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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투투포럼 원문보기 글쓴이: 말씀
선비의 꿈… 고라니 울음… 강가에 웅크려 말을 건다
<오랜 시간 사람들이 오고간 발자국이 이어져 길이 되고, 그 위에 남겨진 이야기가 다시 새로운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과거 보러 가는 선비의 꿈과 유배 떠나는 신하의 눈물이, 겨우살이 걱정하는 고라니의 마음이 모두 길 위에 있습니다. 길이 품고 있는 생명과 문화와 역사가 하나로 이어져 ‘이야기가 있는 문화 생태 탐방로’가 만들어졌습니다.>
‘이야기가 있는 문화 생태 탐방로’라는 제목의 팸플릿에 적힌 ‘길 위로의 초대’라는 글이다. 이 탐방로는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생각하며 걸을 수 있는 아름다운 길로 선정한 것인데 전국에 일곱 곳이 있다.
길은 생명이고 역사고 문화다. 노루와 고라니, 멧돼지가 다니던 길을 사냥꾼이 뒤쫓고 그래서 난 길을 나무꾼이 길을 들이고 그런 오솔길이 모여 외딴 동네와 사람을 이어주고 장터 찾아 짐 나르던 농군과 아낙이 그 길에 역사를 심었다. 그 길은 다시 대간의 고개 넘어 한양으로 과거시험 보러 가던 선비의 청운의 푸른 꿈으로 채색되고 또 가끔은 귀양과 유배길에 오른 관리의 분루로 얼룩졌다. 길은 그렇게 태어난다.걷는다는 것은 곧 생각하는 것. 생각 없는 걷기란 된장 고추장 간장이 담기지 않은 빈항아리와 같음이다. 걸음걸음에 생각을 담음이란 곧 자기 성찰이요 또한 자연의 관조 아닐까. 이 길을 걸으며 금수강산의 자연과 역사, 우리 문화를 다시 한 번 제대로 느껴 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중 하나인 여강(麗江) 길을 소개한다. 여강은 경기 여주군을 남북으로 관통하며 적시는 남한강의 또 다른 이름이다.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외쳤던 프랑스 철학자 장 자크 루소. 그는 “걸을 때만 명상에 잠긴다. 걸음을 멈추면 생각도 멈춘다”며 걷기예찬론을 폈다. ‘깃털 없는 두 발 짐승, 인류가 내딛어온 600만년 걷기의 역사’라는 부제의 책 ‘On Foot’(걸어서)을 쓴 조지프 아마토. 그에게 걷기는 ‘발과 땅, 인류, 이 세상 사이의 변화무쌍하고 지속적인 대화’였다.
이 말을 곱씹으며 여강 길 걷기에 나섰다. 난생 처음 찾은 겨울 강변은 애잔했다. 잿빛구름이라도 짙게 낄라치면 무채의 겨울 풍경이 더더욱 을씨년스럽다. 하지만 햇빛 쨍쨍한 한낮의 강변 모래밭은 그리도 푸근할 수 없다. 아지랑이라도 피어오를 듯 사랑스럽다.
여주에는 다리가 많다. 다섯 개나 된다. 여강을 두고 마주한 신륵사와 영월루를 잇는 여주대교 북쪽으로는 세종대교, 남으로는 이호대교 남한강교 섬강교 남한강대교가 있다. 섬강교만 빼고 모두 남한강을 가로지른다. 총연장 55km의 여강길. 이 길 대부분은 강안이다.
그 출발점은 영월루. 북진하는 여강 서편의 강안을 따른다. 남한강교를 지나 세 강이 만나는 삼합리를 경유해 남한강대교에 이르면 그 다리 건너 섬강 합수지점을 지나 섬강교까지 간다. 여기서 다시 강을 건너는데 이번에는 이제껏 걸어온 강변을 물 너머로 보면서 서쪽 강안을 따른다. 종착점은 강변의 신륵사다.
여강의 서쪽과 동쪽. 그 지형은 판이하다. 서쪽은 낮은 구릉지다. 그래서 강안은 급경사의 산지다. 반면 동쪽은 모래와 자갈밭이 넓게 펼쳐진 평지다. 산자락은 한참 뒤로 물러섰다. 서안과 동안은 걷는 풍치도 다르다. 서안에서는 강을 내려다보여 좋고 동안에서는 모래며 자갈 등 강변을 거닐어 좋다.
강은 말이 없다. 겨울을 닮았다. 게서 유일한 소음이란 일제히 강상을 날아오른 오리들의 부산한 날갯짓 소리뿐. 그나마도 소리개가 하늘에 뜰 때나 일어나는 잠깐의 해프닝일 뿐 강은 늘 침묵한다. 그런 소란을 피해 오리 떼는 남한강교 다리 밑에서 주로 논다. 모두가 시베리아에서 찾아온 철새들이다.
남한강 섬강 청미천, 흐느끼며 몸을 섞고…
○ 주막의 정취가 깃든 옛 나루터 길(12km)
여주읍내의 강변은 죄다 개발됐다. ‘은모래금모래’라 불리던 백사장도 자갈마당이 된 채 유원지로 변했다. 게서 부라우 나루터까지 강변에는 둑이 섰다. 게다가 지금은 보(堡) 공사로 어수선하다. 4대강 사업의 일환인데 그 바람에 강변의 갈대밭은 쑥대밭으로 변했다. 보가 생기면 수위도 오르고 둑도 더 높게 돋워야 한단다. 둑 아래 너른 강변은 사라질 운명이다.
둑 방의 상수원취수장을 끼고 오른쪽 동네 길로 접어들면 단현리. 부라우 나루터가 있는 마을이다. 나루터는 가파른 강안 기슭의 바위지형 아래다. 하지만 강안의 절벽에 들어선 전원주택단지에 가려 동네서는 보이지 않는다. 주택담장 아래 샛길이 유일한 통로. 거기서 만나는 나무 우거진 강기슭의 아담한 공터. ‘부라우’는 강변 나루로 쓰인 바위무더기의 붉은 빛을 말하는 순수한 우리말이란다. 그 부라우 나루터에 서니 강안의 평화로운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왼편으로 이호대교, 오른편 멀리로 영동고속도로가 지나는 남한강교가 아스라이 보인다.
다음 나루는 오른편(상류) 1.8km 지점의 우만리 나루터. 저 멀리 보이는 남한강교 옆인데 거기까지 가려면 강안을 떠나 도로를 따른다. 우만리 나루는 가을걷이 끝낸 밭 끝자락의 강변이다. 300년 나이의 높이 18m 느티나무 거목이 나루터임을 증거한다. 장호원과 여주장 오가던 원주사람과 강 건너 강천 면에 땔감 구하러 가던 주민들이 주로 이용했다고 한다.
이날 여강 길 걷기에는 동반이 있었다. 여강길 정기 걷기모임에 참가한 분들이다. 느티나무 아래서 서로 인사를 나누던 중 이포나루 근방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여주 토박이 최은렬 씨(여주군청 근무)의 구수한 옛 이야기가 시작됐다.
“45년 전만 해도 제가 살던 이포나루는 한강의 큰 나루 중 하나였습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말이지요. 이포옥이라는 술집에 천양각이라는 기생집도 있었고 한약방 양조장 대장간도 모여 있었지요. 나루에는 삿대로 배를 부려 강을 건네주는 나룻배가 있었고 새벽이나 늦은 밤에도 가끔 강 건너에서 사공을 부르는 과객의 고함소리가 들리곤 했습니다. 1972년에야 전기가 들어왔으니 당시 모습이 상상될 겁니다. 이포나루 건너편은 요즘 막국수로 유명해진 천서리인데 당시 이 마을을 생각하면 박목월 선생님의 시 ‘나그네’가 떠오릅니다. 천서리 벌판은 온통 밀밭이었고 나그네 쉬어가던 나루 근방의 주막에서는 늘 술 익는 향기가 퍼져 나왔으니까요.”
1970년대 경제개발과 더불어 나루는 터만 남기고 사라졌고 1985년 나루터는 한 주민에게 매각됐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주택 400만호 개발사업이 시작됐고 급증한 모래수요를 충당하느라 여강 변은 모래채취사업의 광풍에 휩싸였다. 자갈밭으로 변한 은모래금모래 강변이나 늪지형의 바위늪구비는 모두 그때 여강에 남긴 상처의 흉터다.
우만리 나루터 다음 행선지는 흔암리 나루터(점동면). 흔암리 동네의 양지바른 구릉에는 청동기 유적인 ‘반움집’이 조성돼있다. 여기서 마을길로 1.5km쯤 걸으면 ‘아홉사리 과거’ 길로 접어든다. 이 길은 깎아지른 절벽지형 강안 산기슭에 난 나무꾼 길. 흔암리에서 ‘도리’라는 산 너머 강변마을까지 3km나 이어지는데 사람이 다니지 않아 낙엽만 수북이 쌓여있었다.
그 이름 그대로 이 길은 조선시대에 과거시험 보러 가던 선비가 주로 이용했다고 한다. 강안의 절벽을 피해 굽이굽이 이어진 꼬부랑산길(3km)이 국수 가락처럼 가늘게 이어졌다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도리’ 역시 들어가면 다시 돌아 나와야 하는 막다른 곳이라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단다. 명성황후를 배출한 여흥 민씨의 집성촌이다.
○ 세물머리 길(17.4km)과 바위늪구비 길(22.2km)
세물머리 길은 도리마을에서 남한강에 유입되는 청미천을 경유해 창남나루터 삼합저수지 개치나루터 부론성당을 지나 남한강의 흥원창(배로 세곡을 나르기 위해 국가가 운영하던 창고)에 이르는 코스. 세물이라는 남한강, 섬강, 그리고 청미천을 말한다. 흥원창 앞에서 남행하던 섬강을 만나 그대로 집어삼킨 남한강은 서진 중에 청미천까지 받아들인다. 이렇게 세물은 흥원창 부근에서 만난다. 해서 삼합리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강원 충북 경기 세 도가 부근에서 경계를 이룬다. 흥원창에서 바라다 보이는 삼합리 마을의 금모래은모래 강변 풍경이 멋지다.
흥원창부터 신륵사까지는 강천마을회관으로 이어지는 닷둔리 해돋이산길만 빼고는 모두 여강의 강변을 걷는 멋진 루트다. 해돋이산길도 숲을 지나는 멋진 트레킹 길이다.
▼ 쌀 나르고 돈 흐르던 나루, 이젠 다리로 남아 ▼
한강. 거기에는 수많은 이름이 녹아 있다. 강화나루 임진강 하구에서 서해로 흘러들며 강의 실체를 상실하기까지 518km 긴 흐름의 수많은 구비만큼이나 그 물은 구간마다 다른 이름을 갖는다.
그중 주류(主流)만 살펴도 이렇다. 백두대간 금대봉 아래 안창죽의 큰 샘 검룡소에서 발원한 이 물. 이끼 고이 붙은 바위타고 졸졸졸 흐르며 실개천을 이룬다. 그러다 창죽동(태백시) 벗어나 국도 35호선을 따를 즈음에야 비로소 ‘골지천’이란 이름을 얻는다. 내내 북행하던 골지천이 몸집을 키우는 곳은 임계(정선군). 예서 임계천을 받아들인 후에는 서쪽으로 몸을 틀어 사행(蛇行)하다 또 다른 짝을 만나 강으로 승격된다. 그곳은 정선 산중의 여량. 골지천은 백두대간 고개 대관령의 서쪽 면을 타고 내려온 송천과 만나는데 그곳 여량이 정선아라리 처녀상이 있는 ‘아우라지’고 게서 새로 태어난 그 물이 동강의 모체인 ‘조양강’이다.
강은 개천과 다르다. 조양강은 국도 42호선과 정선선 열차에 도로와 철로를 제공할 만큼 넉넉한 공간을 강안에 품을 만큼 위세가 크다. 그렇게 당당히 남행하던 조양강이 서쪽으로 급격히 물길을 틀며 조성된 너른 평지. 바로 정선읍이다.
정선읍을 적시며 서쪽으로 돌아나가는 조양강이 남쪽을 향해 돌아설 즈음, 거대한 사행을 감행한다. 그런데 그 물의 굽이굽이에는 물의 공격과 산의 방어로 점철된 치열하고도 격렬한 자연의 공방전 흔적이 아로새겨진다. 물가에 반복되는 절벽 뼝대와 그나니 널찍한 강변 모래톱의 물돌이다. 뼝대는 물에 의해 공격당해 초래된 피해사면이고 모래톱은 게서 깎여 나온 돌무더기의 잔해다.
하지만 본격적인 사행은 아직 이르다. 가수리에서 동남천을 받아 들여 좀 더 큰물로 거듭난 이후에야 본격화한다. 그 물이 동강이고 이후가 동강의 전형적인 사행구간이다. ‘선생 김봉두’라는 영화를 기억할 것이다. 그 촬영지인 연포분교가, 곧 일반에 개장될 비경의 석회암지형 백룡동굴, 동강의 정취가 짙게 묻어나는 문희 마을, 동강 래프팅의 출발점 진탄나루터. 이 모두가 동강 사행구간의 명소다.
동강이 사행을 그칠 즈음 어라연 계곡이 나타나고 그 즈음 물길은 영월읍에 근접하는데 영월읍내 동강교 통과 후에는 서쪽에서 흘러드는 또 다른 큰 물을 만난다. 그게 서강이고 비로소 이 물은 남한강으로 이름을 바꾼다. 남한강은 영월을 지나 서행하지만 이내 남쪽으로 방향을 튼다. 여암 신경준(조선후기 인문지리학자)의 말 그대로 ‘물은 산을 넘지 못하는 법’. 백두대간 소백산에 막힌 탓이다.
그제야 강은 고향 강원을 벗어나 충북도로 진입한다. 이어서 단양. 조선의 시인묵객 중에 그 아름다움을 시로 남기지 않은 이가 없다할 만큼 강상비경으로 손꼽혀온 도담삼봉이 여기 남한강에 있다. 강의 흐름이 보이지 않는 것도 이때부턴데 충주호로 몰입되기 때문이다. 예서 이름을 빼앗긴 것은 남한강뿐이 아니다. ‘신단양’으로 불리는 매포도 같다. 신단양은 단양읍이 충주댐 건설로 충주호에 수몰되자 매포에 새로 조성한 신시가지다.
충주댐을 통과한 남한강물. 충주시를 감싸 돌며 북행하다가 잠시 강원(원주시) 충청 두 도의 경계를 이룬다. 그러다 횡성에서 남행하던 섬강과 정면충돌하며 서쪽으로 급격히 방향을 바꾸는 합수점에 이르러서는 삼도(강원 충청 경기)의 경계를 이루는 물길로 성장한다. 여기가 경기 여주군. 이 강은 여주 땅에서 만큼은 달리 불린다. 여강이다. 이후 남한강은 강원 충청을 버리고 경기도 땅을 적시다 서해로 흘러든다.
강을 볼 때 한 가지 유념할 것이 있다. 강의 용도다. 철도 자동차가 없던 100년 전까지 강은 수운의 주요통로였다. 서해와 남해의 소금과 생선, 그리고 각 지방에서 거둔 세곡이 어떻게 한양까지 운송됐을까. 우마차로? 천만의 말씀이다. 지방 간 육로수송은 어불성설이다. 유일한 예외라면 문경새재다. 새재 길로 우마차가 겨우 지나기는 했지만 대량의 화물수송은 언감생심이었다.
그런 마당이니 만큼 큰 강은 국가의 대동맥이었다. 그래서 강 이름도 한강이다. 게서 여강의 역할은 지대했다. 이천 여주의 곡창과 강원의 중심 원주로 모인 모든 재물을 한양으로, 또 서해의 물자가 내륙지방으로 수송되는 유일한 물길이어서다. 조선 3대 시장 강경(충남논산)에서 거둔 물건도 모두 여강을 통해 충주까지 전달됐다. 여강에는 그래서 큰 나루가 많았다. 다섯 개 되는 다리가 모두 그 나루의 후신이다.
|트래킹정보 |
◇여강길 함께 걷기
▽여주장=5배수의 날짜에 열린다 해서 ‘오·땡(5·0)장’이라고 불린다. 강원산간 토속음식인 수수부꾸미와 메밀전병을 파는 김경원(75) 전옥례 씨(72·강원 평창군 방림면 계촌5리) 농군 부부의 노점이 명물. 메밀묵 콩기름 청국장은 물론 조 수수 팥 배추가 모두 해발 900m 산간의 밭에서 직접 키우고 그것으로 손수 만든 것이다. 여주 이천 두 장만 12월부터 파종 직전인 4월까지 나온다는데 숯불에 들기름 둘러 부쳐내는 메밀전병 맛이 기막히다. 장은 오전 10시에 연다.
▽삿갓봉 여주온천=트레킹 후 들르면 좋다. 굴암매운탕과도 가깝다. 강천면 부평리 411-8, 6000원. www.yeojuspa.co.kr. 031-885-4800
◇맛집
▽(구)보배네만두(주인 송기봉 씨·사진)=오금리(여주읍) 농가에서 20년째 가마솥에 밥 짓고 김치 넣어 빚은 손 만둣국과 고소한 손 두부를 내는 여주토속 음식점. 이 동네 할머니 다섯 분이 지금도 도토리묵 보리밥 등 모든 음식을 장만하는데 두부도 국산 콩만 쓴다. 열무김치 국물에 말아내는 여름별미 열무국수는 TV 음식프로 ‘맛 대 맛’에서 세 번이나 우승한 명품. 유사한 이름의 식당이 한때 열네 곳이나 됐던 명소로 점심시간과 주말은 한 시간 이상 기다려야 하니 피할 것. 오전 11시에 문 열고 쉬는 날은 없다. 여주읍 오금리 405-2, 031-884-4243.
▽굴암매운탕=여강변 굴암리에서 어업권을 갖고 직접 배를 저어 쏘가리며 메기 등 민물고기를 잡고 있는 어민 윤선남 씨가 부인 김순오 씨와 함께 직접 운영하는 식당. 비린내 없애느라 지나치게 많이 친 양념으로 뒷맛이 텁텁한 보통의 민물매운탕과 달리 깔끔한 맛이 특징. 물고기를 지하수에 담가 흙냄새 빼고 직접 담가 1년 묵힌 고추장양념 덕분인 듯. 소비량의 대부분을 직접 잡은 고기로 충당해 신뢰가 간다. 쏘가리매운탕 8만∼9만 원. 잡고기탕은 5만 원 선. 월요일 쉼. 강천면 굴암리 74, 031-882-6382, 00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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