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희의 결혼 선언
“아빠 나 결혼하고 싶은 사람 생겼어.”
이것은 맏딸 은희의 폭탄적인 선언이었다. 요즘 서른한 살이면 노처녀도 아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혼담이 뜸했었고 이제 딸 결혼도 못 시키고 늙히는가 하고 걱정하고 있던 때였다. 그녀가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을 때만 해도 집적대는 애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 애들은 상대도 안 했다. 친구들이 하나둘 결혼하면서 그들 남편의 소개로 여러 남자를 만났으나 너무 신중해서인지 미지근한 상태로 있어서 모두 나가떨어졌다. 대학원을 마치고 잠깐 회계법인에서 직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때만 하더라도 외국인을 비롯해 구혼하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같이 다니던 한국 교회 청년들도 호의를 보이며 가까이하려 했다. 그러나 수습 기간인 직장 일이 힘들어서였는지 돌아보지 않았었다. 고등학교 친구들이 미국에서 결혼하면 축하하러 쫓아다니고 하와이에서 결혼한다고 들러리를 서달라고 하면 거기까지 다니며 축하해주더니 그들의 결혼도 고비를 넘기자 이도 시들해졌다.
한국에서 연구소에 다니다가 올해 은퇴한 김 박사는 이러다 딸, 은희가 혼기를 놓치는 게 아닌가 해서 이만저만 걱정이 아니었다. 인간은 아이를 낳기에 가장 적절한 시기에서 멀어질수록 성적 매력을 잃어간다고 한다. 그래서 예쁘지 않은 젊은 여성에게는 그래도 이성의 매력이 작용하지만 젊음이 없는 여성에게는 그것이 없다고 쇼펜하우어는 말하고 있다. 은희가 예쁘기만 하지 성적인 매력을 잃으면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이었다. 그는 어떻게 자기 아내를 만났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우연히 친구를 따라 교회에 갔다가 그녀를 보았다. 그녀의 하는 짓이 다 귀여웠다. 그녀가 교회 청년부 회원이라고 해서 청년부에 들어갔다. 여름에 청년부 수련회를 한다고 해서 따라갔다. 그곳에서 예수님이 제자들 발을 씻겨준 것을 본받아 세족식을 했다. 개울물에서 남자는 여자 발을, 여자는 남자 발을 씻겨주는 일이었다. 그는 그녀의 발을 씻겨주고 싶었다. 다 씻겨주고 나면 발이 땅에 닿지 않도록 업고 수련회 장소까지 갔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하지 못한 게 너무 아쉬웠다. 그러나 그 뒤로도 자주 만나게 되고 밤에도 보고 싶으면 그 집 가까이에 있는 교회로 불러냈다. 그녀 집은 보수적인 기독교 가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누가 “너는 연애를 왜 하느냐?”고 물었다면 그는 “행복하니까.”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또 “너는 왜 결혼하고 싶으냐?”라고 물었다면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라고 거침없이 대답했을 것이다. 정말 연애하면 순간이 행복하고, 영원히 더 행복해지는 것일까? 정말 그럴까? 결혼한 사람을 보면 그런 것 같질 않다. 행복은 연애의 목적지가 아니다. 행복은 이성적인 것이 아니고 아지랑이처럼 손에 잡히지 않은 감성적인 일종의 쾌감이다. 옆에 두기도 아까운 애인이 아내가 되어 안방에 죽치고 앉아 있으면 연애 때의 열정은 사라지고 가끔 저 ‘웬수’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연애는 자연이 행하는 속임수이고 결혼은 연애의 소모이므로 필수적으로 환멸이다.”라는 쇼펜하우어의 말이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 박사는 그때 처녀였던 아내를 만나는 것이 행복이었고 더 계속 행복하기 위해 결혼했다. 그것이 비록 환상이었다 할지라도 그는 젊은 시절에는 그런 본능적인 환상이 있어야 한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그런 시절을 보내지 못한 은희가 미국 생활이 싫증이 나서 귀국했다. 그녀는 회계법인에서 훈련받고 바쁘게 일하는 일이 싫은 것 같았다. 쉽게 말하면 모든 상거래를 하는 회사나 기업의 재무서류를 법에 맞게 작성하도록 돕고 자문하는 일인데 너무 바쁘고 무의미한 수습 기간 때문에 질린 모양이었다. 귀국해서 대학교수가 되는 것이 그녀의 꿈이 되었는데 한국도 미국 석사학위만 가지고는 취직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되는대로 시간 강사로 뛰면서 박사학위과정을 시작한 지 이 년째였다. 김 박사는 딸만 둘이었는데 큰딸, 은희는 총명해서 미국 유학을 보냈고 둘째는 국내에서 간호대학을 졸업하여 병원에서 근무하다가 약사와 만나 결혼해 지금은 잘살고 있어 큼 짐을 덜었는데 맏딸이 문제였다. 그런데 갑자기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사실 귀국 후 걱정이 되어 대학교수 한 사람을 추천했었다. 그런데 은희가 반대였다.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이유였다. 그녀의 신앙은 부모보다 더 나았다. 그때 아내가 말했다.
“네 아버지도 처음은 기독교 신자가 아니었다. 친구 따라 교회에 나와서 나와 만났는데 지금은 교회의 장로가 되지 않았니? 무엇보다 인품이 문제야. 만나보고 나서 결정할 수도 있지 않아?”
“엄마, 그건 희망 고문이에요. 내가 뭐라고.”
그러면서 말했다. 어떤 사람은 기독교인이며 술도 입에 한 번 대 본 적이 없다고 말하며 결혼했는데 알고 보니 술고래였고 부인 구타가 심해 결국 이혼했다는 간증을 들은 일이 있다고 했다. 결국, 겉으로 사람을 보고 판단할 수는 없다는 말이었다. 한번은 목사 지망생인 전도사를 추천했다. 신학교를 나왔고 비전도 분명한 청년이었다. 어머니의 친구가 추천한 사람이라고 해서 딸과 카페에서 만남을 주선했는데 그쪽에서 소식이 없었다. 소개한 사람에게 물으니 그쪽 부모는 탐냈었는데 막상 본인인 전도사가 싫다고 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목사 사모로는 부담스러운 학력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결국, 은희만 상처를 받고 말았다. 그 뒤로는 함부로 소개할 수가 없었다. 가끔 좋은 사람이 생기면 이메일과 전화만 알려 주어서 서로 문자를 받아보고 상대방을 알아보라고 조심스럽게 일러줄 뿐이었다. 그래도 아무 성과가 없었는데 이번은 결혼까지 하겠다는 청년이 있다는 것은 의외였다.
김 박사 부부는 은희를 불러 진지하게 물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며 뭘 하는 사람인데?”
“응, 전문의야. 지금 레지던트 과정이 끝나가는데 곧 전문의 시험도 볼 거래.”
“어떤 분얀데. 나이는?”
“외관데 나이는 나와 동갑.”
“군대는?”
“대학 다닐 때 사병으로 갔다 왔대.”
“얼마나 사귀었는데 결혼하자고 그래?”
“일 년 반쯤. 미안해 말 않고 만나서.”
일 년 반을 부모 몰래 만나고 있었다는 건 큰 배신이었다. 은희가 평소에 하는 짓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서로 상처받는 것이 싫어 먼저 좀 만나 본다는 것이 그리되었다고 말했다. 평소 남자에 시큰둥한 그녀가 그에게 매력을 느낀 건 그가 솔직하고 직선적이며 거짓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근무하는 병원은 어딘데?”
“영남대 병원.”
“뭐, 경상도? 거기가 고향이야?”
“응. 부모님은 거기서 작은 공장을 운영하고 계신대.”
“신랑과 시부모 될 분이 경상도 사람이라고?”
김 박사는 놀라서 소리를 쳤다. 경상도 가장은 집에 오면 “묵자, 자자.” 밖에 모르고 설거지는커녕 모든 가사노동은 거들어 보지도 않는다고 알고 있었다. 그는 남자 중심인 가부장적 전통의 고장이 경상도라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었다. “그래 결혼하면 그 집에 들어가 살 거야?” 김 박사는 드디어 한마디 했다.
“설마. 따로 살 집을 마련해 주겠지.”
아내가 거들었다.
“그런 이야기는 아직 할 단계가 아니야. 하지만 결혼하면 여자는 남자 집에 가서 사는 게 아니야?”
“이 맹꽁이가. 너 시집살이가 뭔지 알고 하는 소리야? 그 지방은 아예 여권이 없는 곳이야. 결혼 후 네가 교수로서 사회 활동도 할 수 있다고 다짐을 받았어?”
“아직 그런 단계가 아니라고 했잖아. 하지만 그건 당연하지. 각자의 존엄성을 인정받고 서로 각자 성장하는 것을 돕는 삶이 부부가 아니야?”
김 박사는 많이 걱정되었다.
“그 애를 한번 만나보자. 지금까지 부모 모르게 어디서 만났어?”
“거의 매주 그가 날 찾아와서 이곳 도서관이나 시내 카페에서 만났고 어떤 때는 영화를 보고 돌아가기도 했어. 내가 얘기해볼게.”
“너는 그 애가 오면 그렇게 좋았어?”
“나는 그런 적극적인 사람이 좋아. 그건 나를 좋아한다는 뜻 아니야? 그리고 결혼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하는 게 아니고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과 하는 게 아니야?”
다음 주, 주말에 당장 미팅을 주선해서 집에서가 아니고(집은 30년이 된 아파트여서 벽지나 마루나 너무 후졌었다.) 중식당에서 김 박사 부부와 은희 커풀이 저녁 식사로 모였다. 아무래도 한가한 방이 좋을 것 같아서였다. 만나고 나자 깜짝 놀랐다. 너무 잘생긴 총각이었다. 어디 있다가 나타난 것인지 하나님께서 정해준 은희의 배필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 대답하는 게 시원시원했다. 첫 마디가 쉬 나오지 않아 어떻게 해서 은희를 알게 되었느냐고 딸에게는 묻지 않은 질문을 했다. 그는 미소하며 말했다. 자기가 서울 세미나에 갔다 오면서 서울역에서 열차를 기다리다가 자기 의학서적을 놓고 온 일이 있었는데 며칠 후 그 책이 자기 책상 위에 택배로 와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정성스럽게 포장해서 보내 준 것을 보고 누가 그렇게 버리지 않고 친절을 베풀었을까 하고 발신인 전화번호를 찾아 감사 인사를 하게 된 것이 만남의 동기가 되었다고 했다. 반년 가까이 이메일을 물어, 서로 글을 주고받았는데 꼭 만나보고 싶어 찾아본 게 동기가 되었다고 했다. 김 박사는 물었다.
“빨리 결혼하고 싶다는 말을 했다는데 왜 결혼을 서두를 사정이 생긴 것인가?”
“일 년 반 이상 만났는데 결혼을 미룰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동안은 여자 교제가 없었나?”
“주변에 간호사들이 많이 있는데, 그들과 만나는 것을 교제라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이제는 한 가정을 갖고 여러 면으로 안정을 얻고 싶습니다.”
김 박사는 이것은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의학 서적을 서울역에 놓고 떠나며 어떻게 은희는 또 그 자리에 앉아 그 책을 발견하고 택배로 보낼 생각을 한 것일까? 또 만나보니 늠름한 청년이고 장래가 유망한 청년인데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의사 사위를 만나려면 열쇠를 여러 개 준비해야 한다는데 개업할 집 하나 마련해 주지 못할 자기가 오히려 한심할 뿐이었다.
“부모님은 이 결혼을 어떻게 생각하시나? 은희 이야기를 한 적은 있는가?”
“한번 김 교수가 대구에 내려와 아버님을 뵌 적이 있습니다. 부모님은 제 생가에 전적으로 동의하십니다.”
이건 자기들끼리 다 짜고 친 고스톱이 아닌가?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 하고 김 교수는 생각했다. ‘예스, 예스.’라고만 하면 되는가? 하고 딸에게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다음 주말에 대구에서 간단하게 상견례를 하였다. 코로나 때문에 성대하게 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신랑 측 부모와 예비 신랑, 박 군, 김 박사 내외와 은희가 참석했다. 김 박사의 둘째 딸은 바빠서 나오지 못했다. 김 박사는 박 군이 언제쯤 전문의 시험을 끝내고 독립해서 병원 개원을 할 수 있을지 묻고 싶었으나 병원 개원에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는 자기가 그런 질문을 하는 것도 실례인 것 같아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자 신랑 측 아버지인 박 사장이 자기네는 아파트에 살고 있는데 결혼하면 작은 집을 하나 전세로 얻어 따로 살게 하겠다고 말했다. 병원 개원은 은행 융자를 받아, 할 수도 있겠지만 외과는 더 병원에서 훈련을 받아야 해서 오래 수련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어떻든 병원 개원은 지금은 코로나로 재정적인 압박도 심해 좀 늦어질 것 같다고 말했다. 박 사장은 박 군 닮아서 남의 의중을 잘 알아 미리 안심시키는 것 같았다. 김 박사는 연구소에 근무해서 그곳은 원래 퇴직금이 없었다. 따라서 뒤늦게 가입한 국민연금으로 살아야 하는 형편이어서 이건 너무 기운 결혼 같다는 생각이 들어 힘이 쭉 빠졌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결혼은 두 달 후 신랑의 스케줄을 봐서 결정하기로 하자고 일단 매듭을 지었다. 이건 완전히 주도권을 신랑 측에 빼앗긴 모임이었다.
김 박사는 집으로 돌아오자 30년 된 아파트를 완전히 뜯어고치겠다고 선언했다. 결혼하면 박 사장은 신랑에게 따로 전셋집을 얻어주겠다고 했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 경우는 처가에 와서 주말 부부로라도 살게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재도구를 다 꺼내어 어느 창고에라도 맡기고 한 달 때쯤 집을 비우고 딴 집에 살다가 집 리모델링이 끝나면 들어가겠다는 계획이었다.
“아버지, 그건 너무 무리한 생각이 아니어요?”
“뭐가?”
“30년 다 되어가는, 그것도 40평이 넘는 아파트를 완전히 고치겠다는 건 너무 무모한 생각 같아요. 언제 재건축이 시작될지도 모르는 아파트를 겉만 깨끗하게 꾸미면 무슨 소용이 있어요. 금전만 낭비지.”
“나는 그 박 사장이 전세를 얻어주겠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다. 또 네가 시댁에 들어가는 것은 더욱 싫다.”
“그렇다고 시집간 딸을 새로 꾸민 아파트에 살게 하고 남편을 주말부부로 살게 하겠다는 거예요?”
“너를 붙들고 있으면 시댁에서도 빨리 전셋집을 얻어주지 않겠니?”
“그건 아버지의 생각이고요 하나님의 생각은 아닌 것 같아요.”
“하나님께서 나에게 아무 말씀도 안 들려주신다. 내가 너를 위해 무엇이든 해 주고 싶은데 아무것도 해 주 수 없지 않니? 신랑감도 찾아 주지 못했고, 결혼 날짜도, 너희의 살 집도, 병원을 개원한대도 나는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이 아파트를 깨끗하게 리모델링해서 네가 편하게 하루라도 지나게 해 주는 것뿐이야.”
“아버지는 저에게 충분히 해 주셨잖아요. 미국 유학으로 대학 공부도 할 수 있게 해 주시고. 딸들을 위해 충분히 희생하셨어요. 이제 저희는 잊고 부모님의 노년의 행복한 계획을 세우실 때요. 하나님께서 저를 그 집으로 보내시려고 계획하셨으면 앞으로의 삶도 인도하실 거예요. 저희는 잊어버리세요. 아니 하나님께 맡기세요.”
그 뒤로 두 달 뒤 둘째 토요일을 결혼일로 결정하였다고 통보해 왔다. 그리고 그날은 예식장에서 결혼하지 않고 야외에서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 결정을 따르기만 하면 돼? 너도 동의했어? 야외에서 하다니, 그날 비가 오면 어떻게 할 거야?”
“저는 시간이 여유롭고 그는 바빠서 시간을 내기가 힘든데 어떡해요. 또 결혼식은 우리만의 결혼식으로 특별히 야외에서 하고 싶다는데 어떻게 반대해요.”
“그래도 네 의견이 있을 게 아니야?”
“그의 의견이 제 의견이에요? 이제 한 말을 탔는데 어떻게 해요. 하나님께서 그를 목적을 두고 이끄실 것이라고 믿어요.”
“하나님은 그를 통해서만 너희들의 삶을 인도하신다니? 그의 부모님도 그렇게 따르시니?”
“외과 의사는 급한 수술 환자를 앞에 두면 빠른 결정을 해야 한 대요. 그것이 버릇되어 먼저 결정하고 통보하나 봐요. 저도 일생에 한 번인데 야외에서 우리가 정한 식순대로 결혼식을 한번 해보고 싶었어요. 틀에 박힌 결혼식보다는요.”
“그건 안 돼. 나는 야외 결혼식을 하더라도 우리 목사님이 주례해 주셔야 한다고 벌써 부탁까지 했는데?”
“왜 그러셨어요?”
“결혼식은 장난이 아니야. 하나님 앞에서 맺어준 부부가 되겠다고 서약하는 것인데 목사님 주례 아니면 절대로 안 된다.”
“알겠어요. 저도 하긴 그래요. 아무리 순서가 진부하다고 주례 없이 예식을 진행하며 신랑·신부가 혼인서약을 하객들 즐겁게 장난 섞인 어조로 하는 것은 싫어요.”
“그리고 야외 예배도 다시 생각해 봐라. 3일 동안도 정확한 예보를 할 수 없는데 어떻게 두 달 뒤 일기를 예측하니. 비가 오면 청첩장도 다 찍어 놓고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예식은 대구의 한옥 마을에서 하기로 이미 결정했대요. 비가 오면 사회자석은 열린 천막을 치고 하객석은 비치 파라솔을 세운 탁자를 몇 개 놓을 모양이에요. 꼭 올 사람만 오면 되대요.”
“그건 안되지. 여러 하객을 증인으로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걸 사람이 나눌 수 없다고 엄숙히 서약하는 것인데 건성건성 넘길 수 있어?”
“꼭 비온다고 정해진 것도 아니잖아요. 좋은 날씨 주시라고 기도 좀 해 주세요.”
“요즘 결혼을 너무 쉽게 생각하니 두 쌍 중 한 쌍은 이혼한다잖아. 또 애는 낳지 않고. 낳아놓고 이혼하면 또 그 애는 무슨 죄야.”
“아버지, 쉽게 여겨서가 아니에요. 돈 자랑하느라 너무 사치스러운 결혼을 너도나도 해서 반기를 든 거예요. 웨딩홀, 스튜디오, 웨딩드레스샵, 웨딩 메이크업, 또 결혼 정보회사는 얼마나 많은데요. 모두 호화판이에요. 이런 낭비에서 해방되자는 것이에요.”
“그건 좋은 생각이다. 그럼 예식 비용은 어떻게 하자고 상의를 했어?”
“그건 지금부터 해야지요. 얼마 되지 않을 거예요. 그 집 박 사장님은 교회 집사님이시고 노숙자 구제에 헌신하시는 분이래요. 간소하게 하실 거에요.”
김 박사는 은희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어리던 딸이 언제 그렇게 컸는가? 이제 부모를 떠나 부부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그는 할 말을 잃었다.
“그래 너희들이 결정해서 연락해라. 그대로 따르겠다.”
그는 두 손을 들었다. 그러나 사는 집 리모델링은 반드시 해서 결혼 후 분가가 안 되는 경우는 내 집에 ‘너를 더 두고 싶다.’라고 마음으로 결심하였다. 딸 사랑한다고 하나님께서 반대하지는 않으실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