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어의 눈물'이 위선이라면 '낙타의 눈물'에는 무슨 표지를 달아주어야 할까? 지난 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낙타의 눈물(The Story of the Weeping Camel)>을 본 사람이라면 자신 있게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색적인 영화 제목과 몽골의 고비 사막이 그 배경이라는 점에 이끌려 어제 아내와 함께 이 영화를 보았으니, 나도 물론 그 정답을 알고 있지만 여기서는 잠시 침묵하기로 하자.
영화는 몽골의 남부, 고비 사막의 외딴 곳에서 양과 염소와 낙타들을 기르면서 살아가는 한 유목민 가족의 삶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된다. 나이든 할아버지는 사막에서 말라죽은 삭정이들을 주워 땔감을 모으고, 할머니는 파오(유목민들의 원통형 천막집) 안에서 음식을 만들면서 며느리가 맡기고 나간 어린아이를 돌보고, 젊은 며느리와 그 남편은 밖에서 가축들을 돌보느라 여념이 없다. 거친 사막 저 멀리 지평선 쪽으로 붉은 해가 질 무렵 사내는 집안으로 들어서기 전, 출산이 가까워져 신음하는 어미 낙타를 살펴보지만 새끼가 나올 기미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어미 낙타의 배에서 삐쭉 삐져 나온 새끼의 가느다란 발들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머리는 보이지 않고 다리부터 나오고 있으니, 난산이다! 어미 낙타는 밤새 힘을 썼던 모양인지 기진해서 쓰러져 있고, 새끼는 그 상태에서 더 나올 기미가 안 보인다. 젊은 아들 내외와 할아버지는 한편에서는 고통스러워하는 어미를 달래고 또 한편에서는 새끼의 다리와 때마침 나온 새끼의 머리를 살살 잡아당겨 가까스로 아기 낙타를 끄집어낸다. 아직 핏덩이가 묻어 있는 아기 낙타의 털 색깔이 어미의 누런 황토색과는 전혀 다른 흰색이다. 희귀한 변종이 태어난 것이다.
가족들은 흰둥이 아기 낙타의 탄생을 기뻐하지만, 정작 어미 낙타는 갓 태어난 자신의 새끼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너무나 고통스럽게 낳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렇게 힘겹게 낳은 새끼가 평생 한 번도 보지 못한 흰둥이 병신 자식이어서 실망한 것일까. 새끼에게 젖을 물리는 것은 고사하고 자신의 옆에 다가오는 것도 거부하는 어미 낙타의 모습은 비정하기까지 하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젊은 아들 내외가 새끼 낙타를 끌어다 억지로 어미 낙타의 젖을 물리려고 하면 어미 낙타는 새끼에게 뒷발질을 해댄다. 세상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새끼 낙타가 이제 굶어죽게 생겼다.
할아버지는 민간 요법을 따르기로 하고, 손자 둘을 인근 마을에 보내 도움을 청한다. 한나절 낙타를 타고 사막을 건너 도착한 마을에서 어린 둘째 Ugna는 난생 처음 TV를 보고 그 재미에 푹 빠져서, 집에 돌아와서 우리도 TV를 사자고 어른들에게 말한다. 할아버지는 TV는 좋지 않은 환영(glass image)일 뿐이라며 Ugna의 요구를 일축한다. 더군다나 그 곳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외진 곳이니 어떻게 TV를 본단 말인가. Ugna는 건전지로 작동되는 할아버지의 구식 라디오를 곁눈질하며 건전지로 작동되는 TV는 없냐고 구시렁댄다. 그에게는 할아버지가 밤마다 구수하게 들려주는 낙타의 전설들도 이제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은 재미없는 재방송일 뿐이니, 마을에서 잠깐 보았던 TV 브라운관에 반짝거리는 디즈니 만화의 유혹은 어쩌다 얻어 쓰게 된 아디다스(adidas) 모자에 비길 바가 아니다.
하루나 이틀이 지난 후, 마을에서 달려온 오토바이 한 대가 이들의 집 앞에 멈춘다. 굶어 죽어가는 새끼 낙타를 구하기 위하여, 그리고 산후 우울증에 시달리는 어미 낙타를 돌보기 위하여 마침내 수의사가 온 것일까. 천만의 말씀! 오토바이에서 내리는 사내의 손에는 악기 케이스가 들려 있다. 그는 마을의 음악 선생님이자, 몽고의 전통 악기로 여겨지는 두 줄 현악기의 연주자이다.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고 난 후, 문제의 그 모자(또는 모녀) 낙타를 치료하기 위한 의식이 시작된다.
가까이 붙잡아 맨 어미 낙타와 새끼 낙타 앞에서 마을에서 온 연주자는 현악기를 연주하고 젊은 며느리는 어미 낙타의 몸을 쓰다듬으면서 그 곡조에 맞추어 나지막하고 다정하게 노래를 부른다. 처음에는 저항하던 어미 낙타는 음악 소리에 조용해지더니 이내 눈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한다. 이윽고 마치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기라도 하듯이 어미 낙타의 두 눈에서 뚝뚝 눈물이 떨어진다. 화면 속에 클로즈업된 어미 낙타의 눈은 소의 눈처럼 크고 둥글고 맑아서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다. 할아버지가 손자들에게 말해 준 낙타의 전설처럼, 신(神)께서는 낙타에게 정말 소의 눈을 준 모양이다. 옛날에 신께서 하늘에 여러 동물들의 이름을 붙인 황도 12궁 하늘길을 만들었더니 이를 부러워한 낙타가 자신도 하늘길에 올려달라고 간청했단다. 그러나 이미 일을 마친 뒤라 낙타의 소원을 들어줄 수가 없었던 신께서는 그 대신 황도 12궁 동물들의 특징들을 하나씩 뽑아내어 낙타에게 주기로 했는데, 낙타의 눈은 바로 소(牛)로부터 빌려온 것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언제 보아도 슬퍼 보이는 소의 눈을 지니게 된 낙타는 눈물을 뚝뚝 떨구고,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내 눈에도 눈물이 아롱거린다. 노래가 끝나고 연주도 끝난 후, 새끼 낙타를 어미 낙타의 곁으로 끌고 가 젖꼭지를 물려본다. 신기하게도 어미 낙타는 이제 더 이상 자기 새끼를 물리치지 않는다. 새끼 낙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맘껏 양껏 어미의 젖을 빨아먹는다. 비로소 자신의 새끼를 받아들인 어미 낙타 옆에서 새끼 낙타가 내지르는 울음 소리에는 이제 더 이상 슬픔이 담겨 있지 않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가족들의 얼굴에도 비로소 안도의 웃음이 보이고, 파오 안에서 뭔가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어린 둘째 Ugna의 입은 다른 가족들보다 훨씬 더 벌어진다. 그의 앞에 지지직거리는 작은 TV가 놓여 있는 것이 보인다. 파오 바깥에서 전파를 잡으려고 이리저리 둥근 접시 모양의 안테나를 돌리는 그의 형 Dude의 모습이 보인다. 처음에는 물리쳤으나 마침내 새끼를 받아들인 어미 낙타처럼, Ugna의 부모 역시 어린 자식의 소원을 끝까지 야멸차게 거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 내가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낙타의 눈물'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챘을 것이다. 누구나 생애의 한번쯤은 보았을 어머니의 눈물, 자주 보여주지는 않지만 어쩌다 숨기지 못하고 한두 번쯤은 자식들에게 들켜버리는 어머니의 그 속 깊은 사랑을 나는 이 영화에서 보았던 것이다. 그 사랑은 낙타의 눈물 속에서도 있었지만, 젊은 아낙이 사막의 모래 폭풍 소리가 너무 무서워 울음을 터뜨린 계집아이를 꼭 안고 불러주는 낮고 고운 자장가에도 담겨 있고, 어미 낙타를 마치 자기 자식 어루만지듯 쓰다듬으며 불러주는 아름다운 노래 가락에도 담겨 있었다. 화면에는 보이지 않지만, 고집 센 할아버지와 젊은 남편을 설득해 중고 TV를 들여놓도록 한 것도 분명 이 젊은 아낙이었으리라.
<낙타의 눈물>이 다큐멘터리 스타일로 찍었으면서도 마치 잘 연출된 한 편의 드라마를 보듯이 가슴 뭉클한 감동을 안겨주고 있는 이유가 이렇게 어미와 새끼 낙타의 이야기를 통하여 그로부터 유추되는 인간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의 깊은 사랑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소박하고 단순하지만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이 영화에는 동물과 인간 사이에 흐르는 따스한 사랑도 있고, 젊은 내외의 양쪽 부모님을 함께 모시고 살아가는 3대의 가족간에 말없이 교류되는 사랑도 있다. 또한 낙타의 치료 의식을 위하여 사막의 외딴 곳에 떨어져 살고 있는 이 가족의 집을 기꺼이 방문한 음악 선생님처럼, 세상은 항상 고립이 아니라 연대를 통하여 그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낸다는 진실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이렇게 다층적인 의미망을 담고 있기에 우리가 이 영화 속에서 들여다본 눈물을 흘리고 있는 낙타의 눈은 그 모습을 유심히 바라다보고 있는 가족들의 눈으로, 다시 낙타를 위하여 정성 들여 연주를 하는 마을에서 온 음악선생님의 눈으로까지 확대된다. 동물적인 모성애는 가족들간의 사랑으로, 다시 공동체적인 연대의식으로까지 확대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 속에 나오는 낙타들의 모습은 인간의 마을과 집에 함께 깃들어 사는 정주형(定住型) 동물인 소의 모습을 더 닮아 있다. 눈은 말할 것도 없고 부스스한 털에 덮인 그 모양새와 누런 털의 색깔까지도 그렇다. 우리가 흔히 '낙타' 하면 떠올리는 모습이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광활한 모래 사막을 건너가는 약대의 모습이라는 점, 즉 낙타는 소보다는 유목형(遊牧型) 동물인 말과 더 가깝게 여겨진다는 점을 생각하면 조금 의외롭다. 할아버지가 손자들에게 들려주다가 어린 Ugna가 "그거 열 번도 더 들은 이야기잖아요?"라고 제지하는 바람에 끝까지 들려주지 못한 낙타의 전설을 더 들어본다면, 분명 신께서 낙타를 위하여 말(馬)로부터 빌려온 것은 튼튼한 다리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그 다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다. 그 대신에 진통에 신음하는 어미 낙타의 얼굴과 눈, 어미로부터 거부당해 낙담한 어린 새끼 낙타의 몸짓과 표정에 카메라의 초점을 맞춘다.
사랑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부지런하지만 표정이 없는 다리로는 그걸 말할 수 없다. 사랑은 어느 동물이든지 그 얼굴에, 제 새끼를 핥아주는 그 주둥이에,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는 그 눈동자로부터 온다. 새끼의 공포를 잠재우기 위해 나지막하게 불러주는 어미의 자장가 노래와 말없이 흘리고 있는 그 눈물로부터 온다. 그 사랑은 제 새끼에게만, 제 자식에게만 머무르지 않고 점점 커지면서 넓어지는 그런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