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와 같은 필사로 죄를 면책받다 ―책 제작소, 중세의 수도원 필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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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루돌프 폰 엠스의 세계연대기에 실린 그림. 13세기 말. 뮌헨 바이에른 국립도서관 : 필사가에게 글의 내용을 일러주는 저자. 중세 시대 책의 저술 방식에서 저자와 필사가의 관계를 보여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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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시대에 책의 가치는 상당했다. 미사 전서 한 권이 포도밭이 들어선 야산 하나와 교환되었고, 설교집 한 권이 양 200마리와 보리, 호밀 수십 가마의 가치를 호가했다. 책은 수도원에서 제작되었는데 대규모 수도원의 경우 필사실을 구비하고 있었다. 수사 또는 수녀가 필사가와 필사화가의 역할을 맡았고 그들에게 책 제작은 예배와 기도의 연장선과 같은 신성한 행위였다. 성서를 베끼는 일 한 가지만으로도 죄악을 면책받을 수 있다고 믿을 정도로 필사의 의미는 고귀했다. 그러나 도회의 시민들의 읽고 쓰는 능력이 신장되면서 책 수요가 늘어났고 책 시장은 폭발적으로 급증했다. 기존의 제작 방식으로는 수요를 감당할 수 없어 책 제작은 점차 수도원에서 전문화된 생산체계를 갖춘 곳으로 옮겨갔다. 이리하여 책은 수도원의 담장을 넘어 속세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수도원 필사실에서 제작되었던 책 15세기 바젤의 수도사 야콥 루버는 “책 없는 수도원은 군대 없는 국가와 같다”고 말한다. 그는 또 ‘담이 없는 요새’, ‘살림살이 없는 부엌’, ‘음식 없는 식탁’, ‘꽃 없는 들판’, ‘잎 없는 나무’에 비유하기도 했다. 수도사라서 그랬는지, 하와가 없는 아담이라는 비유는 들지 않았지만, 좋은 책이 좋은 수도원을 만든다는 사실만큼은 굳게 믿었던 것 같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보다 앞서 1170년 카노니쿠스 고트프리트가 한 발 앞서 “도서관 없는 수도원은 무기고 없는 성채와 같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책이란 경건한 영의 싸움에서 총알과 같다는 인식은 무척 중세적으로 들린다. |
고대 후기부터 중세 전성기인 12세기까지 책은 거의 대부분 수도원에서 제작되었다. 자체 수요를 충당하거나 다른 수도원과 교환하기 위해서, 그리고 특별한 행사에 맞추어 주문제작하는 식이었다. 가령 1150년 수도원장 고트프리트 폰 아드몬트는 이웃의 수도원장에게 책을 필사할 수 있도록 애장본 한 권을 빌려달라고 이런 편지를 보낸다.
“존경하는 형제여, 그대의 명망 높은 수도원 도서관이 우리에게는 없는 귀중한 필사본을 많이 소장하고 있으니, 바라건대 그대의 넘침으로 우리의 갈급을 메워주는 뜻에서 예루살렘의 파괴, 그리고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 황제가 이끄는 로마군대의 승리에 대한 요세푸스의 기록을 실은 책을 빌리고 싶네. 제대로 연구를 해보고 싶어서 그러네. 지체 없이 필사를 하고 반드시 돌려줌세. 그대의 호의가 우리 안에서 크게 성장할 것이네.”
책 한 권 빌리면서 이렇게 간지러운 소리를 늘어놓아야 하는지 조금 치사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중세 시대에 훌륭하게 장식된 책 한 권의 가치가 장원 하나에 맞먹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뒤늦게 고개가 끄덕여진다. 거래 장부나 영
수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서 책값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796년 스페인에서는 합창곡이 수록된 악보 한 장이 소 두 마리 값에 맞먹는 3솔리디를 호가했고, 1074년에는 어떤 수사가 미사 전서 한 권을 받고 잘 가꾼 포도밭이 들어선 야산 하나를 넘겨주었다고 한다. 물론 평범한 책이 아니고 화려한 세밀화가 빼곡하게 들어 있는 양피지 장정본이었을 것이다. 15세기 독일에서는 설교집 한 권이 양 200마리에다 보리와 호밀을 수십 가마 얹어주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1983년 소더비 경매에서는 226쪽짜리 사자왕 하인리히의 복음서 한 권이 약 200억 원에 팔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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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 밤베르크 국립도서관. 12세기 말의 미완성 그림 : 가장자리 둥근 그림은 책의 제작 과정을 보여준다. 경석으로 가죽을 다듬고, 칼로 잔털을 제거하는 장면 등이 보인다. | |
필사 행위는 예배와 기도 책을 제작하는 작업실은 대규모 수도원의 경우, ‘필사실’이란 뜻의 스크립토리움(scriptorium)에서 실행되었다. 물론 모든 수도원에서 필사실을 따로 운영하는 것은 아니었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장미의 이름』에는 이상적인 도미니크 회 수도원과 필사실이 등장한다. 영화에서도 그런 것처럼 필사실은 도서관과 인접한 곳에 위치했다. 작업대는 햇빛이 잘 드는 창가에 붙였고, 여름에는 수도원 안쪽의 시원한 십자회랑이나 넓은 도서관에서 작업을 하기도 했다. 수도원에서는 재능 있는 수사 또는 수녀들이 책에 글을 적어 넣고 그림으로 장식하는 필사가(miniator)와 그림을 그리는 필사화가(illuminator)의 역할을 맡았는데, 이들에게 책을 제작하는 일은 한 마디로 예배와 기도의 연장이었다. 작업 효율을 높이기 위해 긁개로 가죽을 다듬어 펴고, 밑그림을 치고, 안료를 바르는 채색 과정은 여럿이 공동작업으로 진행했다. 필사가들의 작업실 광경은 현재 풍부하게 남아 있는 복음서 저자들의 그림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성서의 복음서를 집필했던 예수의 제자들은 구약의 예언자 에제키엘의 환시에 나타난 네 가지 짐승을 제각기 거느리고 나타나는데, 필사 책상 앞에 쪼그린 모습으로 열심히 펜을 놀리는 모습은 1,000년 전 중세 필사실의 풍경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중세 시대 수도원 필사가나 화가들은 자신의 서명을 남기는 일이 드물었다. 이런 경향은 12세기 이후 등장하기 시작한 도시의 전문 필사가나 화가들이 서명을 통해서 명성을 추구하고 책 만드는 일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생각했던 것과 크게 다른 점이다. 그러나 서명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현재 남아 있는 필사본들의 탄생과 계보를 분류하고 정리하는 일이 무척 어려워진 것은 사실이다. 수도원에서는 새로운 실험보다 원본에 충실한 복사를 원칙으로 삼았고, 전해지는 작업교본의 표본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려고 애썼다. 솜씨를 뽐내고 명예를 내세우는 대신에 한 몫의 노동을 통해 겸손의 덕목을 가꾸는 일을 더욱 중요하게 여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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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3. 파리 국립도서관. 1448년∼1449년 : 마레 히스토리아룸에 실린 그림으로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필사화가의 자화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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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3_1. 코덱스 기가스(Codex Gigas)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고 해서 악마(사탄)의 성경이라 한다 | |
필사로 죄를 면책받다
그러나 일에 대한 자부심만은 누구 못지 않았다. 1187년 기랄두스 캄브렌시스는 장식 문양을 매듭처럼 엮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첫 머리글자 X, P, I를 새긴 『켈스의 서』를 두고는 ‘이것은 인간이 아니라 천사의 손으로 그린 작품’이라고 극찬했다. 그 후 필사화가들의 손은 천사의 손으로, 그들의 작품은 천사의 솜씨로 불리기 시작한다. 또 필사가와 필사화가들 사이에는 신기한 기적과 전설도 많이 전해진다. 세상에서 가장 큰 책, 『코덱스 기가스(Codex Gigas)』의 탄생에 관한 기록에서는 타락한 사제가 악마와 계약을 맺고 자신의 영혼을 팔아먹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세상에 둘도 없는 크기의 거대한 책을 단 하룻밤에 완성하려는 야심으로 일을 시작한 테오필루스는 거대한 양피지에 줄을 긋고 이니셜을 베끼고 필사를 시작하지만, 밤이 이울도록 지면을 채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절망한다. 절망에 빠진 영혼을 악마와의 계약으로 맞바꾼 테오필루스는 마침내 책을 완성하지만, 이미 그의 영혼은 악마의 손아귀에 넘어간 뒤였다. 영혼 없는 육신의 방황은 안식 없이 떠돌다가 성모상을 발견하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 성모는 대천사 미가엘을 시켜 악마로부터 잃어버린 테오필루스의 영혼을 되찾아온다. 기록의 뒷 부분은 거의 수십 장에 이르는 “나의 죄를 고백합니다”라는 울먹이는 참회로 이어지지만, 그런 것까지 밑줄쳐 가면서 다 읽을 필요는 없다. 여기서는 필사가의 작업이 그 시대에 얼마나 고귀한 가치로 인정받았으며 성서를 베끼는 일 한 가지만으로도 영혼의 씻을 수 없는 죄악까지 사함을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는 사실에 대해서만 납득하면 그만이다.
또 다른 필사가 라둘프는 제 손으로 해치운 작업 분량만큼 지옥 불에 떨어질 자신의 죄악이 면책될 것이라고 자신 있게 털어놓는다.“책을 베끼는 동안 성 베다스투스가 하늘에서 내려다보시며 내가 펜으로 글자를 얼마나 옮기나 헤아리셨다. 낱장마다 들어가는 문장의 행을 꼽으시고, 날카로운 점을 몇 개나 찍는지도 세어보셨다. 이 책에 들어 있는 글자와 글줄과 점의 수만큼 나의 죄는 사함을 받을 것이다.”
또 레겐스부르크의 수사 마리아누스는 밤늦게 까지 작업실에 붙어 있으면서도 불을 켜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일을 할 때는 오른손에 펜을 쥐고 왼손은 높이 들고 있었는데, 그의 손가락 셋이 환하게 빛나면서 등잔이 따로 필요 없었다는 것이다. 아른스베르크에서는 영국에서 온 무척 부지런한 수사 리처드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수고의 보상을 한사코 마다하고, 이 세상에서 그 열매를 거두려고 하지 않았다. 그가 죽은 뒤에 좋은 자리를 구해서 매장하고 스무 해가 지난 뒤였다. 그의 무덤을 열어보았더니 그의 생명이 붙어 있던 육신은 모두 썩었는데, 펜을 잡았던 오른손 하나는 생전 그대로의 형태를 잃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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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의 담장을 넘어 도시 속으로
수도원 필사실의 전통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12세기 이후의 일이다. 도회의 시민들 사이에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이 크게 신장되면서 책을 생산하고 소유하는 계층이 넓어졌다. 수요층의 입맛이 다양해진 것은 물론이다.
무엇보다 대학이 잇달아 설립되면서 책 시장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책 제작도 기존의 방식으로는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대학에서 가르치는 학습교재는 주문량을 예상하고 미리 제작되었다. 내용도 똑같아야 했기 때문에 한 가지 정형이 요구되었다. 학생들은 대학의 교과과정에 맞추어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구입했다. 귀족들은 필사가와 세밀 화가를 고용해서 맞춤형 책을 주문하고 개인 도서관을 갖추었다. 부유한 시민들은 귀족들의 책 수집 유행을 따라잡기 위해서 애썼고, 라틴어에 익숙하지 않았던 여자들은 읽기 쉬운 방언으로 쓴 기도서를 손에 쥐고 싶어했다.책의 제작 공정도 차츰 수도원에서 떨어져나갔다. 페르가멘트 제작부터 모든 일감들이 전문화되고 어엿한 직업으로 독립하면서 새로운 공급체계를 갖추기 시작한다. 수도원 필사실의 높은 담장 너머 도시의 자유로운 바람이 불어오면서 책의 제작과 향유 주체가 함께 세속화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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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4. 헤라클레스 이야기에 들어있는 장식 그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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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5. 성 갈렌 수도원 도서관. 10세기 말 : 교황 그레고리우스 대제의 말을 받아 적는 파울루스 디아코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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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6. 조반니노 그라시의 스케치북에 실린 동물 형태의 머리글자. 14세기 말. 베르가모 시립도서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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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 사튀로스에 관한 주해를 담은 장식 그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