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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편대로 드리는 일천 번제(一千 燔祭) 사람의 값이 왜 이렇게 다릅니까? (레 27:1-8, 왕상 3:1-15, 눅5:1-11)
어떤 사람은 3억을 받고 어떤 사람은 3천만 원도 못 받았다니 사람값이 왜 이렇게 다릅니까? 어떤 사람은 비행기 타고 가다가 하늘에서 죽었고 어떤 사람은 시골 경운기에 치어 길 바닥에서 죽었기 때문입니까? 남자와 여자가 다르고 노인과 어린이가 그 값이 다르다니 말이 됩니까? 묻고 싶은 것은 하나님께서 입김을 불어넣어주신 것은 똑같은데 사람의 생명 값이 왜 이렇게 각각 다른가 하는 질문입니다. 자동차 보험이나 생명 보험을 들고 그 보험을 계산할 때도 사람에 따라 다르기는 다릅니다. 나이에 따라서 금값 은값 똥값의 차이가 있습니다. 어떻게 사망했느냐에 따라서 보험액수가 80대 20, 60대 40 그 비율이 각각 다릅니다. 어떤 경우는 보험을 전혀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럼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물의 값도 다릅니까? 어떻게 다르고 왜 다른지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본문을 통해 그 답을 찾아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이르라 만일 어떤 사람이 사람의 값을 여호와께 드리기로 분명히 서원하였으면 너는 그 값을 정할지니 네가 정한 값은 스무 살로부터 예순 살까지는 남자면 성소의 세겔로 은 오십 세겔로 하고 여자면 그 값을 삼십 세겔로 하며 다섯 살로부터 스무 살까지는 남자면 그 값을 이십 세겔로 하고 여자면 열 세겔로 하라. 일 개월로부터 다섯 살까지는 남자면 그 값을 은 다섯 세겔로 하고 여자면 그 값을 은 삼 세겔로 하며 예순 살 이상은 남자면 그 값을 십오 세겔로 하고 여자는 열 세겔로 하라. 그러나 서원자가 가난하여 네가 정한 값을 감당하지 못하겠으면 그를 제사장 앞으로 데리고 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값을 정하되 그 서원자의 형편대로 값을 정할지니라.“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시대는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남녀평등의 시대입니다. 어려서부터 그렇게 배워왔고, 현실이 또한 거의 그렇습니다. 구약시대와 조선시대 이래 남녀의 성차별이 너무 심했지만 현대는 법으로 남 녀 평등을 보장하고 있습니다. 여자가 남자와 동등한 지위가 되고 평등을 누리게 된 것은 불과 백여 년 전부터입니다. 그 전에는 성경말씀처럼 남자와 여자의 성차별은 아주 심했습니다. 오랜 역사의 흐름 속에서 보면 아주 최근에 와서야 남여 평등이 보장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차별이 많습니다. 남녀평등의 시대가 되어가면서 몇 십 년 전부터 소위 전통보수주의와 진보주의 사이에 갈등이 생기고 논쟁의 중심주제가 되었습니다. 이제 남녀 누구나 가장이 될 수 있고 호주가 될 수 있습니다. 영국 여왕뿐만 아니라. 정당대표가 될 수 있고 여자수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남자가 여자를 돕는 배필이 될 수도 있다는 진보주의자들이 박수를 받고 있습니다. 이제 남자 일 따로 있고 여자 일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능력에 따라서 형편에 따라 남녀 구별하지 않고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아이를 키울 수도 있고 행주치마를 두르고 집안일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위치가 바뀌고 관계가 새롭게 설정되면서 전통적인 가치관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남편과 아내의 일이 바뀌고 남녀 관계에 혼돈이 오면서 결혼관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이혼은 날로 늘어나고 자녀문제가 사회문제화 되고 있습니다. 앞으로 사회문제 가정문제 자녀들 문제 이런 문제들을 잘 극복해 나가야 진정한 평등사회가 올 것입니다. 성경말씀은 유교와 그 뿌리가 분명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남녀가 유별하다는 것을 대전제로 대부분 남자를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애초에 하나님께서 여자를 지으신 것이 남자를 돕는 배필로 지으셨고, 한 가정의 가장은 당연히 남자였으며, 심지어는 족보에서조차도 아내의 이름들은 생략된 채 아버지와 그 아들들의 이름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12지파 족장도 모두 남자이고, 예수님의 12제자도 모두 남자입니다. 얼만 전까지만 해도 교회 목사와 장로도 모두 남자였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을 보면 예루살렘성 열두 문 위에 이 열두 지파의 이름이 쓰일 것이고, 성곽 열두 기초 석에는 열두 사도들의 이름이 쓰일 것이라고 증언합니다. 남자들 속에 여자가 있고 남자이름위에 여자 이름이 있으면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부끄럽고 죄송한 말씀이지만 과거의 생활 속을 들여다보면 여자는 가족 아니라 가축처럼 여길 때가 많았습니다. 묻습니다. 남녀가 진정 동등한가? 성경말씀은 동등하다고 말씀하면서도 차별을 둘 때가 많습니다. 교회도 여신도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교회도 부서장은 거의 남자로 되었습니다. 사실 부서장이나 장로 목사가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자리이기에 이름이 먼저 나오든 나중에 나오든 별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남자든 여자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면 사실 동등합니다. 세상에서는 회장 부장 그 직책이 명예이기에 누가 먼저냐 자리문제가 되지만 교회 안에서의 직책은 일을 하는 소의 멍에와 같기에 이름이 먼저이든 나중이든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남녀차별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남자든 여자든 힘이 더 센 사람이 멍에를 메고 끌고 가면 좋습니다. 그럼 모든 면에서 동등하다면 무엇 때문에 왜 하나님께서 여자와 남자를 만드셨습니까? 여기 차별과 구별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여자와 남자를 만드신 것은 차별에서 그 모습이 다른 게 아니요 구별해서 다르기 때문입니다. 귀하고 아름다운 모습은 빨간색이냐 노란색이냐 그 색을 구별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은 남자이든 여자이든 그 색깔에 따라서 특징이 있고 특색이 있고 인권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오늘 말씀가운데 서원제물의 값을 다르게 매기고 있는 것입니까? 조금 차이는 있지만 여자의 값이 남자의 절반쯤 됩니다. 아담 남자 갈빗대 하나를 빼서 화와 여자를 만들어서 그렇습니까? 남자 절반을 빼서 여자를 만들었다면 동등하겠습니까? 본문에 또 하나 물어보고 싶은 문제가 있습니다. 유교의 전통은 아무리 나이 많아 늙어도 어른은 어른입니다. 도자기나 장신구 물건도 오래되면 더 값이 나가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준을 보면 60세 이상 노인은 젊은이의 그 값이 1/3 일정도입니다. 젊은 사람들이 어른들을 공경해야 하고, 노인들의 지혜가 젊은이들보다 더 많은데 무엇으로 그 값을 정했기에 노인들은 젊은이의 삼분의 일밖에 안된단 말입니까? 오늘 말씀을 보시면 여신도 여러분과 권사님들은 억울하실 겁니다. 성경말씀을 보시면서 그 핵심이 어디에 있는지 깊이 생각하십시다. 아무 곳이나 낚시를 던지고 그물을 친다 해서 고기가 잡히는 것은 아닙니다. 낚시하기에 적당한 장소와 깊이가 있습니다. 깊은 곳에 그물을 던져야 고기를 많이 잡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밤새도록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제가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던지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질 정도가 되었습니다.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모두 와서 두 배에다 가득 채웠습니다. 두 배 모두 잠길 정도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묻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가운데 제일 중요한 핵심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그 정답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1번 시몬 베드로는 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았다. 2번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 3번 밤이 새도록 고기를 잡았다. 4번 말씀에 의지하고 순종하겠습니다. 5번 고기가 두 배에 가득 찼다. 여기서 어떤 말씀이 성경본문의 핵심입니까? 가장 귀하고 소중한 말씀이 무엇입니까? 보는 사람 눈에 따라서 듣는 사람 귀 에 따라서 다를 것입니다. 나는 어떤 말씀을 가장 핵심의 말씀으로 봅니까? 성경말씀의 뜻과 그 깊이를 잘 알아야 하나님의 음성을 바로 듣고 그 뜻을 따르게 됩니다. 오늘 말씀은 솔로몬의 일천번제에 대해서 그 깊이와 뜻을 공부하고 제물의 값이 각각 다르다는 레위기 마지막 27장 1절에서 8절 말씀의 핵심을 찾아보겠습니다. 솔로몬은 일천번제 제사를 어떻게 드렸습니까? '한 번'에 일천 마리를 번제로 드리는 제사입니까? 아니면 한 마리를 일천 번씩 나누어 천 마리를 드리는 제사입니까? 일천 마리의 양이나 소를 일천 번 나누어 한 마리 씩 드리는 것이 아니라. 일천 마리를 한 번에 드리는 번제가 솔로몬의 일천 번제입니다. 그 뜻을 자세히 보시면 번제는 히브리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제물을 불태워드리는 제사의 방법입니다. 솔로몬이 기브온에서 일천 번제를 드리자 그날 밤 하나님께서 꿈에 나타나 무엇을 원하는지를 물으신 성경말씀의 사건을 보시기 바랍니다. 많은 성도들이 '1천 번의 제사를 드린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일천 번제는 '1천 번의 제사를 드렸다'는 일천번 제가 아니라 '1천 마리의 생축을 한꺼번에 모두 불태워 제사 드렸다'는 일천 번제라는 뜻입니다. 한자로 보시면 더 확실합니다. 一千番 祭 일천 번의 제물이 아니라. 一千 燔祭 일천 마리의 번제입니다. 한문으로 솔로몬의 일천 번제(一千 燔祭) 의 번(燔)자를 보시면 차례나 회수를 가리키는 한 번 두 번 하는 번(番)이 아닙니다. 불사르다. 태우다. 사를 번(燔)자 번제(燔祭) 입니다. 그래서 일천 번제는 일천 번 드렸다는 횟수와 정성에 의미를 두는 것보다 일천 마리를 한 번에 번제로 드렸다는 큰 믿음에 핵심이 있습니다. 솔로몬의 일천 번제는 어려번의 정성보다는 일천 마리를 한꺼번에 드리는 솔로몬의 큰마음과 많은 정성에 있습니다, 성경말씀에 솔로몬이 왜 기브온 산당으로 올라갔는가. 그것은 그 산당이 그 시대에 가장 컸기 때문입니다. 그곳은 1천 마리의 번제물을 한꺼번에 불태울 수 있는 넓은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일 동안 매일 매일 바쳤다는 것은 솔로몬의 일천 번제와는 맞지 않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제사장도 아니고 매일 매일 3년 동안 일천 번 드리는 제사에만 골몰했다면 어떻게 왕국을 다스렸겠습니까? 일천번제는 솔로몬이 왕이 되고 나서 며칠에 걸려서 한꺼 번에 1천 마리의 양과 소를 번제물로 받쳤다는 뜻입니다. " 역대하1장: 5절과 6절 말씀을 보시면 “ 옛적에 훌의 손자 우리의 아들 브살렐이 지은 놋제단은 여호와의 장막 앞에 있더라 솔로몬이 회중과 더불어 나아가서 여호와 앞 곧 회막 앞에 있는 놋 제단에 솔로몬이 이르러 그 위에 천 마리 희생으로 번제를 드렸더라.”라고 확실히 증언합니다. 가장 귀한 헌물은 믿음입니다. 돈이나 인간적인 정(情) 때문에 기도가 응답된다고 생각한다면 말씀의 본뜻을 잘 모른 것입니다. 백만 원 헌금을 천 원씩 천 번을 하는 것과 한꺼번에 백만원을 드리는 제물 어떤 것이 일천 번제에 가까운 제물이겠습니까? 솔로몬은 왕이요 부자입니다. 일천 번을 나누어서 드린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왕도 부자도 어닌 우리들은 가난하기 때문에 일천 번을 나누어 드리는 정성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줄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제물은 레위기 본문 8절 말씀처럼 서원자의 형편대로 값을 정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입니다. 레위기에서 하나님의 뜻은 사람의 값과 제물의 값이 다르다는 것을 전하기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어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자녀들과 하나님의 백성들 사람의 값이 서로 다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의 값과 제물의 값이 다르다는 것을 전하기 위해서 레위기를 쓰셨겠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 중에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말씀이 말씀에 의지하고 순종해서 깊은 곳에 그물을 던졌다는 순종에 있는 것처럼 레위기 본문 말씀에서도 중요한 핵심의 말씀은 8절 말씀에 있습니다. “서원자가 가난하여 네가 정한 값을 감당하지 못하겠으면 그를 제사장 앞으로 데리고 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값을 정하되 그 서원자의 형편대로 값을 정할지니라.” 제물의 값은 서원자의 형편대로 값을 정하라는 말씀이 바로 레위기의 핵심입니다. 제물의 값은 서원자의 형편대로 정하는 것입니다. 가난한자는 에바 밀가루 분을 하나님께 드리고 좀 나으면 비둘기를 드립니다. 그러나 부자는 양과 소를 드렸습니다. 형편대로 값을 정한다는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시골에서는 고구마나 감자로 하나님 앞에 드리고 도시에서는 백화점의 선물 세트로 하나님 앞에 드립니다. 시골에서는 소박한 들국화를 하나님 전에 드리고 도시에서는 비닐하우스에서 키운 아름다운 양난을 하나님 전에 드립니다. 이것이 형편대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정성입니다. 공평하게 드리는 제물입니다. 제물을 드리고 성전을 섬기는 것을 증언하는 레위기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서원자의 형편대로 값을 정하는 것입니다. 말씀은 그 깊이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깨닫고 하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부자이시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부족함이 없으십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형편대로 값을 정하고 목적을 정하여 드리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솔로몬 왕의 양과 소 일천 마리의 많은 번제를 기뻐하시지만 우리 가난한 사람에게서는 일천 번의 번제를 나누어 드리는 정성의 번제를 기뻐 받으십니다. 나의 형편은 어느 정도입니까? 나의 형편이 밀가루 분을 드릴 정도입니까? 아니면 비둘기를 드릴 형편입니까? 양을 번제로 드릴 수 있는 형편이라면 양과 소를 드리는 정성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줄 믿습니다. 서원기도를 드리시는 여러분! 서원자의 형편대로 하나님 앞에 번제를 드리고 제물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형편대로 이 말씀이 레위기의 본 뜻 입니다. 샤일록처럼 인색한 감사와 찬양은 인색한 축복을 받게 되고 솔로몬처럼 분에 넘치는 감사와 찬양은 분에 넘치는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형편에 맡게 어떤 사람은 천 번으로 나누어 일천 번 제를 꾸준히 드리고 어떤 사람은 솔로몬처럼 단번에 큰마음으로 일천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 같은 사람은 체면이나 생각하고 머리로 계산하면서 하나님과의 약속을 전혀 지키지 않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다 보고 계시고 다 알고 계십니다. 분에 넘치게 일천 번제를 드리는 솔로몬 왕에게 하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기브온에서 밤에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어 하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솔로몬! 내가 너에게 무엇을 줄꼬? 솔장로 몬권사 너는 나에게 구하라. 이 때 솔로몬이 하나님께 간청했습니다. 하나님이시여! 저에게 백성들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할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시옵소서! 여기 솔로몬의 기도가 마음에 꼭 드신 하나님! 오래 살겠다는 장수도 많은 부도 구하지 아니했습니다. 원수의 생명을 멸해주시라고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 재판을 잘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하였으니 솔로몬!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모두 너에게 주겠노라.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큰 그릇에 크신 축복을 담아주셨습니다. 먼저 구할 것을 먼저 구하고 먼저 할 일을 먼저 할 줄 아는 사람이 솔로몬처럼 큰 사람입니다. 부귀영화의 축복도 받을 줄 믿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번제를 드리고 예배를 드리면서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눈에 보이는 세상 것을 구하고 있습니까?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세상의 모든 것을 더하여 주겠노라. 이는 하나님의 약속이십니다. 먼저 구할 것을 먼저 구하고 먼저 할 일을 먼저 한다면 솔로몬처럼 더 많은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형편에 맞게 드리는 번제와 분에 넘치는 여러분의 감사에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 함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형편에 맞도록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드리는 제물을 기뻐 받으시는 하나님! 우리의 기도와 우리의 예배와 우리의 제물을 받아주시옵소서 차별하지 않으시고 정성을 기뻐 받으시는 하나님! 세리처럼 통회하는 심정을 드립니다. 솔로몬처럼 일천 번제를 드릴 수 있도록 많은 제물을 허락해 주시오소서 시간과 건강과 재물을 형편에 맞게 나누어 드리오니 기뻐 받아 주시옵소서 항상 감사와 감격의 믿음으로 드리오니 우리의 삶을 받아주시옵소서 2012년 감사와 감격이 넘치는 가정과 교회 안에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넘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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