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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완의 기찬 여행 - 푸른길공원 |
입력시간 : 2014. 08.01. 00:00 |
숲과 근대문화 흔적이 공존하는 '물 숲길'로
2.1㎞ 구간 남광주역서 백운광장까지
옛 흔적 여기저기 남아 추억 돋게 해
길 따라 항일운동가 정율성 생가 맞이
3구간은 물 숲길로 명명된 곳이다. 2.1㎞ 구간으로 남광주역에서 백운광장까지다.
이곳을 가려면 남광주역과 남광주시장을 거쳐서 근래 만들어진 남광보도교를 건너야 한다.
이곳은 발아래 광주천이 흐르고 옛 철교가 흔적으로 남아있다.
다리에서 광주천을 내려다보면 무척 환상적이다.
또 한여름을 알리는 요란한 매미들의 소리가 들려 마음을 차분하게 한다.
이제 여기서부터는 백운광장까지 연결된 길이다.
남광주의 유래부터 알아보자. 남광주역은 지난 1930년 12월 남조선철도주식회사가 민간철도로 광주-여수간 철도인 광려선을 만들어(경전선의 전신)건설했다.
전남광주역(초창기 광주역명)과 효천역 사이에 세운 역명은 ‘신광주역’으로 불리다가 1938년에 남광주역으로 개칭됐다.
남광주 역명은 옛 남문 밖에 있어서 남광주 역으로 불려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남광주 역은 지난 2000년 8월 10일 경전선 광주 외곽 이설과 동시에 폐역됐다.
이후 기차는 서광주역으로만 지나다니면서 이곳으로는 더 이상 기차가 오지 않았다. 지금 이곳은 푸른길공원의 제3구간으로 자리잡으면서 남광주 시장을 품에 안고 있다.
지난 1960년대 초 역 주변에는 아낙네들이 모여들면서 시장이 형성됐다.
이들은 고흥, 보성, 여수 등지서 새벽 기차를 타고 싱싱한 생선 실어날랐다.
화순 너릿재 넘어, 능주, 앵남 등지에서 올라온 채소류도 많았다.
당시 남광주 시장은 지금은 사라진 금동시장, 학동제일 시장에 밀려 있어서 그리 큰 규모는 아니었다.
하지만 1973년부터 남문로가 확장되고 화순, 보성, 고흥, 순천 도로가 포장되면서 시장은 점점 커졌다.
버스이용 승객이 늘고, 열차를 이용하는 승객도 늘어났다.
생선의 특성상 이곳은 주로 새벽에 열렸다.
목포, 여수, 고흥, 등지에서 싱싱한 생선이 올라와 시장이 활기를 찾고 사람들로 붐볐었다.
이런 덕분에 인근의 국밥집과 횟집이 성행했고, 저녁에는 시장 안이 손님들로 가득찼다.
선술집 주모가 막 잡은 싱싱한 생선회를 좁은 공간에 엉덩이 서로 부비면서 먹는 재미가 쏠쏠했던 시절이 있었다.
필자도 가끔 싼값에 회를 먹기 위해 단골로 다니던 집들도 있었는데.
이런 모든 공판장 기능이 이제는 수산시장으로 변하고, 경전선마저 이설되면서 당시 분위기는 사라져 아쉬움이 있다.
현재 지하 주차장 출입구 쪽에 있었던 옛 역사를 철거하지 않고, 그곳에 철도역사문화관이라도 지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길은 숲의 호젓한 길이다. 싸묵싸묵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도 좋은 길이다.
남광보도교를 지나 백운광장까지는 숲 터널로 이뤄져 있다
.
이 길은 '숲은 치유사'라고도 불린다.
숲속에는 식물들이 미생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식물성 살균물질인 피톤치드와 식물 조직속에 있는 테르펜이라는 정유성분으로 가득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또 물이 흐르는 숲은 몸에 좋은 음이온을 많이 만들어낸다.
이러한 성분은 우리몸의 자율신경을 안정시켜주고 우리몸을 건강하게 해 머리를 맑게 하고 기분이 좋게한다.
그러나 아쉬움도 있다. 인도 쪽으로 걸어가면 답답할 때가 종종 있어서다.
남광주 고가와 백운동 고가를 올라갈 때면 굉음과 매연을 발산하는 차들이 지나다닌다.
인도와 숲길 사이 2~3m의 나무를 식재하면 그나마소음과 매연을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길을 따라가면 광주의 음악가 정율성 동상이 반기고 인근에는 정율성 생가가 자리하고 있다. 중국 시진핑 주석에 따르면 정율성 선생은 중국에서 김구 선생처럼 항일투쟁을 했던 인물이다.
김구 선생에 비해 정율성 선생은 지명도가 떨어지는 편이나 중국에서는 정율성을 모르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정율성은 중국에서 3대 작곡가로 손꼽히는 인물로 ‘인민해방군가’를 작곡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지난해 6월 박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해 천안문광장 앞에서 시 주석의 영접을 받을 때 이 노래가 울려퍼졌다.
정율성은 단순히 음악가가 아니라 항일투쟁가요, 혁명가이기도 하다.
그가 태어났을 당시 조선은 일제 식민치하에 있었다.
그는 지난 1914년 광주에서 태어났으며, 광주숭일보통학교를 마치고 1933년 항일운동에 가담한 형들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난징(南京)의 조선혁명간부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지난 1934년 졸업 후 비밀활동을 하면서 피아노를 배웠다. 상하이(上海)에 가서 외국인인 크리누아에게 작곡과 성악을 배웠고, 1937년 프랑스에서 작곡공부를 했다.
특히 19세 되던 해인 1933년 그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약산 김원봉이 이끌던 의열단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비단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그의 부친과 형제들도 임시정부 요원 또는 군인, 공산당원으로서 중국에서 항일투쟁을 했다. 그의 아내 정솔성은 1949년 중국 공산화 이후 초대 네덜란드 대사를 지낸 중국 정부의 요인이었다.
정율성은 상하이와 옌안 등에서 성악은 물론 작곡과 피아노, 바이올린 등을 배우며 음악활동을 했으며, 중국의 아리랑 격인 ‘옌안송, 중국 인민해방군가인 ’팔로군행진곡‘ 등 중국인들에게 사랑받는 노래를 선보였다.
이후에도 그는 베이징인민예술극원, 중앙가무단, 중앙악단에 종사하면서 일생동안 모두 400여 편의 작품을 남겼으며, 1976년 베이징에서 62세로 타계했다. 선생은 중국의 국립묘지 격인 베이징 시내 빠바오산 혁명묘역에 안장돼 있다.
이 같은 공로로 정율성은 중국 창건 50돌인 2009년 ‘신중국 창건 영웅 100인’에 뽑혔으며, 중국의 3대 작곡가로 추앙받고 있다. 윤이상에 이어 한국이 낳은 또 한 명의 세계적 음악 스타인 셈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그는 한동안 금기의 인물로 치부돼 왔다. 중국에서 공산당 활동을 했으며, ‘인민해방군가’를 작곡했다는 이유다.
이 때문에 정율성과 그의 가족들에 대한 항일독립투쟁 포상은 물론 공적조차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일제 당시 적잖은 애국투사들이 사회주의 계열에서 활동했는데 이는 독립운동의 한 방편이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양림동은 근대문화의 유입처나 다름없다. 그렇기 때문에 푸른길공원 의미는 더욱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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