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 시 : 2000년 9월 23일(토) 오후2시
・ 장 소 : 구미1대학 시청각홀
・ 주 최 : 구미시
・ 주 관 : 구미문화연구회
・ 후 원 : 판소리학회・구미청년유림회
❁ 프 로 그 램 ❁
□ 개 회
사 회 : 권순종(구미1대 교수)
․ 개회사 : 김영일(구미문화연구회장)
․ 축 사 : 김관용(구미시장)
□ 주제 발표
박록주 명창의 삶과 예술세계
좌 장 : 서종문(경북대 교수)
제 1주제 : 박록주 명창의 삶과 예술활동
발표 : 김석배 (금오공대 교수) 지정 토론 : 김현주(경희대 교수)
제 2주제 : 박록주 명창의 음악예술세계
발표 : 이보형 (문화재전문위원) 지정 토론 : 최동현(군산대 교수)
제 3주제 : 박록주 판소리 사설의 특징
발표 : 김종철 (서울대 교수) 지정 토론 : 박일용(홍익대 교수)
개 회 사
선조의 문화유업을 계승하기 위한 행사의 일환으로 저희 구미문화연구회가 주관하는 박록주선생 추모공연에 깊은 관심을 보여주신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지방자치는 문화자치의 튼튼한 토양속에서 풍성한 결실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화유산을 계승하기 위한 크고 작은 노력은 바로 지방 자치를 앞당겨 구현하는 길이며 문화의 시대인 21세기를 살아가는 지혜이기도 합니다.
박록주 선생의 얼을 추모하기 위한 행사역시 이러한 가치에 의미가 맞춰져 있습니다. 동편제 창법의 국보적 존재인 박록주선생은 우리의 고장 선산 출신으로 많은 업적을 남기시고 지난 79년 타계하셨습니다. 그러나 국보적 존재로서 부여된 소중한 문화가치에 불구하고 그분의 얼을 계승하려는 노력은 미미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저희 문화연구회는 지난 5월 27일 선산읍 노상리에 있는 기념비를 참배한 가운데 ‘국창 박록주선생 21주기 추모제’행사를 시작으로 나름대로의 노력을 기울여 오늘의 추모행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저희들은 또 ‘박록주 기념사업회’를 결성키로 의견을 모으고 토대를 닦아나가고 있기도 합니다.
전라도 사투리가 아니면 안되는 것으로 여겨지던 판소리계에서 유독 경상도 사투리를 고집, 동편제의 지평을 넓인 박록주선생은 소중한 문화유산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관심밖에 밀려나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박록주선생의 업적을 계승하기 위한 추모행사에 보내주신 여러분의 깊은 관심으로 그분의 문화업적은 새롭게 살아나고 있습니다. 저희 문화연구회는 앞으로도 여러분의 깊은 관심과 성원에 힘입어 박록주선생의 얼을 계승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여 나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00년 9월 23일
구미문화연구회 회장 김 영 일
축 사
풍요와 결실의 계절, 오곡이 무르익어 가는 가을입니다. 먼저 구미문화연구회에서 國唱 朴綠珠 先生 再照明 학술세미나를 갖게 된 것을 34만 구미시민과 더불어 축하를 드립니다.
이번 세미나는 유서 깊은 선비문화와 전통예술의 멋을 간직한 고장 구미가 배출한 중요무형문화재 박록주선생의 삶과 예술적 업적을 재조명하고 문화도시인으로서의 자긍심 고취와 우리 시를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어 더욱 그 뜻이 깊다고 하겠습니다.
예로부터 면면이 이어져 온 우리 선조의 삶의 지혜와 교훈, 그리고 수준 높은 예술의 정수가 녹아있는 민족음악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판소리는 음악, 문화, 무용, 연극등이 멋들어지게 어우러진 우리 고유의 대표적인 종합예술로서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오늘날 외래문화의 급속한 유입으로 인해 판소리와 같은 뛰어난 민족문화예술이 점차 위축되고 있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다행히 오늘 판소리의 대가 박록주선생 재조명 학술세미나가 열림으로서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자명한 이치를 깨닫는 전환점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아무쪼록 이 세미나가 문화예술 창달을 기하는 뜻깊은 자리가 되고 아울러 주제발표와 토론을 위하여 구미를 방문해 주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이 자리를 마련하신 구미문화연구회 관계자 여러분에게도 고마운 인사를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Ⅰ. 머리말
자신의 세계를 올곧고 비옥하게 가꾸며 사는 것은 아름답다. 더구나 남들이 근접하기 어려운, 가치 있는 것을 위해 한평생을 바치는 일은 아름답다 못해 숭고하다. 판소리 명창 가운데 이런 삶을 살았던 명창이 적지 않지만 근래의 명창 중에서 박록주만큼 그렇게 산 이도 흔치 않다.
일찍부터 장래성 있는 명창으로 주목받았던 박록주는 판소리로 일가를 이루어 20세기 특히 해방 후의 판소리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판소리 및 창극 공연은 물론이고 국악방송에 출연하였고, 수많은 제자를 판소리 대들보로 키웠으며, 판소리보존연구회를 설립한 그의 공적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박록주가 현대 판소리사에 남긴 이와 같은 뚜렷한 공적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그러나 그의 예술가로서의 삶과 예술활동에 대해서는 미진하기 그지없다. 이에 본고에서는 선행연구에서 미진했던 부분인 그의 삶과 예술활동에 대해 체계적으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Ⅱ. 박록주 명창의 예술적 삶
박록주의 본명은 命伊, 雅號는 春眉, 綠珠는 藝名이다. 그의 소리인생은 『한국일보』에 38회 연재(1974.1.5~2.28)된 「나의 이력서」에 정리되어 있는데, 그것은 박록주의 기억을 더듬어 정리한 탓으로 연도에 상당한 착오가 있다. 여기서는 「나의 이력서」를 바탕으로 하되 『매일신보』,『조선일보』,『동아일보』등 당시의 신문기사를 통해 연도를 바로잡고, 현지조사 및 여타의 자료를 참고하여 박록주 명창의 예술가로서의 삶을 연보형태로 간략하게 작성하기로 한다.
1905년 (1세) : 음력 1월 25일(양력 2월 28일) 경북 선산군 고아면 관심리 437번지(현 구미시 고아읍 관심동)에서 父 朴重根과 母 權順伊의 셋째딸 命伊로 태어났다. 호적부에는 明治38年(1905년) 2월 15일 生, 父 朴在普 ․ 母 朴順伊로 기재되어 있다. 농사를 많이 짓는 편이어서 먹고사는 걱정이 없었으나 부친이 한량이서 집안일은 어머니가 감당했고 자신도 집안일을 도왔다고 한다. 그런데 선산의 古老들은 박재보는 박수무당으로 소리선생도 하였는데, 그에게 소리를 배운 기생들은 마을 뒤편의 壯元峰에서 소리연습을 하였고, 그 중의 일부는 선산의 요리집인 春香閣에 놀음 나갔으며, 박록주의 상경 후에도 상당기간 박재보는 소리선생을 계속하였다고 한다.
1916년(12세) : 선산군 해평면의 桃李寺 부근에 머물고 있던 박기홍에게 본격적인 소리 공부를 시작하였다. 선산에 온 협률사 공연을 본 부친이 목소리가 쟁쟁한 딸을 나라 제일의 명창을 만들기 위해 박기홍에게 보냈고, ‘綠珠’라는 예명도 이때 부친이 지어준 것이다. 두달 동안 <춘향가>전바탕과 <심청가>일부를 배워 동편제 소리의 기틀을 닦았다. 이때부터 소리 잘한다는 소문이 나서 선산은 물론 김천, 왜관, 상주등 이웃 고을의 잔칫집에 초청되었다.
1918년(14세) : 선산에 온 김창환의 협률사를 따라다니며 김창환과 김봉이에게 단가와 토막소리 한두 개를 배웠고, 그후 대구 앞산에 있는 절에서 두달 동안 강창호에게 <심청가>의 ‘초앞’부터 ‘심청이 인당수에 빠지는데’와 단가 <고고천변>을 배웠다. 이어 대구의 샘밖골목에 있던 앵무(鸚鵡, 행수기생 출신)의 달성권번에 다니며 춤, 시조, 소리를 배우는 등 기생수업을 했다.
1919년(15세) : 달성권번에서 김점룡, 임준옥, 조진영에게 남도민요<육자배기>와 <화초사거리>를 배웠다. 박록주는 이때 이미 대구에서 김초향 다음가는 명창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1921년(17세) : 원산의 명창대회에서 첫 남편이 남백우와 만나 원산에 살림을 차렸다.
1923년(19세) : 서울로 올라와서 송만갑에게 단가<전국명산>과 <춘향가>의 ‘사랑가’에서부터 ‘십장가’까지 배웠다. 漢南券番에 妓籍을 두고 우미관에서 열린 명창대회에 참가하면서 서울에서 명창으로 이름이 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부터 몇 년에 걸쳐 송만갑에게 <적벽가>, 정정렬에게 <춘향가>와 <숙영낭자전>, 김정문에게 <흥부가>와 <심청가>, 유성준에게 <수궁가>, 김창환에게 ‘제비노정기’를 배운 것으로 보인다.
1926년(22세) : 가을에 송만갑, 김해 김록주와 진고개에서 녹음하면서 음반 취입을 시작하였다. 그후 콜럼비아, 빅타, 오케, 폴리돌, 시에론, 다이헤이 음반 등에 수많은 명곡을 남겼다. 그리고 9월 16일 경성방송국(JODK)의 시험방송에 출연한 이래 1945년 3월까지 100여 차례 국악방송에 출연하였다.
1928년(24세) : 팔도명창대회(조선극장)후 김경중, 조선극장 지배인 신씨, 김유정을 만났다. 이때부터 여러해 동안 김유정의 집요한 애정공세에 시달렸다.
1930년(26세) : 9월 5일 창립한 조선음률협회에 참여하여 각종 명창대회에 출연하였다.
1931년(27세) : 김경중의 배려로 남원군 주천면 상주마을에 있는 김정문에게 20여일 동안 <흥보가>(‘초앞’부터 ‘제비 후리러 나가는데’)를 배웠다. 남원에서 돌아온 뒤 5월 2일(음 3월 15일) 복잡한 집안 사정과 신씨와의 애정문제로 자살을 기도했다. 이 해는 漢城券番 소속이었다.
1934년(30세) : 두 번째 남편인 순천의 갑부 우석 김종익과 만났고, 우석은 국악발전을 위해 공평동 29번지의 가옥 한 채를 마련해 주었다. 이때부터 조선성악연구회(이사장 이동백, 5월11일 창립총회)의 일원으로 각종 명창대회에 참가하여 이름을 날리고, 그후 창극 <춘향전>(춘향), <흥보전>(흥보처), <심청전>(심청),<숙영낭자전>(숙영낭자),<배비장전>(애랑), <편시춘>,<토끼타령>(자라모),<옹고집전>(옹고집처), 창작극<漁村野話>(어부 딸 애경), <장화홍련전>등에 출연하여 창극배우로서 명성을 쌓았다.
1937년(33세) : 부친 박재보(1.19)와 우석 김종익(5.6)이 사망하였다.
1939년(35세) : 이동백 명창 은퇴기념공연에 참가하였다.
1942년(38세) : 7월 조선음악협회 산하의 조선음악단 단원으로 창립 기념공연 ‘조선음악무용제전’의 창극 <춘향전>과 <숙영낭자전>에 출연하였다.
1944년(40세) : 6월에 창설된 조선이동창극단 단원으로 <장화홍련전>에 출연하였다.
1947년(43세) : 대한국악원이 주최한 ‘제1회 창극제전(2.10-17, 국도극장)의 <대춘향전>과 <대홍보전>에 출연하였다.
1948년(44세) : 9월 당시의 창극단체가 여성을 푸대접하는 데에 불만을 품고 30여명의 여류명창을 규합하여 여성국악동호회를 결성하여 10월에 <옥중화>(행수기생)을 공연하였다.
1949년(45세) : 2월 김아부 작 <햇님과 달님>(시공관)을 공연하였고, 6월 하순에 모친이 사망하였다.
1950년(46세) : 적치하의 서울에 남아 있다가 정남희 등의 월북 강요로 고초를 겪었다.
1951년(47세) : 1.4후퇴때 오태석․신숙․이용배․조농옥․김세준․한농선 등 30여명과 함께 국민방위군 정훈공작대에 편입되어 1952년 초까지 김석민 작, 이부풍 연출의 <烈女化>(導唱)로 군위공연을 다녔다.
1952년(48세) : 봄에 눈병으로 한쪽 눈을 잃었다. 대구에서 강태홍, 박춘홍, 박연자, 박병두, 한영순, 나경애 등 40여명으로 國劇社를 결성하여 <열녀화>로 동부전선에 위문공연을 다녔다.
1954년(50세) : 두 번째 작품으로 김향 작 <애모랑과 더벅머리>(신마산 극장)를 올렸다. 그후 <월하삼경>,<유관순전>, <초생달>, <원앙선>, <한양은 천리원정>, <산호거울>, <임따라 가오리>, <임자 없는 玉冠任>등의 안무와 작곡을 담당하였다. 국극사는 뒤에 寶娘국극단으로 개명되었다.
1960년(56세) : 급성폐렴으로 경찰병원에 입원하였고, 퇴원 후 박귀희에게 <흥보가>를 가르치면서 유랑극단 생활을 마감하였다.
1962년(58세) : 3월부터 국악예술학교(현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에 출강하였다.
1964년(60세) : 12월 24일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판소리)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고, 국악 발전에 끼친 공으로 공로상 (국악상, 공보부 장관, 12월 28일)을 수상하였다.
1968년(64세) : 문화재공로상(문화공보부 장관상)을 수상하였다.
1969년(65세) : 10월 15일 명동 국립극장에서 은퇴공연을 가지고 공식적인 무대활동을 마감하였다. 은퇴공연은 대구, 대전, 부산에서도 가졌다.
1971년(67세) : 정통 판소리를 보존하기 위해 판소리 보존연구회(종로구 익선동 127)를 설립하여 초대 이사장(1971-1973)을 맡고 제1회 판소리유파발표회를 열었다.
1973년(69세) : 11월5일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흥보가> 예능보유자로 재지정되었다.
1978년(74세) : 5월 18일 제자발표회를 가졌고, 고향 선산에서 그의 마지막 공연도 가졌다.
1979년(75년) : 5월 26일(음 5월 1일) 오후 1시 향년 75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이상에서 정리한 박록주의 역보에도 정확하지 못한 부분이 더러 있을 것이다. 앞으로 더 많은 자료를 찾아내어 미비한 부분을 수정, 보완할 것이다.
Ⅲ. 박록주 명창의 예술활동
박록주는 앞의 연보에서 알 수 있듯이 판소리 및 창극 공연은 물론이고 국악방송 출연, 판소리 교육 및 판소리보존연구회를 설립하는 등 시로 다양한 예술활동을 벌였다. 이제 그의 예술활동을 분야별로 간략하게 정리하기로 한다.
1. 판소리 공연
박록주의 판소리 공연은 일찍부터 있었지만 본격적인 판소리 공연은 아무래도 소리 기량을 어느 정도 갖추기 시작한 조선음률협회 시절부터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은 해방 전에 박록주가 출연한 것으로 확인된 판소리 공연이다.
이외에도 박록주의 판소리 공연은 더 있었을 것이다. 박록주는 해방 후에도 1972년의 제2회 판소리유파발표회(4.15, 국립극장), 1969년의 은퇴기념 공연, 1978년의 선산공연등 다수의 판소리 공연을 하였다.
2. 창극공연
창극은 1934년 5월 조선성악연구회가 출범하면서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박록주는 <춘향전>의 춘향, <심청천>의 심청, <흥보전>의 흥보아내, <숙영낭자전>의 숙영낭자, <배비장전>의 애랑, <토끼타령>의 자라어머니, <옹고집전>의 옹고집 아내, <어촌야화>의 어부 딸 애경 역등 주역배우로 출연하였고, 창작창극 <편시춘>에도 출연하였다. 다음은 박록주가 해방전에 출연한 것으로 확인되는 창극인데, *표 한 것은 그가 출연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박록주는 이외의 창극에도 다수 출연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해방 후에는 1947년 2월 국도극장에서 열렸던 제 1회 창극제전[<대흥보전>(2.10-2.13), <대춘향전>(2.14-2.17)]에 출연하였고, 1948년 여성국악동호회를 결성하여 9월 <옥중화>(시공관), 1949년 2월 <햇님과 달님>(김아부 각본, 시공관)을 공연하였다. 1951년 국민방위군 정훈공작대에 편입되어 한동안 <열녀화>(박록주 導唱)로 군위문공연을 다녔고, 1952년 대구에서 국극사를 조직하여 <열녀화>로 동부전선에 위문공연을 다녔으며 6월에 <월화궁의 비화>를 공연하였다. 1954년 <애모랑과 더벅머리>(김향 작, 신마산극장)를 올렸고, 이외에 <월하삼경>, <유관순전>,<초생달>,<한양은 천리원정>,<산호거울>,<임 따라 가오리>,<임자 없는 玉冠任>등의 안무를 담당하였다.
3. 음반 취입
박록주가 음반에 처음 취입한 것은 1926년 가을로 보이고, 첫 발매 음반은 1927년 1월 일동축음기주식회사의 “Nt. B125 短歌 한송뎡 소상팔경 朴綠珠”이다. 그후 주로 1930년대에 콜럼비아, 오케, 빅타, 폴리돌, 다이헤이, 시에론 음반 등에 수많은 명곡을 남겼고, 해방 후에도 지구레코드사의 장시간음반(LP)등에 다양한 소리를 남겼다.
박록주가 일제시대의 유성기음반에 남긴 소리는 다음과 같다.
1) 日東蓄音器株式會社(Nitto, 졔비 標朝鮮레코드)음반
일동축음기주식회사(NITTO RECORD)는 1925년 9월부터 한국에 진출하여 ‘졔비표조선레코드’라는 상표로 1928년까지 많은 명반(나팔통식 녹음)을 내었다. 박록주의 음반은 4장이 있다.
Nt.B124 短歌 한송뎡 소상팔경 朴綠珠
Nt.B125 사거리 上下 金綠珠 朴綠珠
제비표조선레코드 B164-A (남도잡가) 추풍감별곡(상) 박록주
제비표조선레코드 B164-B (남도잡가) 추풍감별곡(하) 박록주
제비표조선레코드 B169-A (단가) 강산유람, 창 박록주, 고 한성준
제비표조선레코드 B169-B (단가) 초한가, 창 박록주, 고 한성준
2) 日本콜럼비아(Columbia) 蓄音器株式會社 음반
日本콜럼비아 축음기주식회사는 1928년 11월 한국음악을 처음 녹음하여 1929년 2월 첫 음반을 발매한 이래 일제시대 전 기간에 걸쳐 콜럼비아 정규반, 리갈 보급 반 등 약 1,500종의 음반(전기녹음)을 발매하였다. 박록주의 음반으로는 1930년 1월에 발매된 “영화극 심청전”이 첫 음반으로 보이고, 26장의 음반(콜럼비아-19장, 리갈-7장)이 있다.
Columbia 40065-A(20764) 영화극 심청전(상) 김영환․변혜숙․박록주 콜럼비아관현악단
Columbia 40065-B(20765) 영화극 심청전(하) 김영환․변혜숙․박록주 콜럼비아관현악단
Columbia 40065-A(20776) 단가 만고강산 박록주
Columbia 40076-B(20777) 춘향전 춘향집 구경 박록주
Columbia 40082-A(20774) 춘향전 추월강산(상) 박록주
Columbia 40082-B(20775) 춘향전 추월강산(하) 박록주
Columbia 40088-A(20804) 심청전 沈淸水祭(상) 박록주
Columbia 40088-B(20805) 심청전 沈淸水祭(하) 박록주
Columbia 40098-A(20784) 춘향전 사랑가 박록주
Columbia 40098-B(20805) 춘향전 사랑가 박록주
Columbia 40099-A(20808) 단가 대관강산 박록주
Columbia 40099-B(20807) 심청전 船人隨去 박록주
Columbia 40121-A(20788) 심청전 沈淸下直(상) 박록주
Columbia 40121-B(20789) 심청전 沈淸下直(하) 박록주
Columbia 40122-A 東風歌(一) 박록주
Columbia 40122-B 東風歌(二) 박록주
Columbia 40133-A(21339) 남도잡가 성주푸리 김창환․박록주․하농주 재비伴奏
Columbia 40133-B(21338) 남도잡가 성주푸리 김창환․박록주․하농주 재비伴奏
Columbia 40146-A(21333) 극 춘향전(一) 김영환 이애리스 윤혁 박록주
Columbia 40146-B(21334) 극 춘향전(二) 김영환 이애리스 윤혁 박록주
Columbia 40147-A(21335) 극 춘향전(三) 김영환 이애리스 윤혁 박록주
Columbia 40147-B(21336) 극 춘향전(四) 김영환 이애리스 윤혁 박록주
Columbia 40172-A(21187) 심청전 심봉사 자탄 박록주 고 한성준
Columbia 40172-B(21188) 심청전 즁타령 박록주 고 김창환
Columbia 40217-A(21189) 춘향전 군노사령 박록주
Columbia 40217-B(21190) 춘향전 사랑가 박록주
Columbia 40248-A(20806) 단가 죽장망혜 박록주
Columbia 40248-B(20811) 남도잡가 흥타령 박록주
Columbia 40285 흥보전 흥보 쫒겨가는데 박록주
Columbia 40293-A(21191) 춘향전 이별가(상) 박록주 고 한성준
Columbia 40293-B(21192) 춘향전 이별가(하) 박록주 고 김창환
Columbia 40385-A(21641) 춘향전 몽중가 박록주 고 한성준
Columbia 40385-B(21640) 흥보전 흥보 쫓겨가는데 박록주 고 김창환
Columbia 40423-A(21619) 단가 귀불귀 박록주 고 한성준
Columbia 40423-B(21643) 단가 진국명산 박록주 고 김창환
Columbia 40447-A(21618) 흥보전 중타령 박록주 고 한성준
Columbia 40447-B(21642) 춘향전 기생들이 모히다 박록주 고 김창환
Regal C105-A(21619) 단가 귀불귀 박록주 고 한성준
Regal C127-A(21191) 춘향전 이별가(상) 박록주 고 한성준
Regal C127-B(21192) 춘향전 이별가(하) 박록주 고 한성준
Regal C144-A 심청전 심청수제(상) 박록주
Regal C144-B 심청전 심청수제(하) 박록주
Regal C145-A(20808) 삼국지 고당상(상) 박록주
Regal C145-B(20809) 삼국지 고당상(하) 박록주
Regal C171-A 심청전 심청 하직(상) 박록주
Regal C171-B 심청전 심청 하직(하) 박록주
Regal C172-A(20790) 심청전 범피중류(상) 박록주
Regal C172-B(20790) 심청전 범피중류(하) 박록주
Regal C172-B(20791) 심청전 범피중류(하) 박록주
Regal C173-A 단가 진국명산 박록주 고 한성준
3) 日本빅타(Victor) 蓄音器株式會社 음반
日本 빅타 蓄音器株式會社는 1928년 6월 초 한국음악을 녹음하여 1929년 초부터 발매하였다. 약 1,000종의 음반(전기녹음)을 발매하여 일제시대 전 기간에 콜럼비아와 함께 한국음반 시장을 주도하였다. 박록주의 음반은 19장의 <춘향전>전집중 9장 (13면)을 비롯하여 13장이 있다.
Victor 49120-A(3538) 俗曲레뷰(상) 독창 박록주(자진륙자박이, 개고리타령), 김초향(흥타령, 방아타령), 박월정(산타령, 둔가타령)
Victor 49140-A(3448) 단가 대관강산 박록주 고 한성준
Victor 49140-B(3449) 춘향전 광한루 경개 박록주 고 한성준
Victor KJ-1111(KRE196)-춘향전 전편(1) Victor KJ-1129(KRE233)- 춘향전 전편(38)
정정렬․이화중선․임방울․박록주․김소희 고 한성준
V.KS-2005-A 단가 대관강산 박록주
V.KS-2005-B 춘향전 광한루 경개 박록주
V.KS-2015-A 속요 남도속요집 박록주 김초향 박월정
4) 日本폴리돌(Polydor)蓄音器商會 음반
株式會社 日本 폴리돌 蓄音器商會는 1932년부터 한국음반을 발매하기 시작하여 일제시대 말까지 650여 종의 한국음반을 발매하였다. 박록주의 음반은 6장이 있다.
Polydor 19020-A 단가 초로인생 박록주 고 김창선
Polydor 19020-B 춘향가 적성가 박록주 고 김창선
Polydor 19021-A 춘향전 추월강산(상) 박록주 고 김창선
Polydor 19021-B 춘향전 추월강산(하) 박록주 고 김창선
Polydor 19022-A 삼국지 조죠 군사 우는데 박록주 고 김창선
Polydor 19022-B 심청전 수궁가 박록주 고 김창선
Polydor 19041 흥보전 박타령 박록주 고 김창선
Polydor 19099-A 단가 달거리 박록주 고 김창선
Polydor 19099-B 춘향전 사랑가 박록주 고 김창선
Polydor X-584 춘향전 중 추월강산 박록주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박록주는 일동축음기주식회사 음반(4장), 일본콜럼비아주식회사 음반(26장), 일본빅타축음기주식회사 음반(13장), 일본폴리돌축음기상회 음반(6장), 시에론레코드 음반(12장), 오케축음기상회 음반(41장), 태평축음기주식회사 음반(4장), 코리아레코드 음반(1장)등 100여장의 유성기음반에 젊은 시절의 예술세계를 남겨놓았다. 이외에도 박록주의 유성기 음반은 앞으로 더 발굴될 것으로 보인다.
박록주가 남긴 다양한 소리를 정리하면, 단가로는 <한송정>,<소상팔경>,<강산유람>,<초한가>, <만고강산>,<대관강산>,<죽장망혜>,<귀불귀>,<진국명산>,<초로인생>,<달거리>,<운담풍경>,<어화청춘>,<장부한>,<강산풍월>,<아서라 세상사>,<靑春怨>등을 취입하였다. 그리고 <춘향가>는 거의 전 바탕을 남겼는데, ‘사랑가’에서 ‘십장가’까지는 송만갑제이고 나머지는 정정렬제인데, 일부 박기홍제도 섞여 있을 것으로 보인다. <심청가>와 <흥보가>는 김정문제인데, 다만 ‘제비노정기’는 김창환제이다. <적벽가>는 한두 매에 불과하고, <수궁가>음반은 보이지 않는다.
이밖에 창극, 남도잡가(민요)등도 음반으로 남겼다. 창극으로는 정정렬․이화중선․임방울․김소희등과 함께 취입한 빅타 음반의 <춘향전 전집>, 김연수․김옥련․정남희․김준섭 등과 함께 취입한 오케 음반의 <심청전 전집>, 이춘풍과 함께 취입한 시에론 음반의 <장한몽>이 있다. 그리고 남도잡가로는 <화초사거리>,<추풍감별곡>,<성주풀이>,<농부가>,<흥타령>,<자진육자백이>,<개고리타령>,<자진농부가>,<육자백이>등을 남겼고, 가야금병창으로 <육자백이>와 <흥타령>을 남겼다.
박록주는 해방 후에도 많은 녹음을 남겼다. 아세아레코드의 <춘향전(1집~4집)>(1989년 제작, 4카세트),<흥보전(1집~3집)>(1989년 제작, 3카세트), <숙영낭자전>(1989년 제작, 1카세트), 케네디레코드의 <인간문화재와 명창들에 남도창 단가집(1)의 <恨老歌>,<운담풍경>,지구레코드의 <흥부전(1~3)>(1960년대 말녹음, 발매)과 도미도레코드의 <숙영낭자전 진국명산 백발가>(1970년 제작)등이 대표적인 것이다. 이들은 그 후 여러 음반회사에서 재발매되었다.
4. 국악방송 출연
경성방송국(JODK)은 시험방송을 거쳐 1927년 2월 16일 정규방송을 시작하였는데, 현재까지 확인된 최초의 국악방송은 1926년 7월 12일(월, 오후7시)의 “朝鮮歌 曲目 南道雜歌(六字백이) 伽倻琴竝唱 演奏者 漢城券番 金弄雲Ⅳ 朝鮮器樂 玄琴, 洋琴 合奏(打令) 演奏者. 漢城券番 吳雲深 金彩雲”이다. 박록주가 국악방송에 첫출연한 것은 시험방송 때인 1926년 9월 16일 김수련과 함께 <사계절>을 부른 것으로 보인다.
박록주 명창이 출연한 국악방송 프로그램을 연도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20년대]
1926년 : 9.16(조선노래<사계절>-박록주/김수련), 9.23(조선가<中外三八景>,10.28(조선노래<中外三八景>-박록주[한남권번]
1928년 : 1.24(남도단가),1.29, 3.22, 3.29, 4.6, 4.12, 4.22, 6.20, 7.8, 9.5, 10.15,11.30
12.20
1929년 : 1.5(남도단가), 1.17(남도단가와 가야금 독창 및 합창-박록주․하농주․이소향․이옥화), 2.17(남도단가와 가야금병창-박록주․김해선), 3.14(남도단가), 3.20(남도명창, 김추월․박록주․하농주), 3.30(남도단가), 4.23(가야금과 남도단가-박록주․하농주․오태석․안기옥),12.1(단가,춘향가 외)
[1940년대]
1940년대 : 1.1(어화 청춘, 박타는데), 2.10(운담풍경, 춘향가 중 이별가), 6.8(백발가, 흥부가), 9.14(단가 적벽가, 춘향가)
1941년 : 1.8(단가 적벽가, 춘향가 중 이별하는데), 2.4(춘향전-창극), 2.28(단가 적벽가, 흥부가)
1942년 : 5.30(단가 적벽부, 흥부가), 10.7(적벽부, 흥부가)
1943년 : 6.28(창극조), 7.17(적벽부, 흥부가 중에서), 8.3(창극조), 8.27(적벽부, 흥부가 중에서)
1944년 : 12.19(창극조), 12.24(창극조)
1945년 : 1.18(창극조-장부가 외), 2.4(창극조), 3.11(창극조)
이상의 국악방송 프로그램을 살펴보면 박록주는 100여차례 국악방송에 출연하여 단가<만고강산>,<대관강산>,<운담풍경>,<강상풍월>,<진국명산>,<천하태평>,<적벽부>,<공도난이>,<어화 청춘>,<백발가>와 판소리<춘향가><심청가>,<흥보가>를 주로 불렀고 더러<적벽가>도 불렀음을 알 수 있다. 그 외 <육자백이>,<화초사거리>,<보렴>등 남도잡가도 더러 불렀지만 유성준에게 배운 <수궁가>는 방송에서 부른 적이 없다.
5. 판소리 교육과 정통 판소리 보존
박록주는 1960년에 박귀희에게 <흥보가>를 가르치면서부터 판소리 교육에 발을 들여놓았고, 1962년 3월부터 1969년 10월31일까지 국악예술학교(1960년 3월 설립)에 출강하면서 본격적으로 판소리 교육에 나섰다. 그는 다음 세대의 판소리 동량을 배출하였는데, 박귀희, 김소희, 한애순, 성우향, 조상현, 이옥천, 한농선, 정성숙, 조순애, 박송희, 박초선, 성창순, 정의진 등에게 <흥보가>를 전수하였고, 박초선, 한농선, 조상현, 조순애, 박송희 등에게 <숙영낭자전>을 전수하였다. 이들 주에서 박송희와 한농선이 박록주제 <흥보가>보유자 후보로 지정되었다.
박록주는 1969년 은퇴한 뒤 1971년 정통 판소리를 보존하기 위해 판소리 보존 연구회(종로구 익선동 127)를 설립하여 초대 이사장(1971-1973)을 맡아 판소리유파발표회를 열었다. 판소리유파발표회는 1971년 명창 권삼득 탄생 2백주년을 기념하는 제1회(7.5, 국립극장)가 열린 이래 1999년 제29회(11.13,정동극장)가 열려 정통 판소리 보존의 터전이 되고 있다. 그가 판소리보존연구회를 설립하고 판소리유파발표회를 연 것은 창극으로 인해 크게 훼손, 변질된 판소리의 본질을 되찾고자 한 것이다. 박록주 역시 창극 무대에서 화려한 활동을 하였지만, 판소리의 진정한 아름다움이 어떠한 것인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그에게 창극으로 인해 판소리가 俗化되는 현실은 감당하기 힘든 아픔이었을 터이고, 정통 판소리를 지키려는 그의 노력은 이러한 회한에 찬 반성적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Ⅳ. 맺음말
우리는 이제까지 현대 판소리사에 지워지지 않을 뚜렷한 족적을 남긴 판소리<흥보가>의 인간문화재였던 박록주 명창의 삶과 예술활동을 살펴보았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를 간략하게 정리하여 본고를 마무리하기로 한다.
박록주는 1905년 1월 25일(음력) 경북 선산군 관심동에서 태어나 1979년 5월26일 향년 75세로 타계하였다. 그는 박기홍, 송만갑, 김정문 등 당대 최고의 명창을 스승으로 모시고 정진하여 판소리로 일가를 이루었고, 현대 판소리사의 중심에 서서 판소리와 창극 공연, 음반 취입, 국악방송 출연, 판소리 교육과 보존을 위해 평생을 바친 진정한 판소리꾼이었다.
박록주는 20대인 1930년대 조선음률협회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판소리 공연을 하였는데, 1930․1940년대의 판소리 공연에 두루 참가하여 명성을 날렸다. 그리고 1934년 조선성악연구회가 창립되면서 창극공연에 나서<춘향전>의 춘향,<심청전>의 심청,<홍보전>의 흥보처,<숙영낭자전>의 숙영낭자, <배비장전>의 애랑, <옹고집전>의 옹고집처, <토끼타령>의 자라모, <어촌야화>의 애경 역 등을 맡아 창극배우로 명성을 얻었다. 그리고 해방 후에는 여성국악동호회와 국극사를 조직하여 <열녀화>,<햇님과 달님>,<월화궁의 비화>,<애모랑과 더벅머리>,<월하삼경>등에 출연하거나 안무를 담당하였다.
박록주는 1926년 가을에 첫 음반 취입을 한 이래 일동축음기주식회사 음반을 비롯하여 콜럼비아, 빅타, 폴리돌, 시에론, 오케, 태평 등의 유성기음반에 100여장 이상의 다양한 명곡을 남겼고, 해방후에도 지구레코드 등에 적지 않은 녹음 남겼다. 그리고 1926년 7월 12일 경성방송국의 시험방송에 출연한 이래 1945년까지 100여 차례 국악방송에 출연하였다.
박록주의 예술활동 중에서 무엇보다도 주목되어야 할 업적은 김소회, 박귀희, 조상현, 박송희, 한농선, 성창순 등 다음 세대의 판소리를 이끌어갈 뛰어난 제자들을 배출하였고, 상처투성이인 판소리의 원형을 되살리고자 판소리보존연구회를 설립한 것이다.
이상에서 알수 있듯이 박록주 명창은 우리시대의 판소리 거장이었다. 따라서 앞으로 그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물론 그의 소리를 보존하고 그의 업적을 기리는 작업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박록주 명창의 음악예술세계
이보형(문화재전문위원)
<차 례>
Ⅰ. 서론
Ⅱ. 학습역사
Ⅲ. 음악자료
Ⅳ. 음악적 특성
Ⅴ. 결론
Ⅰ. 서 론
다 알려진 바와 같이 박록주는 경상북도 선산에서 태어나 송만갑, 정정열, 유성준, 김창환과 같은 국창급 문하에서 수련하였고, 1920년대 이후 일제시대에서부터 해방후 1970년대까지 판소리의 공연활동, 교육활동, 조직운영 등 여러 영역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기었다. 발표자는 이 자리에서 박록주의 학습내력과 그가 남긴 음악 자료와 그가 구사한 판소리의 음악적 특성과 후세에 끼친 영향에 대하여 간략히 조명하고자 한다. 먼저 박록주의 학습과정과 내용을 살피고 그가 취입한 유성기 음반, LP음반, CD음반 등 음향자료를 추린 다음 여기에 나타난 음악성에 대하여 간단히 살피고 이것이 후세에 끼친 영향에 대하여 살피고자 한다.
Ⅱ. 학습의 내력과 전승계보
박록주(朴綠珠)는 아명은 명이이고 호가 춘미(春眉)이다. 그가 태어난 곳이 경상북도 선산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이규섭의 「판소리 답사 기행」에는 경상북도 선산군 고아면 관심리이라 좀더 자세히 밝히고 있다. 그의 출생 연대는 1906년으로 알려졌는데 노재명의 박록주 음반 해설서에는 실제 출새연대를 1905년으로 치고 있다. 아마 이는 호적 나이와 실제 나이의 차이인지도 모를 일이다. 박록주는 그의 부친에 지시로 어려서 소리를 시작하였다 한다. 그의 부친의 성명이 박재보라고도 하고 박중근(朴重根)이라고도 한다. 이것도 아명과 실명의 차이인지도 모른다. 위와 같은 문제는 발표자가 이 자리에서 다룰 분야가 아니다.
12세에 박기홍에게 소리를 배운 것이 소리 공부의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록주가 박기홍에게 배웠다는 것은 필자가 박록주에게 수차례 들어서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박기홍이 박록주에게 소리를 가르친 첫 선생이냐 그리고 박기홍에게 어느 기간 동안 배웠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박기홍에게 3년간 배웠다고 기록하는 이도 있으나 두 달을 독선생으로 모시고 배웠다는 보고도 있다. 당시 천하를 신선처럼 떠돌던 박기홍의 사정으로 봐서 3년간 그를 붙잡아 놓고 배울 수 있는 여건이 못 되었을 것이니 후자가 맞을 것 같다. 박록주가 박기홍에게 무엇을 배웠는지 알려지지 않았으나 노재명은 단가 대관강산과 춘향가 전 바탕과 심청가 일부라고 하였다. 대관강산을 배웠다는 것은 필자가 박록주에게 직접 들어 아는 사실이나 춘향가 전 바탕을 배웠다는 것은 처음 듣는 일이다.
박록주의 부친이 소리선생도 했으며 박록주에게 소리를 가르쳤다는 보고가 있다. 이것은 더욱 고증을 요하겠지만, 이것이 사실이라면 박록주의 첫 선생은 그의 부친일 가능성이 짙다. 당시 국악인들이 거의 세습 음악인들이었고 박록주도 그의 말대로 그런 집안 출신이니 이는 있을 수 있는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부친에게 배운 내용에 대하여는 알려진바 없다. 14세에 김창환이 이끄는 협율사를 잠간 수행하였고 이때 김창환에게 흥보가 제비노정기를 배웠고 김창환의 아들 김봉이에게 잠간 판소리와 단가를 배웠다는 보고도 있고, 이내 협율사 수행을 그만 두고 대구에서 김점룡, 임준옥, 조진영에게 보렴, 화초사거리, 육자배기와 같은 남도잡가를 배웠고 1922년에는 박록주가 서울에 올라가서 송만갑에게 단가 진국명산과 판소리 춘향가 사랑가에서부터 십장가까지 배웠다고 보고되기도 하였다. 박록주가 김창환에게 제비노정기를 배웠고 송만갑에게 소리를 배웠다는 것은 사실이므로 이와 같은 보고는 신빙성이 있는 것이다.
1929년에는 남원에 내려가 김정문에게 21일 동안에 흥보가를 배웠다 한다. 이는 세상에 다 열려진 발표자도 이 사실을 박록주에게서 여러 차례 들어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1930년에는 다시 내려가 심청가를 배웠다는 노재명의 보고가 있다. 박록주가 김정문에게 심청가를 배웠다는 것은 처음 알려진 일이다. 박록주는 만년에 공개석상에서 심청가를 거의 부른 일이 없지만 다음에 보이는 유성기 음반 자료에 박록주가 부른 심청가 자료가 보이고 만년에 녹음한 심청가 녹음자료가 남아 있다는 사실은 이를 증거한다고 할 수 있다.
1934년에는 여러 선배 명창들과 조선성악연구회를 결성하고 이때 송만갑에게 계속 판소리를 배웠고, 유성준에게 수궁가를, 정정열에게 춘향가와 숙영낭자전을 배웠다 한다. 이때 유성준에게 수궁가 전바탕과 정정렬에게 춘향가 전 바탕을 배운 것인양 소개되기도 하였으나 그런 것 같지 않다. 필자가 보기에는 당시 스승이나 박록주의 사정으로 봐서 수궁가와 춘향가 전 바탕 공부하는 것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박록주가 남긴 자료에 의하면 적벽가 도막소리를 누구에게 배운 것이 같은데 그의 적벽가 선생이 유성준이냐 송만갑이냐 정정열이냐 하는 것이 문제인데 유성준일 가능성이 많다.
김봉이에게 배운 판소리와 단가는 어느 대목인지 알려지지 않았다.
박록주가 구술한 바에 의하면 그가 부르는 비단타령에 경기도 장호원 출신 백점봉제가 들어 있다 하였다. 그렇다면 박록주는 백점봉에게 잠깐 배운 적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박록주가 배운 단가와 판소리 학습 내용을 살펴보면 박기홍에게 단가와 판소리 춘향가 일부(?), 김점룡, 임준옥, 조진영에게 남도 잡가, 김창환에게 제비노정기, 송만갑에게 단가와 판소리 춘향가 일부, 김정문에게 흥보가와 심청가, 유성준에게 수궁가와 적벽가(?)일부, 정정렬에게 춘향가 일부를 배운 것으로 되었다.
이것을 전승계보대로 추리자면 박기홍, 송만갑, 유성준, 김정문에게 배운 것은 동편제 소리이겠고 김창환 정정열에게 배운 것은 서편제 소리이다.
박기홍에게 배운 동편제 판소리는 단가 대강강산이라는 것은 박록주의 구술로 알려졌고, 판소리 춘향가를 배웠다 하나 박록주가 남긴 소리 가운데 어느 대목이 박기홍제인지는 알려진 바 없다. 이것은 정춘풍-박기홍-박록주로 전승되는 것으로 다른 동편제 소리와는 전승계보를 달리 하는 특이한 소리이나 전승되는 것이 불명하여 아쉽다. 그가 취입한 대관강산은 음반으로 남아 있다.
송만갑에게 배운 것은 진국명산 등 단가와 판소리 춘향가 사랑가에서 집장가까지라 한다. 송만갑에게 배운 도막소리는 이 밖에 더 있을 것 같다. 이 소리제는 송흥록-송광록-송유룡-송만갑-박록주으로 전승되는 정통 동편제 집안의 소리라 할 수 있다. 음반에 남아 있는 진국명산, 사랑가, 동풍가가 이 소리제인 것 같다.
김정문에게 배운 소리는 흥보가와 심청가라 한다. 이 소리제는 송흥록-송광록-송유룡-송만갑-박록주로 전승되는 동편제 소리라 할 수 있다. 이 흥보가는 무형문화재로 지저오디었고 수많은 제자에게 가르친만큼 널리 알려졌다. 유성기 음반에 담긴 몇 대목 쯤 남아 있고 LP에 담긴 전 바탕이 남아 있어 자료는 풍부한 셈이다. 심청가는 유성기 음반에 6면쯤 남아 있지만 생전에 심청가를 거의 부르지 않아서 남은 자료가 드물어 아쉽다. 노재명의 보고에 의하면 박록주가 죽기 직전에 녹음한 심청가 자료가 있다 하나 유족들이 내놓지 않는다고 한다. 이것이 인멸되기 전에 세상에 공개되어야 한다.
유성준에게 배운 것은 수궁가가 전 바탕 배웠는지는 알길이 없지만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도막소리일 것이다. 유성준이 적벽가의 대가인 만큼 박록주가 부른 적벽가가 유성준제일 것 같다. 이 소리제는 송홍록-송광록-송유룡-유성준-박록주로 전승되는 소리이다. 박록주가 유성준에게 배운 것으로 보이는 수궁가와 적벽가 자료가 유성기 판에 남아 있다.
김창환에게 배운 것은 흥보가 제비노정기뿐이라 한다. 이 소리제는 정창업-김창환-박록주에게 전승되는 서편제 소리이다. 이 소리는 유성기판에 취입되었고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흥보가를 김정문제로 짰지만 제비노정기는 김창환제이다. 이 소리는 유성기 판에 남아 있고 LP흥보가에도 남아 있다.
정정열에게 배운 것은 단가와 판소리 춘향가, 판소리 숙영낭자전이다. 판소리 춘향가는 정창업-정정열-박록주로 전승되는 것이라 할 수 있지만 정정열은 춘향가를 상당 부분 새로 짰고 숙영낭자전은 전적으로 새로 짠 것이라 하니 정정열-박록주로 전승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정정열제 춘향가 일부와 숙영낭자전이 음반 자료로 남아 있다.
Ⅲ. 음악자료
박록주의 소리를 녹음한 음향자료는 음반자료가 상당량 남아 있고 약간의 테잎자료가 남아 있다. 음반 자료에는 유성기 음반 자료와 LP 음반 자료가 더러 있고 근래에 이를 복사한 약간의 CD음반 자료가 있다.
박록주가 처음 음반에 취입한 것은 일동음반주식회사에서 취입한 제비표조선레코드 유성기 음반이다.
제비표조선레코드는 일동축음기회사에서 발매한 음반이다. 1927년에 일동축음기회사에서 제비표조선레코드 Nt.B124에 단가 한송정 및 소상팔경을, Nt.B135에 김록주와 잡가 화초사거리를 Nt.B164에 단가 추풍감별곡 등 소량의 음반을 발매하였다.
박록주의 음반 취입이 본격화된 것은 콜럼비아 레코드에 음반을 취입하면서부터이다.
1929년에 콜럼비아 레코드사에서 C.40076에 단가 만고강산, 판소리춘향가 춘향집 가르치는데, C40082 추월강산 상하, C.40088 심청가 심청수제 상하, C.40098 춘향가 사랑가, 정자노래, C.40099 단가 대관강산 심청가 선인수거, 1931년에 C.40121 심청가 심청하직 상하, C40122 동풍가 상하, C40133성주푸리 농부가, C.40172 심청전 심봉사 자탄, 중타령, C.40285 흥보전 흥보 쫓겨나는데, 1933년에 C.40423 단가 귀불귀, 진국명산, C.40447 흥보가 중타령, 춘향가 기생들이 모이다 등을 발매하였다.
1934년에 콜럼비아 레코드사에서 보급판으로 낸 리갈판 C.127 춘향가 이별가 상하, C.144 심청가 심청수제 상하, C145 삼국지 고당상 상하, C171 심청하직 상하, C.172 심청전 범피중류 상하 C.173A 단가 진국명산 등이 발매되었다. 이것들은 대개 1932년에 Columbia 40423-A로 나온 단가 귀불귀가 초판이 1934년에 리갈 C105-A로 재판이 나왔고, 1932년에 Columbia 40423-B로 나온 단가 진국명산이 1934년 초판이 리갈 C173-A로 재판이 나왔고, 1932년에 Columbia 40423-A B로 이별가 상은 이별가 초두 「와락 뛰어」, 이별가 하는 「춘향모 나온다」가 초판이 나왔고 뒤에 1934년에 리갈 C105-A B로 재판이 나왔던 것처럼 재판인 경우가 많다.
시에론에서도 박록주 음반을 소량 발매하였다. 1933년에 Ch.123 장한몽 애별편 상하, Ch.124 장한몽 상봉편을, 1934년에 Ch.162 흥보가 박타령, 돈타령, 1935년 Ch.229 춘향가 긴사랑가 자진사랑가를 발매하였다.
빅타 음반에서도 박록주 음반을 취입하기도 하였지만 콜럼비아에 견주어 그 수량이 많지 않다. 1935년에 V.49140 단가 대관강산, 춘향가 광한루경개가 발매하였다. V.49140 단가 대관강산, 춘향가 광한루경개는 V.KS-2005에 재판으로 나왔다. 1937년에 V.KS-2028로 나온 제비강남을 차자 상하 음반이 나왔는데 이것이 재판인지는 불명이다.
V.KJ-1111~1129로 나온 춘향전 전집에서 丁貞烈, 李花仲仙, 金素姬와 함께 박록주가 출연하는데 그는 주로 월매 역을 맡고 옥중가 천지삼겨를 불렀다.
포리돌 음반에도 박록주 음반에 발매되었는데 그리 많지 않았다. 1932년에 P.19020 단가 초로인생, 춘향가 적성가, P.12021 추월강상 상하, P.19022 삼국지 조조군사 우는데, 심청전 수궁가, P.19041 흥보전 박타령 상하, P.19099 단가 달거리, 춘향전 사랑가를 발매하였다. 1932년에 나온 P.19021 추월강상 상하가 1939년에 P.X584로 재판이 나왔다.
오케 음반으로는 1933년에 O.1561에 단가 강상풍월, 흥보가 박타는데, O.1568에 박록주는 김종기 가야금병창에 곁드려 육자배기, 흥타령, O.1577에 흥보가 제비노정기 상하, O.1588에 이소향과 함께 남도잡가 화초사거리 상하, O.1592에 춘향전 어사와 장모상봉 상하, 1934년에 O.1627에 농부가 자진농부가, O.1663에 춘향전 춘향 자탄가 상하, O.1670에 흥보전 박타령 상하, 1936년에 O.1780에 단가 만고강산, 1937년에 춘향전 추월강산 상하를 발매하였다.
다이헤이 음반으로는 1935년에 T.C8093 단가 운담풍경 대관강산 등 소량의 음반을 발매하였다.
해방 직후에 우리나라에서 유성기 음반을 발매하였으나 박록주 음반이 발견된 것은 없다.
1960년대부터 LP가 나왔고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초에 지구레코드 도미도 신세기 등에서 박록주 소리를 담은 음반을 발매하였다.
지구레코드에서는 1966년 박록주가 박초선과 함께 부른 남도민요집 음반을, 1967년에는 LM-120180 흥보전을 발매하였다.
1970년에는 도미도레코드사에서 LD-183-A 숙영낭자전을 발매하였다.
1973년에는 신세기레코드회사 박록주 단가집을 발매하였다.
1980년대 중반부터 Cd 음반이 나왔으나 박록주는 이미 고인이 되어 새로 취입한 음반은 없고 일제시대 나온 유성기 음반이나 1960~1970년대 나온 LP판을 재판으로 발매하고 있다.
1993년에 서울음반에서 일제시대 빅타 유성기 V.KJ-1111~1129로 나온 춘향전 전집을 LP판을 재판으로 발매하고 있다.
1994년에 신나라 SYNCD-067 SP시대의 「판소리 여류명창들 2」에 일제시대 박록주와 오비취의 유성계 음반을 재판으로 발매하였다.
1996년에 지구레코드사에서는 1967년에 LP로 나온 LM-120180 흥보전을 CD로 엮어 한국전통 음악시리즈 4집 「박록주 흥보가」를 재판으로 발매하였다.
1996년에 지구레코드사에서는 전통음악시리즈 제13집 「단가집 1」에 기왕에 LP로 나온 김연수, 박초월, 박록주, 성우향의 단가를 CD재판으로 발매하였다.
1996년에 LG미디어에서는 일제시대 나온 콜럼비아 유성기 원반(8)을 엮어 「박록주 판소리」라는 이름으로 발매하였다.
Ⅳ. 음악적 특성
앞에서 살핀대로 박록주가 배운 판소리의 대부분은 동편제 소리이다. 그러니만큼 그가 부르는 소리는 거의 동편제 양식에 따르고 있다. 그가 정정열, 김창환과 같은 서편제 명창에게 약간의 소리를 배웠으나 이것이 박록주의 소리양식에까지 미치지는 못한 것 같다. 이것은 박타령, 사랑가와 같이 박록주가 만년에 장기로 삼은 소리 대목들이 거의 동편제 명창에게 배운 것들이고 제비노정기 천지삼겨와 같이 서편제 명창에게 배운 대목들도 목구성은 동편제 양식을 따르고 있는데서 알 수 있다.
이것으로 봐서 박록주는 철저한 동편제 명창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박록주가 태어난 지역적 특성과 배운 스승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판소리 동편제라는 것이 「동쪽 판소리 전승 지역 소리제」라는 뜻이다. 이것은 경상도 서쪽지역 전라도 동쪽지역이 된다. 이것은 박록주가 경상도 선산이라는 동편제 전승지역에 태어났다는 그 어린 시절 음악환경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고, 박재보, 박기홍이 동편제 소리를 가르쳐 그의 어린 시절에 소리 기틀을 잡아 주었던 것이고, 송만갑, 유성준과 같이 그의 청년기 소리 선생이 동편제 소리를 하는 국창이었다는 것이 크게 작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박록주가 겉으로 들어내고 말한 것을 들어보지는 못했지만, 공연에서 그의 소리 양식과 제자에게 가르쳤던 소리 양식으로 봐서 그의 판소리 음악적 이념은 동편제 소리 양식을 구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우선 그가 구사하고 가르쳤던 소리 성음과 목구성에서 볼 수 있다. 흔히 세상에서 말하기를 박록주 소리 성음을 일러 남자 성음을 지녔다고 하고 동편제성음을 지녔다고 말하고 있다. 조선시대 판소리가 창우집단의 연희에서 생성되었고 본디 창우가 남자들의 구실이었으니 판소리가 본디 남자들의 구실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진채선 이래 여성들이 판소리 명창으로 등장하면서도 그 소리 성음은 남자 성음을 구사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런데 판소리가 협율사에서 주된 공연 종목이 되고 판소리 청중이 시민 대중으로 전이되면서 여성명창들이 대중들이 좋아하는 여성적인 소리 성음으로 변질되는 경향이 있었고 또 일반 대중이 좋아하는 도막소리만 배우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박록주는 여자 명창으로 남성적인 소리 성음을 유지하였고 또 다른 여자 명창들처럼 도막소리만을 지니지 않고 기왕에 남성 명창들처럼 전판 소리를 배웠다. 그가 이미 서울에서 스타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지만 전판 소리를 배우는 것이 명창의 바른 도리라는 것을 깨닫고 송만갑, 정정열에게 전판 소리를 배우고자 하였으나 당시 송만갑과 정정열은 공연이 잦아서 전판 소리 수업이 곤란하였다. 그래서 시골에 은거하며 소리를 가르치고 있었던 김정문에게 흥보가 전판을 배웠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더구나 심청가까지도 전판을 배웠다고 한다면 더욱 그렇다.
박록주는 대부분의 소리 대목의 첫머리를 이른바 엄성으로 낸다. 정노식이 말한대로 소리 머리를 엄성으로 내는 것은 동편제의 특성이다. 박록주는 소리 머리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상당히 많은 부분을 엄성으로 소리한다. 그리고 그가 구사하는 소리 성음은 수리성이다. 수리성이라 하는 것은 텁텁하고 걸죽한 소리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것은 목의 자질이 그럴 수도 있고 발성이 그럴 수도 있는데 박록주의 성음은 목의 자질과 발성이 다 그렇다.
발성으로 수리성을 내려면 성대를 조여 약간 마찰시키며 발성하는 것인데 이때 내는 음향을 음향학적으로 말한다면 배음이 많이 나는 음색을 가리킨다. 이것은 회화에서 여러 원색이 배합된 중화된 중후한 색상과 같은 것이며 판소리에서 이런 성음을 지닌 소리가 중후하고 질박한 느낌을 준다.
판소리가 본디 창우회에서 남자들의 중후한 소리를 구사하던 공연환경에서 생성된 것이라 한다면 이는 판소리 본연의 것이라 할 수 있다. 판소리가 협율사에서 대중화되면서 남자들의 소리 발성까지 여성화되는 경향이 있었는데 박록주는 여성이면서 그리고 협율사 공연에 여러차례 참가한 경험이 있는데도 이런 유행에 따르지 않고 중후한 음색을 끝까지 고수하였다는 것은 판소리 본연의 소리 성음의 전승이라는 것을 두고 보면 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창극사에 말하였듯이 동편제는 우조를 주로 하고 서편제는 계면조를 주로 한다고 한다. 이것을 잘 못 전하여 동편제는 우조로만 소리하고 서편제는 계면조로만 소리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판소리의 각 대목을 동편제와 서편제의 소리에서 우조와 계면조대목을 추리면 그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 이것은 우조나 계면조로 소리하는 것이 이면에 분명히 가려지는 대목에서는 동편과 서편의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 다시 말해서 지극히 슬픈 대목에서는 어느 제에서나 계면으로 소리하는 것이고 장엄한 대목에서는 어느 제에서나 우조로 소리하는 것이 법례로 되었다.
다만 동편과 서편에서 조의 차이는 이면이 불분명한 대목에서 동편에서는 우조를 서편에서는 계면을 쓴다는 것이고 한 대목에서 우조와 계면의 성음변화를 이룰 때 동편에서는 우조화가 많고 서편에서는 계면화가 많다는 것이다. 일제시대 협율사에서 여성들이 주로 판소리를 공연하면서 판소리가 계면화되고 남성들도 계면 성음을 많이 구사하는 경향이 있어 성음이 불분명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박록주는 이런 경향에 휩쓸리지 않았다. 박록주에게서 그의 만년에 발표자가 직접 본 일인데, 시골에서 굳혀 있던 명창이 박록주 댁에 왔다가 구궁가 고고천변 대목을 일제때 유행하던 대로 계면제로 소리하였다. 박록주가 듣고 “이 대목이 즐거운 대목인데 어찌하여 우는가?”하고 나무랐다. 즉 고고천변은 계면으로 소리하는 것이 이면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박록주는 시세에 따르지 않고 성음이 분명한 쪽으로 소리를 이끌어 갔다고 할 수 있다.
박록주가 흥보가의 박타령에서 비단타령을 백점봉제로 고친 것은 소리 성음에 대한 박록주의 분명한 생각을 반영하는 것이다. 일제 때 판소리가 대중화되면서 동편제 소리에 계면화 현상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조선창극사에도 보이는 이야기이지만 송만갑이 소리를 고치고 부친에게 쫓겨났다는 이야기는 유명하거니와 많지는 않지만 그런 동편제의 계면화 현상은 송만갑에도 있었고 김정문에게도 있었다. 박록주가 비단타령을 백점봉제로 고친 것은 김정문에게 배운 비단타령에 당시 시세대로 계면성음이 짙게 깔려 있었는데 이와 달리 계면화되지 않은 백점봉제 비단타령이 이면에 맞다고 본 것 같다.
동편제는 시김새를 굵게 하고 서편제는 시김새를 치밀하게 한다는 것도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김명환 명고수가 “동편제는 작살로 고기를 잡는 형국이고 서편제는 잔 그물로 그물을 잡는 형국이다.”라 하였던 것은 이를 두고 이르는 것이다. 박록주는 시김새를 구사하되 반드시 필요한 대목에서 굵게 하여 동편제 시김새를 구사하고 있다. 박록주가 서편제 소리를 배웠지만 이 대목을 소리할 때 시김새는 동편제에 가깝게 소리하는 쪽으로 갔다. 일제 때 빅타판 유성기판 춘향전 전집에서 박록주가 정정열제 서편 옥중가를 취입한 적이 있다. 이를 듣고 김소희 명창이 평하기를 싱거막하게 했다고 하였다. 서편제의 아기자기한 시김새를 구사하지 않고 동편제의 담박한 시김새를 구사하였다는 것이다.
동편제에서는 서편제보다 장단이 좀 빠른 경향이 있다. 근래에 판소리 장단이 매우 느려진 것은 일제때 대중을 위한 표정적인 판소리를 구사하면서부터이다. 박록주는 정정열에게 소리를 배운 만큼 느린 장단도 구사한다. 그러나 김여란과 같은 다른 정정열 제자 명창들이 정정열 보다 소리를 더욱 느리게 가져갔던 것에 견주어 박록주는 정정열 보다 느리게 가져가지 않았다. 소리를 패기 있게 가져가려는 동편제 소리 이념을 지킨 것이다. 이는 박록주와 김여란 양자가 부른 「천지삼겨」를 비교해 보면 분명히 드러난다.
동편제는 시김새를 굵게 하고 서편제는 시김새를 치밀하게 한다는 것은 부침새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리 김명환 명고수가 “동편제는 작살로 고기를 잡는 형국이고 서편제는 잔 그물로 고기를 잡는 형국이다.”라 하였던 것도 부침새에 그대로 적용된다. 박록주는 부침새를 구사하되 반드시 굵은 부침새를 구사하고 있다.
박록주가 서편제 소리를 배워 그의 소리에 엇부침을 쓸 경우가 있는데 이는 소리를 배운대로 하기 위함이며 스스로 소리를 짤 경우에는 엇부침을 남발하지 않고 또 부침새를 아껴 써 동편제에 부침새를 구사하는 쪽으로 갔다.
Ⅴ. 결론
박록주는 경상도 선산 동편제 전승지역에 태어나 주로 동편제 소리를 공부하였고 이 소리제를 구현하며 많은 공연활동을 하고,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오히려 동편제 선배들이 시세에 따라 서편화하려는 것을 거슬러 동편으로 회귀하는 동편제의 기둥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김소희, 박귀희, 한애순, 박송이, 한농선, 성우향, 성창손, 조상현 등 오늘날 내노라는 명창들이 박록주에게 오늘날 동편제 흥보가를 부른 것은 오직 박록주로 말미암은 것이다.
지금 판소리는 동편제와 서편제가 혼합되어 소리제의 특성이 희미해지는 쪽으로 가고 있다. 그래서 순수한 동편제와 서편제가 남기 어렵게 되었다. 순수한 동편제도 전승이 어렵게 된 마당에서 박록주의 영향은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박록주 명창이 후세에 끼친 위대한 영향이 많지만 그 중에서 첫손을 꼽는다면 위태한 동편제 소리의 기둥 구실을 했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박록주 판소리 사설의 특징
김 종 철 (서울대 교수)
<차 례>
1. 머리말
2. 박록주 판소리의 역사적 위상
3. 박록주 [흥보가]의 특징
4. 결
1. 머리말
판소리 명창이란 어떤 사람인가? 신재효가 [광대가]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인물, 사설 치레, 득음, 너름새를 다 갖춘 사람이면 명창이라 할 수 있는가? 또는 그와 관계없이 판소리 청중의 인기를 한 몸에 끄는 사람이면 명창이라 할 수 있는가?
이 두 조건을 무시하고 명창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판소리는 뼈를 깎는 수련을 통해 어떤 높은 경지에 도달해야만 비로소 실현되는 예술인 동시에 청중의 환호 속에서 그 생명을 유지해야 하는 운명을 가진 예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판소리가 하루 이틀이 아닌 긴 역사를 갖게 되면서 명창은 좋은 목이나 기막힌 너름새 등만으로 될 수 없게 되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성립하고, 동편제니 서편제니 하는 계보가 형성되면서 판소리 창자에게는 자기가 창안할 수 있는 것보다 스승으로부터 주어진 것이 더 많게 되었다. 소리의 법통을 지켜야 하는 것이 그 단적인 예이다. 그러면서 다른 판소리 창자와 전문적인 예술가로서, 대중적인 흥행가로서 경쟁은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어려움을 돌파하여 명창이 되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작품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라고 본다.[춘향가]이든 [심청가]이든 판소리 창자가 작품에 대한 그 나름대로의 해석을 하고, 그것을 득음의 경지에 오른 소리로 표현하거나 사설을 새롭게 짤 수 있는 사람만이 명창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하면 판소리에서 소리는 사설의 의미를 음악적으로 실현하는 것이며, 이 실현이 청중에게 새로운 예술적 체험을 가능하게 할 때 그 소리꾼은 명창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명창의 판소리 사설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 명창이 새롭게 해석한 이야기이며, 그 의미를 소리로 구현한 너울[아우라]이 보이지 않은 상태지만 뒤덮고 있는 그런 존재이다. 이것이 이 발표에서 박록주의 판소리 사설을 보고자 하는 기본 관점이다.
2. 박록주 판소리의 역사적 위상
춘미(春眉) 박록주(朴綠珠:1905-1979)의 판소리사적 위상에 대해서 이 자리에서 새삼 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춘미의 소리 이력과 남기고 간 소리와 사설에서 주목할 점을 지적해 두고자 한다.
춘미의 출생지가 경북 선산이라는 점은 어떻게 보면 흥미로운 사건이나 20세기에 들어서서 상당수의 여류 명창이 영남출신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개인적인 관점보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더 흥미를 가져야 할 사항이다. 즉 판소리의 지역적 기반과 관련하여 동편제의 기반을 이룬 역사적 지형도가 어떠했는가에 대한 탐구를 요청하는 사항인 것이다.
춘미의 소리 이력에서 특히 주목되는 점은 판소리 입문을 당시 (1916년) 선산에 와 있던 박기홍(朴基弘)에게서 했다는 것이다. 박기홍이란 누구인가?[조선창극사]에 朴基洪으로 나와 있는 그는 함양, 청송 등지에 살았다고 했는데, “그는 당당한 東派의 魁傑이라기보다 朴萬順, 鄭春風, 去後 高宗 時代로부터 近代에 이르러 有史 百年인 東派의 法統을 혼자 두 손바닥 우에 받들어 들고 끝판을 막다싶이한 宗匠이다. 는 평을 받은 인물이다.
춘미는 이 박기홍에게서 춘향가를 배웠다고 [나의 이력서](2)에서 기록해 놓고 있다. 박기홍의 [춘향가]는 근대[춘향가] 및 [춘향전]에서 결코 지나칠 수 없는 존재이다. 20세기 구활자본 [춘향전]의 주류를 형성한 [옥중화]가 바로 박기홍의 [춘향가]를 소설가 이해조가 매일신보에 연재한 것이다. 그러므로 박기홍의 [춘향가]는 근대 [춘향전]의 역사를 복원하는데 반드시 확보해야 할 자료이다. 이 [춘향가]를 춘미가 배웠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인데, 아쉽게도 현재 전해지는 춘미의 [춘향가]는 정정렬제가 중심이다. 박기홍의 [충향가]에서 송만갑의 [춘향가]로, 다시 정정렬의 [춘향가]로 간 것 자체가 근대 판소리사의 어떤 흐름을 보여주는 역사적 자료이지만 이 세 명창의 [춘향가] 중 박기홍의 것만 온전히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춘미의 [춘향가]에서 박기홍의 흔적을 찾는 일은 그러므로 중요한 과제라 할 수 있다.
춘미는 유성기 음반에 남긴 여러 소리 외에 [흥보가], [춘향가], [숙영낭자전]을 녹음으로 남겼고 이중 [흥보가]와 [숙영낭자전]은 판소리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다. 전자는 동편제 [홍보가]의 정통에 속하는 것으로 박송희, 한농선, 정성숙 등으로 전승되고 있으며, 후자는 전해종, 정정렬로 이어져 온 맥을 전승한 것으로 여러 사람에게 전해졌으나 현재는 박송희 명창이 이를 가장 적극적으로 전승하고 [숙영낭자전]은 19세기에 등장한 판소리의 새로운 레퍼토리로서 우리 판소리사가 창조의 역사였음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배비장타령]을 비롯한 여러 마당이 전승에서 탈락되어 온 와중에 [숙영낭자전]이 그 맥을 이어 오는데 춘미의 역할이 가장 컸다는 점은 평가되어 마땅한 것이다.
춘미의 판소리에서 또 하나 주목할 것은 그 판소리의 전승이 스승에게서 배운 것을 그대로 고정한 것이 아니라 다른 유파라도 좋은 것은 받아들여 소리를 더욱 정제하는 그런 전승이었다는 점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흥부 제비의 노정기를 김창환의 더늠으로 한 것을 들 수 있다. 춘미는 스스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취입한 10곡의소리 가운데 김창환(金昌煥) 선생이 가르쳐준 흥보가(興甫歌)중 제비노정기(路程記)도 들어 있었다. 원래 흥보가라면 송만갑(宋萬甲) 선생이 으뜸이지만 이 노정기만은 김선생을 당할 자가 없었다. 김창환선생이 이 노정기와 춘향가 중 이도령 과거보는 대목이 일품이라고 해서 22살 되던 봄에 수운동댁으로 배우러 갔다.([나의이력서](13))
이 부분은 정광수 명창의 증언이 있다.
이(이보형) : 그런데, 가령 ‘제비노정기’ 같으면, 누구 사설은 못쓰게 생겼다든가 누구 제비노정기는 가사가 좋다든가 이런 말도 있을 것 아니에요.
정(정광수) : 있었죠. 그것은 말허자면, [흥부전]의 제비노정기는 양화집에서 나왔다는 게 뿌리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없어지기 쉬운 것이요. 지금 박록주씨한테서 배은 사람덜이 전부 제비노정기를 허는데, 그 사람들이 지금 김창환씨 집에서 가사와 곡조가 나왔다는 것을 잘 모르거든요. 박록주씨는 단성사에서 의관님을 모시고 소년시절을 보낼 적에 그 노정기 허는 것을 보니 좋거든. 그래 이걸 영감님한테 배왔어요. 배왔으나 소년시절에 잠깐 배운 것이라, 그것이 똑바라 나갔다고 볼 수는 없는 점이 있으나, 어쨌든지간에 서울서 박록주씨가 김창환씨한테 단성사에서 배왔기 때문에 그 흥보전에 대해서 그 제자들이 그걸 알죠. 박록주씨가 김정문 선생한테서 공부를 했다는디, 거기(김정문)는 제비노정기가 없어요.
[제비노정기]수용이 김창환 더늠 그대로가 아닐 수 있다고 정광수 명창이 말한 것 역시 사실로 볼 수 있다. 춘미 스스로 그때 배울때 김창환 명창이 고령인데 다 앞 뒤 가리지 않고 가르쳐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현재 유성기 음반으로 전해지는 김창환의 [제비노정기]의 사설과 박록주의 [제비노정기]는 사설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춘미가 김창환의 [제비노정기]를 수용한 것은 서편제 소리에서 좋은 것을 동편제에서 받아들인 것에 해당된다. 반대로 춘미의 소리 중에 좋은 것이 김창환의 [흥보가]를 이은 정광수의 [흥보가]에 수용되고 있다. 바로 흥부가 놀부를 찾아가 양식을 비는 대목이다.
(진양)(진계면)
(이 대문 진양조는 춘미(春眉) 박록주선생(朴綠珠先生)의 참조(參照)하여 참구(參究)를 하였음)
두 손 합장 무릎을 굻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형님주전 비나이다 살려주오 살려주오 이 동생을 살려주오 그저께 하루를 굶은 처자(妻子)가 어제 아침을 그저 있고 어저께 하루를 문드러니 굶은 처자가 오늘 아침을 그저 있사오니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이라 설마한들 죽사리까마는 여러 끼니를 굶사오니 할 일없이 죽게가 되야 형님전에 왔나이다 형님 덕택에 살려주오 벼가 되면 닷말만 주시고 쌀이 되면 두 말만 주고 돈이 되거든 한냥만 주시고 그도저도 못 되거든 먹다 남은 식은 밥이나 찌겅이나 싸래기나 되는대로 주옵시면 자식을 살리겠소 천석궁(千石宮) 부자형님(富者兄任)을 두고 굶어 죽기가 과연(果然) 원통(怨痛)합니다. 형님 통촉을 허옵소서
이렇게 보면 <김창환 - 박록주 - 정광수>로, 대를 이어 좋은 더늠의 주고받기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처럼 춘미의 소리는 판소리의 역사적 세련에 일조를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춘미는 스승에게서 전승한 것도 나름대로 새롭게 짜고 있다.
(진양) “시르렁 시르렁 톱질이야. 가난이야 가난이야, 원수년의 가난이야. 잘 살고 못 살기는 묘 쓰기에 매었는거나. 삼신제왕님이 짚자리의 떨어질 적으 명과 수복 점지허나. 에이어로 당그여라. 시르렁 시르렁 당그여라. 이보게 마누래!”“예” “톱소리를 어서 맞소.”“톱소리를 맞자헌들 배가 고파 못 맞것네.”“배가 정 고프거들라컨 초매끈을 졸라 매소. 시르렁 시르렁, 실근 시르렁, 시르렁 시르렁 실근 톱질이야 당그여라. 이 박을 타거들랑 아무 것도 나오지를 말고 밥 한 통만 나오너라. 평생의 포한이로구나. 에이여루 당거주소. 시르르르르르 시르르르르르 톱질이야 당기여라.”
(진양)
시르르르렁 실건 당겨 주소 헤여루 당겨주소. 이 박을 타거들랑은 아무 것도 나오지 말고 밥 한통만 나오너라 평생의 포한(抱恨)이로구나 헤여루 당기어라 톱질이야. 여보게 마누라 톱소리를 어서 맞소. 톱소리를 내가 맞자고헌들 배가 고파서 못 맞겄소. 배가 정 고프거든 허리띠를 졸라를 매소 헤여루 당겨 주소. 큰 자식은 저리 가고 작은 자식은 나한테로 오너라. 우리가 이 박을 타서 박속을랑 꿇여를 먹고 바가질라컨 부잣집에 팔어다가 목숨보명 살아나세 당겨주오. 강상에 떳난 배가 수천 석을 실고 간들 저희만 좋았지 내 박 한통을 당할 수가 있느냐. 시르르렁 실건 시르르르렁 실건 시르렁 실근 당기여라 톱질이야.
김정문의 박타는 대목의 서두 부분은 춘미의 경우 박을 타기 전의 흥보 아내의 [가난 타령]에 들어 있다. 춘미는 이 박 타는 대목의 뒷부분을 새롭게 추가한 것이다. 같은 동편제인 박봉술이나 강도근의 박타는 대목에 이 뒷부분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 추가는 춘미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춘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김정문선생이 가르쳐 준 흥부가를 잊지 못하는 것은 그 가운데 박타는 대목과 비단 파는 대목을 내가 좋아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는 제일 자신있는 곳을 부르라고 하면 이 두 대목과 김창환선생이 가르쳐준 제비노정기를 부르곤 한다. 특히 박타는 대목과 비단 파는 대목은 그 후 내 성격과 성량(聲量)에 맞게 약간 수정을 가했다. 따라서 이 두 대목은 완전히 나만이 지니고 있는 독특한 스타일로 변했다. ([나의 이력서](18))
요컨대 춘미의 판소리는 정태적인 것이 아니라 동태적인 것이었고, 그 동태성(動態性)은 판소리의 미적 세련을 위한 상호 교호 작용이자 자신의 개성을 확보해 가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 그 판소리는 [흥보가]와 [숙영낭자전]의 전승에서처럼 우리 판소리사에서 뚜렷한 맥을 이어온 것이었다.
3. 박록주 [흥보가]의 특징
춘미의 판소리를 역사적 존재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앞에서의 논의의 핵심이다.
다시 말해 그 지향이 개성적인 것이긴 하지만 크게 보면 판소리의 역사적 전개의 한 축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이 점은 춘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흥보가] 사설의 이해에도 적용된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제비노정기]는 서편제 김창환의 더늠을 수용한 것이지만 서두부분은 신재효의 [박타령] 서두 부분이 수용된 것이다. 이 수용이 김정문에서 이루어졌는지 송만갑에서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는 춘미의 [흥보가]의 모체(母體) 자체가 역사적으로 변모해 오던 것이었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춘미의 [흥보가]는 그 자체 역사적 존재이며, 그 제자들에 의해 또 역사적으로 변모해 갈 운명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시각을 전제로 춘미[흥보가]의 사설이 갖고 있는 특징을 일별해 보기로 한다.
1) 놀부박의 소거 문제
춘미[흥보가]의 가장 큰 특징은 놀부가 제비 후리러 나가는 대목에서 작품이 끝나는 것이다. 같은 동편제 [흥보가]중에서 강도근의 [흥보가]도 이 대목에서 끝나는데, 반면에 박봉술의 [흥보가]는 놀부 박이 온전히 다 들어 있다.
놀부 박 부분이 불려지지 않는 것을 두고 여성 창자들이 놀부 박에서 나오는 유랑연예인들의 소리가 잡스럽다고 해서 부르지 않기 때문으로 보는 것은 일면적이다. 강도근 같은 남성 창자도 부르지 않는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놀부 박 부분이 불려지지 않는 것은 역사적으로 보면 놀부와 성격이 같은 옹고집을 노래한 [옹고집타령]이 불려지지 않는 것, 소설 [흥부전]의 전승에서 놀부 박의 개수가 후대로 올수록 줄어드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흥부가]이든 [흥부전]이든 제비로 인해 갈등 상황이 역전되고, 흥부의 성공과 놀부의 패망이라는 대응 구조로 되어 있고, 그것이 작품의 완결성을 말해주는데, 놀부의 박 개수가 줄어드는 것이 역사적인 추세라 해도 놀부가 제비 후리러 가는 대목에서 갑자기 끝나는 것은 어디로 보나 부자연한 일이다. 놀부라는 인물의 징치는 놀부의 형상화에 못지 않은 우리 근대사의 주요한 역사적 과제이기 때문에 [흥보가]가 이 부분을 정면으로 문제 삼지 않는다면 그 사회적 역할의 한 부분을 도외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놀부박 부분을 부르지 않는 것이 하나의 의식적인 선택이고, 그 이유가 놀부 박에서 나오는 유랑 연예인들의 소리가 잡스럽기 때문이라는 것은 그 근거에 판소리사의 전개에서 어떤 잠재적인 흐름이 개입하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것은 유랑 연예인들의 소리와 판소리의 차별의식, 유랑 연예인과 판소리 창자와의 차별의식이 개입하고 있음을 말한다. 이런 측면에서는 놀부 박 부분이 불려지지 않는 것은 역시 유랑 연예인이 많이 등장하는 [변강쇠가]의 전승에서의 탈락과도 연관이 된다. 이는 판소리와 판소리 창자의 사회적 위상의 상승과 직결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판소리에서 여성 창자의 등장 자체가 판소리의 외정(外庭) 예술적 성격의 약화와 동반된 현상임도 우리가 주목해야 할 일이다.
그렇다면 유랑 연예인의 소리와 판소리의 차별의식은 놀부 박 부분의 배제로만 나타나는가? [흥보가]의 서두 부분부터 놀부 제비 후리러 나가는 대목까지에서도 그러한 의식이 나타나야 일관성을 가질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 구현되고 있는가?
2) 간결한 표현의 사설
춘미[흥보가]의 또 하나의 특색은 사설이 간결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채록되어 있는 사설과 문화재관리국에서 춘미를 1973년에 무형문화재로 지정하면서 녹음한 것을 비교해 보면 뒤엣것이 더 간결하다. 춘미의 성품과도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문장의 연결이 직선적으로 이어지고 있고, 창자가 서술자로서 객관적인 묘사를 하기 위해 옆으로 비켜서서 설명하는 법이 없다. 서두 부분을 비교해 보자. 앞엣것이 박봉술의 것이고 뒤엣것이 춘미의 것이다.
아동방이 군자지국이요 예의지방이라 십실촌에도 충신이 있었고, 삼척 유아라도 효제를 일삼으니 어찌 불량헌 사람이 있으리요마는 요순의 시절에도 사흉이 있었고 공자님 당년에도 도척이라는 사람이 있었으니 어찌 일동여기를 인력으로 할 수가 있나! 전라도는 운봉이 있고, 경상도에는 함양이 있는데, 운봉 함양 두 얼품에 박씨 형제가 살았으되 형 이름은 놀보요 아우 이름은 흥보였다. 사람마다 다 오장이 육보인듸 놀보는 오장이 칠보였다! 어찌 칠보냐 하며는, 이놈이 밥곧 먹으면 남한테 심술을 부리는 보 하나가 왼쪽 갈비 속에 가서 장기 궁짝만헌 것이 붙어 가지고, 병부 줌치 찬 듯 딱 이놈이 앵겨 가지고 남한테 심술을 부리는듸 꼭 이렇게 부리것다.
놀보 심사 볼작시면 대장군방 벌목하고(---)
아동방이 군자지국이요 예의 지방이라, 십실지읍에도 충신이 있고 칠세지아도 효도를 일삼으니 어찌 불량한 사람이 있으랴마는, 요순시절에도 사흉이 났었고 공자님 당년에도 도척이라는 사람이 있었으니 아마도 일종 여기야 어쩔 수 없었는가 보더라. 중년에 경상 전라 충청삼도 어름에 놀보 형제가 사는데 놀보는 형이요 흥보는 아우라 놀보란 놈이 본디 심술이 많은 데다가 그 착한 동생을 쫓아내야 되겠는데 이찌해야 쫓아낼까. 날마다 집안에 들어 앉아서 심술공부를 허는데 꼭 이렇게 하던 것이였다.
대장군방 벌목하고(---)
같은 내용의 사설이지만 춘미의 사설은 집약적이고, 대상의 핵심에 직진하고 있지 부연하지 않는다. 심지어 ‘놀보 심사 볼작시면’처럼 판소리 특유의 관습화된 표현조차 건너뛰고 있다. 이러한 간결 혹은 집약적 서술 지향은 앞에서 본 바 놀부 박 부분의 탈락과 일정한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한다.
3) 스토리 중심의 판짜기
간결한 표현은 결국 스토리 중심의 판짜기로 연결된다. 물론 간결한 표현을 지향한다 해서 노래해야 할 것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놀부 심술 대목이나 제비 노정기 대목처럼 필요한 부분은 풍부하게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볼때 사건의 전개에서는 빠른 템포로 진행하고, 사건의 전진을 늦추고 그 상황을 재담이나 희극적 묘사로 즐기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심지어 희극적 정황조차도 그 묘사는 간결하다.
가령 흥보 박 타는 대목에서 첫째 박에서 쌀이 가득 나오는데, 춘미의 경우는 그 쌀로 밥을 해먹으면서 벌어지는 희극적 사건이 없다. 반면 박봉술, 강도근, 정광수, 김연수 등등의 [흥보가]에는 모두 흥부 가족이 밥 먹는 일로 벌이는 희극이 묘사되고 있다. 동네 솥을 빌려다가 밥을 집채만큼 해 놓고 아이들을 모아 놓고 밥령을 내리고, 흥보는 주먹밥을 만들어 던져 놓고 받아먹기를 하고, 너무 많이 먹어 죽는다고 소동을 벌이는 등등의 희극이 전혀 없다. 다만 춘미가 좋아했다는 비단 타령만은 있다.
여기서 우리는 춘미의 [흥보가]가 박봉술, 김연수 등의 그것과는 다른 지향을 보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박동진은 물론이고, 박현봉의[흥보가]까지 삽화의 풍부성을 지향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20세기에 들어서서 사연의 풍부함을 지향하는 축이 있는가 하면 간결하고 빠른 진행을 지향하는 축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후자가 춘미 [흥보가]의 지향이라 할 수 있다.
이 지향은 신재효처럼 어떤 사건의 정황을 해설해 가며 그 상황을 즐기는 것과도 다르다. 신재효의 경우를 보자.
흥보가 의사 있는 사람이라면 수작이 이러하니 무슨 일이 되겠느냐, 썩 일어서서 나왔으면 아무 탈이 없을 것을, 저 농판 숫한 마음에 참 모르고 그러하니 자세히 일러주면 무엇을 줄 줄 알고 본사를 다 고하여
“동부동모 친형제로 이름자 항렬하여 형님 함자 놀보자 아우 이름 흥보라 하온 줄을 그다지 잊으셨소.”
놀보가 생각하니 다시 의뭉을 떨자 한들 흥보의 하는 말이 밤송이 까놓듯 하였으니 의뭉집이 없었구나. 맞설 밖에 없거든,
“그래서 동부동모나 이부이모나 친형제나 때린 형제나 어찌 왔는고.”
원판 미련키는 흥보같은 사람이 없어 얻으러 왔단 말을 그 말 끝에 할 것이랴. 엔간한 제 구변에 놀보 감동시킬 줄로 목소리 섧게 하고, 눈물을 훌쩍이며 고픈 배 틀어쥐고 애긍히 빌어본다.
이러한 서술은 서술자가 상황 자체를 즐기는 것이기도 하고, 이를 통해 청중들도 그 상황을 차근차근 즐기고 곰씹게 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그러나 춘미의 사설에는 이러한 경우를 찾기 어렵다. 겨우 “이러고 들어가거든 놀보 기집이라도 후해서 전곡간에 주었으면 좋으련마는 놀보 기집은 놀보보다 심술보가 하나가 더 있것다.” 정도이다.
이렇게 본다면 춘미의 [흥보가]사설은 희극미를 의도적으로 지향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 실제 창은 희극적이지만 그 템포라든가 하는 것은 그것을 그다지 의식하지 않는다는 점을 잘 보여주는 것이 병영에 매품 팔러갈 때 자식들과의 문답이다.
(아니리)
이 놈들이 저의 어머니 울음소리를 듣고 물소리 들은 거위 모양으로 고개를 들고,
“아버지 병영 가십니까.”
“오냐 병영 간다.“
“아버지 병영갔다 오실 때 나 찰떡 좀 사다 주시오.”
또 한 놈이 나 앉으며,
“아버지 병영갔다 오실 때 나 풍안 하나 사다 주시오.”
“풍안은 무엇 할래.”
“뒷 동산에 가 나무할 때 쓰고 하면 눈에 먼지 한점 안 들고 좋지요.”
흥보 큰 아들이 나 앉으며,
“아이구 아버지.”
“이 자식아 너는 왜 또 부르느냐.”
“아버지 병영갔다 오실 때 나 각시 하나 사다 주.”
“각시는 무엇 할래.”
“아버지 재산없어 날 못 여의주니 데리고 막걸리 장사할라요.”
(중머리)
아침밥을 지어먹고(---)
박봉술의 경우 이 아이들의 말을 듣고는 “에이 이놈들 쓸 놈은 한 놈도 없구나.”식의 발언이라도 있지만 여기서는 일체 논평이 없다. 심지어 아니리가 끝나자 말자 ‘아침밥을 지어먹고---’로 숨도 돌리지 않고 넘어가 마치 이 희극적이면서도 비극적인 장면에 무심한 듯한 모습까지 보인다.
사건의 전개에서 하나의 정황을 조성하고 그 정황을 스토리의 진행과는 약간 비껴나게 하여 한바탕 즐기는 데서도 판소리의 묘미를 느낄 수 있다고 한다면 춘미의 사설은 그러한 배려가 상당히 약한 것이다.
4) 음악적 표현을 전제로 한 사설 짜임
그렇다면 춘미의 [흥보가] 사설의 장점은 무엇인가? 청중의 흥미를 자아내고, 관심을 끌어들일 희극적 정황이나 재미있는 묘사를 위한 장황한 수사를 배제하고 간결하고 스토리 진행 중심의 판짜기로 되어 있는 이 시설에 어떤 장점이 있는 것일까?
이는 춘미 [흥보가]의 핵심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질문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발표자는 이 점은 춘미의 그 사설의 의미를 음악적으로 표출하는 창(唱)에서 찾아야 한다고 본다. 춘미는 창으로 승부를 걸었고, 거뜬거뜬하게 창으로 불러나감으로써 청중으로 하여금 그 의미나 정정황을 체험하게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 점에서 춘미의 사설은 음악적 표현을 함께 고려하여야 한다.
이와 아울러 그 음악적 표현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것은 등장 인물의 심리와 내적 정황을 매우 사실적으로 형상화하는데 주력하고 있는 점이고, 인물의 내면 묘사와 서사의 객관적 진행 사이에 분명한 음악적 표현의 구별을 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간결한 사설이 실제 창에서는 매우 극적인 진행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사례로서 들 수 있는 것이 흥보가 환자 얻으러 갔다가 매품을 팔기로 하고 돈을 받아 나오는 대목이다. “저 아전 거동을 보아라.”는 중머리로 매우 그 행동을 크게 묘사하는데, 그것은 “궤문을 덜컹 열고 돈 닷냥을 내어주니”로 연결 되는데, 그것은 바로 흥부의 심리로서 아전의 행동을 묘사한 것이다. 굶주림 끝에 겨우 만져보는 돈 앞에 그 돈을 꺼내주는 아전과 그 돈이 든 궤는 매우 거대한 존재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부지불식간에 아전에게 존대를 하고는 질청 밖으로 나서면서 가장으로서의 허위의식이 발동하여 이것저것 사먹고 취한 상태로 집에 오는 희극적인 모습을 보이며, 부인에게 큰 소리를 치는 가부장적인 모습까지 드러낸다.
이 점에서 춘미의 사설은 음악적으로 사건의 의미를 짚어가며 해석하는 그 노선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고, 그 점에서 음악과 결부시켜 볼 때 매우 간결하면서도 빈틈없는 짜임새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4. 결
춘미가 어째서 명창이냐는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변으로서 그 사설의 짜임새가 소리로써 승부를 거는, 음악적 정통파의 길을 걸었고, 그 길에서 성공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린 셈이다. 간결하고 잔 맛이 없지만 그 간결성 속에 등장 인물의 내면을 굴곡있게 음악적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이 [흥보가]는 우리 판소리사에서 하나의 뚜렷한 노선이 되었다.
물론 이와 다른 노선, 말하자면 가다가 멈추고 한바탕 신나게 놀고, 다시 갈 길을 가다가 어디선가 멈추어서 또 한바탕 노는 그런 노선이 있고, 오히려 그런 노선이 춘미의 시대에는 더 풍미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노선도 그 나름으로 충분한 의의가 있다. 무대를 희비극으로 장악하는 일이 거의 없는 오늘날의 판소리 연행에 비겨 보면 매우 소중한 노선이다.
어쨋든 춘미의 노선은 음악적 표현으로 승부를 건 매우 고답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고, 그래서 그 사설의 간결미는 약간은 위험한 승부수였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