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닌 줄 알면서도 나는 슬쩍 어깨를 만져본다 내 손에 붙잡힌 것은 나뭇잎 하나 그 얇은 살갗에 내게 말을 건네고 싶어하는 나무의 떨림이 고스란히 얹혀 있다
손바닥 위에 나뭇잎을 올려 놓고 다른 손바닥으로 덮는다 내 손바닥과 손바닥 사이에 갇힌 나뭇잎이 물고기처럼 파닥파닥 떨어댄다
거기에 내 떨림이 섞여 그늘뿐인데도 나무 밑이 휘황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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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탐하지 않으면 발전이 없어요 각자 탐 한 개는 있어야지요."
어제 보낸 '기포의 새벽 편지' 불수불탐분 글에 댓글을 준 어느 스님의 소중한 글입니다 이 글을 곰곰이 음미하노라면 부처님 경전을 읽다가 특히《금강경》을 읽어 나가다가 반발심처럼 튀어오르려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는 합니다
어쩌면 스님은 바로 그 느낌을 가슴에만 담아 두지 않고 솔직하게 표현했으리라 여겨집니다 이 스님의 댓글이 소중한 이유이지요 우리는 곧잘 얘기합니다 욕심이 너무 없으면 어찌 삽니까 살아가면서 본능적으로 필요한 게 있다면 그게 욕심인데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힌 채 너무 고통스러워 외치셨다지요 "오! 하나님, 하나님이시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여기서 무엇을 느끼시는지요 몇 년 전 로봇 부처님을 등장시킨 영화《인류멸망보고서》가 있습니다 그리고《AI》라는 영화에서도 인공지능 로봇 인간이 고통을 느낀다는 설정이 있습니다 인공지능으로 느낄 수 있는 로봇 인간이 정말 가능하기는 할까요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셨습니다 배고픔을 느끼고 목마름을 느끼고 추위를 느끼고 더위를 느끼고 두려움을 느끼고 사랑과 슬픔을 느끼고 고통과 기쁨을 느끼셨던 분입니다
예수님이 신의 아들이란 말을 나는 믿지 않습니다 내가 불교인이어서가 아니고 기독교인이 아니어서는 더더욱 아닙니다 과학적으로 분석한다면 으레 신의 아들이 될 수 없습니다
이는 예수님만 아니라 우리 부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적으로 위대한 성자를 과학으로만 짚을 수는 없으니까요 문화 인류학에서 보더라도 예수님 그분 자체가 영원한 고전인 동시에 영원한 즉시성을 지닌 분이십니다
내가 우리 서가모니 부처님을 가장 완벽한 인간으로 보듯 어떤 측면에서 보더라도 예수님 그분은 가장 인간적이며 더없이 거룩한 성자이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엄청난 고통을 호소하셨듯이 부처님도 춘다의 공양을 받으신 뒤 엄청난 배탈과 복통에 시달리셨습니다
부처님의 절규를 들어보실까요 "이 음식을 소화할 수 있는 자는 삼계에서 오직 나 여래만이 가능하다." 냉동고는 옛날에도 있었습니다 서울에는 얼음 창고가 3개였는데 동빙고 서빙고 내빙고였지요 이들 중 서빙고가 가장 컸고 8개의 저장고에는 13만5천 정丁의 얼음이 있었습니다
정이란 장정 한 사람이 들 수 있는 무게와 부피로 얼음을 재는 단위지요 두께 4치(약 12cm)에 둘레 6자(약 180cm)입니다 얼음의 밀도가 물보다 약하니까 무게는 얼마쯤이나 될까요
냉장고는 전기가 발명된 이후로 2,560년 전에 없었습니다 아열대의 북인도 어느 시골 마을 부처님을 위해 미리 조리한 음식이 상상외로 많이 상했지만 우리 부처님께서는 오직 춘다의 정성만을 생각하여 상한 줄 아시면서도 다 드신 것입니다
부처님의 절규 속에는 배탈과 설사 복통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그리고 석 달 뒤 부처님께서는 쿠시나가라 어느 마을 나무 아래에서 자리에 눕고 싶어 하십니다
"아난다야! 등이 아프구나 눕고 싶으니 가사를 펼쳐 여래가 누울 자리를 마련해다오." 통증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생명이 살아있음입니다 생명이 있는 자는 느낌이 있습니다 살고자 하는 느낌이 있습니다 이를 본능이라 하더라도 좋습니다
나는 왜 불수불탐분에서 느낌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요 맞습니다 불수不受입니다 불수불탐의 불수 때문입니다 수受는 '받을 수'로 새기고 있습니다 따라서 '받다'가 주 움직씨고 그 밖에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거두어들이다 회수하다 받아들이다 받아들여 쓰다 배우다 얻다 이익을 누리다 주다 내려주다 수여하다 담보하다 응하다 들어주다 이루다 잇다 이어받다 등용하다 5온蘊 또는 5음陰의 하나 12인연因緣의 하나로 쓰입니다
지금까지《금강경》내용으로 보면 불수는 받지 않음이고 불탐은 탐내지 않음이 맞습니다 그렇게 해석하는 게 지극히 당연합니다 하지만 나는 오온의 하나인 수 오음의 하나인 수로 읽고 싶습니다 12인연의 하나인 수로 풀고 싶습니다
수는 '받아들임'입니다 외부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내 마음에서 느끼는 것입니다 받아들이는 기관은 6가지이고 받아들이는 대상도 6가지입니다 느낌을 판단하는 기관도 으레 6가지입니다
이를 통틀어 18계界라 합니다만 매일《반야심경》을 읽고 외지만 무심코 넘기는 게 바로 이들 18계지요 느낌을 뜻하는 다른 말로는 수受 외에도 감感이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감이 대표적인데 수와 감을 구별한다면 수가 일차적 느낌인데 비해 감은 결론적 총체적 느낌입니다
그럼 불수를 어떻게 풀이할까요 '느낌이 아님'입니다 어둠無明에서 움직임行이 생기고 움직임에서 앎識이 생기고 앎에서 이름 빛깔名色이 생기고 이름 빛깔에서 여섯 감관六入이 생기고 여섯 감관에서 닿음觸이 생기고 닿음에서 느낌受이 생기고 느낌에서 사랑愛이 생기고 사랑에서 가짐取이 생기고 가짐에서 있음有이 생기고 있음에서 삶生이 생기고 삶에서 늙음 죽음老死이 생깁니다
여기서 느낌의 뜻인 수는 느낌이라 풀었습니다만 정석으로 해석한다면 받아들임이지요 닿음으로 인하여 받아들이고 받아들임으로 인해 사랑이 생기고 사랑으로 인해 가지려 하는 것입니다 누가 어떤 것을 주었는데 보살은 보살이기 때문에 받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난후아이찐南懷瑾NanHuaiJin은 그의《金剛經說甚麽》(금강경 뭐라 하셨을까)에서 신원봉 선생의 옮긴 글을 통해 받지도 않고 탐하지도 않는다 했고 무비스님의《금강경오가해》도 신원봉 선생의 번역과 같습니다 우승택 선생은《心想事成금강경》에서 받지도 않고 탐내지도 않는다 했습니다
도올 선생은《금강경강해》에서 받을 생각도 말고 탐하지도 말라 했지요 지안스님은《금강경바로읽기》에서 '탐착 없는 복덕'이라 했으나 경문 내용의 번역에서는 불수를 '누리지 않는다'고 풀었습니다 가장 부드러운 번역인 듯싶습니다
이는 위에서 본 수受의 움직씨 중 '받아들여 쓰다'를 비롯하여 '이익을 누리다' '얻다'의 뜻을 제대로 살려 번역한 듯싶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려 했던 뜻을 가장 잘 이해했다고 느껴집니다 나는 수를 느낌이라 풀고 있습니다만 지안스님의 '복덕을 누리다'는 탁월한 번역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글자 한 자를 놓고 고민합니다 어떻게 전달하느냐에 따라 가끔 큰 오해를 일으키는 까닭입니다 우리는 종종 청렴을 얘기하면서 "주지도 말고 받지도 말라"합니다 받지 않는다면 주지 않겠지요 또 주지 않는데 받을 수 있겠습니까 주지 않는데 받는 행위를 취한다면 이는 훔침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경전에서는 말씀하십니다 "항하사수 등 세계에 가득한 칠보로 보시하고~"라고 보시하는 자가 있다는 것은 받는 자가 있기에 가능합니다 우리는 받지 않고 살 수 있습니까 사람이 아니면 괜찮은가요 사람에게서는 받으면 절대 안 됩니까
우리가 태양으로부터 달에게서 대기에게서 자연에게서 산에서 들에서 과일과 채소와 곡식에서 온갖 새들과 곤충과 동물에게서 꽃과 약초와 나무와 땅에서 보이지 않는 여러 사람의 손길에서 정말 아무것도 받지 않고 살 수 있나요
금강경을 가르치면서 어찌하여 시주의 시줏돈을 받고 불사비를 받습니까 그러고 보니 불사비는 불사를 위해 받는 것으로 퍼블릭Public 재정에 해당하니까 전혀 얘기할 게 아니군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남에게 차 한 봉지 받지 않아야겠지요