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정 <피해라는 이름의 해피>
만난 첫날부터 결혼하자던 한 남자에게
꼭 한 달 만에 차였다
헤어지자며 남자는 그랬다
너 그때 버스 터미널 지나오며 뭐라고 했지?
버스들이 밤이 되니 다 잠자러 오네 그랬어요
너 일부러 순진한 척한 거지, 시 쓴답시고?
그런 게 시였어요? 몰랐는데요
너 그때 ‘두사부일체’ 보면서 한 번도 안 웃었지?
웃겨야 웃는데 한 번도 안 웃겨서 그랬어요
너 일부러 잘난 척한 거지, 시 쓴답시고?
그런 게 시였어요? 몰랐는데요
너 그때 도미회 장식했던 장미꽃 다 씹어 먹었지?
싱싱하니 내버리기 아까워서 그랬어요
너 일부러 이상한 척한 거지, 시 쓴답시고?
그런 게 시였어요? 몰랐는데요
진정한 시의 달인 여기 계신 줄
예전엔 미처 몰랐으므로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사연 끝에 정중히
호(號) 하나 달아드리니 son of bitch
사전은 좀 찾아보셨나요? 누가 볼까
가래침으로 단단히 풀칠한 편지
남자는 뜯고 개자식은 물로 헹굴 때
비로소 나는 악마와 천사 놀이를 한다,
이 풍경의 한순간을 시 쓴답시고
* * *
나는 이상형이란 말이 참 싫다. 그 속에 담긴 편협, 억압, 필연적인 오해가 싫다. 반면, 첫인상은 중시 여긴다. 나는 이제껏 첫눈에 반하는 체험을 한 번도 하지 못했다. 상대가 누구든지 첫 만남에서 호감과 거부감을 모두 발견한다. 그날의 호감이 관계를 지속시키는 데 도움이 되고, 그날의 거부감은 훗날 갈등이 생겼을 때 면역이 되어준다. 그래서인지 어지간해선 절교 같은 극단은 좀체 생기지 않는다. 이젠 나이마저 먹었으니 첫날부터 “너는 내 운명!”을 외치는 일 따위 영영 생길 일 없겠다.
이 시의 문제적 인간은 ‘여자를 만난 첫날부터 결혼하자던’ 남자이다. 나랑은 아주 거리가 먼 캐릭터. 첫인상에서 이상형을 거쳐 결혼상대로 판단하기까지 하루가 채 걸리지 않는 남자. 그는 상대 여성이 시를 쓰는 사람임을 익히 알고 있었다. 이 시는 그런 남자의 첫인상이 어떻게 참혹한 이해 또는 냉정한 이해를 거쳐 이별선언으로 가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그의 눈에 그녀는 순진해 보였을 게다. 시를 쓰는 여자라서 더욱 그래 보였을 테고. 그런데 겪어 보니 별로 순진하지 않다. 여자가 되바라지거나 못된 성격이란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남자의 기대치가 비현실적이었을 게다. 하여 그녀의 순진한 언행은 ‘순진한 척’으로 폄하된다. 이상형의 부작용.
그는 시가 감성뿐 아니라 지적 활동의 소산임을 안다. 그의 첫눈에 그녀는 지적으로 보였을 테다. 그런데 겪어 보니 별로 지적이지 않다. 여자가 지적이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그네를 침대에 누이고 사이즈보다 크면 자르고 작으면 늘려 죽이던 프로크루스테스. 그 침대에 딱 맞는 사이즈가 아니다 보니 그녀의 지적이어서 때로 건조해지는 특성은 ‘잘난 척’으로 폄하된다. 이상형의 부작용.
그의 눈에 그녀는 로맨틱해 보였을 게다. 그는 시가 시인들의 별난 인식에서 비롯된다는 것도 알았을 테다. 그런데 겪어 보니 다른 사람들과 별로 다를 게 없다. (내 지인의 남편이기도 한 어느 서양인이 날더러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시인인데도 아주 정상적이고 건강하시네요.” 뭐?) 그녀의 살짝 별났을 뿐인 언행은 너무 쉽게 ‘이상한 척’으로 폄하된다. 이상형의 부작용.
고작 한 달을 겪어 놓고선 상대가 제 이상형이라는 틀에 들어맞지 않는다 해서 잔뜩 피해의식을 느끼는 사람 이야기. 그 어긋한 관계 속에 시가 들어가 있을 뿐, 그 자리에 음악, 미술, 운동 등이 들어가도 비슷한 풍경이 생겨났을 게다.
시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이렇게 나온다.
시(詩): [명사] 문학의 한 장르. 자연과 인생에 대한 감흥·사상 등을 음률적으로 표현한 글.
늘 순진하고 언제나 지적이고 항상 별난 사람이 아닐지라도 자연과 인생에 대해 감흥이 일면 누구나 쓸 수 있는 게 바로 시이다. 음악, 미술, 운동 등도 사전에 특별한 사람이 하는 활동이라는 조건은 없다.
행복의 필수조건이 서로 판이한 사람끼리는 친구는 될 수 있어도 연인은 될 수 없다. 남녀관계는 다른 인간관계보다 더 예민하다. 그렇게 중요한 필수조건을 첫인상에서 결정지으려 하는 사람은 앞으로도 줄곧 개자식(Son of a bitch)으로 끝나는 관계의 악역을 맡을 수밖에 없다고 나는 감히 단언한다. 사실 개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만.
유용선 『현대시와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