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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이 한양에 접근하자 북쪽으로 도피하는 국왕 선조.(근세 일본의 대하 역사소설 《에혼 다이코기(繪本太閤記)》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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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 초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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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장군들을 영접하는 류성룡. (《에혼 다이코기》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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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도 해전 당시 분전하다가 일본군의 총탄에 맞은 이순신. 필자가 확인한 근세 일본 문헌 가운데, 이순신의 모습이 가장 크게 그려진 장면이다. (19세기 중기에 간행된 《조선정벌기》 중에서) |
‘2권본 《징비록》’은 17세기 후반에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징비록》이 일본에 유출되었음을 알려주는 첫 흔적은 1683년에 제작된 쓰시마 번주(藩主) 도서관 소장 서적 목록인 《덴나 삼년 목록(天和三年目錄)》이다. 여기에는 《징비록》과 《서애선생문집》을 비롯해서, 임진왜란 이후에 조선에서 성립된 문헌 상당수가 보인다. 조선 전기 문헌이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 의해 약탈되었다면, 17세기에는 조선인과 일본인이 합작해서 조선 문헌을 대량으로 일본에 유출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쓰시마와 가까운 규슈 후쿠오카 번의 저명한 학자 가이바라 엣켄(貝原益軒·1630~1714)이 후쿠오카 번을 지배한 구로다 집안의 사적을 정리한 《구로다 가보(黑田家譜)》를 편찬할 때 《징비록》을 이용한다. 엣켄은 이 ‘2권본 《징비록》’을 일본의 문화 중심인 교토(京都)의 출판업자 야마토야 이베에(大和屋伊兵衛)에게 소개한다. 그리하여 1695년에 일본판 《징비록》인 《조선징비록》이 교토에서 출판된다.
《조선징비록》은 ‘2권본 《징비록》’을 4권본으로 바꾸고, 엣켄의 서문과 조선의 행정구역표, 조선지도를 붙였으며, 한문에 일본어식 읽기 부호(훈점)를 붙여서 일본 독자들이 읽기 쉽도록 편집했다. 엣켄은 서문에서 이 문헌의 가치를 다음과 같이 극찬한다.
〈이 책은 기사가 간결하고 말이 질박하니 과장이 많고 화려함을 다투는 세상의 다른 책들과는 다르다. 조선 정벌을 말하는 자는 이 책을 근거로 삼는 것이 좋다. 그 밖에 《조선정벌기(朝鮮征伐記)》와 같은 책은 비록 한자가 아닌 일본 글자(히라가나)로 쓰였지만 이 역시 방증(傍證)으로 삼기에 족하다. 오로지 이 두 책만이 실록(實錄)이라 할 만하다.〉
《조선징비록》이 출간된 이후, 《징비록》에 나타난 임진왜란 인식은 일본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조선징비록》이 간행된 10년 뒤에 출판된 《조선군기대전(朝鮮軍記大全)》에는, 류성룡이 이순신을 천거했다는 《징비록》의 기사를 인용하면서 ‘류성룡이 영웅을 천거하다’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다. 이순신을 영웅으로 추앙하고 이순신을 천거한 자신의 공을 강조하고자 한 류성룡의 ‘《징비록》 사관’이 일본 사회에 성공적으로 받아들여졌음을 알 수 있다.
에도시대 일본의 출판문화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 일본에서는, 포르투갈·에스파냐 가톨릭 세력이 전래한 인쇄기술과 조선 인쇄기술의 영향으로 대량 상업출판이 시작되었다. 세계 문화사에서 높이 평가받는 근세 일본의 지적(知的) 르네상스기에, 출판인들은 일본의 옛 문헌과 중국·조선·네덜란드 등 외국 문헌을 가리지 않고 책을 찍어 상품으로 판매했다. 책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얻는 데 열중한 일본 독자들 역시 외국 문헌을 가리지 않고 읽었다.
당시 일본에서 많이 읽힌 대표적인 조선 서적으로는 《징비록》 《동국통감(東國通鑑)》 《동의보감(東醫寶鑑)》, 그리고 이황(李滉)의 저술 등을 꼽을 수 있다. 대개의 경우 역사학이나 의학 등 해당 분야의 일본인들이 읽는 데 그쳤지만, 유독 《징비록》은 일본 대중이 널리 읽었다.
이러한 사실은 숙종 때인 1719년 통신사의 제술관(製述官)으로 일본에 다녀온 신유한(申維翰)의 《해유록(海遊錄)》에도 잘 나타나 있다. 신유한은 당시 활짝 핀 일본의 출판문화를 소개하면서 이렇게 적고 있다.
〈그러나 가장 통탄할 것은, 김성일의 일본견문록 《해사록(海槎錄)》과 류성룡의 임진왜란 기록 《징비록》, 강항의 《간양록(看羊錄)》 같은 책은 나라의 기밀에 속한 것이 많이 실려 있는 것이라 공개할 수 없는 것인데, 지금 모두 대판(오사카)에서 출판되었으니 이 어찌 적정을 정찰하여 적에게 일러주는 것과 다르겠는가. 나라의 기강이 엄숙하지 못하여 역관들이 사사로이 매매하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구나!〉
《징비록》에 대한 일본인들의 관심은, 전근대(前近代) 일본이 경험한 가장 큰 국제전쟁인 임진왜란에 대한 일본 사회의 지대한 관심을 반영한 것이다. 특히 일본인들은 임진왜란이라는 전쟁과 《징비록》을 통해, 왜국(倭國)이 백제를 부흥시키기 위해 663년에 나당(羅唐) 연합군과 충돌한 백강 전투 이래 거의 1000년 만에 중국 군대와 맞붙은 일본군이 어떻게 싸웠는지 알고 싶어했다.
그리고 조선과 명나라의 어떤 용맹한 장군들이 일본군에 맞서 싸웠는지 알고자 했다. 상대편이 유능한 장수일수록, 그들과 싸워 이긴 일본 장군들이 더욱 빛나는 법. 이러한 일본 측의 수요를 충족시켜 준 것이 《징비록》을 통해 영웅화된 이순신이었다.
중국인의 임진왜란觀도 변화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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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어죽은 어머니의 젖을 빠는 아기를 보고 류성룡이 슬퍼하다. (《에혼 다이코기》 중에서) |
이처럼 이순신을 영웅시하는 한일 양국의 계산은 서로 달랐지만, 결과적으로 이순신은 임진왜란에서 한일 양국이 공히 합의할 수 있는 영웅이 되었다.
류성룡의 ‘《징비록》 사관’은 일본을 거쳐 중국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청(淸)나라의 초대 주일공사였던 하여장(何如璋·1838~1891)을 수행해서 일본에 건너간 청말의 대학자 양수경(楊守敬·1839~1915)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메이지(明治)유신 이후 몰락한 일본의 옛 지배층이 헐값에 내놓은 중국의 희귀 서적을 수집, 이를 《일본방서지(日本訪書志)》라는 제목으로 간행했다. 이 책의 권6에 《징비록》에 대한 언급이 실려 있다.
여기서 양수경은, 일본 학자 가와구치 조주(川口長孺)가 1831년에 간행한 《정한위략(征韓偉略)》에서 류성룡을 간신(奸臣)이라고 비난하는 명나라 문헌의 주장을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류성룡에게서 두보(杜甫)와 같은 우국지사(憂國之士)의 풍모가 느껴진다’고 서술한 대목을 인용한다. 그는 ‘일본판 《조선징비록》이나 《정한위략》을 읽으니 《양조평양록(兩朝平壤錄)》과 같은 명나라 문헌이 조선의 국왕 선조 및 류성룡 등을 비하하고 명나라 군대의 일방적인 은혜를 강조하는 것이 사실과 다름을 알게 되었다’고 적는다.
《양조평양록》 등 명나라 문헌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군들과 직접 교섭한 류성룡·이덕형과 같은 사람들을 나쁘게 평가하고 있다. 이는 반대로 말하면, 이들이 명나라의 심기를 건드릴 만큼 조선의 국익(國益)을 수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양수경의 기록은 류성룡이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여 세상에 던진 ‘《징비록》 사관’이 일본을 거쳐 중국에까지 영향을 미쳐, 결국 중국인들의 임진왜란관도 변화시켰음을 보여준다.
기록을 남기는 자가 승자(勝者)가 된다
1598년 11월 19일. 이날은 임진왜란 최후의 해전인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전사한 날이자, 류성룡이 “일본과의 화의를 주장해서 나라를 망쳤다(主和誤國)”는 정적(政敵) 북인(北人)들의 공격을 받아 삭탈관직(削奪官職)된 날이다.
정치투쟁에서 패한 류성룡은 고향인 안동 하회에서 《징비록》을 집필하여 자신의 억울함을 변론했다. 《징비록》에서 류성룡은 임진왜란의 양대 승리 요인을 명나라 군대와 이순신의 활약이라고 규정했다. 이러한 논리의 배후에는, 명나라 군대가 먹을 군량미를 조달한 것도 자신이고 이순신을 천거하고 옹호한 것도 자신이라는 주장이 깔려 있다. 물론 이것은 류성룡 개인의 관점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징비록》의 주장이 기본적으로 역사적 사실에 부합했고, 《징비록》이라는 책 자체가 탁월한 설득력을 지녔기에, 류성룡의 임진왜란관, 즉 ‘《징비록》 사관’은 그 후 조선은 물론 일본, 중국에까지 전파(傳播)됐다.
흔히 승자(勝者)는 역사를 쓰고 패자(敗者)는 문학작품을 쓴다고 한다. 그러나 류성룡과 《징비록》의 사례는, 승자가 역사를 쓰는 것이 아니라 기록을 남기는 자가 승자가 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http://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3&mcate=M1004&nNewsNumb=20150316966&nidx=169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