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처럼 미국에서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둘러싼 문제가 구조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해결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많은 이들에게 좋은 소식처럼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다문화 사회’에서 계속 나아갈 수 있다는 말인가? 나의 답은 간단하다. 즉, 우리는 계속 나아감으로써 계속 나아간다. 더욱이, 그것은 한때 ‘자신들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세상에서 살아남기를 배워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나쁜 길이 아니다. 참으로 나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은 우리의 것이 아님을, 세상을 안전하게 만들 수 없음을, 그리고 해결책은 존재하지 않음을 인식함으로써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대로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정답 없이 사는 것을 배우면서, 또한 기독교 세계 이후를 사는 것을 배우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생존법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바라건대 우리가 발견한 그 생존법은 우리 자신의 삶에 놀라움을 줄 뿐 아니라, 우리의 비그리스도인 형제자매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을 생각하면, 그렇게 기대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개정판 서문」중에서
콘스탄티누스주의는 버리기 힘든 습관이다. 계속 ‘권력을 쥐고’ 있음으로써 아주 많은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일 때에 특히 그렇다. 이 습관을 버리기 힘든 것은, 서구 문명의 필수 요소로 자리 잡은 교회의 위상에 의해 우리의 모든 범주가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기독교 신학 좌우 진영 모두가 얼마나 자주 그러한 일련의 전제를 지속적으로 상정하는지 주목하라. 그리고 물론, 여기서 나는 정확하게 바로 그러한 전제들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서론」중에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것이라고 믿는 구원은 결국, 필연적으로 다른 모든 서사와 거기에 상응하는 정치조직을 종속시키는 하나님의 통치에 관한 서사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예수님 안에서 행하신 것만이 유일하게 참된 정치라고 믿기 때문에, 언제나 신정정치의 유혹을 받는다. 그러한 증언이 억눌릴 때 구원은 어쩔 수 없이 개인 구원에 관한, ‘이것저것 믿는 것’에 관한 무기력한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으며, 교회는 단지 함께하는 게 목적인 공동체들 중 하나가 되고 만다. 따라서 로마의 기획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권력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려고 노력한 것이다. 그것은 구원의 정치학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인들이 통치해야 한다는 생각과 오해한, 이해할 만은 하지만 재앙과도 같은 전략이었다.
---「1장 구원의 정치학」중에서
정의를 위해 일하는 데 관심이 있는 그리스도인은 자유주의 사회의 전제를 통해 결정된 정의의 개념에 그들의 상상력이 사로잡히는 것을 허락하고, 결과적으로 정의에 대한 실체적 설명을 더욱 불가능하게 만드는 사회의 발전에 기여한다.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적실성을 갖고자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바람이지만, 그로 인해 우리는 우리의 사회질서가 갖는 한계에 저항할 수 있는 결정적 능력을 상실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모든 사회에 앞서 우선적으로 붙잡아야 하는 것은 정의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2장 정의의 정치학」중에서
종교의 자유는 미묘하기는 하지만 분명 유혹이다. 종교의 자유는 그리스도인인 우리로 하여금 법적 메커니즘이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 준다고 믿도록 유혹한다. 그것이 미묘한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메커니즘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에토스를 지지하는 것이 임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우리는 언제 우리가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충성을 국가의 이름으로 제한했는지 인지할 수 있는, 복음을 통해 형성된 결정적인 기술을 상실한다. 우리는 교회의 자유란 종교의 자유의 특정한 예와 다름없다는 전제를 받아들여 그 둘을 혼동한다. 따라서 우리는 관용적이게 되고 우리의 신념이 사적 영역으로 후퇴하는 것을 허용한다.
---「3장 자유의 정치학」중에서
오늘날 교회는 진퇴양난에 빠져 있는 것 같다. 우리는 현대사회 내에서 우리의 자리를 유지할 수만 있다면, 돌봄의 공동체가 됨으로써 그렇게 하려고 한다. 목사는 일차적으로 돌보는 사람이 된다. 그러한 문맥에서는 교회가 훈련받고 훈련하는 공동체가 되려는 모든 시도가 돌봄의 공동체가 되는 것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일처럼 보인다. 그 결과, 교회가 제공하는 돌봄은 대개 아주 인상적이고 긍휼이 넘치는 반면, 교회가 대치한 권세에 맞설 수 있는 공동체로 세우기 위한 근거는 결여되어 있다.
---「4장 교회의 정치학」중에서
결혼에서 사랑이라는 요건은 결혼의 내재적 본질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권면에 기초한다. 우리는 결혼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사랑한다. 그러나 우리는 결혼이라는 문맥 안에서 그러한 사랑이 어떤 것인지 배울 수 있다. 기독교 전통은 결혼이 서로에 대한 신실함의 본에 기반을 둠으로써 포용적 사랑의 공동체를 뒷받침하도록 돕는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결혼에서 요구되는 사랑은, 자녀들을 환영하고 맞아들여 훈련시키는 기독교 사회질서의 본질을 정의함으로써 정치적으로 기능한다.
---「5장 성의 정치학」중에서
우리는 소위 ‘공립학교’의 교육과정에 이의를 제기해 온 것이 왜 흑인, 원주민, 여성이었고 그리스도인은 아니었는지 물어야 한다. 어째서 우리는, 피조물로서의 우주의 위치를 철저하게 배제하더라도 세상을 납득 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는 지배적 가정에 도전하는 일을 모두 근본주의자들에게 넘겨주었는가? 나는 그 답이, 근본주의적이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눈에 어리석어 보이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혹은 보다 혹독하게 말하자면, 그들 자신의 눈이 사실은 이제 세상의 눈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결과, 우리는 우리를 지배하는 권세를 정당화하는 이야기에 도전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
---「6장 증언의 정치학」중에서
출판사 리뷰
교회의 정치를 다시 상상하다!
하우어워스는 구원, 정의, 종교의 자유에 대한 교회의 통념에 도전한다. 자유주의가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 교회는 자신을 정치와 무관하게 만드는 사회적 합의에 힘을 실어 줌으로써 체면을 차리고 있다. 교회의 임무는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통로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 수단인 증언이 억눌릴 때 교회는 의미를 잃는다. 오늘날 여러 교회는 사회적 증언을 이끌어 가기 위해 정의와 권리를 일차적 규범으로 삼았는데, 정의에 대한 호소는 자유주의의 전제 위에서 작동하며, 증언이 지닌 진리성을 거의 드러내지 못한다. 기독교는 정의 이론을 더욱 철저하게 점검하며 발전시켜야 한다. 또한 종교의 자유는 교묘한 유혹이다. 종교의 자유 아래 우리는 세상과 겪어야 할 갈등을 대면하지 않는다. 교회의 자유는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국가가 주거나 뺏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참된 교회가 될 것인가?
교회는 현대사회에서 자리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돌봄’의 공동체가 되었다. 그 친근함과 긍휼은 훌륭한 섬김이지만, 교인을 하나님 나라의 증인으로 훈련하는 것과 양립하기 어렵다. 교회가 훈련 공동체로 회복될 수 있도록, 하우어워스는 기예를 통한 훈련을 제안한다. 벽돌쌓기와 같은 기예를 배우는 이는 스승으로부터 기술과 지식뿐 아니라 해당 분야의 고유한 언어와 관습을 습득한다. 기예 공동체의 역사와 전통 안에서 우리는 도덕적 훈련을 받는다. 하우어워스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새로운 역사에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죄인이며 피조물임을 배워야 한다. 이는 고백이라는 구체적 실천과 동떨어져서는 배울 수 없는 것이다. 교회는 증언의 역사와 전통을 전달하는 훈련 공동체다.
어떻게 성 윤리를 이해할 것인가?
현대 기독교는 성의 표현이 ‘건강한 대인 관계’에 도움이 되는가를 중심으로 성 윤리를 논의한다. 하지만 페미니즘이 도전하듯 성 윤리는 권력과 지배권의 문제다. 성을 사적이고 개인적인 문제로 다루는 것은 정치적 자유주의의 영향이다. 하우어워스는 버트런드 러셀의 주장을 분석함으로써 성 윤리가 광범위한 사회적·도덕적 변화를 요구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스도인은 서로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권면과 타인을 섬기라는 명령에 따라 결혼을 이해해야 한다. 그렇기에 독신과 결혼의 부르심은 모두 동등하게 중요하다. 자녀를 낳고 기를 능력이 있는 공동체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정치적인 실천이다.
계몽주의의 교육관을 거부하고 복음의 이야기를 증언해야 한다!
학교에서는 역사 과목과 교육과정 전체를 통해 결정적인 도덕적 훈련이 일어난다. 그러나 교육과정에 반영된 권력은 학생들에게 부패한 전통을 주입하거나 강화한다. 흑인, 인디언, 여성이라는 호칭이 정치적이듯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이라는 주제만큼 정치적인 인식도 없다. 과거 유럽인들은 기독교 진리의 권위로 원주민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레케리미엔토’를 내세워 아메리카에서 권력을 행사했다. 현대 기독교의 교육 전략 또한 우리를 지배하는 권세에 도전하는 능력을 상실하고, 객관성과 합리성의 권위를 내세우는 계몽주의의 ‘레케리미엔토’에 순응했다. 우리는 ‘국가의 이야기’에 이의를 제기하고 우리가 믿는 이야기를 세상 전체를 위해 설득력 있게 만들어야 한다. 예수님의 하나님을 증언하되 그러한 증언이 권력을 위한 이데올로기가 되는 식으로 왜곡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에겐 지배와 폭력의 패턴을 거부하면서 증인이 되어 복음을 소통할 임무가 있다.
※ 이 책을 읽으면 좋을 독자
- 오늘날 교회가 국가 및 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고민하는 모든 그리스도인
- 한국 교회의 정치 참여 방식과 행태에 대해 고민하는 그리스도인
-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정치 신학과 그가 말하는 참된 교회의 비전에 관심이 있는 독자
- 구원, 정의, 종교의 자유, 교육, 성 등 중요한 쟁점들을 더 깊이 연구하기 원하는 신학생, 목회자
- 증인들의 모임으로서 교회가 어떤 훈련 공동체가 되어야 할지 고민하는 그리스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