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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해 룡 (산문)
1) 첫눈 내리던 날
금년들어 첫눈이 내렸다.푸른 갑옷으로 도도하게 펼쳐 졌던
메다세퀘이아 가로수 거리도 어느 덧 찬바람에 산산이 흩어져
지금은 패잔병의 무장 해제된 병영의 모습처럼 앙상한 가로수
거리를 거닐면서 바라보이는 금성산은 하얀 눈에 덮여 존엄한
위세를 보이며 세월의 무상함을 더욱 실감하게 하고 있다.
함박눈이 엄청 쏟아진다.외투깃을 세우고ㅇㅇ버스역까지 눈을
맞으며 그녀를 마중 나갔다.
ㅇㅇ음식점에 들려 갈치찜을 먹었다 오래전 부터 대접 하려던
참이었는데 구미에 맞는지 잘 먹는다.
세월은 5년이 지났지만 조금도 변한 것 없이 한결 같다 .
오늘따라 그녀는 더욱 예뻐 보였다. 검정색 정장에 짙푸른
블라우스 애련하고 가냘픈 세련된 모습을 보고 있으니
그동안 지루하고 외롭던 마음이 눈녹듯이 사라지는 느낌이다.
왜 그럴까? 내가 외롭고 삶에 지쳐 있기 때문일까? 그녀와
나는 만나면 만날수록 깊어 가는 정감을 어느 누구도 막을 수
는 없을 것 같았다.
“깃발은 바람에 나부껴야만이 아름답듯이,사랑은 아름다운
추억이 많이 쌓여야 만이 더욱 아름답다는것”을---
깃발처럼 펄럭이는 생동감이 넘치는 두사람의 사랑은 하늘이
맺어준 축복으로 알고 행복한 추억을 많이 장식하고 싶다.
설익은 과일처럼 부족한 듯 한 그녀의 몸매 !
어떠한 약속이라도 틀림없이 지키는 믿음, 두 사람의 대화는
종일 있어도 실타래 에서 나오는 명주실 처럼 끝이 없다.
식사를 마치고 함박눈을 맞으며 약 1km 정도의 메타세콰이어
거리를거닐었다.푸르렀던 지난 가로수거리를 걸었던 때보다도
함박눈을 맞으면서 걸어오는 발걸음은 마냥 즐겁기만 했다.
첫눈은 온 산천이 하얗게 쌓여, 우리들의 사랑을 축복해
주는 듯 했다.
참으로 이상한 인연이야 !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왜 그중에서 그녀만이 나를 사로잡는 매력이 있는가.
인간의 힘이 아닌 인연의 힘이 아닐까?
깊은 연못으로 파고들어 나올 줄 모르는 행복감은 순간이 아닌
영원으로 승화되는 분위기였다. 눈이 얼마나 쌓였는지 도로는
차단되었다.그녀는 택시로 집에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다.
첫눈이 내리던 날~ 나에겐 잊지 못할 추억으로 길이 남아 있다.
2) 사랑은 바람처럼
날씨가 맑고 화창하다, 이제 얼마 있으면 봄이 올 것이다.
그녀의 전화를 받고 공원으로 갔다. 먼저 나와 운동하고 있는
그녀와 숲속을 거닐었다.대나무 숲 양지바른 햇살아래 그녀와
같이 앉았다. 숲 향기가 향긋한 그녀의 냄새와 어울려 더욱
행복했다. 작년 가을 이곳에 왔을 때는 뻐꾹새가 울었다.
뻐꾹새와 사랑은 공통된 감정을 연상시키는 듯싶다.
너무나도 고요하다 못해 적막할 정도로 말이 없던 순간,그녀의
가느다란 숨소라만이 내 귀가에 들릴뿐 세대를 초월한 우리의
사랑은 영원 하리라 생각돠었다 .
나의 인생 오직 가족 위해 살아 왔고 노후의 우울증은 물론 갈등과
방황의 소용돌이 속에서 헤매고 있을 때 그녀와의 만남은 우연이
아닌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 아니었는가 싶었다.
심성이 고운 그녀는 남들이 보기엔 예쁜 얼굴이 아니다. 그러나
나의 눈에는 개성미가 있어서 모두가 예쁘다 .
그 중에서 제일 예쁜 곳 이라면 고운 마음씨이다.
그 마음에 강력한 사랑의 힘이 샘솟는 것이리라 .
물론 젊음도 있겠지만,그러나 나의 주변에 젊고 예쁜 여자 찾으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겠지만, 어느 유행가 노래 가사처럼
“ 얼굴만 예쁘다고 여자냐 마음이 고와야 여자지 ”
노인은 외롭다, 나도 70이 다가오는 노인이다. 처자식 다 있어
아무런 걱정 없는 현실이지만, 외로운 것은 어쩔 수 없다 .
어느 날 갑자기 외로움과 소외감과 아무도 해결 해주지 못할
불행의 기로에 있을 때 어둠속에서 희미한 등불을 만난 듯 그녀는
나의 진로에 사랑의 얼을 심어 주고 길을 열어 주었다 .
나의 고독한 심정을 달래주며, 나를 포근히 감싸주었다 .
이 세상에서 나를 이해하여 주고 가정으로 유도 해주려는 착한
여인이 어데 있겠는가 ? 그녀는 나를 착취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를 위로해 준다. 나는 누구에겐가 나의 외로운 환경과
심정을 호소하고 싶어도 그러한 상대가 없다.
그런데 많은 여인들 중에서도 그녀는 내 심정을 호소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세월이 갈수록 인간미가 물신 풍기는 그녀에게 나는
깊은 정감이 들었다 .세월이 갈수록 만나면 만날수록 자꾸만 깊은
감정은 바로 이것이 사랑이란것을 느끼게 되었다.
누군가를 사랑 한다는것은 참으로 행복한 것이다.
그리고 희열과 활력과 생동감이 넘치게 되어 젊음이 재생 되는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노인의《 4 고(苦) 빈곤 고독 병고 죽음 》에 대하여 생각해 봤다.
이것을 반대로 해석해보니
첫째는 항상 수중에 용돈이 있어야하고
두번째는 남녀 구분없이 친한 친구있어 항상 기쁘게 살아 가야 하고
세번째는 건강을 지키며 살다가
네번째는 때가 되면 미련없이 주변 친지들에게 부담 주지않고
사라지는 지혜를 갖어야 할것이다 .
어느 세월의 종착점에 가면 인간은 물론 모든 생물은 사멸하기
마련이다. 다만 살아가면서 건강하게 살다가 가는것이 노인들의
희망 사항 이다 .
사라질때 까지 주변사람들에게 부담없는 삶은 바로 건강인것이다.
이세상에 혼자 태어났다가 혼자 돌아가는길 누구한테 의지할것인가?
자신외엔 아무도 없다. 건강에 대한 방법은 바로 걱정, 근심 없이
항상 기쁘게 살아가는 것이다.
오늘 이렇게 생동감 있게 살아 가는 비결은 바로 그녀의 나에 대한
영원으로 승화되는 사랑의 힘이 있기에 가능한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고달프고 힘이 빠질 때 용기가 생기고 힘이 솟구치는 충전기 역할을
해주고 있는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무에게도 가슴 아픈 심정을
호소하지 못하고 속이 터질 것만 같다가도 그녀의 목소리만 들어도
속이 편안해 진다.
「 인생은 짧고 사랑은 영원 하리라 .추억은 바람처럼 스쳐 지나간다.
바람,바람,바람. 그녀와 나는 숫한 바람이 스처가며 사랑의 깃발을
나부꼈다 . 깃발은 바람에 나부겨야 아름답다 .
사랑은 추억이 있어야 만이 더욱 아름답다 .그녀와 나의 추억은
나부끼는 깃발에 바람이였다 .영원으로 승화되는 바람이였다.
진종일 함께 있어도 지루하지않는 두사람 그녀는 바람처럼 사라졌갔다.
다시 바람은 불어 올 것이다 .
3) 사랑의 일기 ( 메타세퀘이아 의 길 )
부도난 모 회사 공장을 감시하는 경비원으로 근무하면서 70 이 넘은
고령임에도 집에서 할일 없이 노는것보다 났겠다싶어 혼자 자취하면서
월 80만원을 받으며 귀양살이 겸 노후의 일자리를 찾아 잠시 근무
하기로 했다.아무도 찾아오는 사람 없는 외로운 귀양살이 인생!
그래도 집에서 놀때 보다 마음이 훨신 편했다.
언제나 처럼 기다리던 전화가 왔다.그녀의 맑은 목소리! 광주에서
이곳으로 출발 했다는것. 불야 불야 주변을 정돈하고 공장에서 버스역
까지 걸어갔다 .양옆에는 울창한 메다스퀘아의 가로수가 우거진 국도따라
3 K m 정도를 발거름도 가볍게 그녀를 마중하려 나갔다.
얼마 후 버스에서 내리는 그녀의 모습은 언제나처럼 사뭇 반가 웠다.
그녀는 새로 담은 김치와 깻잎 무친것 죽순 조기조린것 사과등을 봉투에
넣어 갖고 왔다. 이 무거운 것을 갖이고 오냐고 하면서 내가 받아들고
지름길인 들길로 함게 거닐엇다. 누렇게 익어가는 황금 들판 !
둘이는 정답게 속삭이며 ㅇㅇ중학교로 해서 공장으로 왔다.
외롭고 쓸쓸한 이 외딴 생활환경 속에서 만약에 그녀가 없었더라면
나는 어떠 했을 것인까 ?
그녀는 생의 활력소이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것 역시 그녀의 힘이 아니
었더라면 존재할수가 없는 신이 보내준 수호자라고 극찬하고 싶을 뿐이다.
그 녀와 나의 만남은 전생의 무슨 인연이 아니고서야 있을수 없다고 본다.
생일도 똑같은 5. 22.생이요 생각부터 행동까지 모든 분야가 똑같은
닮은꼴 이기에 불평과 불만이 없다. 내가 바라고있는 심성, 기품,등이
좋아 유일한 나의 보배라고 칭찬하고 싶을 정도이다
다만 걱정이 생긴다면 나의 젊음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것인가 또한
그녀의 믿음이 변화할것인가? 난생 처음 느껴보는 사랑의 신비 그 말
그대로이다. 그녀가 원하는것이 내가 바라는것이요 내가 원하는 것은
그 녀는 이루어 준다. 밝은 미소와 목소리는 나를 생동시켜준다.
같이 있으면 마냥 행복할 뿐이다. 어쩔수없이 떠나야할 시간이 다가온
오후 8시 반경 ㅇㅇ역까지 같이 걸었다. 울창한 메다스퀘아 가로수 길을
걸으면서 사랑의 헤어짐을 아쉬워 했다.
손을 마주잡고 다정스럽게 거닐던 메다스퀘아 가로수가 양옆으로 울창
하고 푸르게 우거진 국도의 거리를 거닐던 추억은 길이 남을 것이다 .
◆ 결혼 한지 40여년을 오직 가족을 위해 한눈 팔지 않고 열심히 살아온 나를 두고 공처가라고 까지 농담을 들을 정도로 착실파 였고 그렇게 공직생활도 해왔는데 일대 변화가 온것이다.
지금도 내 신념에는 변화가 없고 당당 하다고 생각된다. 우울증에 시달렸을때 종교의 힘으로 치유해 보고져 마침 아내가 천주교신자 여서 천주교에 귀의하여 성당에도 열심히 다녔지만 아무런 효험이 없었다.
아무도 나를 이해하여 줄수도 없는 나만의 고달픈 삶이였다.
우울증에서 헤어 나올려면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용감히 탈출 그 늪에서 빠져 나와야만 했다.나는 생각해 봤다.〈음악이 있고 아름다운“리듬“속에서 이성간에 접촉이 있으면 회춘의 기회를 맞게되고 우울증의 특효약이 될수 있을거라고 확신했다.〉 월 30만원의 교습비를 지불하고 사교춤을 배우기 시작 했다. 매달 지불 되는 연금에 변화가 생겼으니 아내인들 좋아할리 있겠는가? 나 또한 노후의 나의 인생설계를위한 결심을 변경할수는 없는일! 아내와의 갈등은 악화되기 마련이였다. “홀”에 들려 음악과 리듬에 미쳐 맴도는 순간부터 나의 생활은 완전 변화되었고 우울증도 서서히 나아지는 반면 아내와의 불화는 차츰 골이 깊어만 갔다.
그러던 어느날 혼자사는 50대 초반의 여인을 알게 되었다. 인연이란 있는 것일까! 그녀와 만나면서 부터 우울증은 완전히 사라지고 아내한테서 느껴보지 못한 신비스런 정감과 환희를 느낄수가 있었다.
꿈결같은 세월이 수개월 지난 어느날 그녀가 살고 있는“아파트”에 아내가 찾아 온것이다.
독안에 든 쥐가 되었다. 할 수 없이 문을 열고 현관에 들어선 아내는 창백한 얼굴로 말 한마디 없이 서 있었다.
나는 일단 진정 시키고져 앉으라고 권했다. 참으로 침착했다. 일언반구도 없이 나를 따라 집으로 함께 돌아 왔다.
♥ 난생 처음인 남편의 외도!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믿고 살아왔던 남편이 아니였던가!
아내의 심정을 안심 시키느라 ㅇㅇ한방병원에 들려 진찰하고는 한약을 지어 진정시켰다.
그래도 의연하게 대처한 떳떳하고 품위있는 모습은 나를 감동 시켰다.
반면 나는 완전히 건강해지고 내 건강 내가 지키며 가족들에게 조금이라도 부담주지 않으면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아내는 이러한 나의 확고한 신념을 느꼈음인지 노후의 나의 삶에 제동을 걸거나 시비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받아주는듯 싶다.
나는 아내를 보살펴 주고 아내는 나를 이해하면서 서로 돕고 사는 노후의 부부사랑은〔 어려운 시련이 있고서야 서로의 소중함을 느끼며〕 오늘도 노후 부부사랑으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
4) 그리운 어머니
◆ 내 나이 80 이 되어도 어머니란 세 글자만 떠오르면 마음이 왜 숙연 해지는가!
어머니에게 못다한 효사랑이 쌓여서 일까? 가끔씩 꿈속에서나마 어머님을 뵐때이면 그렇게도 내 마음이 흐뭇 할수가 없다.
효 를 다하지 못한채 돌아가신 어머님에 대한 죄송스런 마음 이를때가 없고 어머니가 그립다.
처 자식 먹여 살리려고 객지생활 하다 보니 미처 어머님 돌볼 시간 없어 슬픈사연만 쌓여 이렇게 어머니만 생각하면 눈물이 앞서고 만다.
4. 19 혁명후 군에서 만기제대 하고 그 이듬해 5.16 군사혁명이 일어났다. 군에서 제대후 직장이 없어 일자리를 찾아 서울행 야간열차를 타려고 집을 나섰다. 아득한 추억이 아닐수 없다.
수중에 버스 비용도 없이 무작정 서울로 가는 심정은 참으로 비참 할 수 밖에 없었다. 5월의 석양 노을빛을 등에 업고 정읍 천원역으로 터벅 터벅 걸어 갈때에 뻐꾸기소리가 유난히 슬펐고 내 마음은 참으로 처량했다.
집 대문까지 나와 몸조심 하라고 손짓하며 돌아서는 어머니의 모습! 나는 이러한 흘러간 사연이 가슴에 떠 오르며 어머니가 그리워진다. 「비나리는 고모령」은 나의 애창곡의 하나이다. 어쩌다 노래방이라도 가서 노래를 불러보면 서슴없이 이노래를 부른다. 그러면서 흘러간 옛추억에 잠기곤 한다. 【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 설때엔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 가랑잎이 휘날리는 산마루 턱에 넘어 오든 그 날 밤이 그리웁고나】 왜 진즉 어머님께 효를 다하지 못하고 이렇게 가슴아프게 그리워 할까-후회 할뿐이다 어머님 께서는 늘 자식 잘 되기를 하느님께 기원했고 당신 몸 고닲은것 생각지도 않으시고 오직 아무런 바램도 없이 자식 잘 되기만을 바라는 사랑으로 살아 오셨다.
〈조건 없는 사랑 어머님의 사랑은 바다 보다도 넓고 하늘 보다도 높은 지고지순한 사랑!〉내가 지금 이렇게 존제하고 있는것도 어머님의 따뜻한 사랑 없이는 존재 할수가 없었을 것이다.
◆ 갈 곳 없는 서울생활은 성북동 건설현장에서 노동일을 하면서 현장 함바(식당)에서 식사하고 사촌 고모 댁에서 유숙했다.
어느 날 혁명정부에서 첫 국가 공무원시험이 있다는 공고를 보았다. 수속을 마치고 시험당일 시험장에 들렸다. 제목이 혁명 완수의 길 이란 주관식 논문 이였고 국어는 객관식 문제였다. 운명의 갈림길이다. 가슴이 콩 튀듯이 튀고 손이 떨려 시험을 정신없이 치르고 나왔다. 그 이튿날, 그 당시 시민회관이 국회 의사당 이였는데 그곳에 합격자 번호를 플래카드에 적어 놓았다.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찾아보아도 내 번호는 보이지 안했다. 때마침 이슬비가 부슬 부슬 내리고 있었다.
내 옆에 서있는 아가씨가 살며시 내옆에 와서 우산을 받쳐 준다. 비는 자꾸만 더 많이 왔다. 그 여인도 시험을 보고 확인하러 왔는지 모르지만 우산을 받쳐 준 그 여인은? 아련한 추억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쏟아지는 비를 주룩 맞으면서 대한문을 거처 돈암동까지 걸어왔다. 자신에 대한 비참한 반발 심리에서 였을까?
고생 하다 64년도 총무처시행 공무원시험에 합격하여 공직생활을 하게 되었다.
전남 승주군청에 첫발령지가 되어 근무했다. 그 당시 만해도 도로 포장이되지않은 상태라서 내고향 고창에서 순천까지 오려면 7-8 시간 정도 걸리는 아주 먼 객지 에서 결혼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어머니께 자주 찾아 뵙지 못하고 효의 기회가 없어서 지금 이렇게 그리움만 쌓여갔다.
돌아 가실 때 임종도 못하고 돌아가신 그 모습만 머리에 남아 있을 뿐 ! 그리움이 이렇게 사무치고 있을 줄이야.....
어머님 돌아가시던날( 6 . 8 ) 귀뜨라미 소리가 그칠줄 모르게 울고 있었습니다.
5) 귀뚜라미 소리
앞 마루터 감나무 어느 그늘 속에서
그칠줄 모르게 울고 있는 쓰르람 쓰르람 소리!
18세 꽃나이 시집온지 예순 여섯해
한 많은 이승 삶못다 핀 넑이 되어
저리도 슬피 우나......
남편 자식 잘 되길 그토록 기원했던
오직 그 사랑 한이 맺혀 사무쳤기에 쓰르람 넋이 되어
떠나면 다시 못올 영겁의 길목에서
마지막 가야만 할곳 떠나지 못해
저리도 슬피 우나...
님은 가셨지만 사랑의 혼은 남아 있네
자즈러지도록 울고있는 애절한 이별의 아쉬움 !
이제 저 쓰르람 소리 울릴때면
사랑을 남기고 가신 님 그리워
나 함께 울고 있었네......
마치 어머님의 넋이 원한에 사무쳐 아쉬움에 지쳐서 슬피 울고 있는듯 마음이 서글퍼 졌습니다.
평소에 감상적인 표현하신바 없으신 아버님께서도 구슬피 우는 쓰르람 소리를 신기하게 느끼셨는지
한 말씀 하셨습니다.
〈웨 저리도 쓰르람이가 그칠줄 모르게 울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어머님은 평소 아버지와 자식들만을 사랑하셨고 오로지 전부였습니다. 말못할 사연으로 외지에 출입도 못하시고 오직 집안에서만 평생을 지내시다가 영원이 가신 불운의 여인 ! 쓰르람이 소리는 이러한 삶의 원한을 우리에게 알리고저 하는 사연이 아니겠는가 싶었습니다.
어머님께 좀더 많이 효도하겠다 마음 먹었지만 그뿐 ! 기다려 주지않고 영원히 떠나가셨습니다. 어머님의 사랑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시요 하늘 나라로 가셨습니다. 이제 인간의 고뇌를 버렸고 꿈 속에서나마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손목을 잡을래야 잡을수 없는 이승에서 저승으로 영원히 가셨습니다 .
가시던날 쓰르람이가 그 토록 자즈러지게 슬피 울었고 또 그 날이 오면은 역시 쓰르람이소리는 나의 마음을 울리고 있었습니다. 그리운 어머님 ! 하늘 나라에서 편히 쉬시옵서소 !불효자는 어머님을 늘 내 가슴에 안고 살아 가렵니다.
6) 너도 하나 나도 하나
앙상한 나무 가지 위에 빨간 홍시 하나
어데서 날라 왔나 까치 한마리/
너도 하나 나도 하나 홍시도하나
초저녁 서쪽 하늘위엔 반짝이는 별하나
어데서 흘러 왔나 하얀 쪼각배 /
너도 하나 나도 하나 저별도 하나
외로운 마음 한 구석엔 옛 추억 하나
어데서 밀려 왔나 그리움하나 /
너도 하나 나도 하나 추억도 하나.
7) 5 .18 공 원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5 .18 공원을 산책하면서 잃었던 나의 건강을 회복하고 유지해 왔었으며 어머니와 같은 따뜻하고 편안한 안식처라고 생각해 보곤했다.
먼저 눈을 뜨자 마자 산책의 순서대로 길을 거닌다.
광주 학생 교육문화 회관의 건물이 보이는 쪽으로 발길을 옮겨본다.
옆에는 넓은 잔듸와 광장이 있어 가슴이 툭트이는 신선한 공기를 마실수 있고 상쾌한 느낌이 든다.
많은 산책인들이 저마다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걷기도 하고 체조도 하고 의자에 앉아 있기도 한다.
까치들이 날아와서 아침 먹이를 열심히 찾아 다니곤한다. 신록이 우거진 숲이 보이는 곳으로 발길을 옮겨본다.
편백나무가 울창히 우거진 숲속에 들려 4 9계단을 세며 올라가 보니 약 200평 정도의 넓은 광장이 눈에 띄고 일부 각종“ 헬스”운동기구가 다양하게 설비되어 있었으며 저마다의 체형을 유지관리 하고져 남녀노소 없이 나와서 열심히 운동을 하고있다.
또 요즈음에는 광주시 주최로 산책인들을 위하여“ 에어로빅 ”운동을 음악에 마춰 가르치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운집하여 음악에 맞추어 단체로“리듬”체조운동을 하고있다.이곳을 지나 공원 상봉까지153계단을 올라가 보았다.이곳엔 단군성전이란 건물이 있는데 내부를 드려다 보니 단군성조의 초상화만 있을뿐! 설렁하기만 하다.
주변엔 시누대가 답답할 정도로 우거져 있어 간벌이라도 해주었으면 싱싱하게 성장 할거라고 생각 되었다.
자연의 원칙은 적자생존이라 태양빛을 받아 좋은 환경을 만나면 싱싱하게 잘자라고 그렇지못한 환경에 있는 식물은 자연 고사하고 만다.
7월의 싱싱한 녹음속에서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심호흡 하면서 간단한 국민체조를 했다. 이맘떼쯤이면 어데서인가 모습도 알수없고 이름도 모르는 5.18공원에서만 들리는 산새의 명랑한 노래소리가 들린다.
〔 포。_ 피↗ 포- 퓨↘ " 포°- 피∧ 포- ? }나도 같이 함께 박자를 마춰 불러준다.
나 혼자 생각인지 몰라도 무엇인가 그 새는 이상하게 느꼈음인지 퓨°--- 하고 되뭇는것 같았다. 똑같이“리듬”에 마춰 반복 해줘 본다. 이새는 이상하게 느꼈음인지, 다시 삐유 하고 좀 억양이 쌔게 너는 누구냐 하고 다시 신경이 곤두 세워져 제차 되뭇는것 같이 느껴졌다. 나는 아침마다 이름모르는 산새와 함께 대화하는 재미가 여간 흥미롭다. 자꾸만 산새소리만 기다려진다. 날씨가 화창한 날엔 산새 소리도 역시 생동감 있고 한층 명랑하다.
이렇게 이름 모르는 산새와 서로 교감을 나누면서 의자에 누어 허리운동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산새하고 서로 휘파람으로 대화를 해보곤 한다. 포°-피, 포퓨--- 삐유↘ 산새가 반응이 없을때엔 자꾸만 산새들을 불러본다.
그러면서 발길을 눈앞에 보이는 팔각정으로 향해 거닐었다.
건물앞에 커다란 타원형 바위에 문자가 새겨진 비석이 보였다. 비석에 새겨진 문자를 읽어 봤다.
무등의 푸른 날개 아래 민주도시
빛고을이 한눈에 모여 드는 오월루!
여기는 5 .18 . 민중항쟁의 정신을 기리기위해
5.18.기념공원 정상에 조성된 전망대 입니다.
오월루에 올라 80년 5월 그역사의 현장에서
산화하신 영령들을 기리고자 자유 민주 인권의
숭고한 뜻을 기억 하시기 바랍니다.
비문을 읽고 어느듯 마음이 숙연해졌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31년전 내 나이 48세 그당시 영광군청에 근무했을때이다. 아내와 같이 5.17일 쇼핑을 하러 광주에 나들이 나왔다.그런데 데모 학생들의 대열이 밀어 닥치고 어쩐지 태풍전야 처럼 느낌이 심상치 않았다.초등학교 다니는 어린 세아이들 생각이 번쩍 떠 오르며 여기 있다가는 큰 변을 당할 듯한 기분이 들었다. 불야 불야 서둘러 영광으로 되돌아 왔다.
이튿날 드디어 5.18 역사적인 대사건이 터지고야 말았다.많은 광주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학생들과 더불어 시위에 참여하고 계엄군과 마주 싸워 광주는 피바다가 되고 시민군은 태극기를 휘날리며 광주인접 도시 까지 진출하며 영광에까지도 트럭을 타고 몰려 왔었다.그날을 회상 해보니 이 비문 앞에서 스스로 머리가 숙여졌다.
옆에 3층 건물인 오월루에 올라가 보았다. 빛고을 시내가 한눈에 바라보인다.
먼저 광주시청 KBS 방송국! 옛날엔 상무대였던 곳이 대형 건물들 빽빽이 들어서 있는 광주의 중심 도시가 되었다.
무등산을 바라보니 그날의 역사를 지켜보고 있음에도 묵묵히 어머니의 포근한 마음처럼 우리 시민들을 감싸주고 있는듯 싶었다.광주하면 무등산,무등산하면 광주, 그리고 5.18민주화 운동의 도시!
이제 역사의 그날을 묵묵히 지켜 보면서 오늘도 저 무등산은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광주시민을 안아주고 지켜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참동안 광주시내 일대를 관망하면서 잠시 숨을 돌려 쉬고 있었다.
시원한 산들바람이 불자 오월루밑에 위치한 원각사에서 댕그렁,땡그렁 풍경소리가 들린다.
마치 5.18 희생자의 영령들의 넋을 위로하는듯 싶었다. 깊은 상념속에 잠기면서 하산했다.
산책로에는 아직도 많은 인파가 걷기운동을 하면서 끊임없이 줄을 이어 걷고있다.
그 대열에 따라 동상이 있는곳으로 갔다.구릿빛 검은동상! 젊은 두사람이 가운대 부상자를 울분에 넘처 껴안고 가는 모습!
그리고 오른편 젊은이의 모습은 정의의 투쟁과 의기에 넘치는 분노의 모습! 역사적 진실을 실감케하고 있었다.
다시 광장으로 내려왔다.12석주가 세워진 곳에 5.18 에 관련된 수상자들의 기록들이 새겨져 있었다. 바로 계단 입구에는 2004년도 5.18 민주화기념 수상자로 뽑힌 아웅산수기의 기록이 새겨진 석주가 서 있었다.
그녀는 버마 NLD 민족민주동맹 사무총장을 역임하면서 1998년 군사독재의 무자비한 민주화운동 탄압속에서 시민들을 이끈 지도자로서 인도의 간디 미국의 말틴 루터,킹의 비폭력 운동에 영감을 받아 가장 비인도적인 정권에 대한 민주화 투쟁에서 비폭력 방법으로 일관되게 싸워온바있어 수상대상자로 선정 된것이었다.
앞서 2000 년도 수상자에는 사나나 구스미오 전 동티모르 대통령이 선임되어 석주에 기념비가 새겨져 있었으며 기타 5.18 운동 각종 모임 단체들의 기념비가 석주에 새겨져 있었다.이 공원은 세월이 갈수록 숲이 울창하게 우거지고 광주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어가고 있으며 이곳을 찾을때마다 민주화의 선구자 광주시민의 긍지를 느끼면서 동상을 향해 잠시 고개 숙여 역사의 그날을 상기 하면서 하산했다. 빛고을 민주화의 도시 길이 빛나라!
이 공원은 역사적 사연을 안고 영원한 우리 시민들의 안식처가 되어 주고 있다.
8) 후회 없는 행복한 삶
도대체 행복이란 무엇인가? 왜 사람들은 행복한 인생을 구가하고 있는가 !
물론 사람마다 개성의 가치관에 따라 어느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
행복(happiness)이란 생활속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뿜을 느끼는 흐뭇한 상태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
행복한 가정속에 행복한 인생이 있다.그렇다면 불행한 가정속엔 행복이란 존재할수 없다는 말인가!
행복이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창조할수 있고 또는 느낄수 있는 다양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인생 70고개 넘으면 덤으로 사는 인생이다.옛날 같았으면 사람의 수명이 60도 못되어 사망하였기 때문에 환갑잔치란 것이 유행 되었든 시절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80 이 넘어도 축하연을 여는 풍습이 사라져 간지 오래되었다.
핵가족 시대로 접어 들면서 사람들이 가정에 대한 의식구조 뿐만이 아니라, 부모에 대한 효 사상의 개념마져도 점차 변천되어 가고 있다는 시대적 흐름을 빨리 파악하지 못하고서는 노후 인생에 갑짜기 불어닥치는 생할 속의 충격을 감당 하기 힘들것이기 때문에 사전에 마음의준비와 자신을 관망하고 살아가는 지혜가 요구되고 있는것이다.
마침내 빛고을노인건강타운에서는 시대적 흐름을 일찍 간파하고 노인들의 복지향상를 위해서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축복받을 일이라 아니 할수없다.
노인들의 4 고(苦)중의 하나가 무위(無爲)인데 이곳에 나와 자신의 취미에 따라 마음껏 여생을 즐긴다는것은 얼마나 축복받아야 할 자선사업인가? 일찌기 이러한 복지시설이 있었더라면내가 겪고있는 가정의 불화는 없었을것이다.
나의 여생 후회없이 건강하고 즐겁게 남에게 부담 주지않고 살아간다는것은 매우 중요하고 보람된 일이라고 생각된다.〈 웃으며 즐겁게 살며는 엔돌핀(endorphin)이란 호르몬이 분비되어 생활에 활력을 넣어주고 더욱더 젊어지고 기분이 좋아 건강하고 장수의 비결이 된다라고 한다.〉나는 이러한 사실을 이미 실감하고 있었고 또한 실천하고 있었다.
가정이란 생활 환경속에서 끊임없이 밀려오는 스트레스는 나에게 엄청난 신체적 변동사실이 있었다.
§ 어느날밤 아내와 밤늦도록 심각한 언쟁이 있었다. 그것은 가정의 생활비 문제였다.
아내는 현재 상태의 생활 비용으로서는 도저히 살아가기가 어려운 형편이니까 나더러 생계비를 좀 더 부담 하라는것이다.
노후인생! 수중에 용돈 없으면 남보기 측은한 인생이란걸 이미 알고 살아 왔는데, 노상 벼르고 있던 아내의 생각과 나의 생각의 이견으로 말다툼이 있었다. 아내는 나더러 용돈을 줄이고 생활비에 보태 달라는 것이고 나는 나대로 한번 약속한 연금의 반분 비율은 변동할 수 없다는것! 나도 이제 남은 내 인생 가정이란 틀에서 묶이고싶지 않아!
나는 지금까지 열심히 가정을 위해 살아왔고 이젠 남은 인생 의무에 시달리며 살아갈순없어, 이젠 권리를 주장하며 살아갈거야---
오가는 대화속엔 속이 터질것만 같아 대화의 해결도 못본체 내방으로 와서 잠자리에 들었다.
지난 흘러간 세월속의 여러가지 영상들이 파노라마 처럼 뇌리를 스처갔다.
기뻤던일 슲었던일 가슴아픈 흘러간 사연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왜 내가 이렇게 됐을까? 가슴이 가깝하고 어쩔바를 모르게 답답했다.
“나보다도 나이가 적었던 서로 알고 지낸 모 컴퓨터학원생 친구가 갑자기 심장 마비로 밤새 아무도 모르게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 자꾸만 머리에 떠올랐다.또 엇그제 나의 동갑인 친구가 위암으로 전대 화순병원에 입원 했다기에 위문차 찾아가 봤는데 사망했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 또한 혈압이 8 0 - 1 8 0 까지 오르고 있지만 쉽사리 치유되지 않는다.
어렵사리 잠이 들었다. 잠자리도 편치가 않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덮고 있던 이불위에 붉은 피가 흘러 묻어 있었다.
그래도 일단 아내한테 알렸다.이유를 알수가없다.아스피린이 들어간 혈압약을 장기 복용해서그런것인지,아니면 엇그제 사슴고기와 피를 먹은 탓인지, 간밤에 아내와의 오랜 스트레스 언쟁의 결과인지---
아내가 가자는데로 가까운 메디칼센터 병원으로 함께 갔다.
피검사 소변검사 심전도검사를 해봤으나 아무런 변화없이 정상이였다.신체의 건강리듬상태는의사가 잘 알겠지만 자신이 더 잘 감지 할수가 있는것이다.나는 나의 건강을 위해서 절대 스트레스를 갖어서는 않될것이란 것을 더욱 실감하게 되었다.
간밤에 그렇게도 언쟁하였던 지난 흔적 하나 없이 함께 병원에 동행한 아내가 고마웠다.
편안한 무소식이 되고 나의 가슴속에는 새로운 마음의 서글픔이 쌓여갔다.
이 세상 혼자 왔다 혼자가는 인생! 나 역시 나의 의무 성실히 수행하였고 이제 남은것은 건강하게살다 부담없이 떠나가려는 것이 나의 마지막 남은 노후 삶의 권리인데, 나는 그냥 담 담 했을 뿐이였다.
5 .8 일 어버이날이 되어 온가족이 한자리에 모였었다.
이날밤 3남매 앉혀 놓고 지난날 병원가서 진단했던 일들을 말하고,자식된 입장에서 안부 한번 묻지 않고 이럴 수 가 있는가 하고 물어보았다. 분위기가 싸늘했다. 아내와의 갈등은 자식들에게 까지도 그 영양력이 미치고 있다는것을 알았다.
그렇다고 구더기 무서워 장 못담으랴? 라는 속담 처럼 가슴에 갈등만이 더욱 쌓여만 갔다.
예로부터 처자식 자랑하면 팔불출이란 말이 있다. 팔불출 소리 들어도 아내의 자랑을 하고싶다. 그녀는 매사가 완벽주의자다.조금도 허술한 데가 없이 살아 오면서, 남의 허점을 상대방이 미처 살필 여유없이 쏘아댄다.
생활능력도 깔끔하고 아이들 성장과정에서 남부럽지않게 잘 보살펴 주었다.
그래서 그녀를 철썩같이 믿고 있었으며. 남의 지탄 받을 일이랑 아예 생각조차 할 수 없고 항상 바르게 살아 온 아내 였었다.
그러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녀는 나더러 정신과병원에 가서 내정신감정을 해보자고 누차 주장해 왔었다.
그녀의 생각에는 나의 사고방식이 옛날 같지 않고, 중년기에 열심히 가족위해 살아오든 그러한 남편이 아니라서 그렇게 생각 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지극히 정상이고 미래를 보는 예지를가지고 있음에도 그녀의 눈에는 그렇게 느꼈을것이다.
그녀의 말대로 정신과 병원에 가서 감정을 받았다.
의사는 젊은 여자였다. 나는 아내로 부터 누차 정신감정을 바랬고, 또 나의 정당성을 의사한테 인정 받고 싶어서 함께 왔노라고 일단 서두를 꺼낸 다음 나의 심리적인 아내와의 갈등, 기타 노후 인생에 대한 심리적인 성적인 전반에 걸처서 조목 조목 체계있게 말했다.설명할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나의 설명을 다 듣고 난후에야 아내의 설명을 요구했다.
아내는 할말이 없을것이다.기껏 한다는 소리가 예전엔 그러지 않했던 남편이 가정생활에는 염두에도 없이 경제적인 생활에 도움을 주지않고 가정에 어려움을 주고 있다는것이다.
여의사는 한마디로 결론을 내렸다. 이러한 사항은 제가 다룰 사항이 아니니 두사람이 잘알아서 처리하세요!
하고 자리에서 일어 섰다. 그후 부터는 다시는 정신과병원에 가자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나는 고민할 수 밖에 없다. 내 노후인생 찾아 보자하니 수중에 적당한 용돈이 필요하고 아내의 요구대로 가정을 따르자니 나의 용돈이 없어 이래저래 고민 하였지만 나의 한번 결심한 내 여생 후회 없는 행복한 삶을 살기로 결심하였다.
어느날 갑자기 아무도 모르게 소리 없이 훌적 떠날 때에는 돈도 명예도 사랑도 미움도 다 부질 없는것! 빈손으로왔다 빈손으로 떠나는 남은 인생 건강하게 살면서 얼마나 아름다운 추억을 남기고 살았느냐가 더 소중한것이 아닌가 한다. 남녀 구분 없이 좋은 친구 만나 산이좋으면 산으로 가고 바다가 부르면 바다로가서 하고싶은 취미생활 마음껏 즐기며 후회 없는 행복한 삶 건강하고 보람되게 살아가고져 한다.
가정의 행복
서론
먼저 빛고을건강타운 자서전,회고록반 에서 제“은발의 향기 2집”문학책자를 발간한다 하기에 기고문을 제출하기를 나는 상당히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첫째는 남들은 저마다 자랑스런 일들이 많아서 온통 자랑거리만 기술하는데 나는 자랑거리가없었다.
둘째는 자랑거리가 없지만 나의 좋지 않은“ 프라이버시 ”에 관한 문제라서 선듯 서면 제출하기가 망서려 질 수 밖에 없었다.
셋째는 내가 굳이 자서전을 기록 제출 했을 경우 독자들이 몇“ 프로 ”의 동감을 얻을 것인가 아니면 비난의 대상이 되어 나의“ 이미지 ”에 손상을 줄 것인가.
다만 나의 기록 자서전에 30 프로 만이라도 동감하는 독자가 생긴다면 나와같은 동료를 얻게되었다는 심정에서 대담하게 기술하면서 독자의 동감과 비판과 선도의 길과 방법을 바라면서이책자에 기고 하고져 한다 .
행복한 가정
우리 인간이 살아 가는데 있어서 행복한 가정은 구성원간에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 요소인존경과 사랑과 믿음이 있어야만이 존재하는 것이고 또한 누구나 바라고있는 자명한 사실이라아니할수 없다.
이 세가지 근본 요소가 상실 되었다는 것은 누구의 잘못이라고 하기 이전에 그 가정은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고 먼저 그 원인과 결과를 분석해 봐야 할것이라고 생각해본다. 나는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아내와 자식들을 위해 온정성 아낌없이 다바쳐 내 젊은 청춘 오직 가족을 위해 살아 왔었고 자식들 다 제 살길 열어주고 이제 둘만이 남은 노후의 부부 인생 살아가고 있으면서 이제 노후의 가정에 심각한 문제점들이 노출되어가고 있음을 볼 수 가 있었다.
남존여비의 사상이 지배해오든 시대가 지나 여성상위시대로 접어들면서,여성의 권위가 신장되고 가정에서도 여성의 목소리리가 높아지고 점차 남자들의 권위가 위축되면서 남자들은 여자가 하자는대로 따라야 가정이 편안하였고 가정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고개숙인 남자가 되어가야만 했었다.
30 여년간의 공직생활을 마치고 명예로운 정년퇴임을 하였다.아무런 사고없이 무사히 공직생활을 마쳤다는 사실은 자신은 물론 주변 친지들로 부터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으며, 특히나 돌아가신 선친께서도 참으로 장하다 라고 극찬해 주셨다.오직 사랑하는 내 가족 위해 한눈 팔지않고 열심히 살아 왔고 주변사람들로 부터도 선망의 대상으로 우리를 우러러 봤었다.그때에는 우리가정에 존경과 사랑과 믿음의 세가지 요건이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가 다 가춰져 있었다. 나는 아내를 지극히 사랑했고 그리고 신뢰했다.또한 열심히 살아가는 아내를 존경했다. 공직에 있을때 어렵사리 준비한 개간지 2 만평도 아내 이름으로 소유권 등기를 하였고 현재살고 있는 아파트도 아내 이름으로 되어있어 부부는 일심동체로 여기며 살아오고 있었으며.오직 나에게는 국가에서 매월 지급되는 연금이 나의 기본생활비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였다.
정년퇴임후 친지들도 찾아보고 한동안은 편안한 세월을 지내고 있었으나 그생활도 잠시뿐! 외출하고 친구라도 만날려면 수중에 용돈이 필요했고 그러다보니 집안에 앉아 TV 나 보면서 세월을 보냈다. 아내의 입장에서 볼때 얼마나 따분하겠는가— 얼마나 심난하게 생각 되었는지자식들 보는 앞에서 여지없이 자존심이 손상 되는 언투로 방에가서 자라고 핀잔을 주는때가번번히 있을뿐만이 아니라 직장에 있을때와는 달리 말투가 아주불친절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나의 자존심을 깔아 뭉개는 것이였다.
또한 정년퇴임당시 20년 분만 연금으로 돌리고 나머지는 현찰로 수령했으나 현금관리는 아내가 맡아서 관리 하였기에 어떻게 사용했는지 -- 자가용 뽑아서 내가 운전하다가 큰애한테 넘겨주고 막내한테 한대 뽑아주고 3.000 만원을 빚 내어서 큰딸 결혼 시키고 막내 결혼시킬때 빚내어 아파트 입주시키고, 이런모든 가정사를 아내의 의견대로 따라주며 그런대로 세월이 흘러갔다. 최근에는 영광에 있는 농지가 포장도로에 편입되자 2.000만원의 현금을 수령했는데도 나한테는 일언반구도 없다가 내가 사용처를 되뭇자 생활비용및 각종 빚갚는데 사용 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3 가지 기본요소가 상실되고 있는 시점에서 가정의 행복이 보장될수 있겠는가?
또한 가정생활이란 명목으로 쥐꼬리 만한 연금에 눈독이 옮겨 항시 불만이 쌓이고 있는것이 눈에 보이는데 난들 편할리 있겠는가 --- 침묵으로 세월을 보내면서 탓하지 않고 그저 나의 노후인생 내가 지키며 살아가고 있을뿐이다.
남들은 외국 관광 여행을 다녀왔다고 자랑하지만 나는 국내여행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이렇게 노후인생이 서글퍼질수 있단말인가 ?
인천에 살고있는 큰딸 한테서는 엄마한테 잘해야만이 아빠한테 더 잘하겠다고하니 어떻게 잘해야 할것인지 내 노후 인생 접고 오로지 지엄마 뜻대로 해줘야만이 속성이 풀리려는지 내인생 덤으로 살아가는 인생!
그래도 저희들에게 부담주지않고 건강하게 살고 있다는 자체가 고마웁게 생각 하련만,살다보면 알게 될날이 있을것이다.
나는 아내를 한편 고맙게도 생각해 본다.노후 늦게나마 나의 인생에 눈을 뜨게 해줬다는것!
만약에 나의 인생 내가 찾지못했다면 얼마나 비참한 인생의 말로에 후회 막심 할것인가?
한편 아무것도 모르고 남편만 믿고 살아오든 아내 입장을 생각해 보면은 안타깝고 측은한 생각이 들지만 어쩌겠나 -- 서로가 가슴아픈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남들처럼 많은 돈 축재하여 아내한테 예전대로 잘해주었으면 아내는 흠 잡을데 없는 착하고 얌전한 아내란것을 왜모르겠나! 그런생각이 들면 자꾸만 내 마음이 약해지는 느낌이든다.
버리자 버려! 약한 생각이란 이제 나에겐 있을수없어,아무도 나를 대신 살아 줄순없어,오로지 나에겐 매월 나오는 연금 50 프로의 지분으로 나름대로 건강히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아내의 입장에서는 생활비가 턱없이 부족하다고 말없는 저항의식이 숨겨져있어 가정엔 항상 먹구름만 끼어있을뿐이다.그것은 바로 정다운 대화의 단절이 지속 되고 있을뿐---
내가 만약 생활의 여유가있어서 아내의 마음대로 원만히 경제적인 뒷바라지를 해 줬다면 아내는 예전처러럼 선량한 아내로서의 직분을 잘해 왔을지 생각해본다.
정년퇴임후 집에서 놀고 있을때 외로움과 가족으로부터의 배신감 그리고 갈등과 분노 이러한모든것들이 종합되어 폭발되는 순간 나는 가정이란것을 망각하고 오직 나라는 자신에 집착하게 되고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광야를 해매고 있었다. 울안에 가친 망아지는 활동에 제한을 받고 살아오지만 광야를 해졌고 달리는 망아지는 거칠게없어 자연의 대광장 에서 마음껏 대지를 달리며 자연의 섭리대로 살아오고 있었다.
정신적인 우울증은 물론 신체적인 각종 병세도 차츰 건강해지면서 자신의 인생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갖이게 되었다.
4 첫눈 내리던 날
금년 들어 첫 눈이 내렸다 . 푸른 갑옷으로 도도하게 펄처졌던 메다세퀘이아 가로수 거리도 어느 덧 찬바람에 산산이 흐터져 지금은 패잔병병의 무장 해제된 병영의 모습처럼 앙상한 가로수 거리를 거닐면서 ,
바라보이는 금성산은 하얀 눈에 덮여 존엄한 위세를 보이며 세월의 무상함을 더욱 실감하게 하고 있다 .
함박눈이 엄청 쏘다진다 . 외투 깃을 세우고 0 0 버스 역 까지 눈을 맞으며 그녀를 마중 나갔다 .
가냘픈 그녀의 몸매는 나를 매혹시킨다 .지루하고 외롭고 삶에 맥이 풀리다가도 그녀를 보면 마음이 부풀어 오른다 .
오늘따라 그녀는 더욱 예뻐 보였다 . 검정색 정장에 짙푸른 블라우스 , 애련하고 간냘픈 세련된 모습을 보고 있으니
그동안 지루하고 외롭던 마음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느낌이다 .
왜 그럴까 ? 내가 외롭고 삶에 지쳐있기 때문일까 ? 그녀와 나는 만나면 만날수록 깊어가는 정감을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다 . 생동감이 넘치는 두 사람의 맞남은 하늘이 맺어준 인연으로 알고 행복한 추억을 많이 장식하고 십다 . 어떻한 약속이라도 틀림없이 지키는 믿음 , 두 사람의 대화는 종일 있어도 실타래에서 나오는 명주실처럼 끝이 없다 .
식사를 마치고 함박눈을 맞으며 약 1 km 정도의 “ 매타세콰이어 ” 거리를 거닐었다 . 푸르렀던 지난 가로수거리를 걸었던 때보다도 함박눈을 맞으면서 걸어오는 발거름은 마냥 즐겁기만 했다 . 첫눈은 온 산천에 하얗게 쌓여 , 우리들의
사랑을 축복해 주는 했다 .
5 사랑은 바람처럼
날씨가 맑고 화창하다 . 이제 얼마 있으면 봄이 올 것이다 . 그녀의 전화를 받고 공원으로 갔다 . 먼저 나와 운동하고 .
있는 그녀와 숩속을 거닐었다 . 대나무 숲 양지바른 햇살아래 그녀와 앉았었다 .
숲 향기가 향긋한 그녀의 냄새와 어울려 더욱 행복했다 . 작년가을 이곳에 왔을 때는 뻐꾸새가 울었다 . 뻑꾹새와 사랑은
공통된 감정을 연상시키는 듯싶다 .
너무나도 고요하다 못해 적막할 정도로 말이 없던 순간 , 사랑의 감정은 가슴속 깊이깊이 정감이 느껴졌다 .
햇볕애 반사된 그녀의 하얀 피부 ! 세대를 초월한 사랑 , 영원히 사랑하리라 생각했지만---
나의 인생 오직 가족 위해 살아 왔고 노후의 우울증은 물론 갈등과 방황의 소용돌이 속에서 해매고 있을때 그녀와의
그녀와의 만남은 우연이 아닌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 안니였는가 싶다 . 심성이 고운 그녀는 남들이 보기엔 예쁜 어굴이 아니다 . 그러나 나의 눈에는 개성미가 있어서 모두가 예쁘다 . 그 중에서도 제일 예ㅃ쯘곳이라면 고운 마음씨이마 .
그 마음에 강력한 사랑의 힘이 셈솟는 것이리라 .
노인은 외롭다 . 나도 70 이 닥아오는 노인이다 . 처자식 다 있어 아무런 걱정 없는 현실이지만 , 외로운 것은 어쩔수 수 없다 .
어느날 감자기 외로움과 배신감에서 갈등과 분노 발악과 파탄의 진일보 상테에서 아무도 해결 해주지 못할 불행의 기로에 있을 때 , 어둠속에서 환한 등불을 만난 듯 그녀는 나의 진로에 사랑의 얼을 심어 주고 길을 열어 주었다 .
이 세상에서 나를 이해해 주고 가정으로 유도 해주려는 착한 여인이 어디 있겠는가 ? 누구엔가 나의 외로으\ㅜㄴ 환경과 심정을 호소하고 싶어도 그러한 상대가 없었다 . 그런데 겨에겐 내 심정을 호소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
점 점 세월이 흘러 갈수록 인간미가 물신 풍기는 그녀에게 나는 깊은 정감이 들었다 .
세월이 갈수록 만나면 만날수록 깊은 감정은 바로 이것이 진실한 사랑이란 것을 느끼게 되었다 .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것이다 . 그리고 희열과 활력과 생동감이 넘치게 되어 젊음이 재생되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 언 세월의 종착점에 가면은 인간은 물론 모든생물은 사멸하기 마련이다 . 다만살아가면서 건강하개 살다가 가는 것이 노이들의 희망사항일 게다 . 사라질때까지 주변사람에게 부담 없는 삶은 바로 건강인 것이다 .
이 세상 혼자 탱났다가 ㅎㅗㄴ자 돌아가는 길 누구한테 의지 할 것인가 ? 자신외엔 아무도 없다 .
건강에 대한 방법은 바로 걱정 없이 항상 기쁘게 살아가는 것이다 . 오늘 이렇게 생동감있게 살아가는 비결은 바로 그녀의 나에 대한 영원으로 승화되는 사랑의 힘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
고달프고 힘이 살질 때 용기가 생기고 힘이 솟구치는 충전기 역활을 해주고 있는 것 아닌가 생각되다 .
아무에게도 가슴아픈 심정을 호소하지 못하고 속이 터질 것만 같다가도 ,그녀의 목소리만 들어도 마음이 편하다 .
이 세상 다 할때가지 사랑해 주고 싶다 . 영원한 저 세상에서 까지 다시 만나고 싶다 . 〔 인생은 짧고 사랑은 영원하다 〕
추억은 바람처럼 스처 지나간다 . 바람 , 바람 , 바람 , 그녀와 나는 숫한 바람이 스쳐가며 사랑의 깃발을 나부꼈다 .
깃발은 바람에 나부껴야 아름답다 ,
사랑은 추억이 있어야만 더욱 아름답다 ,
아름다운 추억은 영원하리라
그 녀와 나의 사랑의 추억은
나부끼는 깃발에 바람 이였다 .
영원으로 승화 되는 바람 이였다 .
진 조일 함께 있어도 지루하지 않는
우리 두사람 ! 그녀는 오후 늦게 서야
바람처럼 사라져갔다 . 다시 바람은 불어올것이다 .
3 노후의 가정
미운정 고운정 다 격고 이제 46 년이란 세월이 흘러 갔다 . 젊었을 때 처럼 서로 존경하고 사랑하고 믿음이 재생 될때 비로소 노후의 행복한 가정이 이루어 질것이다 . 정년퇴임후 소일 거리가 없어 집안 에서만 쉬고 있을때 아내의 따뜻한 말 들이 외롭고 서글픈 심정을 달래 줄수 있을 테이지만 자존심을 상하는 말들은 싸늘한 정감없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부부의 정은 점 점 멀어지고 드디어 미듬 마져 살아져간 지금 ! 다시 한번 옛 시절-- 동경의 대상으로 바라 볼 뿐이다 .
또한 노후의 정감 있는 생활 “패턴” 을 유지 했더라면 외롭고 서글픈 삶은 없었을 것이다 .
우울증에 시달리며 고달픈 삶을 탈피 하고자 천주교 성당에도 열심히 다녀 보았지만 아무런 효험이 없었다 .
나 는 비로소 매일 아침 마다 일찍 일어나 518 공원을 산책, 운동하고 음악이 있는 홀 에 가서 리듬에 마춰 춤도 추었다 .
그러던중 세로운 맞남이 있어 활기를 되 찾게 되었고 그 후 부터 완전히 우울증은 사라지고 나의 건강도 서서히 좋아 졌다 .
이젠 아내를 소중히 보고 내 건강 지키며 주변 사람 에게도 부담주지 않고 다시 한번 세로운 마음 으로 노후의 가정을 다져가면서 살아가고져 한다 .
후회없는 행복한 삶 (연속)
그후 부터는 다시는 정신과 병원에 가자는 소리를 하지 않했다 . 난는 고민 할수 바께 없다 .내 노후 인생을 보니 용돈이 필요하고
아내의 요구대로 가정을 따르자니 나의 용돈이 없어 이래 저래 고민 하였지만 한번 결심한 내 여생 후회없는 행복한 삶을 살기로 결심을 하였다 어느날 갑자기 아무도 모르게 소리 없이 훌적 떠날때에는 명예도 사랑도 미움도 다 부질 없는것 빈손으로 왔다 반손으로 떠나는 남은 인생 건강하게 살면서 얼마나 아름다운 추억을 남기고 살았는 야가 더 소중한것이 아닌가 한다 .남여 구분없이 좋은친구 맞나서 산이 좋으먼 산으로 가고 바다가 부르면 바다로 가서 하고 싶은 취미생활 마음껏 즐기며 후회 없는 행복한 삶 건강하고 보람되게 살아 가고져 한다 .
2 후회없는 행복한 삶
도대체 행복이란 무엇인가 ?
왜 사람들은 행복한 인생을 추구하고 있는가 ! 물론 사람마다 개성의 가치관에 따라 어느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
행복 (happiness) 이란 생ㄴ활속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뿜을 느끼는 흐뭇한 상태라고 기록 되어 있는것을 보았다 .
행복한 가정 속에 행복한 인생이 있다 . 그렇다면 불행한가정 속엔 행복이란 존재할수 없단 말인가 !
행복이란자신의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창조할수 있고 또 느낄수 있는 다양성이 존재 한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
인생 70 고개를 넘으면 덤으로 사는 인생이다 .예날 같았으면 사람의 수명이 60 도 못되어 사망하였기때문에 환갑 잔치란갓이 유행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 하지만 지금은 80 이 넘어도 잔치 축하연을 여는 풍습이 사라저 간지 오래 되었다
핵가족시대로 접어 들면서 사람들이 가정에대한 의식 구조뿐만이 아니라 부모에 대한 효 사5ㅏㅇ의 개념마져도 점차 변천되어 가고 있다는 시대적 흐름을 빨리파악 하지 못하고서는 노후인생에 갑작히 불어 댝치는 생활속의 충격을 간당하기 힘들것이기때문에 사전에 마음의 준비를 와 자신을 관망하고 살아가는 지혜가 요구되고 있는것이다 .
마침내 빛고을 건강타운에서는 시대적 흐름을 일찍 간파하고 노인들의 복지 향샹을 위해서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이야 말로 축복 받을 일이라 아니 할수 없다 .
노인들의 4 (苦) 의 하나가 무위 ( 無爲 ) 이곳에 나와 자신ㅢ 취미에 따라 마음껏 여생을 즐긴다는 것은 얼마나 축복 받아야할 자선 사업인가 ? 일찍이 이러한 복지 시설이 있었더라면 내가 격고 있는 가정의 불화는 없었을 것이다 .
나의 여생 후회 없이 건강하고 즐겁게 남에게 부담 주지 않고 살아 간다 는것은 매우 중요하고 보람된 일 이라고 생각 된다 . 〈 웃으며 즐겁게 살면 엔돌핀 (endorphain ) 이란 “ 홀몬” 이 분비되어 생활에 활력을 주고 더욱더 기분이 좋아 건강하고 장수의 비결이 된다고한다 〉 나는 이러한 사실을 임 실감하고 있었고 또한 실천하고 있었다 .
가정이란 생활 환경속에서 끊임없이 밀려오는 “스트래스” 는 나에게는 엄청난 신체적 변화를 주었다 .
언날밤 아내와의 심각한 언쟁에서였다 . 아내는 현재 생활비용으로서는 도저히 살아가기가 어려운 형편이니까 나 더러러 생활비를 더 부담하라는 것이다 .
나는 지금까지 열심이 가정을 위해 살아 왔고 이젠 남은 인생 의무에 시달리며 살아 갈순 없어 ,이젠 권리를 주장하면서 살아 갈 거야 -
오가는 대화속에서 속이 터질 것만 같았지만---대화의 해결도 못본체 내 방으로 와서 잠자리에 들었다 .
지난 흘러간 세월속의 여러가지 영상들이 “ 파노라마 ” 처럼처럼 뇌리를 스처 갔다 .
나보다도 나이가 적었던 서로알고 지낸 모 컴퓨터 학원생친구가 심장마비로 밤새 아무도 모르게 세상을 떠났다 는 말을 듣고 자꾸만 머리에 떠올랐다 .
또 엇그제 나의 동갑인 친구가 위암으로 전대 화순병원에 입원 했다기에 병 문안차 찾아가 봤는데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
나 또한 혈압이 80-180 까지 오르고 있지만 쉽사리치유되지 않는다 . 어렵사리 잠이 들었다 . 잠자리도 편치가 않했다 .
아침 일어나 보니 덮고 있던 이불 위에 붉은 피가 흘러 있었다 .그래도 일단 아내한테 알렸다 .아스피린이 들어간 혈압약을 장기 볼용 해서 그런것인지 ? 아내와 가자는 대로 가까운 “ 메디컬쎈터” 병원으로 함께갔다 . 피 검사 . 소변검사 ,심전도검사, 를 해 봤으나 아무런 이상 없이 정상 이였다 .
나 또한 혈압이 80-180 까지 오르고 있지만 쉽사리 치유되지 않는다. 어렵사리 잠이 들었다 .잠자리에도 편치가 않했다 .
아침에 일어나보니 덮고있던 이불위에 붉은 피가 흘러있었다 .그래도 일단 아내한테 알렸다 .아스피린이 들어간 혈압약을 장기 복용해서 그런것인지 ? 아내와 가자는 대로 매디컬쎈터 병원으로 함께 갔다 .피 검사 소변검사 심전도검사를 해 해 봤으나 아무런 이상 없이 정상이였다 .
신체의 건강 “ 리듬” 상태는 의사가 잘 알겠지만 자신이 더 감지 할수 있는 것이다 .
나는 나의 건강을 위해서 절대 스트래스 를 가져서는 안 될 것이것을 뎌욱 실감 하게 되었다 .
이 세상 혼자 왔다 혼자 가는 인생 ! 나 역시 나의 의무를 성실이 수행 하였고 이제 남은 것은 건강하게 살다가 부담 없이 떠나가려는 것이 나의 마즈막 남은 노후의 삶의 희망인데---
예로 부터 처 자식 자랑 하면 팔불출이란 말이 있다 .팔출부소리를 들어도 아내의 자랑을 하고 싶다 ,
그 녀는 매사가 완벽 주의자다 . 조금도 허술한데가 없이살아 오면서 생활능력도 깔끔하고 아이들 성장 과정에서 남부럽지 않게 잘 보샬펴 주었다 .
그래서 그녀를 철덕같이 믿고 있었으며 남의 지탄 받을 일이랑 어예 생각 조차 할수 없고 항상 바륵 살아 온 아내였다 .
그러한사람이기때문에 그녀는 나더러러 정신과 병워에가서 정신감정을 해 보자고 누차 주장해 왔었다 .그녀의 생각에는 나의 사고 방식이 옛날같지 않고 중년기 열심이가족위해 살아오뎐 그러한 남편이 아니라서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 나는 지극히 정상이고 미래를 보는 예지를 갖이고 있음에도 그녀의 눈에는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
그 녀의 말데로 정시과 병원에 가서 걈정을 받았다 . 젊은 여자 의사 . 나 는 아내로 부터 누차 정신감정을 바랬고 또 나의 정당성을 으ㅏ한테 인정 받고 싶어서 함께 왓노라고 일단 서두를 꺼낸 다음 나의 심리적 인 아내와의 갈등 노후 인생에 대한 전반에 걸처서 조목조목체계있게 말했다 .
여의사는 한마디로 결론을 내렸다 . 이러한사항은 제가 다룰 사항이 아니니 두사람이 잘 알아서 처리 하세요 ! 하 고 자리에서 일어 섰다 .
도 현 진 해 룡
1 . 나의 인생
먼저 빛고을 건강 타운 자서전 회고록 반 에서 은발의 향기 2집 문학 책자를 발간 한다 기에 기고문을 제출 하기를 나는 상당히 망서리지 않을 수 없었다 .
첫째는 남들은 저마다 자랑 스러운 일들이 많아서 온통 자랑 거리만 기술 하는데 나는 자랑 거리가 없다 .
둘째는 자랑 거리가 없지만 나의 좋지 않은 “프라이버시” 에 관한 문제 라서 선뜻 서면 제출하 기가 망서려 질수 밖에 없었다
셋째는 내가 굳이 자서전을 기록 제출 했을 경우 독자 들로 부터 몃 % 의 동감을 얻을 것인가 . 아니면 비난의 대상이 되어 나의 “ 이미지” 에 손상을 줄 것인가 ?
다만 나의 기록 자서전에 30 %만 이라도 동감 하는 독자가 생긴다면 나와 같은 동료를 얻게 되었다는 심정에서 대담하게 기술 하면서 독자의 동감과 비판과 선도와 방법을 바라며 이 책자에 기고 하고져 한다 .
우리 인간이 살아 가는데 있어서 행복한 가정이란 구성원 간에 가장 기본 요건인 존경과 사랑과 믿음이 있어야만 존재하는 것이고 또한 누구나 바라고 있는 자명한 사실이라 할수있다 .
이 세갖이 기본요건이 상실 되었다는 것은 누구의 잘못 이라고 하기 이전에 그 가정은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고 또한 누구나 바라고 있는 자명한 사실이라 할수 있다 .
먼저 그 원인과 결과를 분석해 봐야 할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 모든 어려움을 극복 하면서 아내와 자식들을 위해서 온정성 아낌없이 내 청춘 오직 가족 위해 살아왔고 자식들 살길 열어 주고 이제 둘만이 남은 노후의 부부 인생 살아가고 있으면서 가정에 심각한 문제점 들이 노출 되고 있음을 실감하고 있다 .
남존 여비의 사상이 지배 오든 시대가 지나 여성 상위 시대로 접어 들면서 여성의 권위가 신장되고 가정 에서도 여성의 목 소리가 높아 지고 점차 남자 들의 권위가 위축 되면서 남자들은 여자가 하라는 대로 따라야 가정이 편안 하였고 가정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서는 어쩔수 없이 고개숙인 남자가 되어야 만 했다 .
30 여년간 공직생활 을 마치고 명예로운 정년 퇴임을 하였다 . 아무런 사고 없이 무사이 공직 생활을 마쳤다는 것은 자신은 물론 주변 친지들로 부터도 매우 자랑 스럽게 여기고 있었으며 특히나 돌아가신 선친 께서도 〔 참으로 장 하다고 〕 라고 극찬해 주셨다 . 오직 사랑하는 내 가족 위해 한눈 팔지 않고 열심이 살아 왔고 , 주변 사람들로 부터도 선망의 대상으로 보였었다 .
그떼에는 우리 가정에 존경과 사랑과 밈음의 세갖이 요건이 갖춰져 있었다 .
나는 아내를 지극히 사랑했고 그리고 신뢰 했다 . 또한 열심이 사라 가는 아내를 존경했다 .
공직에 있을때 어렵사리 준비한 개간지 2 만 평 도 아내 이름으로 소유권 등기 하였고 현제 살고 있는 “ 아파트” 도 아내 이름으로 되어 있어 부부는 일심동체 로 여기며 살아 오고 있었으며 오직 나 에게는 국가에서 지급되는 연금이 기본 생활비로 유지하고 있을 뿐 이였다 .
정년 퇴임후 친지들도 찾아보고 한동안 편한한 세월을 지내고 있었으나 그 생활도 잠시뿐 ! 외출하고 친구라도 만나려면 용돈이 필요 했고 그러다 보니 집안에 앉아 “ TV ” 나 보면서 세월을 보냈다 .
아내의 입장 에서 볼때 얼마나 따분 하겠는가 ! 그러나 쥐꼬리 만한 연금에 생활고에 힘 드렀지만 그런대로 다복하게 살아 왔었다 .
남 들은 외국 관광 여행을 다녀 왔다고 자랑 하지만 나 는 국내 여행도 제대로 하지 못 하면서 이렇게 노후의 인셍이 서글퍼질수 있단 말인가 ! 내인생 덤 으로 살아 가는 인생 ! 그래도 자식들 에게 조금도 부담 주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 가고 있었다는 것을 살다 보면 알게 될 날이 있을것이다 .
나는 한편 노후 늦게 나마 나의 인생에 눈을 뜨게 해 줬다 는것 ! 고맙 게도 생가 해 본다 .
만약에 나의 인생 찾지 못 했다면 얼마나 비참한 노후의 말로에서 후회 막심 할것인가 - 버리자 버려 , 약한 생각이란 이제 나에겐 있을순 없어 -아무도 나를 대신 살아 줄순 없어, 오로지 나 에겐 매월 나오는 연금 50%의 지분으로 나름대로 건강히 살아 가고 있다 .
하지만 아내의 입장에서는 생활비가 턱 없이 부족 하다고 말 없는 저항 의식이 숨겨져 있어 가정에 항상 먹구름만 끼어 있을뿐이다 . 그것은 바로 정다운 대화의 단절이 지속 되고 있을뿐---
내가 만약 생할의 여유가 있어서 아내의 마음대로 원만히 경제적인 뒷바라지를 해 줬다면 아내는 예전처럼 선량한 아내로서의 직분을 잘 해 왔을지 생각해 본다 .
정년퇴임후 집에서 놀고 있을때 외로움과 가족으로 부터의 배심감 그리고 갈등과 분노 ,이러한 모든것들이 종합되어 폭발되는 순간 나는 가정 이란 것 을 망각하고 오직 나 라는 자신에 집착 하게 되고 고삐 풀린 망아지 처럼 광야를 해매고 있었다
울안에 갇친 망아지는 활동에 제한을 받고 살아 오지만 광야를 해집고 다니는 망아지는 거칠게 없어 자연의 대 광장에서 마음껏 대지를 달리며 자연의 섭리 대로 살아 오고 있었다 .
정신적인 우울증은 물론 신체적인 각종 병세도 차츰 건강 해지면서 나의 인생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갖이게 되었다 .
황혼 잔치
도 현 진 해 룡
80년 전 1933년도 음력 5월 22일 당시 양력으로는 6월 14일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 .할머니께서 나를 보고 귀가 커서 오래 살겠다고 항상 귀엽게 여겨주시던 말씀이 떠오르며 어느덧 이 나이에 오게 되었는지 세월의 무상함을 다시 한번생각하게 된다 .
60십 환갑이면 장수했다고 환갑잔치를 하던 시절이 엊그제인데 시대가 변하여 의학의 발달과 식생활의 풍요로움으로 인해 인간수명이 연장 된 것인지 “인생칠십고래희” 란 옛말이 되었다 .
세계의 장수국가로 알려진 일본여자의 평균수명이 87세라고 하니
아마도 머지않아서 100수의 장수시대가 올 거라고 본다 .
금년에는 양력으로 치면 7월11일이 내 생일이라서 우리 가족들은음력으로 생일을 치루기 때문에 아직까지 아무런 축하 소식이 없는데 빛고을 노인건강타운 문학반 이명란교수로부터 금년 팔순 잔치를 청강선생과 함께 축하 “파티”를 하면 어떻겠냐고 연락이 와서 6월 15일 (금요일) 로 날을 받았다 .
이날 우리문학반회원들은 오전수업을 마치고 자가용기타“버스”를
이용하여 화순 매정선생 농장으로 모였다 .
농장에 집은 임시 건물임에도 갖출 것은 다 갖추고 있어 냉장고에서 수박 오이 등 여름과일 등을 꺼내어 모인 회원들에게 내놓고 밖에서는 솥에다 닭을 삶느라 통나무 장작불을 피워 연기를 내며 마치 큰 잔치나 벌이는 듯 여자회원들은 음식 장만에 분주 하다 .
우리들 회원 17명은 수박 등 여름과일 등을 먹으면서 정성껏 장만한 음식을 둘러싸고 동그랗게 모여 앉았다 .
청강선생과 나는 주빈으로서 나란히 앉아 화원들로부터 축가와 박수 속에 준비한 선물까지 받았다 .청강과 나는 고맙다는 인사말을 하고 회원들은 돌아나가면서 나름대로 장끼자랑도 하고 몇 마디씩 자기소개를 하면서 신분을 밝혀 상호 침목을 도모했다 .
일주일 금요일에 한번 씩 만나 교육 끝나면 각자 흩어져 친밀도가 없었지마는 이번 모임에 더욱더 친밀한 인간관계가 이루어진 기회가 된 것이라고 생각 된다
아마도 우리 문학반처럼 정다운 모임을 갖는 반은 없을 것이다 . 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정이 많고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성향이 있어 다른 반에 비할 바 없이 모임의 친밀도가 높다고 본다 .
특히 이명란교수의 노인들에 대한 너그러운 배려와 생활 속에 함께하는 문학교육이라 서로 어울리는 분위기가 회원들에게 좋은 인상 주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 된다 .
평소 문학에 취미가 있었지만 어디에서 나의 소질을 계발할 수 있었겠는가,
빛고을 노인 건강타운 문학반의 만남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너무나도 감사드리고 싶다 .
오늘 팔순 잔치장소를 마련하여 추진해주신 매정, 유정, 회원님을
비롯하여 친 형제처럼 온 정성을 다하여 배풀어 주신 여러 회원님들 모두가 감사할 뿐이다 .
이 기뿐 날 한 가족처럼, 그래도 인정이 메마른 이 사회에 아직까지는 우리 빛고을 노인건강타운 문학반의 모임이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영광스러운 이날을 널리 자랑 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