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우도에 들어간 밤 흰소를 낳는 꿈을 꾸었다 풀밭 위에 치마를 펴고 벌린 내 가랑이 사이로 어린 소가 뭉클, 쏟아졌다 안간힘으로 일어서려는 어린 것이 자꾸 쓰러졌다 달빛이 밀반죽처럼 어린 소의 등을 타고 내렸고 몸 속에 붉은 빛을 감춘 어린 흰소가 댓잎처럼 울었다 서서 견뎌야 할 시간이 너무도 기니 누워라 흰 빛 속의 붉은 어둠아 달빛이 눈도 못 뜨고 여린 몸으로 뒤채였다 어미 소는 물 위를 걸으며 쑥돌같은 파도를 뜯어 삼키고 있었다 어미 소가 파도를 뜯어 삼킨 자리로 돛배가 몇 척 지나갔다 사월 제주 밤바다엔 혼령 실은 돛배들 반디처럼 고와서 울금빛 유채꽃이 뿌리부터 아팠다 간신히 네 발로 선 어린 흰소가 어미 소의 가랑이에 얼굴을 들이민다 누워라 서서 견뎌야 할 시간이 너무도 기니, 흰소가 길게 누워 내 옆구리를 핥았다 오래 전 나를 낳은 흰소의 되새김질 속에서 따듯하고 비린 물이 왈칵 토해졌다 어미 소의 흰 배를 베고 눕는다 내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덜 비린 바닷물이 더 비린 바닷물에게로 흘러간다
시집 『도화 아래 잠들다』(창비, 2003) 중에서
1970년 강릉에서 출생했다. 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하였으며 1996년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대관령 옛길> 등 10편의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2004년 제49회 현대문학상과 2007년 제9회 천상병 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시힘' 동인으로 활동중에 있다. 시집으로『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창작과비평사, 2000 ) , 『도화 아래 잠들다』(창작과비평사, 2003) 그리고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문학과지성사, 2007)이 있고, 산문집은『물 밑에 달이 열릴 때』(창작과비평사, 2002) , 『김선우의 사물들』(눌와, 2005) 가, 그 밖의 저서로는 전래동화 <바리공주>와 최근 발표한 장편소설 『나는 춤이다 』( 실천문학사, 2008)가 있다. 2004년 ‘현대문학상, 2007년 제9회 '천상병시상' 과 이육사문학상 그리고 2008년 한국여성문예원 선정 제1회 '올해의 작가상'과 웹진 시인광장 선정 제1회 '올해의 좋은시' 賞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