에서 누리는 천상낙에 대해 구체적으로 짚어보자.
첫째, 인간낙이란 형상 있는 세간의 오욕 낙(五慾樂 : 財·色·名·利·安逸)을 말한다. 즉 처자나 재산이나 지위나 무엇으로든지 물질이나 환경에 의하여 나의 만족을 얻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인간 낙은 결국 다할 날이 있는 법이다. 온 것은 가고, 성(盛)한 것은 쇠(衰)하며, 태어난 것은 죽게 되어 있다. 생멸(生滅)의 철칙은 이 지구상에는 언제나 존재한다. 이 모든 것들이 하나 둘 소멸되고 없어졌을 때나 이 육신이 죽을 때에는 전날의 모든 수고와 온갖 욕심으로 공들여 놓은 것 뿐 아니라 처자나 재산이나 지위가 다 뜬구름같이 흩어지고 마는 것이다. 이 인간낙이란 것이 얼마나 허망한가하고 다시금 되씹어 봐야 하지 않을까 한다.
둘째, 천상낙이란 도로써 즐기는 마음의 즐거움을 말하며,「나물 먹고 물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을지라도 낙이 그 가운데 있으니, 의(義) 아닌 부와 귀는 나에게 뜬구름과 같다.」는 공자의 말도 이 마음의 즐거움을 말한 것이다. 또한「사흘의 마음공부는 천년의 보배요, 백년의 탐낸 물건은 하루아침 티끌이라.」는 옛 성인의 말도 있다. 이와 같이 형상이 있는 물질이나 환경과 생사고락을 초월하여, 모든 경계(境界)에서 마음이 항상 편안한 것은 천상낙이라 일컫는다. 이 천상낙은 본래 형상이 없는 마음이 알고 행하는 것이므로, 비록 육신이 바뀐다 할지라도, 그 낙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다. 그래서 도를 닦는 사람은 이 허망한 인생낙의 이치를 알므로 참마음을 찾기 위하여 육신에 대한 집착을 벗어나려는 것이다. 종교에 귀일하거나 도학적 접근으로 마음의 평안을 얻고 물질만능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정신세계에로의 이행은 이런 천상낙을 오래오래 계속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결국은 심신의 자유를 얻어서 삼계의 대권(三界大權)을 잡고, 육도윤회에서 해탈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음으로, 인간 마음의 속성한 천상낙을 길고 오래도록 받지 못하는 원인이 생기게 마련인데 그 원인은 형상 따르는 즐거움에 욕심이 발동하여 물질에 집착하기 때문이 아닐까싶다. 즉, 우리가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사치를 하고, 향락을 누리는 것은 형상이 있는 오욕 낙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형상이 없는 천상낙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물질에만 집착하여 탐착(貪着)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인간의 즐거움을 송두리째 버리라는 것은 아니다. 자기 분에 알맞게 자기정신세계와 몸이 흩으려지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절제하며 지혜 속에서 즐겨야 되는 것이다.
꼭 물질이 있어야만 마음이 놓이고, 물질만이 제1의 보배이고, 마음의 안식처가 되고, 위안을 줄 것이라는 크나큰 착각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범부(凡夫)요 인생이 아닐까. 그래서 옛날의 젊은 시절의 난잡한 주색잡기(酒色雜技)를 결코 평생 놓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물질에 중독되고, 물질의 노예로 살아가게 되어 말 못할 고통 속에서 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오욕 낙이란 오욕(五慾)을 충족시켜서 얻게 되는 즐거움이다. 곧 인간의 세상 낙을 말한다. 처자 · 권속 · 재물 · 명예 ·지위 · 향락 등 형상 있는 물건이나 환경 등에 의하여 만족하는 즐거움이다. 그러나 오욕 낙은 일시적으로 변화무쌍하여 정신을 병들게 하고 인생을 파멸의 길로 몰아넣는 경우가 허다하다. 여기서 벗어나는 길이 수행(修行)이고 도(道)다. 오욕 낙에 빼앗긴 마음을 바로 찾아 영원한 삶을 얻는 길이 곧 수행이고 도의 세계이며 신앙이요 이 길이 바로 자기의 오도된 길을 벗어나는 길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신앙심을 가지고 수행을 하면 타오르는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 꺼서 일체의 번뇌나 고뇌가 소멸된 상태, 즉 열반(涅槃)의 경지에 들어서는 것이리라. 이를 ‘니르바나(nirv?na)’라고 한다. 불가(佛家)에서 흔히 수행에 의해 진리를 체득하여 미혹(迷惑)과 집착(執着)을 끊고 일체의 속박에서 해탈(解脫)한 최고의 경지를 이르는 말이다.
우리가 이 고락이 상반된 세상을 살아가면서 해탈과 열반의 경지에는 들어가지 못하더라도 꽤나 ‘삶이 즐거워지는 습관 8가지’가 있다고 한다. 이 여덟 가지만 내 것으로 만들어도 아마 인생 낙과 천상낙을 어느 정도 누릴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하나, 불행의 책임을 남에게 돌리지 말라./ 둘, 진심만을 말하라./ 셋, 똑똑한 척하지 말라./ 넷, 당신이 갖고 있는 것에 대해 우선 감사하라./ 다섯, 단정하게 차려 입어라./ 여섯, 인내심을 가져라./ 일곱, 질투심을 반드시 버려라./ 여덟, 마음을 편히 가져라.」 어떻게 생각들이 드나요? 이 좌우명 같은 내용을 보고서. 이 정도만 내 것으로 만들어도 두 발 편히 뻗고 잠들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진정한 안심입명(安心立命)을 누리려면 이 정도 가지고는 어림도 없다. 본격적인 마음공부, 수행을 통해서만 인생낙과 천상낙을 아울러 누릴 수 있는 것이리라.
수도 인이 구하는 바는, 마음을 알아서 마음의 자유를 얻자는 것이고 그 것이 길이다. 그리고 생사의 원리를 아라서 생사를 초월하자는 것이다. 또한 죄·복의 이치를 알아서 죄·복을 임의(任意)하자는 것이다. 이 지경에 이르러야 가히 아름다운 인생을 노래 할 수 있지 않을 까! 인생과 삶의 아름다움이란 것이 어떤 것인가를 마음에 담고 다시 한 번 음미하면서 이 철리를 삶의 지표로 삼아 보면 어떨까? |
출처: 북소리 죽비소리 철부지소리 원문보기 글쓴이: 청암/정일상
첫댓글 참으로 어디하나 나무랄것이 없는 귀한 참 말씀입니다.
하지만 저는 조금 생각이 다릅니다.
모두가 공자처럼 예수처럼 석가머니처럼 산다면 이 세상은 유지 되지 못할것입니다.
현재처럼 죄와 벌이 공존하는 세상이 좋다고 봅니다.
그 것이 부족한 인간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네, 그게 정답입니다.
다만 삶을 원칙에 입각해서 살자는 이야기라고 여기고
이해하며 읽고 받아 드리면 합니다.
좌우명같은 애기를안고
살면
인생낙과 천상낙을 즐기면서
살듯합니다
마음에 꼭 담아 두면서
삶의 지표로 삼으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