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지내지? 나의 제자 영수야.’
飛想
나의 첫 발령지는 경기도에서도 끝이라는 포천, 의정부에서도 40여분을 더 들어가야 하는 작은 학교였다. 교문 앞에 선 내게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100여년의 아름드리 플라타너스! 플라타너스가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되는 이유는 아마도 첫 발령지에서 있었던 그 아이와의 만남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맡게 된 학년은 3학년이었다. 중간 발령인 덕에 이미 가을로 접어든 시기. 날은 덥고 곡식은 익어가고 있었다. 전 담임선생님은 발령을 받으시고 아이들을 잘 부탁한다는 말씀과 함께 급히 파주로 떠나셨다. 선생님이 떠나신 자리에는 사무인계서와 1반의 학생들. 내게 다가오는 아이들의 두 눈에는 농촌의 맑음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농촌의 순수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아이들 덕분에 나는 쉽게 담임선생님이 되었다.
쉬는 시간마다 몰려오는 아이들 덕에 즐거운 비명 소리가 나도 몰래 나왔다. 전 담임선생님의 빈자리까지 더 채워주고 싶었기에 매일 나는 아이들을 내 눈에 담고, 아이들은 그런 나를 보며 해맑게 웃어 주었다. 나의 첫 제자들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아이들과 더욱 친해질 무렵. 유독 말이 없는 아이가 내 눈에 들어왔다. 작은 아이들 틈에 학교 교목처럼 크디큰 체격에 희디흰 얼굴, 작은 코, 작은 입, 그리고 단추 같은 눈이 인상적인 아이였다. 첫눈에 조금 이곳 아이들과 다르구나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출석부에서 다시 확인한 이름은 도영수. 한참을 보며 참 희한한 성도 다 있구나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지금까지 도씨를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성씨였기 때문이다. 다음날에도 영수는 줄곧 내 눈에 들어왔다. 개별수업에는 참여하였지만 모둠별 학습에는 전혀 참여하지 않고, 아이들과도 전혀 놀지 않았다. 말을 걸어보면 퉁명스런 답변이 고작이었다.
“이름이 뭐니?”
“도영수요”
다른 아이들에게 보이는 새 선생님에 대한 호기심 따위도 없어 보였다. 신기한 것은 다른 아이들도 영수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것이었다. 영수는 철저하게 개인적이었고, 철저하게 따로 놀았다. 그래서 아이들과 친해질 수 없었던 아이. 영수는 내게도 곁을 주지 않았다. 짤막한 말에 투박한 말투로 나를 당황스럽게 하던 아이. 그 아이가 영수였다.
가정조사서에는 엄마의 이름만이 빈칸을 메우고 있었다. 순간 드는 걱정들...
‘혹시 편모일까?’‘ 그래서 애정결핍으로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것일까?’‘그래서 퉁명스럽고 못마땅한 눈빛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예상되는 다양한 생각들이 나를 스쳐갔다. 하지만, 상처가 될 거 같아 물어보고 싶은 맘을 꾹 참았다.
이런 고민들은 며칠이 안 되서 그새 풀렸다. 영수가 몽골인이라는 것. 그래서 어머니와 같이 산다는 것. 외국 근로자인데다 불법체류자이기 때문에 불이익을 받고 있다는 것, 외국인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아이들도 영수를 싫어하고 따돌린다는 것.
‘그랬었구나.’
‘그래서 마음을 열지 못하고 그렇게 세상을, 대한민국을 냉소적으로 바라보았구나.’
‘모두 똑같아. 나는 이곳에서 이방인일 뿐이야! ’라고 말하는 것 같은 영수의 눈빛이 떠올라서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영수를 위해 어디서부터 그에 언 마음을 풀어주어야 할지 고민하였다. 먼저 아이들의 닫힌 마음을 열어주는 것이 필요했다. 영수를 철저하게 배제시키며 놀던 아이들 세계에 영수의 존재를 넣어주고 싶었고, 영수가 그 안에서 충분히 어울릴 수 있음을 아이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내가 생각한 것은 바로 모둠별 놀이학습이었다.
모둠별 학습을 하는 동안 전체 참여하는 모둠원에게 높은 점수를 주어 아이들이 영수가 활동에 참여해 주기를 바라도록 하는 놀이학습을 적용하였다. 처음에는 참여하지 않던 영수가 못이기는 척 모둠활동을 참여하게 되었다. 자연스레 놀이를 하면서 아이들과 어울리게 하였다. 금새 큰 키에 힘이 센 영수는 자신의 모둠을 최고로 만들었다. 아이들도 조금씩 영수의 존재를 깨닫기 시작했고, 필요로 하게 되었고, 어느 순간 영수도 적극적으로 모둠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놀이가 계속되는 동안 아이들은 어느새 영수를 응원하고 있었다. 워낙 큰 키와 다부진 체격의 영수는 손쉽게 모둠 대표자가 될 수 있었다.
영수를 향한 아이들의 관심은 나날이 늘어갔다. 3년동안 영수에게 무관심했던 아이들이 신기할 정도로 아이들은 영수 곁에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영수는 머리가 영리한 아이였다.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들,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들을 하나 둘 펼쳐 보이며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늘 혼자였던 터에 독서가 유일한 취미였던 영수는 아이들에게 곤충, 새, 공룡 등등 지식들을 술술 풀어내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아이들은 그 이야기를 들으려 영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렇게 뛰어난 아이가 친구하나 없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영수는 특히나 국어를 좋아하였다. 독서 소년이란 별명처럼 국어를 무척 좋아했고, 아이들은 영수가 국어시험 성적이 항상 일등인 것에 신기해했다. 우리나라 학생들보다 더 높은 국어점수를 받았던 영수. 영수를 더욱 똑똑하게 만든 것은 멸시와 외로움 속 독서의 힘이었다.
영수가 독서를 하는 것을 보고 아이들도 따라하기 시작하였다. 영수처럼 똑똑해지기 위해서는 독서가 필요하는 것을 아이들 스스로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들은 즐겁게 책을 보기 시작했고, 책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우려했던 영수의 상처는 조금씩 치유되는 듯했다. 아이들 속에서 순간순간 해맑음을 보였고, 그런 영수를 나는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학기가 마무리 되는 12월 중순.
친구들이 하교한 교실 문을 만지작거리며 발을 구르는 영수가 보였다.‘영수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게로구나’라는 생각에 일을 멈추고 나는 영수를 불렀다. 그게 아니라면 사다 놓은 사탕하나를 입에 물려줄 심산이었다. 나는 종종 아이들 몰래 사탕이나 과자를 선물로 주었다. 자존심이 센 영수가 친구들 앞에서 뭔가를 받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기 때문이다.
내 앞에 선 영수가 꾸뻑 인사를 하였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채 말을 이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선생님이 아니었더라면 전 아마 지금도 불행했을 거에요. 곧 방학이 되면 고마운 선생님께 이 말을 못해 드릴 거 같아서요.”
그 때의 감동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또한, 영수의 지난 상처가 치유 되어감을 이야기하는 것 같아 기뻤다.
학기말 방학을 끝으로 영수는 다음 학년을 올라갔다. 도서관업무를 맡고 있는 터라 히터에 등을 맡기며 열심히 책을 읽는 영수를 종종 만날 수 있었다.
영수는 항상 책을 읽다가도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깍듯이 하곤 했다. 책 읽는 시간에는 목례로 대신하라고 했지만, 영수는 끝까지 그 말은 듣지 않았다. 그것이 나에 대한 경의(敬意)라고 했다. 부끄러운 생각도 들었지만 진심어린 행동을 존중하기로 했다. 어찌보면 그런 영수가 나는 대견하고 더 정감이 갔는지도 모른다. 정말로 놀랍게 자라고 커 버린 내 제자를 보며 흐뭇했다.
영수와 나는 매일매일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다. 시간이 허락되는 날이면 나는 영수와 대화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영수는 학교에서 있었던 일부터 지금 읽고 있는 책의 내용들까지 주저리주저리 풀어냈다.
문득 영수가 처음에 학교에 들어왔을 때의 이야기를 했다.
“선생님, 제가 여기 왔을 때 저는 이방인이었어요. 저는 한국인도 몽고인도 아니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엄마는 몽골 사람이고, 나는 한국말을 사용하다 보니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고 친구들도 나를 멀리 했어요. 그래서 한국도 싫고, 한국인도 싫었어요. ”
“그런데 지금은 괜찮아요. 지금은 친구들도 좋고, 한국도 좋고, 선생님도 정말 좋아요.”영수의 이야기에서 영수의 아픔이 묻어났다. 그리고 다행이었다.
영수의 꿈은 외교관이었다.
“선생님 저는 커서 외교관이나 통역관이 될거에요.”
“그거 좋은 생각이다. 너는 몽골어도 할 수 있고, 한국어도 잘 할 수 있으니까 꿈을 잃지 않고 노력한다면 아마 뜻대로 잘 될거야.”
영수는 그렇게 학교와 도서관에서 꿈을 꾸며 키워가고 있었다.
그렇게 2년이 흘러갔다. 여전히 나는 도서관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고, 영수는 6학년이 되어 더욱 의젓해졌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영수가 도서관에서 보이지 않았다. 학교에도 오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불법체류자 단속 강화 기간!
법적용이 강화되어 불법체류자로 걸리면 바로 강제출국조치 되고, 벌금액도 배로 늘려 출국을 종용하는 조치였다. 내국인을 위해서 하는 정책이라지만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에게까지 법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못마땅하였다. 엄연히 몽골인이지만 영수는 나의 제자였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에 온 영수가 나를 찾았다. 그러면서 본국에서 삼촌과 함께 몽골로 떠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전하였다. 삼촌은 서류상 삼촌, 즉 브로커였다. 벌금을 피하기 위해 돈을 주고, 출국을 위한 조치인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나는 망연자실했다.
떠나는 날, 영수가 내게 편지를 내밀었다.
존경하는 선생님께
그동안 저를 제자로 여겨 주시고, 보살펴 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만일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한국을 떠나는 날까지 한국을 증오하고
한국 사람들을 원망 했을 거예요.
상처만 가지고 떠났을 거예요.
지금은 한국이 너무 좋고 한국 친구들도 정말 좋습니다. 다 선생님 덕분이에요.
그동안 제게 잘 대해주신 것에 대해 정말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 약속드렸던 것처럼 꼭 꿈을 잃지 않고, 외교관이 돼서 선생님을 찾을게요.
그때까지 건강하시고, 저 도영수를 잊지 마세요.
정말 감사합니다.
2006년 0월 00일
선생님의 제자 영수 올림
나는 편지를 주고 떠나는 영수에게 국어사전과 책 몇 권을 선물하였다.
떠나는 영수는 자꾸 뒤돌아보았지만, 친구들도 나도 환하게 웃어주었다.
요즈음 몽골에서 온 <악동뮤지션>이라는 남매 듀엣이 지상파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몽골이라는 나라가 내게 친숙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위에 쓰여진 나의 추억 덕분일게다.
‘잘 지내지? 나의 제자 영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