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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지역 연수 후기
프롤로그
한동대학교 최고수산업전문가 제3기 과정은 6개월 남짓의 단기 과정이다. 그럼에도 아주 잘 짜인 교육과정, 그 중에서도 일본 연수는 어쩌면 가장 중요한 과정일 것이다. 26명의 원우들이 가기로 결정 된 곳은 관동지역이다. 적합한 연수 지역을 선정하기 위한 논의 속에서 나는 처음부터 관동지역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까닭에 내심 반가운 결정이었지만, 연수 일정이 내내 마음에 걸려있었다. 식품회사를 세우고 1여년 만에 그간 추진해 왔던 홈쇼핑 출시가 목전으로 다가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쩌랴. 어떠한 약속도 약속은 약속이다. 3박 4일의 일정만큼 구멍 날 부분을 메우기 위해 밤을 새우는 방법 외에는 어떠한 방법도 없었다. 결국 사흘 밤낮을 꼬박 새우고 입던 옷차림 그대로, 짐 하나 소지하지 않고 관광버스에 올라야만 했다. 그로부터 넉 달, 나는 수산관련 학과가 하나도 개설되어 있지 않은 한동대학교에서 수산의 이름을 걸고 이만한 과정을 개설시킨 열정적인 도형기 교수의 열화 같은 압력을 받아 이 후기를 쓴다.
모든 기행문은 그날그날 쓰거나 다녀온 직후가 가장 알찬 것이 되는 것이지만 나는 어쩌다 넉 달 전의 기억을 더듬고 있는가! 시간의 흐름은 끊어지거나 역순 내지는 뒤섞여 흐르지 않는 것이지만 도무지 원 일정이 생각나지 않는다. 다행히도 오랜 시간이 흐르면 여행지는 생각나지 않아도 같이 다녔던 사람들은 생각난다더니 얼굴들은 여전히 생생한데 아무래도 함께 했던 일들은 분명치 않다. 따라서 기억에 남은 부문들만 골라 쓰기로 한다.
내가 오른 관광버스에는 26명의 원우 가운데 딱 절반, 13명만 탔다. 그만큼 우리는 생업에 바쁘다. 경북 울진에서 옹기를 짓는 도지정 인간문화재 오재근 고문님의 화사한 웃음이 반갑다. 이 분은 일본에서 내내 내가 모시겠노라고 자청한 분으로 참으로 외길 인생을 올곧게 아름답게 살아내신 분이다. 그런 분에게 나는 둘째 날 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고행의 길을 선사하고 만다. 지금도 미안하고 미안한 일이지만, 설 대목이 끝나고 울진 간 길에 이 분을 찾아 참으로 따스한 환대를 받았다. 난 이 날의 환대를 기억하기 위해 ‘울진 옹기장이’라는 시 한 편을 남겼다.
그리고 울진 땅의 신지식이자 우리 최고수산업전문가과정의 박종만 회장님, 맑은 미소가 우리의 가슴을 긍정적으로 만드는 권태종 부회장님, 그의 생애 내내 무엇이 그를 만들었을까? 도무지 웃음기라고는 찾기 힘든, 늘 뿔난 표정을 짓는 이재용 사무국장님, 반면에 두상이 너무 작아서일까 만면에 웃음이 넘쳐나는 김민철 원우님, 죽도시장의 명물, 개복치로 십 수 차례 방송을 탔고 한쪽 귀에만 매단 금빛 귀걸이가 소박한 웃음으로 더욱 빛나는 박정훈 원우님, 그러고 보니 우리 3기 원우들 중 유일하게 가시버시이신 김상철, 김정옥 내외가 신혼여행 이후로 처음 여행을 떠난다는 듯 설레는 표정이 역력하다. 과수원을 한다고는 했지만 아무래도 사이비 역술연구원 원장으로 여겨지는 이영성 도사님의 미소 또한 화사하다. 잘만하면 우리 모두 비행기를 타지 않고도 일본 땅으로 데려가줄지도 모를 일이다.
그간 국내 답사에서 번갈아 참여해온 신포항수산의 형제 중, 가위 바위 보로 이겼을까? 윽박질러 왔을까? 오늘은 형님이신 정길재 원우가 보인다. 청소전문업을 하시는 김정화 원우는 내가 미리 부탁한 과메기 보따리를 가리킨다. 일본에서 먹을 과메기 맛은 어떨까? 나는 잊지 못한다. 일본에 도착한 첫날, 현지 관광버스 속에서 먹었던 과메기의 맛은 천상의 맛깔이었다. 이빨 사이로 흐르던 그 쫀득쪽든한 미각을!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아무래도 우리와 갑장인 듯한데 도무지 늙어가는 티가 안 나는 김순옥 원우가 정말 예쁘게도 웃고 있다. 게다가 이 이해할 수 없는, 섹시한 바디라인을 유지하는 비결은 대체 뭐란 말인가? 김순옥 원우를 잘만 연구하면 생리가 끊어진 이 땅의 여인들에게 불청객으로 찾아와 남자도 여자도 아닌 제 3의 성, 울퉁불퉁한 아줌마의 라인을 만들어버린다는 대사증후군을 퇴치할 수도 있겠다 싶다.
이렇게 나를 포함하여 13인의 원우들이 서로의 인사를 나누는 중에도 우리를 담당하는 도형기 교수의 손전화는 쉴 새가 없다. 이미 모든 예약은 끝났을 텐데 또 누가 더 갈 수 있나 확인하시는 것은 분명 아닐 터. 하여간 도합 14인은 일본의 나리타공항에 내렸다. 아니, 내려버렸다.
일본 현지의 가이드는 한국인이었다. 믿을 수 없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정말 토종 일본인의 생김새였다. 미혼이라고 할 때까지만 해도 그것만큼은 믿어줄 수 있었지만 처녀라고 했을 땐 둘 다 믿을 수 없었다. 차라리 그녀가 일본인이고 한국말을 잘 해서 한국 관광객 전담 가이드가 되었다고 했다면 한 가지는 믿었을 것이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지 모르겠다면 이렇게 말해두겠다. 그녀는 정말 못 생긴 얼굴의 소유자였다. 그런 그녀가 우리 원우들을 향해 제 이익을 챙기려는 노골적 시도가 용서 받지 못한 건 근본적으로 그녀의 생김새에서 연유한다.
결론적으로 그녀는 자신이 가이드를 하고 있는 우리 같은 단체에 겁도 없이 나선 사례였다. 두 가지로 압축하자. 우리는 최소한 일본의 수산업 현황에 대한 연수를 나선 단체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지 못했다. 나는 일본어를 제대로 할 줄 모르지만 그녀의 통역은 수산과 관련한 일반적인 용어도 이해하지 못한 수준이라 그녀를 내세운 우리 전체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또 한 가지는 그녀가 못 생긴 것은 차치하더라도 여성으로서 최소한의 피부 관리조차 포기한 수준이었다. 일본어로 말하자. 나는 내가 만난 어떤 한국 여인 중에서도 이렇게 더러운 ‘모지방(もじばん)’을 본 적이 없다. 내가 격하게 가이드의 얼굴을 더럽다고 입에 담는 것은 그가 자신에게 정성을 쏟지 않는 만큼, 자신의 고객을 위한 최소한의 정성마저도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을 나서면 허기부터 찾아온다. 다들 배가 고팠다. 급기야는 편의점 앞에 관광버스를 대고 요깃거리를 찾아야했다. 요즈음은 우리나라 편의점에서도 더러 오뎅을 팔지만 일본은 이미 오래전부터 편의점 거개가 오뎅을 판다. 종류도 다양하지만 일본의 오뎅 국물은 정말 일품이다. 나는 특히 곤약을 당면처럼 실로 만들어 묶은 시라타키(しらたき)와 복주머니 모양의 킨차쿠(巾着, きんちゃく)를 좋아한다. 속 재료로 들어간 찹쌀떡과 오뎅 국물이 밴 유부와 함께 씹히는 식감은 참으로 오묘하다.
그런데 한없이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놈이 눈부시게 흰 빛깔로 눈길을 잡고 있다. 이게 뭘까 싶은데 도형기 교수께서 이름을 일러준다. 한뺀(はんぺん). 부드럽게 입안에서 녹는데 마치 마시멜로우 같다. 노른자를 뺀 계란찜인 듯한데 대구나 도미 같은 담백한 생선 맛깔이 은근하게 배어 있다.
사실 일본에 도착한 첫 날, 무슨 일정에 쫓기었기에 끼니를 놓쳐 그렇게 시장했을까? 도무지 가물가물하다. 한마디로 우리 모두는 시쳇말로 ‘폭풍흡입’ 수준을 넘어 도륙 수준이었다고 기억한다. 편의점에서 걷어온 먹거리는 순식간에 동이 났으나 무언가 아쉽기만 한 데 별안간 김정화 원우가 과메기를 꺼내 펼쳐놓았다.
과메기는 눈을 뚫어 말린다 하여 관목어(貫目魚)란 한자어에서 비롯된 말이다. 그 날 관광버스에서의 과메기는 우리의 허기 내지는 낯선 맛깔에 적응하지 못한, 아니 적응될 수 없는 우리의 목구멍을 시원하게 뚫어준 너무나 친숙한 맛이었다.
일본 수산청 수산종합연구센터
앞서도 말했지만 나는 원래의 일정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서 떠오르는 장면을 중심으로 후기를 쓴다. 일관성을 확보하기는 어렵겠으나 그래도 몇몇 장면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건더기가 저절로 생겼으면 한다. 일종의 옴니버스 형식이라도 되었으면 좋겠다.
전체적으로 수산종합연구센터는 오래된 나머지 너무 낡았다. 그런데 이 건물 이상하다. 지나치게 깨끗하다. 일부러 복도와 벽을 이루는 모서리와 화장실의 높은 창턱까지 손가락으로 문질러보았더니 먼지 한 톨 묻어나지 않는다. 뭐 이런 놈들이 다 있는지. 놀랍지만 배우고 싶지는 않다. 사람 사는 세상은 조금은 느슨한 맛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여간 나는 일본을 알아 가면 갈수록 놀라움 바로 뒤를 따라 지독하다는 느낌이 쫓아온다. 긴자의 한 잡화점에서 700엔에 두 켤레 산 양말, 나도 모르게 이 양말을 가장 자주 신고 있다. 그간 수십 번은 빨았을 터인데 도무지 신축성과 질감이 흐트러지지 않고 있다. 동경대학에서 산 360엔짜리 만년필의 필기감은 또 왜 이리도 부드러운지.
일본인들은 저들이 만든 모든 제품에는 대충이 없다. 수산종합연구센터라는 공공기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먼지처럼 늘 마음이 쓰이는 것도 어쩔 수 없다. 말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엉터리 중국산보다 더 형편없는 제품과 세계 최고의 스마트 TV를 생산하는 우리나라가 나는 더 좋다. 하지만 수온 28.5도에서도 녹아 없어지지 않고 자라는 김 양식 기술을 개발하는 일본은 경계해야 한다. 우리 수산업계의 누군가는 이런 일본을 따라잡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동경대학교
일본이 낳은 세계적인 문호, 나쓰메 소세키의 모교. 1877년에 개교하여 세계 10대 대학의 반열에 있는 동경대학교. 정확하게는 혼고(本鄕)캠퍼스를 찾았다. 아카몬(赤門, 붉은 문)과 이 대학의 마크이자 은행나무 길이 유명한 동경대학교는 내가 우겨서 일정에 포함시킨 곳이다. 하지만 아카몬과 은행나무 길은 동경대학을 떠올리게는 하되 이 대학이 지닌 가치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나는 혼고캠퍼스 내에 자리 잡아 일본의 정신을 고스란히 웅변하고 있는 야스다 강당과 산시로 연못을 흠모한다. 야스다 강당은 일본 학생운동의 정신과 상처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던 6.25 덕택에 패전국에서 고도의 경제성장을 구가하던 전체주의 국가 일본을 민주주의 국가로 그 인식의 반전을 이끌어 낸 단초가 야스다 강당의 불탄 흔적으로 새겨져 있다.
산시로 연못(三四郞池)의 ‘산시로’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로 잘 알려진 나쓰메 소세키의 또 하나의 명작으로 작품명이자 소설의 주인공 이름이기도 하다. 일본 메이지시대 말기 시골 청년 산시로가 대학에 들어와 겪게 되는 사랑과 비애, 방황을 그린 작품이다. 주인공이 정신적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통해 급속도로 변해가는 사회와 문명, 인간성을 비판한다. 가을의 막바지에 서 있는 은행나무 길은 눈부신 노랑으로 동경대학의 정신을 빛나게 하고 있다.
요코하마 베이사이드 마리나
Yokohama BaySide Marina는 왜 온 것인지 모르겠다. 다만 아내로 인해 알게 된 요코하마대학의 다케다요코 교수의 전화번호를 저장하지 못한 것만 아쉬웠다. 한 채에 1억엔을 호가하는 요트도 부지기수라는 직원의 설명보다 요트장을 도배한 방부목 틈새 어디에도 이물질 하나 보이지 않는 것이 또 거슬린다.
하지만 베이사이드 뒤쪽에 자리 잡은 라멘집에 줄지어선 사람들이 이채롭다. 여기다 싶어 우리 모두는 자리를 꿰차고 앉았는데 잔뜩 기대했던 라멘은 그 면발과 국물 맛이 예상을 뛰어넘었다. 이 면발은 분명히 수제인데 쫄깃한 것을 보면 분명 수타면이다. ‘수타면(手打麵)’이라고 떠올리고 나니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수타'란 일본어로 '데우치(手打ち)'라 읽고 '국수 같은 것을 손으로 쳐서 만든다'는 뜻인데 우리가 ‘수타’라 읽고 ‘면’을 붙여 쓰는 말이니 사실은 국적 불명의 단어인데도 나는 그 단어를 떠올린 것이다.
국물은 여태껏 맛 본 적이 없는 정말 독특한 맛깔이다. 언뜻 보기엔 짬뽕 같은데 맛은 사뭇 다르다. 느끼한 맛을 참아내면 고소한 맛이 뒤따라오고 약간 얼큰한 매운 맛도 있는 걸 보면 영 짬뽕과 거리가 먼 것만은 아니다. 그러고 보니 짬뽕도 사실은 일본에서 들어온 음식이다. 19세기말, 나가사키(長崎)에서 사해루란 중국 음식점을 경영하던 진평순(陳平順)이란 사람이 당시 가난해 변변히 먹을 것이 없었던 중국인 유학생들을 위해, 돼지뼈를 우려낸 국물에 면과 요리하고 남은 야채와 어패류를 넣어 만든 것이 시초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음식이 대단히 인기를 얻어 지금은 나가사키를 대표하는 명물 요리가 되었고, 오늘날 나가사키가 일본 최고의 중화가가 된 것도 바로 이 짬뽕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이 나가사키 짬뽕 국물은 돼지 뼈를 우려내 만든 것이라 당연히 설렁탕처럼 뽀얀 국물인데, 그것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고추기름을 넣어 얼큰하게 바뀐 것이다.
그렇다면 이 라멘 국물 맛은 어쩌면 한국의 짬뽕 국물 맛을 본 이가 나가사키 짬뽕 국물에다 고추기름을 더하고 땅콩소스를 합쳐 만든 것이지도 모를 일이다. 하여간 우리 일행 중에 이 라멘을 다 비운 이는 겨우 두 명. 우리나라에선 한 법조인이 가카새키 짬뽕이라 부른 것보다 더 못한 대접을 받은 셈이다. 내 입맛은 유별난가 보다. 난 정말 만족스러웠다. 왜 저 맛난 걸 저렇게 남긴다지 하는 표정들이 우리를 힐끗거리는 게 재밌다. 라멘의 양이 많아 함께 나온 아키바레 쌀로 지은 밥은 손도 대지 못한 것만큼은 미안했다.
이 베이사이드 주변은 유럽풍의 가게가 즐비하다. 아이쇼핑도 내키지 않는다. 지나치게 서구 지향적인 이런 일본은 싫다. 거리를 거닐다가 도시 상공인인 쵸닌(町人)들이 만든 일본의 전통 가게가 그리워졌다.
츠키지 수산시장
새벽 참에 모이라 했다. 동양 최대의 수산 시장 츠키지를 간다고 한다. 십 수 년 전에 맛본 다이와(大和) 스시의 맛이 오랜 세월을 무시하고 내 입안을 감싸고 있다. 대기실에는 이미 사람들로 북적인다. 두 번에 걸쳐 40명씩, 80명만이 츠키지의 참치 경매 현장을 견학할 수 있단다. 이 좁은 공간에 퍼더앉아 잡담을 나누는 얼굴들이 그야말로 인종 전시장 같다. 우리 옆에 앉은 남녀 한 쌍은 각각 호주와 이탈리아에서 왔다는데 이들이 너무 다정하다. 그야말로 글로벌 커플이라고 생각하고 더 이상의 상상은 하지 않기로 했다.
다행히도 우리 일행은 모두 첫 조에 포함되어 지루한 기다림은 면했다. 줄지어 따라가다 멈춰선 곳은 참치 경매 현장이다. 꽁꽁 얼린 참치의 피부가 츠키지 어판장의 공기와 만나 허옇게 서리를 입고 줄지어 누웠는데 경매 장면은 겨우 두 차례로 전부다. 무슨 어시장이 이렇게도 조용한가! 이 정도의 연출로 관광객을 끌어들이겠다고 기획한 놈은 대체 무슨 배짱의 화상인가! 여기 모인 관광객들을 우리의 노량진 시장에 데려다 놓는다면 그 역동성과 다양한 볼거리에 매료되고도 남을 것을,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관광 상품으로 만들어내는 일본인이라니!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나?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그런데 상인들 중에 젊은 여성 하나가 유독 눈에 띈다. 가만히 살펴보니 거개가 중장년의 남자들 속에 빛나고 있다. 할아버지인 듯한 백발의 노인과 함께 참치를 살피는 모양이 예사롭지 않다. 희한한 것은 이 젊은 여성 하나만 이름표를 달고 있다. ‘多古彩’. 다코아야라 불러야 하나? ‘多古’는 다코(문어)를 한자로 바꿔 만든 성이다. 하도 성씨도 많은 일본에서 多古나 岩志(이와시, 정어리), 平目(히라메, 넙치)과 같은 생선 이름을 성이 보이는 연유는 모르겠으나 어촌 집안임에는 틀림없겠다 싶다. 수대에 걸쳐 가업을 잇는 전통이겠지만 그 이름의 뜻이 문어색이 되는 것이니 참
재밌다. 그런데 아야는 1990년대에 이르면서 서양식 이름을 쓰는 풍조에 따른 것이니 이 젊은 여성의 이름은 하나의 흥미로운 오브제라고 해도 되겠다.
한 여성의 이름을 가지고 쓸데없는 생각의 유희에 빠지고 만 것은 볼 것도 없는 참치 어판장이었다 손치더라도 나의 실망은 일정을 이유로 다이와 스시의 맛을 보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에서 절정으로 치닫고 만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이 날 밤 대취하여 우리 일행 중에 가장 연장자이시자 내가 한 방에서 모시겠노라고 한 오재근 고문님을 고문하고 만다.
오다이바 해상공원, 긴자, 신주쿠
나는 기본적으로 지나치게 현대화 된 정갈하고 화려한 거리를 싫어한다. 하지만 오다이바 해상공원의 거대한 복합쇼핑몰이 상점마다 다채롭게 펼치는 디스플레이를 감상하는 즐거움을 좋아한다. 하지만 연전에 들러보았던 디스플레이와 별반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지진으로 인한 원전 사고 이후 도쿄를 비롯한 우리가 다닌 대부분의 밤거리가 많이 어두워진 만큼 오다이바의 화려함도 풀이 꺾일 수밖에 없다고 하나, 정밀하고 참신한 일본인들의 아이디어마저 정체되어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리고 명동을 넘어서는 번잡함, 그리고 활기 넘치는 신주쿠와 긴자는 여전했다. 딸기 네 개를 꽂은 꽂이가 200엔, 우리 돈으로 2,700원이라면 단체여행으로 마련된 지정 식당의 음식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쓸데없는 군것질은 삼가야 한다. 아니다. 사실은 어디를 가더라도 돈이라는 놈은 내가 괄시를 하면 종내에는 돈이 나를 괄시한다는 자수성가하신 장인어르신의 목소리가 불쑥 내 귓가에 들리곤 하기 때문이다.
일정 중에 마련된 식당 중에 무려 스무 종의 사케를 늘어놓은 뷔페에서 참았던 식욕을 불태우기로 한다. 다른 주류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로지 준비된 모든 사케를 맛보기로 한 나는 적합한 안주로 양념된 와규(和牛, 일본 소)를 골랐다. 일반적으로 와규는 육즙이 풍부해 우리 한우와 비견될 만하지만 다른 와규들은 이미 육즙이 많이 빠져 나간 터라 우리의 주물럭 같은 맛깔을 선사하는 양념육이 질리지 않았다.
뷔페답게 최고급 사케는 없었지만 기쿠 마사무네(菊正宗) 만큼은 명성 그대로의 맛을 만끽하게 했다. ‘사케’ 어원이 시가현립대학 명예교수이신 정대성 박사에 따르면 우리말의 ‘삭았다’에서 유래되었다고는 하나 연로하신 분들은 청주나 정종으로 부르시는 데 정종과 청주의 차이가 뭘까 궁금한 적이 있어 좀 짚고 넘어가자.
정종(正宗)이란 말도 수타(手打)처럼 일본어를 그냥 우리 말 한자어로 읽은 것이다. 일본어로는 '마사무네'라 읽는데, 이는 원래 사람 이름이었다. 일설에는 전국시대(1467-1603)의 맹장인 다테 마사무네(伊達正宗) 집안에서 쌀과 국화로 만들던 청주가 너무 맛있어, 사람들이 이를 '기쿠 마사무네(菊正宗)'라 부른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결국 청주를 만든 집안 이름이 정종인 것이다.
그렇지만 마사무네란 원래 청주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명검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한다. 가마쿠라(鎌倉) 시대(1185~1333) 말 오카자키 마사무네(岡崎正宗)란 도공(刀工)이 있었는데, 그가 워낙 칼을 잘 만들어 명검을 그의 이름을 따 마사무네라 불렀던 것이다. 마사무네가 오늘날처럼 청주의 대명사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훨씬 후대인 19세기 중반 이후의 일이다. 지금의 효고(兵庫)현 나다(灘)에서 청주를 만들던 양조 기술자 야마무라 다자에몬(山邑太左衛門)이 '마사무네'란 이름의 청주를 만들었는데, 이 술이 유명해지면서 '마사무네'란 상표명이 청주를 대표하는 말로 쓰이게 된 것이다. 마치 참이슬이 소주를 대표하는 말로 쓰이는 것처럼.
어쨌든 이 뷔페에서부터 마신 사케는 청주가 아니라 원래의 날 선 명검이 되어 돌아와 우리의 어르신 오재근 고문님을 고문하는 도구가 될 줄 어찌 알았으랴. 1899년에 문을 연 일본의 유서 깊은 비어홀 라이온(LION)을 거쳐 나는 내친 김에 다음 날 새벽까지 달렸었다. 평소에는 잠잠한 잠자리를 이루는 내가 만취하면 코골이가 심하다는 핀잔을 아내로부터 수도 없이 들은 터. 내 코골이에 이른 새벽에 일어나 전등 스위치를 찾지 못한 어르신은 옆방으로 옮긴다는 생각만으로 호텔 방문은 닫혔고 ‘밖으로 갇힌’ 신세가 되신 것도 모자라 조식권을 내가 갖고 있어 식사마저 포기하신 것이었다.
하꼬네
하꼬네의 온천수로 익힌 계란을 먹으면 젊어진다는데 우리 원우님들은 모두 관광버스에 올라 나만 기다리고 계셨다. 사고 한 번 제대로 쳤다. 어르신의 표정이 심상찮다. 나를 도우는 걸까? 온천이 찐 계란을 먹으러 줄지어 선 차량행렬이 하도 길어 곧장 아소노 호수로 직행한단다. 나는 내리자마자 마트에 들러 호수의 냉기로 추위에 떠는 어르신께 따끈한 커피를 들려드렸다. 화사하게 웃으신다.
권태종 수석부회장님이 커피 한 잔에 풀릴 걸 그리 역정을 내셨냐며 웃는다. 웃음은 전염력이 강하다. 모두가 만면에 웃음이 가득하다. 아소노 호수를 가르는 해적선에 올라 총을 뽑고 있는 해적 옆에서 올려다보는 모든 원우들을 향해 감사의 총알을 하나씩 박아드렸다.
즐거움을 회복하고 가르는 아소노 호수에서는 후지산이 보이지 않는다. 아쉽다. 여기가 가나가와현의 앞 바다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우키요에(浮世繪)’. 우키요에란 말은, '세속, 속세'란 뜻을 가진 ‘우키요(浮世)’와, '그림'이란 뜻을 가진 ‘에(繪)’가 합쳐진 말로, ‘인간들이 살고 있는 속세의 여러 모습을 그린 그림’이란 정도의 뜻이다. 요즘 말로 하면 풍속화라고나 할까?
이 우키요에는 에도 시대(1603-1867)에 시작된 새로운 미술 장르이다. 에도 시대의 지배 계급은 물론 사무라이라 불리는 무사 계급이었지만, 문화적으로는 이들과 전혀 다른 특징을 가진, 쵸닌(町人)들의 문화가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쵸닌이란 신분을 사농공상으로 나눌 때, 공과 상에 속하는, 즉 도시에 살고 있던 상공업자를 가리키는 말인데, 우키요에는 바로 이 쵸닌, 그 중에서도 에도에 살고 있던 쵸닌들의 대표적인 문화 중의 하나이다.
우리가 탄 해적선은 크게 두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VIP 구역과 일반인 구역, 방자하게도 일반인 구역의 선상에는 해적 놈이 총구를 우리에게 겨냥하고 있지만 VIP 구역의 선상에는 망원경이 설치되어 있다. 저 망원경으로 보면 후지산이 보일까? 풍경판화의 대가라 불리는 가쓰시카 호쿠사이(葛飾北齋)가 그린 ‘부악36경(富嶽三十六景)’, 즉 36군데에서 바라본 후지산의 모양을 그린 시리즈의 하나이자 가나가와 앞 바다에서 바라본 후지산을 그린 ‘가나가와 앞 바다의 파도(神奈川沖浪裏)’란 그림을 떠올리는 것은 높은 커다란 파도가 덮치기 직전의 긴박감을 클로즈업해서, 마치 카메라로 잡은 듯한 기발한 구도와 운필의 웅건함이, 보는 이를 경탄하게 만드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오늘은 평범한 도시 상공인들이 만든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에필로그
자신들이 이룩한 그 위대한 문화보다 유럽과 미국 귀신이 씌었는지 아일랜드 해적과 해적선을 만들어 아소노 호수에다 띄우고 이름깨나 날린다는 관광지마다 미국식, 유럽식으로 만들어 제치는 일본이 씁쓸하다. 아니 우리 역시 씁쓸하다.
나는 사라지거나 잊힌 전통식품 중에서도 생선을 이용한 절임류와 장류 제품 제조에 목숨을 걸고 있다. 굴비장아찌 이후로 생선을 이용한 생산 제품은 우리가 처음이다. 생선으로 절이고 장을 만드는 것은 매우 어렵다. 하지만 그 맛깔의 깊이는 상상을 초월한다. 우리의 선인들은 이런 맛깔을 즐긴 역사가 깊다. 내가 복원하여 생산하는 제품이 절임류와 장류인 만큼 일본 고유의 절임류와 장류들을 눈에 띄는 대로 모았다. 하지만 지나치게 과대 포장이다 싶을 정도로 포장의 달인인 이들이 자신들의 절임류 제품은 한결같이 비닐 봉투에 담아 다른 제품과는 격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천대 받고 있는 것이다.
일본 시장은 내가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미 이 후기를 쓰기 전에 우리의 최고수산업전문가과정은 끝났다. 겨우 넉 달 만에 어디를 어떻게 다녀온 지 가물가물한데도 누구와 다녔었는지는 생생하다. 이 인연을 소중하게 하여야 한다. 결국 사람만이 재산이다. 우리가 수료 이후의 모임을 논의하였을 때, 김순옥 원우는 이렇게 말했다.
“식기 전에 모입시다.”
첫댓글 글만으로도(아쉬운 사진...) 일본 관동지방 한 바퀴 여행하고 온 듯..라멘부터 사케까지.. 그새 일본 공부를 많이도
했구나 싶은게... 백미는 고문님을 고문한 사연~ㅋㅋ 여행 한 번 제대로 했겠다 싶스므니다~ 브럽스므니다~
덕분에 고문님과는 친한 벗이 되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