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신비
고통 없는 삶은 없을까. 하느님은 왜 이토록 수많은 고통이라는 아픔을 우리에게 주셨을까. 애절하고도 슬픈 그리움의 고통. 지나가는 동료의 무심결에 뱉은 말 한마디가 가슴을 후벼 파는 마음의 고통. 원대한 꿈을 품고 살아오다 그것이 좌초 될 때 오는 허무함의 고통. 한평생 나름대로 쌓은 모든 것들이 하루아침에 와르르 무너질 때 오는 절망감의 고통. 헐벗음과 굶주림의 고통. 무시당하고 짓밟히는 상처의 고통. 고통들.
이러한 정신적인 고통도 있지만 육체의 고통도 아프기는 마찬가지다. 팔다리가 부러지는 고통에서 오장육부를 도려내는 고통. 암세포의 전이로 젊은 목숨이 죽음을 기다리는 공포의 고통도 우리 주변에는 얼마든지 볼 수 있고 내가 당할 수도 있는 일들이다.
사람이 한평생 살아가면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 숱한 고통들을 겪지 않고서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그리고 이 고통은 죽고 싶을 만큼 아프고 참담한 것이다. 그렇다고 목숨이라는 것을 마음대로 쉽게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어쩔 수 없이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럴 때 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조용히 생각해 본다.
인류구원이라는 명제하나로 아무런 죄도 없이 발가벗기고 채찍질 당한 채, 머리에는 조롱하는 인파들로부터 가시관까지 씌워진 채, 피 흘리며 말없이 십자가의 죽음을 택한 그분의 참혹한 모습.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무리 억울하고 가슴치고 통곡할 일이 있다 해도 그리스도만큼 억울하며 고통스러울 것인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분의 아픔과 상처를 생각해 본다면 나의 고통은 얼마든지 위로 받을 수 있지 않은가. 이 때문에 신앙 안에서의 고통은 신비라고 보는 것이리라. 사실 “고통이 신비”라는 논리는 소경이 눈을 뜰만큼의 충격이 아닐 수가 없다.
인간의 존재가치는 깨달음에 있다고 한다. 이 깨달음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버리고 희생하는 아픔과 고통을 통해서만이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목마름의 고통을 통해 물의 소중함을 깨닫고, 육체적인 아픔을 통해 건강의 소중함을 깨닫듯이, 우리의 삶도 반드시 아픔과 고통을 통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닐까. 결국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산다는 것은 이러한 깨달음이 마음속에서 이루어질 때 가능한 것이리라. 신앙의 가치가 하느님에 대한 지식의 축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에 대한 깨달음에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삶의 마디마디에서 피할 수 없는 수많은 아픔들. 이 아픔들이 때로는 인생을 어둡게 하고, 좌절하게 하고, 황폐화 시키고, 미워하게 하고, 누군가를 죽이고 싶고, 실망의 낭떠러지로 곤두박질치게 한다. 이때 우리는 이 고통을 고통으로만 받아들이게 될 때 그 고통에서 빠져 나오기란 참으로 쉽지 않다. 오히려 그 고통으로 인하여 다시 한 번 무너지고 헤어 나오지 못할 만큼 더 큰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내 안에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수용할게 될 때, 고통의 힘은 약화되면서 새로운 깨달음의 힘들이 솟아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고통 안에 구원의 뜻이 있고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며, 육신을 능가하는 영적인 것의 위대함이 있는 것이다. 또한 인간이란, 자신을 넘어서 나아가도록 하는 초인적인 힘이 신으로부터 주어졌는데, 고통이란 바로 인간에게 이 초월성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통은 신비라고 생각한다.
감옥에서 온갖 고초를 겪은 시인 보에티우스는 “행복은 사람을 속일 수 있으나, 불행은 언제나 사람을 속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고통은 사람이 지혜를 배울 수 있는 훌륭한 학교이다. 눈물이 눈 속에 끼어 있던 먼지를 씻어 주듯이 한 번도 눈물너머로 세상을 보지 못한 사람은 이 세상이 참으로 어떻다는 것을 알기 힘들다. 그러므로 고통은 세상 구원의 도구가 되며 초자연적이다. 또한 그 안에서 인간이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의 인간성과, 존엄성과, 사명을 발견하므로 다분히 인간적이다.
그리스도가 죄 없이 고통을 받으시므로 고통으로써 사랑과 선을 창조하신 것이 아닌가. 인류구원이라는 최고의 선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끌어 내어지며 십자가에서 다시 출발하게 되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생명수가 흐르는 강의 출발점이다. 하느님이 착한 이에게도 고통을 주는 이유가 여기에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결국 고통 없는 영광은 없으며, 십자가 없는 부활은 생각할 수 없으며, 죽음 없는 천국이란 존재 할 수 없는 것이다.
어느 날 문득 이 사실을 깨달으며 하느님은 결코 감당 할 수 없는 고통은 주시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첫댓글 너무 무겁나~
좀 무겁습니다. 누구나 짊어지고 있지만 풀어놓고 싶어 하지 않지요.
단지 가벼워 졌다 무거워 졌다 하겠지요.
수고하고 무가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어깨에 짊어진 삶의 짐이 너무 무거워 양덕 성당 문을 두드렸습니다. 또 다시 서마산 교회를 찾아 갔습니다.
그 모든 곳에 답이 있었습니다. 요즘은' 위수교'를 믿고 있습니다. '위수'는 남편의 이름입니다.
일용할 양식도 주고 용돈도 주는 위수교 만만세^^(웃어 보입시더. 너무 무거운 낱말, 고통......)
좋은 믿음입니다.
고통, 내가 감당할수 있는 무게. 고통을 받아 들일수 있는 그릇의 크기는 얼마일까. 조금 무겁지만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무는 글 입니다.
교수님, 회장님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무게로 저를 시험하신 것일까요. 젊은 날 저는 참 힘들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