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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남선 교수님과 함께하는 풍수답사입니다. *
정기답사는 홀수 달 두번째 주 일요일에 실시하며
일정에 변동이 생길 시 미리 공지하겠습니다.
100회 정기답사를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올바른 정석풍수를 열강하시는 조남선 교수님과
1년에 6회씩 약 17년의 시간을 오롯이 풍수로 동문님과 함께할 수 있음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우리나라 풍수의 비조이신 "자장율사" 의 정석풍수의 발자취를 따라
1400여년 전 신라로 시간여행을 떠납니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한 사람이 먼저 가고,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루쉰의 "고향" 중에서
1. 답사일 : 2026년 9월 13일 (일)
2. 장소 및 시간 : 아주대 정문 오전 8시 정각 출발
3. 답사지
1) 영축총림 통도사 (경남 양산시 하북면 통도사로 108)
통도사는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영축산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승려 자장율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창건주 자장율사가 643년에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지고 온 불사리와 가사, 대장경 400여 함을 봉안하고 창건함으로써 초창 당시부터 아주 중요한 사찰로 부각되었다.
대장경을 봉안한 사찰로서는 최초이다. 대웅전 남쪽의 금강계단에 봉안한 불사리탑이 통도사의 중심이 되기 때문에 대웅전 내부에는 불상을 봉안하지 않았다. 삼보사찰 가운데 불사리를 모신 불보 사찰이며, 이외에도 수많은 중요문화유산을 소장하고 있어 201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우리나라 삼보사찰[三寶寺刹: 佛寶 · 法寶 · 僧寶로 일컬이지는 세 사찰] 가운데 하나인 불보(佛寶)주1 사찰이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이다. 2018년 1월에 양산시 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 같은 해 6월에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Sansa, Buddhist Mountain Monasteries in Korea)”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646년(선덕여왕 15)에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하였다. 산 이름을 영축산이라 한 것은 산의 모양이 인도의 영축산과 모양이 매우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하나, 그 옛 이름은 축서산(鷲棲山)이다.
절 이름을 통도사라 한 까닭은 ① 전국의 승려는 모두 이곳의 금강계단(金剛戒壇)에서 득도(得度)한다는 뜻, ② 만법을 통달하여 일체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 ③ 산의 형세가 인도의 영축산과 통한다는 뜻 등이 있다.
창건주 자장율사가 643년에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지고 온 불사리주2와 가사(袈裟), 그리고 대장경 400여 함(函)을 봉안하고 창건함으로써 초창 당시부터 매우 중요한 사찰로 부각되었다. 특히 불사리와 가사뿐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대장경을 봉안한 사찰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역사 기록은 통도사의 사격(寺格)을 단적으로 설명해 주는 매우 중요한 기록임에 틀림 없다. 그리고 이 절을 창건한 자장율사는 계단(戒壇)을 쌓고 사방에서 오는 사람들을 맞아 득도시켰다. 이에 통도사는 신라 불교의 계율 근본도량(根本道場)이 되었다.
창건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대찰이 아니고 후에 금강계단이라고 불려진 계단을 중심으로 몇몇 법당이 존재하였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그 뒤 고려 초에는 사세가 더욱 확장되어 절을 중심으로 사지석표(四至石標), 즉 국장생석표(國長生石標)를 둘 만큼 대규모로 증축되었다. 특히 현존하는 중요 석조물이 고려 초기 선종대에 조성되었으므로, 가람의 정비는 이때 중점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 당시의 중요한 석조 조형으로는 금강계단 상부의 석종형부도(石鐘形浮屠)주3를 비롯하여 극락전 앞의 삼층석탑, 배례석(拜禮石), 봉발탑(奉鉢塔), 그리고 국장생석표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모두 고려시대에 속하는 유물이고 그 밖에 현존하는 목조건물들은 모두 임진왜란 이후에 건립되었다.
물론 조형상으로 가장 앞서는 석조물로는 영산전(靈山殿)에서 마주 보이는 남산 위의 폐탑재를 들 수 있으나, 이는 이미 파괴된 채 기단부의 사리공(舍利孔)주5만이 주목되고 있다. 이 석탑이 어떻게 하여 파괴되었는지 또는 최초에 건립된 사원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가람배치>>
통도사의 가람배치는 신라 이래의 전통 법식에서 벗어나 냇물을 따라 동서로 길게 향하였는데. 서쪽에서부터 가람의 중심이 되는 상로전(上爐殿)과 중로전(中爐殿) · 하로전(下爐殿)으로 이어진다. 또, 그 서쪽 끝에 보광선원(普光禪院)이 자리잡고 있다.
본래 이 절터에는 큰 못이 있었고 이 못에는 아홉 마리 용이 살고 있었으나 창건주 자장율사가 이들을 제도하고, 한 마리 용을 이곳에 남겨 사찰을 수호하게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현재도 금강계단 옆에는 구룡신지(九龍神池)의 자그마한 상징적 못이 있다.
먼저 동쪽에서부터 일주문(一柱門) · 천왕문(天王門) · 불이문(不二門)의 세 문을 통과하면 금강계단에 이르게 된다. 금강계단 앞의 목조건물인 대웅전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45년(인조 23) 우운(友雲)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물 상부의 기본 형태는 丁자형의 특이한 구조를 나타내고 있으며, 그 정면격인 남쪽에는 금강계단, 동쪽은 대웅전, 서쪽은 대방광전(大方廣殿), 북쪽은 적멸보궁(寂滅寶宮)의 편액(扁額)이 걸려 있다.
그러므로 이 건물을 대웅전이라고 하지만 남쪽 정면의 금강계단이 그 정전이라 할 수 있다. 즉, 이 건물의 바로 뒤쪽에는 통도사의 중심이 되는 금강계단 불사리탑(佛舍利塔)이 있다. 이는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지고 온 불사리를 세 곳에 나누어 황룡사탑 · 태화사탑, 그리고 통도사 계단에 봉안하였다고 하는 바로 불사리 계단이다. 통도사의 특징은 이 불사리 계단에 있으며 또 이로 인하여 불보사찰의 칭호를 얻게 된 것이다.
부처의 신골(身骨)인 사리를 봉안하였으므로 대웅전 내부에는 불상을 봉안하지 않았으며, 내부에는 불상 대신 거대하고 화려한 불단(佛壇)이 조각되어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근본적 의미는 계단에 부처의 사리를 봉안하고 있다는 신앙 때문이다. 그리고 금강계단 목조건물의 천장에 새겨진 국화와 모란꽃의 문양 또는 불단에 새겨진 조각은 주목되는 작품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영축산 통도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2) 경주 사천왕사지 (경북 경주시 배반동 935-2번지)
경주 낭산(狼山) 기슭에 있는 신라의 절터로 신문왕릉 옆 ·선덕여왕릉 아래에 있다.
신라 문무왕 14년(674)에 중국 당나라는 신라가 그들의 도독부(계림도독부)를 공격한다는 핑계로 50만 대군을 일으켜 신라를 공격하려 하였다. 이에 문무왕이 명랑법사에게 적을 막을 계책을 구하자, 이곳 신유림에 사천왕사를 짓고 부처의 힘을 빌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당의 침략으로 절을 완성시킬 시간이 없게 되자, 비단과 풀로 절의 모습을 갖춘 뒤 명승 12인과 더불어 밀교의 비법인 문두루비법을 썼다. 그러자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풍랑이 크게 일어 당나라 배가 모두 가라앉았다. 그후 5년 만에 절을 완성(679)하고 사천왕사라 하였다.
이곳은 원래 신유림이라 하여 신라인들이 신성하게 여기던 곳이다.『삼국유사』에 의하면 선덕여왕이 죽으면서 도리천에 묻어줄 것을 유언했는데, 그곳이 낭산 남쪽이라 하였다.
여왕이 죽은 지 30년만에 왕릉아래 사천왕사를 짓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여왕의 예언이 맞았음을 알게 되었다. 불교에서는 수미산을 세상의 중심으로 보고 그 중턱은 사천왕이 지키며 꼭대기에는 부처의 나라인 도리천이 있어 불국토가 시작되는 곳이라 믿었다. 이 설화를 통해 낭산을 수미산으로 생각했던 신라인들의 불국토사상을 엿볼 수 있다.
절터에는 머리부분이 없어진 귀부 2기와 비신, 그리고 당간지주 1기가 남아있다. 특히, 절 동쪽에 남아있는 귀부는 사실적인 표현수법과 등에 새겨진 아름다운 조각으로 신라시대의 뛰어난 작품임을 보여주고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가장 먼저 지은 사천왕사는 전형적인 쌍탑식 가람 배치로 신라 호국불교의 성격과 신라인들의 불교관·우주관을 잘 보여주는 절이다. 경덕왕 때 향가인‘도솔가’, ‘제망매가’를 지은 고승 월명이 머물렀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경주 사천왕사지 (경주문화관광, 경주시청)
3) 선덕여왕릉 (경북 경주시 보문동 산79-2)
낭산의 정상부로 오르면 솔숲 사이로 단아한 왕릉 1기가 모습을 드러낸다.
신라 제27대왕 선덕여왕의 능이다.
삼국유사에서 표현하는 선덕여왕은 지혜의 여왕이었다.
‘선덕여왕 지기삼사(善德王知幾三事)’라는 제목으로 선덕여왕이 미리 알아차린 세 가지 일화를 소개했다.
그 하나는 당 태종이 보낸 모란과 관련한 일화이다. 태종이 모란 그림과 씨앗을 보냈는데 선덕이 그림을 보고는 “그 꽃에는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씨앗을 심어 꽃이 필 때를 기다리니 정말 꽃은 향기가 나지 않았다.
두 번째는 옥문지이야기이다.
영묘사 앞 옥문지의 겨울, 난데없이 개구리들이 사흘 밤낮을 울었다.
왕에게 고하자 선덕은 알천랑과 필탄랑에게 서쪽으로 가면 적의 군사가 있을 것이니 소탕하라 명했다.
과연 서쪽 경계지역에 백제 병사 수백이 숨어 있어 이를 소탕했다.
마지막으로 선덕은 본인이 죽는 날과 묻힐 자리를 예언했다.
그는 자신이 죽으면 도리천에 묻어달라고 명했다. 신하들이 위치를 몰라 묻자 낭산의 남쪽이라고 말했다.
신하들은 유언대로 그를 낭산에 묻었다.
그로부터 33년 뒤, 문무왕이 낭산 기슭에 사천왕사를 지었다. 불교에서는 ‘사천왕천 위에 도리천이 있다’라고 했는데 사천왕천을 상징하는 사천왕사 위에 선덕여왕의 무덤이 있으니 바로 도리천이 되는 것이다.
신하들은 그때야 선덕여왕의 유언을 깨닫고는 감탄했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선덕여왕릉 (경주문화관광, 경주시청)
4) 첨성대 ( 경북 경주시 인왕동 839-1)
‘동양 최고(最古)의 천문대’ 첨성대.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경주를 상징하는 랜드마크 중 하나이다.
받침대 역할을 하는 기단부(基壇部)위에 술병 모양의 원통부(圓筒部)를 올리고 맨 위에 정(井)자형의 정상부(頂上部)를 얹은 모습으로 높이는 약9m이다.
원통부는 부채꼴 모양의 돌로 27단을 쌓아 올렸다. 남동쪽으로 난 창을 중심으로 아래쪽은 막돌로 채워져 있고 위쪽은 정상까지 뚫려서 속이 비어 있다. 동쪽 절반이 판돌로 막혀있는 정상부는 정(井)자 모양으로 맞물린 길다란 석재의 끝이 바깥까지 뚫고 나와있다. 이런 모습은 19∼20단, 25∼26단에서도 발견되는데 내부에서 사다리를 걸치기에 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옛 기록에 의하면, “사람이 가운데로 해서 올라가게 되어있다”라고 하였는데, 바깥쪽에 사다리를 놓고 창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 후 사다리를 이용해 꼭대기까지 올라가 하늘을 관찰했던 것으로 보인다.
첨성대를 이루는 돌들은 저마다의 의미를 가진다.
위는 둥글고 아래는 네모진 첨성대의 모양은 하늘과 땅을 형상화했다.
첨성대를 만든 365개 내외의 돌은 1년의 날수를 상징하고, 27단의 돌단은 첨성대를 지은 27대 선덕여왕을, 꼭대기 정자석까지 합치면 29단과 30단이 되는 것은 음력 한 달의 날수를 상징한다.
관측자가 드나들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가운데 창문을 기준으로 위쪽 12단과 아래쪽 12단은 1년 12달, 24절기를 표시한다.
하늘의 움직임을 계산해 농사 시기를 정하고, 나라의 길흉을 점치는 용도로도 첨성대가 활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첨성대 (경주문화관광, 경주시청)
5) 계림과 월성
계림월성 지역은 신라 천년 고도의 심장부다.
월성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동궁(東宮)과 동궁원(東宮苑)인 안압지(雁鴨池)가 있고, 남쪽에는 기암 사이로 흐르는 남천(南川)이 있으며, 서쪽에는 김알지(金閼智)의 탄생설화가 있는 왕궁의 상원(上苑)같은 계림이 있다. 계림 서쪽에는 경주 내물왕릉이 있고, 계림 북쪽에는 첨성대(瞻星臺)가 있다.
월성 주위를 발굴조사한 결과, 단을 지어 연못처럼 아름답게 조성한 해자(垓子)가 동 · 서 · 북에 월성을 에워싸고 있었고, 해자 가에서는 많은 건물터가 드러났다. 이들 건물은 왕궁에 소속된 관청건물들로 보인다.
남천은 월성 남쪽에 접근을 막는 해자 구실도 하면서 어떤 곳은 여울을 이루고 어떤 곳은 깊은 소(沼)를 만들며 기암괴석과 더불어 아름다운 원(苑)의 기능도 하였다. 남천에는 유교(楡橋) · 귀교(鬼橋) · 춘양교(春陽橋) · 월정교(月精橋) · 일정교(日精橋) 등의 아름다운 다리가 설치되어 있었다.
월정교 다리터를 발굴조사한 결과, 4개의 교각(橋脚) 기초가 드러나고, 또 하나의 목교가 하류쪽으로 19m 거리에서 발견되었다. 월정교는 길이 63m, 너비 11m 정도의 석교였다. 이는 신라의 도로규모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계림은 원래 시림(始林)이라고도 하며, 신라의 국호가 되었던 중요한 숲이다. 서기 65년(탈해이사금 9년) 3월 이 숲에서 신라 김씨왕조의 시조가 되는 김알지(金閼智)가 태어났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 시림조에 보면, “숲속에 쌓은 돌이 있는데 높이가 3척이나 된다. 속설에 전하기를, 알지의 태(胎)를 풀 때 가위를 놓았던 돌로서 가위의 흔적이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신단(神壇)같은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1803년(순조 3)에 세운 김알지 탄생비가 비각 속에 서있다.
계림은 습지여서 왕버들과 느티나무가 숲을 이루고 숲 속에는 맑은 개울이 흐르고 있다. 발굴결과 이 숲 북쪽에서 드러난 큰 건물터들은 관아건물이거나 신묘(神廟)같은 건물들로 보인다.
계림은 신라 왕궁의 경역 내에 있는 후원(後苑)같은 원림(園林)이다. 계림 북쪽에 첨성대가 서있고 첨성대 주위에는 고분들이 인접해 있다.
곧, 신라시대에는 왕궁이 원림과 연결되고, 이 원림 속에 첨성대와 왕릉들이 자리하였던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계림 월성지대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4. 회비 : 5만원 (차량 대여비 및 중식 석식 기타 비용 포함)
(당일 총무에게 납부)
5. 연락처 : 회장 이 영기 (010 - 9001 - 4561)
총무 김 은희 (010 - 3228 - 648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